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고지훈 지음, 고경일 그림 / 앨피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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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젠가 무슨 책 리뷰를 쓰면서 얘기한 적 있죠?
근현대사는 제게 쥐약이라고.
아마 이유도 말했을걸요?
오대빵으로 진 축구경기, 재방송으로 보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나 이제 그 말 취소해야겠습니다.
오대빵으로 처참하게 진 축구경기도 재방송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해설자만 훌륭하다면.
바로 이 책,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처럼요.

이 책에서 우리에게 현대사를 해설해 주는 고지훈이라는 분은
축구 경기 해설자로 치면 정통 스타일은 절대 아닙니다.
뭐랄까.....얼마전 MBC 주말 뉴스를 진행하던 최일구 아나운서가 떠오릅니다.
최일구 아나운서, 처음에 엄청 황당했죠.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내보내야 할 뉴스, 그것도 9시 뉴스에서
그가 가끔 폭탄처럼 던진 멘트들 때문에
시청자들은 생소해 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했으나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괜찮아서
나중엔 최일구 아나운서가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며 뉴스를 지켜보았습니다.

이 책도 첫장을 넘기면서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전혀 즐거운 분야가 아닌데.....이거 이 페이스로 계속 나가도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괜한 기우였습니다.
이 책은 웃겼을 뿐만 아니라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역사에 임하는 작가의 진지함과 성실함 때문에
수많은 농담과 역사인물에 대한 비아냥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조봉암과 조병옥이 다만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헷갈리는
무지한 독자에게는 이 책보다 더 좋은 현대사 입문서가 없을 듯 합니다.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세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덮은 퇴영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로부터의 시혜를 기대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며......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재기합시다.

누가, 언제 한 말일까요? 박정희가 5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한 말입니다. 이 뭔가 수상쩍지만 말인즉슨 옳은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연설(저......사이에도 길고 긴 말들이 있습니다)을 이책의 명 해설자는 짧고 명쾌하게 해석해 줍니다.

"노동자? X나게 일해. X나게 일하고 난 다음에? 또 X나게 일해. 일하고 또 일하고 또 일하고......이런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먼저 하란 말이야! 정부가 뭔가 해주기 전에 말이지!"

사실 역사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법조문, 포고령, 신문기사, 이런 것들
그냥 본문 그대로 실려 있으면 읽어봐도 무슨 소린지 모릅니다.
이 책에선 그런 것들을 절대로 날 것 그대로 내놓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노린 것인지, 누구를 향한 화살인지
이런 걸 절대로 구구절절하지 않게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정리해 줍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의역이 너무 심하지 않을까?
에 대해서는 제가 이 분야에 취약하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제 주관으로는 그렇지 않을거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은 저자가 역사인물에 대해 재구성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내놓은 새로운 통찰에 제가 저도 모르게 감동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전두환에 대해 언급하면서
수천명을 죽인 살인자 전두환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수천억을 해먹었다는 도둑놈 전두환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물었던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에 거울을 들이댑니다.
과연 이것이 정상이냐고.
그러고 보니 우리의 모습도 괴물입니다.

 

저자에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엄청 재미나겠다, 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통사적으로 해설해 주시는 책을 내신다면
당장 사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만화책인 줄 알고 있어서 실물을 봤을 때 살짝 실망할 뻔 하였으나
읽다보니 만화보다 더 정신없이 빠지게 되어 그 실망을 얼른 취소하였음을 밝힙니다.
그런 착각을 한 것은 책소개에서 '한국컨텐츠 진흥원 우수만화 선정작'이라는 대목을 봤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 책 군데군데 있는 인물 캐리커쳐 때문인 듯 합니다.
책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는 만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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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 너무 재미있겠어요...!!!!

깍두기 2006-01-13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진~~~~짜 재밌어요!

