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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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에서 그해 데뷔한 가장 우수한 신인에게 수여하는 에도가와 란포 상을 탄 다카노 가즈아키의 두번째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기리노 나쓰오처럼 같은 상을 타고 안정적으로 데뷔해 오늘날까지 히트작을 양산하는 성공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요즘 뭐하면서 먹고 사나, 싶게 낙마한 작가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다카노 가즈아키는 <13계단> 수상 당시 최근 10년 내 최고의 수상작이라는 절찬을 들었던 유망주이니만큼 데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내며 평자나 독자들에게 호의적인 평을 받고 있어 미스터리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다소 묵직한 주제였던 일본 내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과 사형 집행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의 누명을 벗기려 분투하는 주인공들의 모험이라는 오락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13계단>은 확실히 처녀작답지 않은 탄탄함이 돋보인 수작이었다. 반면 <그레이브 디거>는 메시지에서는 조금 후퇴한 인상이고 소설의 재미라는 측면에 더욱 방점을 찍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 프로필을 보면 영화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영화적인 글쓰기가 체질화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가 보기에 조금이라도 지루할 수 있는 장면은 최대한 빨리 넘어가 작품 전반에 속도감이 굉장하며(소설은 대화나 지문이 어느 정도 길어도 그러려니 하지만 영화에서는 장면이 한없이 늘어져버리면 관객이 견디질 못한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장면을 전환해 긴장감을 더하고 주인공의 생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기법은 영화로 치면 교차편집이 아닐까. <그레이브 디거>는 대부분 영상문법으로 씌어진 작품이고 그래서 당장 영화화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끝에 비뚤어져서 양아치가 되어버린 야가미. 서른을 넘기고 이제 새 삶을 살겠다는 각오로 충만해 있다. 그는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골수를 기증할 결심을 하는데, 이식수술이 성공하면 야가미와 그 아이 모두 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한 남자는 정신적으로, 다른 아이는 육체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생전 처음 좋은 일을 하려는 야가미 앞에 암초가 나타난다. 정체불명의 추적자들이 나타나 이유도 모르고 쫓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 그러는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칼을 꺼내는 위험한 추적자들 중 한 명을 정당방위로 살해한 야가미는 결국 경찰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추적자들에게 잡히면 물론이요, 특히 경찰에 체포되면 무죄가 입증되더라도 골수 이식수술 시간에 맞춰갈 수 없게 된다. 야가미는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단 하나의 결심으로 생명을 걸고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으로 병원까지 달음질쳐간다. 남은 시간은 단 12시간, 이동해야 할 곳은 도쿄 북단에서 남단까지 30킬로미터. 야가미의 질주에 어느덧 독자는 모든 걸 잊고 빨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상이 아주 간단히 요약한 대강의 내용인데, 실제로는 중세 유럽 전설을 차용한 암살자 '그레이브 디거'가 벌이는 연쇄살인극부터, 수사과와 보안과 형사들의 경찰 내부 알력다툼이라든가, 유력 정치인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래도 야가미와 추적자들의 쫓고 쫓기는 도시추적극과 왜 야가미가 쫓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융합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플롯에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초에 추적자들에게서 벗어난 야가미는 택시를 타는데 가다 보니 돈이 없는 걸 알고 그냥 내려 위기를 자초한다. 당시는 아직 경찰쪽에서는 비상선이 쳐지지 않은 상태라 병원까지 아무 문제없이 한 번에 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야가미가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었는데 그 정도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할까. 더구나 야가미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여의사가 있지 않았는가. 나중에 갚을 테니까 일단 내려와서 택시비를 치뤄달라, 그 말을 못했을까. 게다가 야가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던 핸드폰과 노트북은 강물에 푹 담궈졌는데도 잠깐 말리니까 곧 제 기능을 한다. 또한 그레이브 디거의 정체라든가 그의 범행의 목적이라는 플롯 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도 속속 나타나는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별 무리없이 금방금방 밝혀지는 것도 작가의 고민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처럼 아쉬운 부분도 자주 눈에 띄지만 워낙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 큰 문제로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악인이었지만 과거를 버리고 착한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쇠 로봇처럼 굳건한 의지를 보이는 야가미는 누구도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야가미가 그렇게 갑자기 좋은 사람으로 변한 동기는 크게 설득력 있게 그려지진 않는다). 택시, 지하철, 페리호, 렌터카와 경찰차, 심지어 두 발이 부서져라 뛰기까지 하는 야가미의 한 밤의 질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교통수단을 활용하므로 더 아기자기하고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자주 언급한 소설의 속도감은 정말 일품이고, 최종적인 사건의 진상도 그 얼개가 잘 맞는 편이다. 특히 병원 코앞에서 결국 잡혀버린 야가미가 역전의 한 방으로 적들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시원한 소나기같이 통쾌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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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3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가미때문에 별 하나를 더 줬답니다^^;;;

