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좀 단상

 

  한겨울이 코앞인데 무좀이 도졌다.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가 찢어져 따끔거린다. 오래 전부터 각질이 벗겨지는 정도의 무좀증세가 있긴 했지만 온 여름내 멀쩡하던 발이었다. 맨발에다 샌들을 신던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어 무좀균이 숨어 있었는데, 간절기를 맞아 양말을 신는데다 신발마저 부츠로 바뀌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제 역할을 잊고 있던 무좀균이 저 좋다고 활개를 친 것이다. 다행히 약을 발랐더니 금세 가라앉는다.

 

 

  며칠 무좀약을 바르면서 이런저런 단상이 스친다. 무좀균은 박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 삼아도 좋을 위안이라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은 무좀 앓는 발과 같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시련은 무좀 앓는 발에 비유할 수 없겠지만 웃고, 울고, 떠들고, 마시는 가운데 생겨난, 감당할 만한 모든 고충은 무좀균에 비유하고 싶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비의(秘義)는 가지고 산다. 아픔이나 상처의 옷을 입은 그것은 평소에는 비활성화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있으면 표면으로 드러난다. 통풍에 문제가 없을 땐 잠잠하던 무좀균은 바람 쐬어 주지 않고 꼭꼭 싸매기만 할 때 스멀스멀 피어나 발가락 사이를 갉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뭔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에 무좀균이 생긴다. 그때 위로라는 약을 발라 상처를 달래는데, 금세 낫는다. 그렇다고 무좀균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들었을 뿐인 이때의 무좀균은 발이 발로 단련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경고 장치로 기능하니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다.

 

 

  그 어떤 약점에도 노출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산다는 건 환희라는 날개옷을 걸칠 때보다 고통이라는 갑옷을 두를 때가 더 많다. 수고로운 갑옷의 시간을 무좀 앓는 발이라 쳐두자. 그 성가신 쓰라림이 가슴 한쪽을 찢어대기도 하겠지만 그건 모두 견뎌낼 만한 것들이다. 따라서 박멸할 필요도 없다. 혹시라도 완전히 없애버린 평범한 상처 그 자리에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나 번민이 들어찬다면 그보다 낭패스런 일도 없을 것이니.

 

 

 

 

 2.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관계의 호불호는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내게 와선 비호감이 되는가 하면,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지만 타인에겐 비호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답도 없다. 이것을 인정하면 관계의 피로감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한데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환희만을 맛보기를 바란다. 해서 어색한 관계를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니 가만 내버려 두면 된다.

 

 

  첫인상에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는 찰나에 결정된다. 시간을 십 분이나 한 시간 연장시킨다고 그 찰나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의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느냐 폐기하느냐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근접성, 유사성, 친숙성, 상호성 등을 언급한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더 친해질 가능성이 높고,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해도 다가서기 쉽다. 원래 성격이 상냥하고 친밀한 사람이면 호감도가 높아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상호성이 사람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합당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관계는 교감 즉 서로 주고받음으로 형성되는데,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상대가 더 잘 안다. 내가 느끼는 만큼 상대도 느낀다.

 

 

  한 번 형성된 나쁜 인상은 다른 좋은 단서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내게 거슬린 언행을 하면 내 눈과 마음은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내 프레임 안에서 상대는 부정의 영역에 머물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번 잘못 엮인 감정은 재고의 여지마저 꺾어놓는다. 그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면 가만 두면 된다. 때론 인위적인 의지보다 자연스런 불편함이 훨씬 인간적일 때가 있다.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력도 없을 테니.

 

 

 

  3.작은 몸짓 큰 관심

 

  모든 사연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거창한 성과나 큰 깨달음의 시초도 밀알 같은 소박함에서 출발한다. 삶 이래로 숱한 우연이 우리 곁을 스쳐갔다. 그것들 중 제 삶의 물줄기를 바꿀만한 순간의 경험과 환경의 영속성이 모여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지나치게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는 아이가 있었다. 존재감 없는 그 아이는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 눈에 띄고도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몸 신호는 언제나 ‘나도 저 아이들처럼 나를 말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한 해 다행히 아이는 어질고 인내심 많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띄게 자신감 없는 아이를 위해 부러 발표를 시키고, 틈만 나면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질적, 환경적 제 한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성정이 쉽게 바뀔 리 없다는 걸 깨친 선생님은 방법을 달리했다. 의식적으로 뭔가 하도록 이끌기보다 그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우연히 만들기 시간에 아이의 손재주를 발견한 선생님은 지나치듯이 한 마디 칭찬을 했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심함을 가장한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우물쭈물하고, 민숭민숭하기만 한 아이에게 맞춤한 접근 방식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제게 손재주 하나는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훗날 전통옷 만드는 일로 일가를 이루었다.