바람돌이 2006-01-13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사는 누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지요. 거기다 그걸 풀어낼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라면 금상첨화군요. ^^

검둥개 2006-01-1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요즘 맹렬독서중이시군요. ^^;;;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보니 이렇게 주옥같은 리뷰들이 줄줄이! 이 책도 보관함에 넣겠습니다. :)

호랑녀 2006-01-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새해에는 참아보려고 했는데... 지름신이여요...ㅠㅠ

마냐 2006-01-1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정말 뽐뿌지수 높으심다....으윽.

깍두기 2006-01-1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우울한 근현대사를 이런 식으로 얘기해 주니까 속 좀 덜 아프고 읽게 되는군요^^

검둥개님, 맹렬독서는~^^ 생각만큼 안되고 있어요. 서재에 자주 좀 출몰하세요.

호랑녀님, ㅎㅎ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마시라니까요^^

바람구두님, 땡스~ 그러고 보니 우리 엄청 오랜만이구만요^^

마냐님, 하여간 전 엄청 재밌었거든요^^
 
생쥐 기사 데스페로 비룡소 걸작선 39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티모시 바질 에링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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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고 했더니 내가 너무도 감명깊게 보았던 <내친구 윈딕시>의 작가였다. 그럼 그렇지~

얘들아, 너희들이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사실 이렇게 물어야만 하지. 아주 자그마하고 약골이면서 커다란 귀를 가진 생쥐가 '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하고 말이야.
대답은......."그렇다"야. 물론 우스운 일이지.
사랑은 원래 우스꽝스러운 거야.
그러나 사랑은 멋지기도 하지. 그리고 강하고. 데스페로가 공주를 사랑하는 일이 이런 모든 사실을 곧 증명해 줄 거야. 사랑이란 게 강하고, 멋지며, 우습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야.

엄청 약골로 태어나, 생긴 것도 평범하지 않아 부모에게 '절망(데스페로)'란 이름을 받은 우리의 주인공 데스페로는 어처구니없게도 공주님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동화는 이 둘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보통은 생쥐기사 데스페로가 엄청난 지혜와 용기로 눈 앞에 나타나는 적들을 챙챙 물리치고 공주님과 키스를 해서 잘생긴 왕자가 된다......정도?

그런데 이 동화에서 생쥐기사의 '눈앞에 나타나는 적들'은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가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시궁쥐가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니? 그렇지 않단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마음이 있지. 살아 있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을 다칠 수가 있어.

이 동화의 주요 악역인 시궁쥐, 그 역겹고 더러운 시궁쥐의 마음 깊은 곳까지 쓰다듬는 작가의 손길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식상한 선악이분법 구도를 훌쩍 넘어 어린이들에게 인생의 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 주고, 그 진실이 쓰기도 하고 시기도 하지만 결국은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는 닭고기 수프라는 걸(이야기에서 수프는 아주 중요한 그 무엇이다) 조근조근 말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느낀 점을 콕 찝어내어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못해도 느낄 거라 생각한다. 뭔가 뭉클한 감정을.

이룰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원했던 건 약간의 빛 뿐이었는데. 그래서 공주를 여기 데려온 건데. 정말로, 아름다움을 조금 가지려고...... 나만의 빛을 가지려 한 건데.

라고 말하는 시궁쥐에 대한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얘들아, 내가 보기에 용서는 사랑과 아주 비슷하단다. 강하고 멋진 거야.
그리고 우습기도 하지.
어쨌든 우습지 않니?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북을 두드린 바로 그 아빠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다니. 생쥐가 그런 배신자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면 우습지 않아?
하지만 데스페로 틸링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어.
"아빠, 아빠를 용서해요"
데스페로는 그 말을 하는 것이 가슴이 둘로 쪼개지지 않을 단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단다. 얘들아, 데스페로는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그 말을 한 거야.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에 대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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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1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솔직이 요즘,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더 버거워요. 이걸 전달하는 것이 어쩐지 씁쓸하거든요. 아이들도 알거든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으음~~ 그래도 꾸준히 들려줘야겠지요... 참, 어려워요.

