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영화 <히말라야>와 '히말라야의 눈물'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저 멀리 히말라야에서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원정 대원들과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9명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시신 수습은 신속하게 이뤄져 벌써 내일 새벽이면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8000m급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 대장(49)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의 시신이 지난 13일(현지시간)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발견됐다. 구르자히말은 네팔 히말라야 산맥 다울라기리 산군에 있는 해발 7193m의 산봉우리다. 원정대 가운대는 다큐멘터리 감독 임일진 엑스필름 대표(49)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2015년에는 영화 <히말라야> 특수촬영(VFX) 원정대장으로 참여했다. <히말라야>는 히말라야에서 숨진 후배 대원 박무택(정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엄홍길(황정민)과 휴먼원정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임 대표는 2014년 봄 5주가량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며 눈사태와 크레바스·빙하 등 영화 속 컴퓨터그래픽의 배경이 될 소스 촬영을 이끌었다.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은 등반가가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번 사고는 히말라야에서도 워낙에 낯선 곳에서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고의 원인조차 뚜렷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원정대 전원이 사망한 참사여서 더욱 슬프고 충격적이다.

 

더구나 이번 원정에서 목숨을 잃은 김창호 대장은 '순수 알피니즘'을 고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다. 김 대장은 언제나 모험적 등반을 시도하는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고, 등정의 결과 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줄곧 실천했던 산악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집에서 집으로(From Home To Home)’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내세울 만큼 '안전한 귀가'를 위해 누구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했던 산악인이었다.

 

소위 머메리즘이라고도 불리는 '순수 등로주의'를 개척했던 인물은 19세기의 풍운아로 불렸던 영국인 알버트 머메리(1855∼1895)였다. 그는 위대한 등반가였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여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저서까지 출판한 지식인이었다. 그 책은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불멸의 고전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도 자세히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산악 고전인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독서에 몰두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 밀턴, 워즈워스, 테니슨의 여러 작품 속 싯구절들이 셀 수 없이 자주 폭넓게 인용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낱 무모한 등반가인 줄로만 알았던 그가 그토록 탁월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머메리는 19세기 말에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에 도전한 위대한 등반가였다. 그는 두 번의 등정 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친구들과 헤어져 구르카 병사들과 함께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보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머메리는 그렇게 낭가파르밧 최초의 희생자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낭가파르밧은 머메리가 죽은 후 58년 동안 숱한 실패와 비극과 대참사를 겪은 끝에, 머메리 사후 58년이 흐른 뒤인 1953년 7월 3일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원정대를 이끈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이 이뤄졌다.

 

 

(낭가파르밧, 높이/8,125m, 출처 : 위키백과)

 

'근대 스포츠 등산의 비조'로 불릴 만큼 위대한 족적을 남긴 희대의 반항아가 남긴 한 마디는 알피니즘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알피니스트들은 그 누구도 머메리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남긴 말은 이랬다.

 

"길이면 가지 말아라."

 

위험에는 다른 학업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육과 정화(淨化)의 힘이 있으며, 사람이 자기가 '완전히 사치와 유약에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다. 산은 이따금 일을 좀 지나치게 밀어부쳐서 교수대, 교수틀, 낙하 발판 등의 시설을 다 갖춘 사형 집행인조차 도저히 더 훌륭하기를 바랄 수 없는 절박한 사멸(死滅)의 환영(幻影)을 산의 신봉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그라지는 저녁 노을이 절규하는 바람과 눈에 쫓겨 발걸음을 재촉하고 복수의 여신들이 능선을 따라 미친 듯이 대상을 사냥할 때, 절벽은 흔히 냉혹하고 절망적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용감한 동료들과 불굴의 정신은 몰려드는 위난의 거미줄을 잘라 내고, "세월이 지나 옛 일을 회상하는 것도 즐겁노라"는 느낌 또한 언제나 있는 것이다.


- 머메리,『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방랑자라고하는 것은, 선인들의 발자취를 정확히 따라가면서 산 속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찍이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혹은 또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 데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황량하게 드러난 슬랩, 능선의 모난 깎아지른 발판, 그리고 거멓게 불거진 걸리의 얼음은 그의 존재에 대한 생명의 입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할 수 있는 체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 머메리,『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이번에 김창호 대장이 원정에 나섰던 구르자히말은 전문 산악인들도 등반하기를 꺼릴 정도로 험산이라고 한다. 특히 남벽은 수직으로 3천 미터가 넘어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김창호 대장이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소식을 들으니 문득 7년 전 이맘때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가 실종된 박영석 대장이 떠오른다.

 

사실 김창호 대장과 박영석 대장의 죽음은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등반가였고, 등정 주의보다는 등로 주의에 집착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박영석 대장은 2011년 10월 세계적 난코스였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됐으며, 당시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있던 김창호 대장은 자원해서 박 대장의 시신 수색조에 합류했다. 밧줄로 몸을 묶고 박 대장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끝내 박 대장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유명 산악인들의 이름은 익히 들어 왔어도 그들과 직접 맞닥뜨린 적은 거의 없었다. 1994년에 코오롱 등산학교에 다닐 때 허영호 대장을 강의실에서 만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섰다가 우연히 오은선 대장과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 하산한 뒤에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포카라에 들렀다가, 그곳에 있는 산악박물관에서 또다른 유명 산악인들을 더 많이 만났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히밀라야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박영석 대장과 고미영 대장도 있었고, 이번에 비운의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도 있었다.

 

- 박영석 대장,
   1989년 랑탕리룽(7,225m)에 최연소 원장대장으로 도전해 동계 세계 최초 등반. 
   1991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100m 추락후 이틀 동안 의식을 잃는 사고를 당함.
   2001년 K2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인 최초 14좌 완등, 세계에서는 8번째 기록.
   2004년과 2005년 남극점과 북극점 정복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11년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 신루트 개척을 위해 나섰다가 강기석, 신동민 대원과 함께 실종.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 고미영 대장.
    2006년부터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등정에 나서 4년간 11좌를 등정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칼날능선'에서 실족하여 사망했다.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 세계 최단기간 14좌를 완등한 김창호 대장, 촐라체 사고로 두 손을 잃은 박정헌 대장.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잊을 만하면 반복해서 날아드는 히말라야로부터의 비보는 앞으로도 결코 끊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머메리의 말대로,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히말라야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알프스의 고산을 즐겨 올랐던 독일 철학자 니체는『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의 어느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이번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원정 대원들이 구르자히말에서 목숨을 걸고 새기고자 애썼던 '영원성의 낙인' 만큼은 오래도록 깊게 각인되었으리라 믿는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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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10-1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보기에 따라서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인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수 있다고요. 자신이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8-10-19 23:15   좋아요 2 | URL
이번 사고는 히말라야 탐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대참사‘였어요. 특히나 8,000미터급 고봉에서 흔히 발생하는 기상 급변이나 한 두 사람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등반 사고도 아니었고요. 베이스캠프에 머물던 등반대가 한꺼번에 9명이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계곡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처진 사고였으니까요. 그 누구보다 모험적이고, 늘 준비에 철저했고, 공부하는 산악인의 상징이었던 김창호 대장의 죽음은 여러모로 애석하고 애통한 면이 많은 듯합니다. 고인의 미망인도 대학때 만난 후배 산악인이라니 ‘등반가의 숙명‘을 넉넉히 이해하리라 믿고, 세 살배기 딸아이도 먼 훗날 언젠가는 아빠의 삶을 이해하리라 맏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