 

 

  제 소심함에 겨워 떨었던 몸짓을 섬세한 눈으로 지켜봤던 선생님을 추억하는 그 아이가 말한다. 무심한 듯한 선생님의 적극적인 낯빛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여전히 말로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여문 손끝으로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이가 강조한다. 모든 시작은 우연하고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제 작은 몸짓을 눈여겨 봐주는 세상 모든 이가 스승이라고.

 

 

 

 

 4.날갯짓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하지만 그 날개의 쓰임새는 천양지차이다. 약한 날개를 가졌으나 그 깃털을 보듬어가며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왕의 강한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그 기운을 뒷전으로 몰아내 퇴보의 빌미로 삼는 이도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픈 건 날갯짓을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강단 있게 제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신은 인간을 핑계거리 많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해 봐도 안 되고, 하기 싫어서도 안 하고, 할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등등 갖은 이유로 우리들이 시도하지 않은 날갯짓에 대해 변명을 할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다. 맘먹은 대로 날갯짓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겸한다는 결심도 작심삼일이요,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쓴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허방에 빠뜨리기 일쑤고, 독촉 받은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추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다. 해서 주변인들이 뚝심 있게 제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만날 그 정신만은 벤치마킹하는데 실천력이 부족하다. 역시 스스로 마련해 놓은 여러 핑계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핑계의 전부는 게으름일 뿐이다.

 

 

  뉴질랜드 은화에 보면 키위새가 등장한다. 키위새는 뉴질랜드의 나랏새이다. 부리가 길고 후각이 발달한 그 새는 날지를 못한다. 아주 오래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뉴질랜드 땅의 그 새는 천적이 없었다. 굳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지였다. 자연히 날개는 퇴화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땅을 접수하면서 키위새에겐 재앙이 따랐다. 인간과 함께 들어간 고양이, 들쥐 등의 활약과 인간들의 포획에 의해 그 개체수가 멸종 위기 수준으로 줄었다. 그들에게 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그리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적 없는 삶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묵묵히, 또는 소란스럽게 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사는 모든 이들을 제 삶의 긍정적 천적, 아니 스승이라 여긴다. 그들이 이끄는 일상의 방식에 내 영혼의 밥술을 얹어 조금이라도 자극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퇴화하는 날개 끝에 얻은 일상의 평화에 안주하는 거야 말로 가장 무서운 습관이다.

 

 

 

  

 5.채찍과 당근

 

  누구나 칭찬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칭찬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거짓 칭찬은 안 한 만 못하다. 예를 들면 상급반 글 모임이 있다 치자. 쌓아온 글쓰기 연륜만큼이나 그들은 글을 보는 안목 또한 높다. 어떤 글이 매혹적인 것이며,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도 잘 안다. 안다는 것과 쓰는 행위는 별개라는 것까지도 꿰 차고 있어,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안다.

 

 

  해서 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그 글에 대한 타자의 충고를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왜냐하면 진심어린 도반들의 한마디야말로 제 글을 살찌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축적된 여러 활동을 통해 깨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료나 스승이 제 글을 칭찬해주면 기분 좋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쓴 소리를 한다고 특별히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약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그 약점을 넘어서려면 주변의 채찍이 꼭 필요하다는 걸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느 일정 수준에 도달한 부류의 예이고, 입문자의 경우인데다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데, 옆에서 충고랍시고 누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럴 수 있다. 글에 대한 객관적 눈이 뜨이기 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충고도 고깝게 들린다. 그 상황에서는 채찍의 방식 보다는 그가 원하는 당근의 방식을 취한 채,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단련된 고수는 벌점을 달게 받지만, 순수한 입문자는 가산점을 원한다. 고수가 당근을 겸연쩍게 여기기는 쉽지만, 입문자가 채찍을 감당하기는 버겁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고수보다는 하수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당근과 채찍은 달리해야 하고, 달콤한 채찍도 충분한 당근이란 뿌리가 있은 뒤의 일임을 알겠다.

 

 

 

 

 6. 경험의 타인

 

  위대한 철학자의 큰 사유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디테일한 일 퍼센트가 그 사람의 숨겨진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유에 언제든지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언제나 공감한다. 그의 사유를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곧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릴 적 체험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이후 한 번도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개인적 전쟁 체험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존재론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시하고 타자를 집단 속에 묶으려 하는 그 방식에 레비나스는 염오증을 느꼈다. 이런 통찰의 아픈 뿌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영향권 아래 두고 맘대로 부리고자 할 때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긴다. 타자가 곧 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런 위험한 사고의 틀 안이라면 전쟁도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경험이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명한 계기가 되었다.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이다.  나 이외의 것을 인정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무, 그것을 레비나스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윤리학으로 승화시켰다. 