깍두기 2006-01-10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돌바람님. 현실은 척박하지요. 사람들도 점점 사나워지고요.
그래도 이 책은 현실을 마냥 외면하고 있진 않아요.
저는 그냥 이 책을 읽으면서....연민의 바다에 푹 빠졌다가 나온 느낌이랄까....
아이들은 또 신나는 모험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좋은 동화의 장점이죠. 누가 읽어도 재밌고, 각자에게 맞는 메시지를 주는 것^^

바람돌이 2006-01-1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멋진건지 아니면 깍두기님의 리뷰가 멋진건지.... ^^
깍두기님의 리뷰를 보면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치네요. 요즘 뭐든지 보관함으로 일단 나르고 본다는 말씀... ^^

깍두기 2006-01-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멋진 거죠 물론^^;;;(돌 던지지 마란 말이야!!!!)
이 작가 책 두권 봤는데
이 책과 <내 친구 윈딕시> 둘다 참 괜찮습니다.
애들은 좋아할지...감수성이 풍부한 애들은 표현하기 힘든 무엇인가를 느낄 것이구요.
문장이 쉽기 때문에 독서수준 높지 않아도 금방 읽을 것 같습니다.
4학년 이상 권장^^

돌바람 2006-01-1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돌이 어때서 던지고 그러세용^^*
역시 깍두기님한테 물어보길 잘했네요. 저도 그러려구요. 헤헤

ceylontea 2006-01-1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제가 읽고 싶어지는데요..(아침부터 지름신이 오시네.. --;)

반딧불,, 2006-01-1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과 막상막하 지름신..등록이옵니다. 질질질~~(그분에게로 끌려가는 중..)

깍두기 2006-01-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앗, 죄송합니다^^
근데 저한테 뭘 물어보셨지?^^;;;;

실론티님, 반딧불님. 그분께 반항하시면 안됩니다^^
 



행책이 드디어 다아시경 2탄을 내는 모양이다. 수고하십니다^^


<책소개>

귀족 탐정 다아시 경 2
사이드와이즈상 수상작


행복한책읽기 SF총서 009
마술사가 너무 많다
TOO MANY MAGICIANS -LORD DARCY 2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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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 SF
2002년판 완역


과학적 마법 문명의 지배를 받는 20세기 런던에서 일어난 불가해한 밀실 살인을 다룬  걸작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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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제국의 마술사 컨벤션이 열린 고급 호텔의 객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된 사람은 런던 후작의 주임 법정 마술사인 서 제임스 즈윈지였다. 완전한 밀실인 피해자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같은 마술사밖에는 없지만, 문제의 호텔에는 이미 수백 명의 마술사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런던 수사 당국에서는 서 제임스의 라이벌이자 사건 현장을 발견한 노르망디 대공의 법정 마술사 숀 오 로클란을 흑마술 용의로 체포하고 런던 탑에 감금한다. 자신의 소중한 조수인 숀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격분, 런던으로 달려온 노르망디 대공의 주임 수사관 다아시 경은 즈윈지가 살해당하기 하루 전 셰르부르의 싸구려 하숙집에서 정체불명의 사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해군에서 새로 개발된 비밀 병기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사태는 영불제국 해군 정보부와 폴란드 비밀경찰 사이의 첩보전 양상을 띄기 시작하는데......

기술 수준은 아직도 가스등과 증기 기관차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과학적’ 마법이 놀랄 정도로 발달한 또 하나의 20세기 유럽을 무대로, 천재적인 귀족 탐정 다아시 경과 법정 마법사인 숀의 활약상을 그린 전설적인 미스터리 SF 제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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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와 스릴러와 판타지를 절묘하게 결합한 랜달 개릿의 최고 걸작!”
                    --데이빗 랭포드, 『판타지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Fantasy)

"개릿의 최고 걸작. 다아시 경의 세계는 풍성한 디테일로 가득 찬 리얼리스틱한 장소이다.“
                    --『SF독자를 위한 안내서』 (A Reader's Guide to Science Fiction)