보석 2007-08-0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여름 읽을 책으로 쟁여두고 있는데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레몬향기 2007-08-0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계단은 참 재밌게 읽었는데.. 역시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jedai2000 2007-08-0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오, 야가미에 꽤 매력을 느끼셨나 보네요. 하기야 얼굴이 못 났어도 마음이 비단결인데 누가 미워하겠어요 ^^

보석님...올 여름에 보시기 가장 좋은 책일 겁니다. 일단 시원시원하니까 ^^

적님...재미로는 <13계단>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 전작의 메시지같이 공감가는 부분은 약간 적어져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2006년작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내용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과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드는 연극, 그 연극 안에 또 다른 극중극이 포함되어 있는 등 난해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어 어느 것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책장을 덮고 나서도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의 온다 리쿠 작품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 그녀의 고정팬들조차도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본다. 다만 대화나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거나 섬세한 정경 묘사, 자주 묘사하곤 하는 연극 장면의 삽입 같은 익숙한 특징들은 여전해 지나친 낯설음은 피하고 있다.

 

호텔 안마당에 꾸며진 정원에서 두 여자가 대면한다. 얼마 전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파티에 참여했던 그녀들은 당시 벌어졌던 희곡작가의 독살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주앉은 것이다. 그 중 한 여자는 다른 여자의 행동에서 어딘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토대로 상대방이 어떤 트릭으로 각본가를 죽였는지 폭로한다. 그 장은 그렇게 끝나지만 곧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동일한 이야기를 문체만 달리 해서 다시 한 번 펼쳐낸다. 여기서 이미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거 녹록찮은 이야기로구나, 하고. 

 