 

 

 

 

 7.알바트로스적 전환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내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어리바리한 나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세상을 향한 시크하고 시니컬한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미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다. 보들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냉소적인 눈으로 사물을 대했으며, 세속적인 부르주아 근성을 혐오했다. 그미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한 정신이었다. 그미는 고매하고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밝고, 맑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다. 추하고, 악하고, 어둡고, 흐리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이유 불문한 당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후배의 사고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사유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하고 세뇌하는 그미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상을 선명하고 명쾌하게 보는 그미의 통찰력이 부러웠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모습을 나는 높이 샀고, 내 사유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너무 남다르게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던 그미는 그야말로 고독한 큰새였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지상으로 내몰린 남다른 생각의 소유자들은 운명적 고난자들이지만 타고난 개척자이기도 하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을 가혹한 정신의 웃자람을 그미는 태연히 즐겼고, 나는 전율하며 그것을 부러워했다.

 

  보들레르 시를 다시 꺼내 읽는 밤, 자꾸만 옛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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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9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 보니 저는 하루에 페이퍼 하나를 꼬박꼬박 올리지만
팜므 님은 페이퍼 7개 분량을 일주일에 한번 올리시는군요... ㅎㅎㅎ

그렇게혜윰 2013-12-09 10:57   좋아요 0 | URL
하루에 한 페이퍼도, 하루에 7 페이퍼도 다 대단하신 거예요!
전 기복이 있네요 ㅋㅋㅋ

다크아이즈 2013-12-11 10:1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ㅋ
자주 올 수 없으니 한꺼번에 물량공세ㅠ
곰발님처럼 부지런하고, 페이스 조절도 잘 하고 싶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18   좋아요 0 | URL
그렇게 혜윰님, 닉네임 바꾸셨나요?
제 즐찾에 있는 분인데, 이름이 바뀌신 것 같아 헛갈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도 알라딘 찾는 면에서는 기복의 여왕인 걸요. ^^*

마녀고양이 2013-12-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언니, 책 무지하게 많이 읽으셨네요... 으아....
알라디너들은 왜 자꾸 저를 반성하고 분발하게 만들까요... 캬.

관계는 상호적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요인을 보면, 자주 보면 정든다, 나랑 비슷한 곳이 있을 것... 과 같은 게 있더군요. 어디서 들었는데, 영화배우 이영애씨는 너무 완벽하게 생겨서 도리어 영화 그림이 안 나왔다, 어울리는 남자 배우가 없었다 라는 말을 감독들이 했대요.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근과 채찍...
저는 하수예요, 하수. 아직 당근이 엄청나게 필요해요!! 큭큭.
저는여, 제 나름대로 '평생 받을 당근 총량의 법칙'이란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연구 결과는 절대 없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26   좋아요 0 | URL
마고님에 비하면 독서량은 아니지요. 잘 계시지요?
완벽한 미인이면 부담스럽지요. 그런 사람 만나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걸 자주 목격하잖아요.

저도 하수인걸요.
제가 매일 자각하는 건, 참 세상엔 글 잘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거지요.
알라딘에도 그런 분들 많잖아요, 마고님 비롯... 긍정의 자극이 되고 있어요.
만날 하수인 스스로를 자책해요. 자책도 잦으면 주변인들이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중하는데도 불쑥불쑥 난, 왜이리 글이 안 되지?, 못 써, 소질 없어, 이러면서 한숨 짓는답니다.

여긴 눈발이 조금씩 날리네요. 마고님은 오늘도 열공 중, 또는 열 상담 중...
부디 겨울 잘 나시길^^*

oren 2013-12-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계절의 기나긴 한때를 억지로 뭔가를 하며 보낼 필요는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그래도 무좀이 도져 몹시 가려우면 우선은 좀 시원하게 긁고 나서 무좀약을 찾을 수밖에 없지 싶어요.
* *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 몽테뉴

다크아이즈 2013-12-11 10:32   좋아요 0 | URL
오렌님은 어디서 이토록 적재적소에 좋은 말씀만 건져다 배달해주시는지요.
알라딘의 맑은 우물 같은 분^^*
무좀은 통풍과 직결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수면 양말 신고 있으면 그 다음날 새끼 발가락 사이가 따끔따끔ㅠ
심한 거 아니니 평생 친구로 가려구요.

오렌님의 겨울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3-12-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영월로 가는 차안에서 이 페이퍼를 읽으며 몇가지 생각이 들어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는 그녀를 저도 원생적으로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이리 채찍질하는 마음에 응원 날립니다. 건필하시구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37   좋아요 0 | URL
영월행이라, 얼마나 좋으실까
좋은 결과 안고 떠나는 그 여행 그림이 그려집니다.
알바트로스 단상 편에 나오는 그 후배 생각이 간절해요.
(일상에 안주한 절 보고 실망할 것 같아 미뤄두고 있다는 ㅠ)
어제도 사람들 만나면서 느낀 건데,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앞에 장사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런 사람 30퍼센트만 닮아도 좋을 건데...

그나저나 전력을 다하는 그사람들은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