 

<역자해설>

다아시 경의 귀환

김상훈(SF평론가, 행복한책읽기 SF총서 기획자)




다아시 경(Lord Darcy) 시리즈의 제2권이자 유일한 장편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를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2006년 1월 현재 국내에 번역 소개된 랜달 개릿의 작품으로는 제1단편집인 『셰르부르의 저주』(행복한책읽기 SF총서 006)와 본서가 유일하지만, 작가의 모국인 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본 시리즈조차도 2002년에 베인(Baen) 출판사에서 시리즈 전 작품을 집대성한 옴니버스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품절 내지는 절판 상태였다. 개릿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고전적’인 작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의 SF작가답게 대부분의 작품이 『어스타운딩』이나 『판타스틱』 등의 SF잡지에 분산 게재되었으며, 이것들 모두가 페이퍼백이나 하드커버 형태로 단행본화되지는 않았다는 내부 사정이 있었다. 게다가 개릿 자신이 Robert Randall, Darrel T. Langart 등 무려 16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해서 (때로는 로버트 ‘소설공장’ 실버버그 등의 신예작가들과 함께) 수많은 펄프 잡지에 모험 SF를 게재한 ‘양산형’ 작가였다는 사실―그러나 질병으로 인한 긴 공백을 겪은 탓에 그 요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을 감안하면, 개릿은 ‘흘러간 황금시대’ 작가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달 개릿이 21세기 들어서도 꾸준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역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간주되는 『다아시 경』 시리즈가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가장 먼저 읽었던 개릿의 작품은 다아시 경 시리즈가 쓰이기 직전인 1962년 『애널로그』지에 분산 게재되고, 다음 해인 1963년에 더블데이(Doubleday)사에서 단행본화된 장편 『뭐든지 할 수 있어 Anything You Can Do』의 낡은 페이퍼백 판이었다. 난파한 항성 간 탐험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괴물 외계인이 지구에 착륙해서 인간을 사냥한다는 펄프SF의 전형적인 침략 테마를 뼈대 삼아, 인류와는 사고 체계가 전혀 다른 외계인과 인류 사이에서 벌어지는 허허실실의 싸움을 그린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조차도 너무 고풍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개릿 자신의 박학함과 장인적 수완이 잘 드러난 이 소품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인 애착을 느끼고 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1950년대의 단순 소박한 우주SF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적막함’ 내지는 고독감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설정의 ‘신기함’에 먼저 눈이 가는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다아시 경』 시리즈는 미국 SF, 나아가서는 미국 문학 특유의 자기 충족적 ‘내향성’이 매우 긍정적으로(바꿔 말하자면 문화적 배경을 독자와 공유하는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작가와 편집자와 팬들 사이의 교류가 매우 활발한 SF 팬덤에서 흔히 인사이드 조크(inside joke)로 불리곤 하는 내부인끼리의 농담이 들어간 작품이나 다른 작가의 등장인물을 끌어오는 재귀 소설(再歸小說; recursive novel)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아시 경』의 경우는 이런 측면뿐만 아니라 SF와는 역사적으로 사촌지간인 미스터리1) 장르에 대한 포괄적인 패러디/패스티시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특히 장편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 이르러서는, TV 프로그램 및 영화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서구 팝컬처에 대한 오마주―때로는 위트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모호하기 그지없는―가 마치 숨은 그림처럼 문맥 곳곳에 잠복하고 있다는 점이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일일이 설명한다면 사족이 되겠지만, 눈에 띄는 몇 가지를 나열하자면……


1. 본서의 제목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물론 난초와 맥주를 사랑하는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Nero Wolfe) 시리즈 굴지의 걸작 『요리사가 너무 많다』2)의 직접적인 패러디이며, 본서에서 마이크로프트 홈즈적인 역할을 맡은 런던 후작의 모델은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네로 울프 본인이다.