다음 장은 지방의 연극 공연장을 향해 하염없이 걷는 두 나그네가 등장하는데, 둘 중 한 명이 빌딩 한복판의 분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 여러 명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목격자들의 증언이 모두 다르다. 누구는 여자가 웃었다고 하고, 다른 이는 울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화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하나의 사실도 여러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그래서 누구도 무엇이 확실한 진실인가를 말할 수 없다는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복선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호텔 정원에서 살해된 각본가가 남긴 '고백'이라는 희곡이 공연되는데, 어쩐지 이 연극은 각본가에게 벌어졌던 독살사건을 토대로 씌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연극 속에서도 각본가는 살해된 상태고, 용의자로 '고백'의 주연배우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세 여배우가 지목되었다. 형사는 각각 그녀들을 취조하는데, 역시나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는 세 여배우. 여기서부터 처음에 제시됐던 각본가 독살사건이 과연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도대체 이 연극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어떻게든 줄거리를 묘사해보려 애썼지만 괜한 짓을 하고 말았다는 후회가 든다. 다채로운 화자들과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향연을 펼치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도무지 설명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다. 이런 작품은 그저 직접 읽어보고 느끼는 수밖에. 취향에 따라 누군가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재미를 발견하거나, 누군가는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혼란스런 개개의 사건들이 결국에는 미스터리적인 장치를 이용해 풀려나가는 점이 만족스러웠고, 끝까지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 몇몇 부분들이 주는 모호함도 인상적이었다. 안개 속을 한참 헤맨 것 같은, 그렇게 고생하다 결국 안개 속을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미궁에 갇혀버린 듯한 신비한 느낌에 근사한 당혹감을 느꼈다. 어쩌면 작가가 주문하는 건 이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를 너무 해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그 낯설음과 기이함을 즐겨라, 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피살된 각본가 가미야는 절정의 인기 작가지만 이거다 하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없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영원히 남을 만한 대표작 '고백'에 몰두하는 거고. 사실은 이 작가가 온다 리쿠 본인은 아닐까. 인기는 실컷 누렸지만 아직까지 비평가들을 쓰러뜨릴 궁극의 작품을 쓴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여 환상과 현실, 실제와 허구, 소설과 연극이 혼합되고 나눠지는 변화무쌍한 실험작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녀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걸지도. 2007년에 이 작품이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았으므로. 나 자신, 힘들게 읽어내긴 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지는 못하겠는데, 역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눠질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C지점에서 끝나는 뻔한 스토리텔링에 지쳐 있는 독자라면 한번 잡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말은 꼭 남기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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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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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는 살성殺星 긴다이치 코스케(물론 그가 사람들을 죽인다는 건 아니다. 워낙 명탐정이다 보니 도처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에 두루 참가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듯). 끝없이 죽고 죽이는 인간군상들의 악귀 같은 모습에 지쳐서일까, 모처럼 쉬면서 휴양을 하기로 한다. 그가 선택한 장소는 예전 <옥문도>와 <팔묘촌>에서 난해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어 인연이 깊은 오카야마 현. 돈 안 되는 탐정 일만 주로 맡았던 사람이라 주머니 사정도 별로기에 귀수촌이라는 산골 마을에 틀어박혀, 고급 온천도 아닌 2류 여관 '거북탕'에서 당분간 유유자적하려 했으나 추가로 지출이 계속 발생하게 되니, 꽃다운 이십대 처녀 3명이 하루에 하나씩 살해되는 터에 부의금으로 허리가 휘게 생긴 것이다(실제로 긴다이치는 부의금을 낸다). 역시 명탐정의 운명을 타고난 긴다이치 코스케, 이쯤되면 그가 사건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그의 뒤를 쫓아온다고 할 수 있으렷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5년도는 이미 일본 사회가 패전의 멍에를 벗고 점차 발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던 시기였으나, 귀수촌은 여전히 과거의 인습에 꽁꽁 묶여 있다. 전통적인 일본의 주군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마을 사람들은 양대 세력인 니레 가와 유라 가로 편이 갈려 서로 반목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대결을 펼친다. 또한 원래 귀수촌을 지배했던 영주 가문의 후손인 다타라 호안은 아내를 8명이나 갈아치우며 유유자적하다 완전히 몰락했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하지만 두 가문의 치열한 싸움은 20년 전 유라 가가 사기꾼 온다의 꼬임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더군다나 그 사기꾼 온다가 자신의 사기를 눈치챈 거북탕(긴다이치가 현재 머물고 있는)의 아들까지 살해하고 잠적하면서 니레 가에게로 완전히 패권이 넘어간다. 과거는 망령처럼 언제까지고 죽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 귀수촌에서 현재 발생한 연속살인사건에는 아픈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니레 가고 유라 가고를 떠나서 전후는 가문이 중심이 아니라 인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어른들끼리의 반목은 떠나 그들의 후손들은 스물 전후의 진취적인 젊은이들답게 서로들 친하게 지내고 있다. 사기꾼 온다의 딸이자 현재 일본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오조라 유카리가 귀수촌으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을의 선남선녀들은 힘을 모아 떠들석한 축하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유카리가 돌아온 날, 다타라 호안이 집에서 실종되고, 사흘 연속으로 밤마다 살인이 계속되는데, 첫째 밤은 유라 가의 딸, 둘째 밤은 니레 가의 딸, 마지막으로 거북탕의 딸이다. 개가 변을 끊지 긴다이치가 어찌 사건을 끊으랴. 그는 휴양이라는 본래 목적도 잊고 사건에 뛰어드는데, 곧 귀수촌에는 전래의 '공놀이 노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공놀이 노래의 내용과 비슷하게 살해당한 처녀들, 긴다이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곧장 사건의 핵심에 뛰어든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 국민추리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후기 수작이다.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1960년으로 사실상 요코미조 스타일의 본격 추리가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점과 선> <제로의 초점> 등의 작품으로 기존 추리소설의 낡은 면모를 일신하고 당대 현실을 작품 안에 끌어들여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던 사회파 추리소설을 대유행시킨 게 1957년경이니 이미 1930년대부터 활동했던 요코미조 세이시는 올드패션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듯 인기가 밀린 요코미조가 절치부심 내놓은 작품이라 하겠으나 실제로 읽어보면 그다지 조급해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느긋한 필치로 익숙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규칙들을 차근차근 펼쳐내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고 자동차가 다니며 비행기가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낡은 인습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비극을 부르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해, 죽음조차 한없이 아름답게 그리는 극도의 탐미주의(이번 작품에서는 늪 속에 빠져 시체로 발견된 유라 가의 딸 야스코의 기모노가 물 속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을 특별히 공들여 묘사하는데, 어쩌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즐겨 연쇄살인을 그리는 이유는 아름답게[?] 단장된 시체에 거의 패티시즘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가 장기를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도면밀하게 단서를 배치하고 결말에서 그동안 모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명탐정의 활약에 집중하는 서양 본격 추리소설의 일본화(<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는 동요에 맞춰 살인이 일어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식 마더구스 추리소설을 일본화하는데 주력한다)까지 긴다이치 코스케 스타일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세태에 따라 달라진 추리소설 팬들의 입맛에 나까지 굳이 맞춰야 하냐는 노장의 자존심이 엿보인다고 해야 할 듯.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보려면 한없이 복잡해지는 법, 되도록 하나하나 순서대로 단순하게 봐야 풀리는 게 세상의 이치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 긴다이치가 해결하는 사건의 진상도 실상은 정말로 단순해 외려 허를 찔리고 만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되기 십상인데, 다행히 요코미조는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 장면장면마다 "여기에 긴다이치가 주목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긴다이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운운하며 독자에게 공정한 힌트를 주려 노력한다. 역시 본격추리라고 지나치게 머리 싸매고 볼 필요는 없고 그저 잠깐 쉬어가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보라는 작가의 씀씀이같아 흐뭇해진다. 언제나 그렇듯 동기가 약간 허망하지만 어차피 요코미조의 세계에서 동기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에게 추리소설은 현실과 무관한 순수한 도락이요, 온전한 즐거움이 전부니까.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빠른 운송수단은 자전거, 비가 오면 하룻밤 쉬어가는 여유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트릭을 만끽할 수 있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서서히 작가생활의 황혼기를 맞아가는 노 추리작가가 느긋한 마음으로 풀어낸, 그래서 독자 역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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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수집가 1
자비네 티슬러 지음, 권혁준 옮김 / 창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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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앞부분에서 암시되고 짐작 가능한 소설이지만, 완벽하게 아무 정보없는 상태로 보시고 싶은 분들은 주의하시길. 
 