2. 홈즈보다 열 배는 더 무례한 ‘폭군’ 네로 울프에게 시달리면서 독자들의 동정을 산 조수 아치 굿윈(Archie Goodwin)의 성 굿윈을 프랑스어(혹은 영불어)로 번역하면 bonne victoire, 즉 bon triomphe가 된다.

3. 본서에서 살해당하는 서 마스터 제임스 즈윈지의 모델은 실존하는 캐나다인 무대 마술사 랜달 제임스 해밀턴 즈윈지(Randall James Hamilton Zwinge)이다. 즈윈지는 초능력 트릭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며, TV에서는 ‘어메이징 랜디(Amazing Randi)’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 등장인물인 티아 아인찌히의 숙부인 네아펠러 아인찌히를 의역하면 ‘나폴레옹 솔로’가 된다. (나폴레옹 솔로는 1960년대를 풍미한 TV 스파이극 〈The Man from U.N.C.L.E〉의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는 플레밍의 007 시리즈에 대한 패러디의 성격을 짙게 함유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비교적 알기 쉬운(?) 이름 바꾸기는 시리즈 도처에서 발견된다.

5. 이를테면, 마술사 길드의 장인 서 라이언 ‘갠덜푸스’ 그레이(Sir Lyon Gandolphus Grey)의 모델은……


1960년대의 ‘현대’사회에서(본 시리즈의 시간 설정은 해당 작품이 잡지에 게재된 연도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과학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지의 제왕』식의 노골적인 마법도 아닌 ‘과학적 마술’이 가장 중요한 테크놀러지로 자리잡고 있다는 설정은 SF에서 시작된 대체역사 내지는 병행 세계(Parallel World) 패러다임을 통해 구축된 것이며, 『다아시 경』이 주는 즐거움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편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역시 ‘망토와 단검(Cloak and Dagger)’ 이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고전적인 첩보물의 서사구조가 글자 그대로 런던의 짙은 안개 속에서(SF라는 합리성의) 망토를 두르고(판타지에 나올 법한) 단검을 휘두르는 등장인물들로 치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릿 자신이 SF와 판타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던 창조적 시대착오 협회3)의 멤버였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럽이 대표하는 ‘고풍스러움’에 대한 ‘젊은’ 미국 작가 특유의 탈구축적 태도가 발현된 탓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밀실 살인과 눈속임(misdirection)을 다룬 퍼즐 미스터리의 왕도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예의 ‘공평함’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지극히 매력적인 수작이다.


작가인 고든 랜달 필립 데이비드 개릿은 1927년에 미국 미주리 주 렉싱턴에서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1948년에 텍사스 테크놀러지컬 칼리지에서 B.Sc(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미 해병대에서 잠시 복무한 후 미시간 주로 가서 화학 기술자로 일하다가, 뉴욕 시로 이주해서 SF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Astounding Science Fiction)』6월 호에서 단편 「The Absence of Heat」로 데뷔한 이래, 그는 무려 16개가 넘는 필명으로 『애널로그』, 『어스타운딩』, 『어메이징 스토리즈』, 『판타스틱』 지 등에 수많은 중단편을 기고했고, 로버트 실버버그와의 공동 저작 등을 통해 직인적(職人的)인 높은 완성도를 가진 견실한 SF 장편을 꾸준히 발표했다. 특히 그는 미국 SF의 황금기를 일궈낸 명편집자 존 W. 캠벨 Jr.의 수제자적인 존재였고, 뛰어난 위트와 기지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인기작가였다. 『다아시 경』 시리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1970년대의 긴 공백기간 중에는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9년에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뒤에는 긴 입원 생활에 들어갔고, 1987년에 팬들의 애도를 받으며 타계했다.


랜달 개릿 저작 목록

1. The Shrouded Planet (1957)
2. The Dawning Light (1958)
3. Pagan Passions (1959)
4. Unwise Child (1962)
5. Anything You Can Do…… (1963)
6. Too Many Magicians (1967)―다아시 경 시리즈. 장편. 본서
7. Murder and Magic (1979)―다아시 경 시리즈. 제1 중단편집.
8. Takeoff! (1980)―단편집
9. Lord Darcy Investigates (1981)―다아시 경 시리즈. 제2 중단편집
10. The Steel of Raithskar (1981)
11. The Best of Randall Garrett (1982)―걸작 단편선
12. The Glass of Dyskornis (1982)
13. Lord Darcy (1983)―6, 7, 9의 합본
14. The Bronze of Eddarta (1983)
15. The Well of Darkness (1983)
16. The Search for Ka (1984)
17. Return to Eddarta (1985)
18. The River Wall (1986)
19. The Gandalara Cycle, Volume 1 (1986)―10, 12, 13의 합본
20. The Gandalara Cycle, Volume 2 (1986)―14, 15, 16의 합본
21. Takeoff Too (1987)―단편집
22. Lord Darcy (2002)―13에 시리즈의 마지막 단편인 「전쟁 마법」 (The Spell of War)(1979)을 추가한 완전판


| 다아시 경 시리즈 |

<1권>
The Eyes Have It ―Analog 1964년 1월 호
A Case of Identity ―Analog 1964년 9월 호
The Muddle of the Woad ―Analog 1965년 6월 호
A Stretch of Imagination ―Of Men and Malice. 앤솔러지. 1973년
The Spell of War ―The Future At War. 앤솔러지. 1979년

<2권>
Too Many Magicians ―Analog 1966년 8월 호∼11월 호

<3권>
A Matter of Gravity ―Analog 1974년 10월 호
The Bitter End ―Asimov’s SF 1978년 9월 호, 10월 호
The Ipswich Phial ―Analog 1976년 12월 호
The Sixteen Keys ―Fantastic 1976년 5월 호
The Napoli Express ―Asimov’s SF 1979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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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0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달 말쯤 내준다고 하더니만 진짜 나오는군요^^ 에헤라디요~

깍두기 2006-01-0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책이 책 좀 빨리 내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번역하시는 분들도 힘들 터이니.
사람들이 SF 좀 사줘야 하는데ㅡ.,ㅡ;

아영엄마 2006-01-09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탄 봤으니 2탄도 봐야겠네요. 읽으시고 평해주세요~ ^^

바람돌이 2006-01-09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들의 리뷰를 보고 결정하지요. 저야 뭐 SF 팬은 아직 아니니까.... ^^

깍두기 2006-01-09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같이 좋아해요^^

아영엄마님, 일단 먼저 사세요. 우리나라 SF출판부흥을 위하야....

바람돌이님, 빨리 팬이 되세요~~~부추김 부추김 부추김 부추김^^
 

책이 나왔다는데 알라딘에는 아직 안 들어왔나봐.
듀나의 '면세구역'은 내가 유일하게 재미있게 읽은 국내 SF인데.
하긴 우리나라에 SF 작가가 있기는 있던가.

 

듀나 SF소설집 '대리전' 출간  
[연합뉴스 2006-01-09 11:24]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1990년대 중반부터 온라인에서 활동하며 인기를 누려온 SF작가 듀나의 신작 소설집 '대리전'(이가서 펴냄)이 출간됐다.
소설집은 경장편 분량의 표제작을 비롯해 '토끼굴' '어른들이 왔다' '술래잡기' 등 단편소설 3편을 싣고 있다.

'대리전'은 경기도 부천이라는 현실공간을 배경으로 외계인 숙주와 지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대결을 코믹하게 그렸다. 소설은 외계인 관광대리업을 하는 화자가 7억 광년 너머에 있는 외계인 컴퓨터의 가상세계 속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친구이자 애인에게 전하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광속을 넘는 우주선을 갖지 못해 지구를 직접 찾아오지 못한다. 그 대신 '앤시블'이라는 초광속 네트워크를 이용해 인간의 뇌에 자신의 정신을 접속하는 방식으로 지구에 온다.

외계인들은 앤시블을 통해 지구인을 숙주로 삼아 지구를 침공한다. 그들은 첨단문명을 가졌지만 첨단기기를 가져오지 못한 탓에 손전등을 개조한 광선총을 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소설의 주인공 역시 "윙윙! 지구 방위대다! 항복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장난감총을 들고 외계인 숙주와 맞서 싸운다.

이처럼 이 소설은 우주선이나 광선총, 전투기나 핵미사일, 외계 바이러스 등이 난무하는 기존 SF작품들의 우주전쟁에 싫증이 난 독자들에게 코믹한 줄거리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세 편의 단편소설은 어른들이 사라진 뒤 아이들만 남은 세계를 그렸다. '토끼굴'은 인류의 멸망 후에 외계인 부모에게 애완견처럼 사육당하는 아이를 다뤘고, '어른들이 왔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때문에 어른들이 죽고난 뒤 원초적 문명을 일궈내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술래잡기'는 바이러스로 인간이 멸절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남매가 로봇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굴없는 작가'로 활동해온 듀나는 1994년부터 온라인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단편집 '나비전쟁'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 등을 펴냈다. 현재 인터넷에서 듀나의 영화낙서판( http://djuna.nkino.com/movies/ )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화 칼럼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를 펴내기도 했다. 307쪽. 9천800원.

http://blog.yonhapnews.co.kr/chu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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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1-0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나가 SF작가였군요. 저는 모 잡지에 연재한 영화얘기만 읽어 그냥 인터넷 영화평론가 내지는 문화평론가 정도로 생각했는데요. ^^

깍두기 2006-01-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위의 책 말고 두권의 단편집이 있어요. 아니 세권인가? 면세구역만 보고 다른 건 저도 못봤네요.
 
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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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당신 말이야, 나한테 꼭 찍혔어!

과학자가 이렇게 글을 재밌게 써도 되는거야! 물론, 대한민국에도 과학자이면서 글도 재밌게 쓰는 마모님이란 분이 계시긴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은 전세계에 그분 하나 뿐인 줄 알았다구.

그런데 이렇듯 과학적 지식과 새로운 주장을, 능청스러운 유머라는 양념을 넣고 반죽하여, 먹기좋고 보기좋은 빵을 만들어내는 솜씨라니! 게다가 그 엄청 오만한 자신감은 어찌 보면 뻔뻔스럽기까지 한데, 난 왜 그것까지 마음에 들어버린 거지!

하여간 난 지금부터 당신의 스토커가 되기로 했으니 각오하셔. 아니, 각오는 내가 해야 하나. 책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ㅡ..ㅡ;

 

저자에 대한 애정고백은 이 정도로 하고,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이 책의 주제는 '진화란 어떤 특정한 방향을 향한 목적의식적인 사다리 오르기(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장이 별로 놀랍진 않았고, 그렇게 간단한 주장으로 책한권을 써내려간 능력이 존경스러웠을 뿐인데, 굴드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면서 글을 쓴 걸 보면 반대쪽의 주장이 상당히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논박을 위해 아주 여러가지 알아보기 쉬운 도표와 그래프와 그림들을 이용하는데(그리고 야구기록도. 진화를 얘기하는 책에 야구 얘기가 삼분지 일이다), 대단한 건 그런 도표 및 그래프마저도 이 아저씨가 사용하면 유머러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술주정뱅이 모델을 보면 폭소가 터진다.

왼쪽에는 벽이 있고 오른쪽에는 도랑이 있는 길을 가면 술주정뱅이는 결국은 도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긴데(갈짓자로 비틀거리다가 말이다) 이것을 그는 생물이 왜 점점 더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로 사용한다. 왜 생물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가? 그것은 무슨 목적의식이 있거나 그것이 생존에 더 유리해서가 아니라 그쪽 방향만 뚫려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양해지기 위해선 복잡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성이야말로 생명이 추구하는 바다. 

그것을 복잡성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 오해하여 '진화는 인간이란 고등동물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교만을 떠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듯.

굴드 아저씨는 코웃음을 치면서 '인류는 운 좋게 당첨된 것 뿐이지 생명의 방향성이나 진화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라고 단언한다. 그 말은 즉, 옛날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진화의 수순을 밟는다면 인간은 절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잘난척하지 말란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그래도 인간이 가장 고등동물이며 지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란 애처로운 마지막 하소연조차 '우리의 행성은 35억년 전 화석으로 보존된 최초의 생물(물론 박테리아)이 출현한 이래 언제나 <박테리아>의 시대였다' 고 못을 박는다. 박테리아는 35억년이란 긴 기간동안 살아왔으며, 지구의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고, 심지어는 그 전체량을 따져도 인간은 물론 지구상 어떤 생물보다 더 많다. 그리고 인간이 핵을 '가지고 놀다가' 절멸한 후에도 여전히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사실 목적의식적으로 인간이 생겨났건 그냥 우연히 생겨났건 이 지구상에 인간이 생겨난 건 엄연한 사실이다. 뭐 그걸 가지고 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할 건 없지 않나 싶지만 굴드는 그 주장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풀하우스의 모델은 우리에게 변이와 다양성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라고 가르쳐 준다.........우수성은 특정한 점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차이들이다. .....우리는 변화로 가득 찬 각각의 자리에서 우수해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획일적인 평범함으로 이전의 빼어난 것들이 가졌던 풍요로움을 대체하려고 한다. 맥도날드가 지역 식당을 밀어내고,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들이 구멍가게들을 내쫓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변이와 다양성 전체를 자연의 현실로 이해하고 방어하는 것은 이러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진화하는 시스템에는 필수적인 원료인 다양성과 변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 진화론자들이 '잘못' 이해했던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의 법칙을 사회에 도입하여 이런 무한경쟁사회가 된 것에 대해 굴드는 매우 유감인 듯 하다. 그는 자연과 생명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세계도 다시 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방향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그가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약간의 '오버'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갖고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다른 저서들과, 그와 대립항에 있는 다른 과학자들(리처드 도킨스 같은)의 책도 읽어볼 예정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마지막에 한 생각 : 그래도 난 박테리아가 되고 싶진 않아........그러나 뭐.....박테리아라고 딱히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아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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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1-0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렇게 재미있어요?
덜덜

하이드 2006-01-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나는 이런책을 줄줄이 사 놓고 못읽고 있으니, 그게 문제에요. 아, 또 욕심나네요. -_-;;;;;;

깍두기 2006-01-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재밌습니다. 제 스타일이어요^^
제가 교양과학서적을 좋아하는데, 가장 감명깊게 읽은 건 중3때 읽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이고요, 이 책도 아주 재미있군요. 코스모스는 교향곡, 이 책은......뭔가 좀더 유쾌하고 가볍고 신랄한 무엇이어요^^

하이드님, 님의 욕심을 누가 막으리.....사 놓은 책으로 대여점 하면 안될까?^^

하루(春) 2006-01-0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안 샀는데... 저도 사게 되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게요. 계속 기대는 하고 있어요. ^^

깍두기 2006-01-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 리뷰가 좀 부추김이 되었나요?^^

마늘빵 2006-01-0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안지릅니다.

마늘빵 2006-01-0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면 안돼~

깍두기 2006-01-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비명 같아요^^

바람돌이 2006-01-0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어두고 지를 때마다 손이 왔다 갔다.... 결정적 한방이군요. 지난번에 페미니즘의 도전도 결정타를 날리시더니....^^;;

깍두기 2006-01-1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훗, 성공^^
저자의 생각에 동의를 하건 반대를 하건
아마 그의 말빨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어요^^

산사춘 2006-01-12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지름땜시 연초는 참고있는데 넘 하셔요. 흑

깍두기 2006-01-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질러요 질러~~~~

2006-06-27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