현대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은 한창 활동할 때 애거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 대가들의 작품들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누군가(아마도 프랑소와 트뤼포일 듯) 그 이유를 물어보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답했다. "예전에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골을 무대로 벌어지는 미스터리극을 시리즈로 만들어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걸 시기한 다른 방송국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최종회 몇 시간 전에 범인은 집사다, 라고 미리 발표해버렸습니다. 그토록 높은 청취율을 보인 프로그램이었지만 최종회는 거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미스터리는 역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막상 범인이 중간에 드러나면 힘이 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는 다릅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나에 몰두한다기보다는 극중에서의 긴장감을 강조하는 서스펜스는 초반에 범인이 등장해도 끝까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지요."

독일의 신인 스릴러 작가가 쓴 <아동수집가>의 전략도 여기에 있다. 아주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탈리아로 휴가여행을 떠났다가 열 살 남짓한 아들을 유괴당하고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10년 동안 애태우며 사는 독일인 엄마가 있다. 남편 역시 절망적인 현실에 몹시 힘들어하지만 그는 서서히 비극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아가야 하지 않나, 는 게 남편의 생각이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승복할 수 없다. 잊는다는 건 곧 포기하는 게 되니까. 아내는 남편의 곁을 떠나 10년만에 끔찍한 범죄의 현장으로 되돌아온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탈리아 토스카나 마을로. 그곳에서 머물며 아들을 다시 찾아보려는 일념으로 여자는 살 집을 구하는데, 마음에 꼭 드는 집이 곧 나타난다.

그 집을 내놓은 주인 남자는 어딘지 속세를 벗어난 듯한 신비스러운 매력이 있다. 익숙치 않은 여자의 시골 생활을 도와주며 친절을 베풀어 친구가 되어준 그 남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남자가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광대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처럼 천만분의 일의 우연으로 그토록 찾아 헤맨 범인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그만큼 플롯이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여자는 남자의 정체를 모르지만 독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고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안 돼, 그 남자가 범인이란 말야.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2권으로 나눠서 출간된 <아동수집가>의 1권은 어린 시절의 학대와 무관심으로 정신에 이상을 일으켜 아동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한 후 살해하는 남자의 범행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실감있게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2권은 전술한 대로 살해당한 한 아이의 엄마가 범인의 정체도 모르면서 서로 가까워지게 되는 서스펜스에 몰두한다. 처음부터 모든 내용이 확 까발겨지기 때문에 그다지 머리쓸 구석은 없지만, 긴장감으로 손톱은 제법 물어뜯게 된다. 연쇄적으로 아동을 살해하는 남자의 심리나 그의 성장배경을 통해 범죄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도 답하고, 아이를 잃고 세상이 끝난 듯 절망속으로 침잠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속도감이나 진행은 느릿느릿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적과의 동침'을 경험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 자체가 주는 서스펜스도 그럴싸한 편이고. 

이렇게 보면 유괴를 소재로 한 꽤 훌륭한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이다, 하고 부족한 이 독후감을 끝마쳐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엄지손가락을 주저없이 치켜들 순 없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그러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제법 커 보인다. 무엇보다 커다란 문제는 주인공의 행동에 개연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동연쇄 유괴살해사건의 범인인 알프레드 피셔(그의 정체는 첫 장부터 나오기 때문에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다)의 행동은 도무지 설명하기에 요령부득인데 자신을 파멸시킬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는 장소를 아무 이유없이 팔아치워 위기를 자초하는가 하면, 특별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아동 외에는 성욕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성인 여자를 유혹해 동거하기도 한다. 여러 명의 아이를 유괴하면서도 나름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러 발각되지 않았던 알프레드는, 결말에선 부모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한 아동에게 예의 그 끔찍한 짓을 저질러 결국 체포되고 만다.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보인 걸 그냥 이 남자의 광기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해야 하나?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이런 몇 가지 개연성없는 부분들은 내 생각에 신인 작가가 처음에 구상했던 플롯에만 너무 매몰되어 그것들이 얼마나 어색한가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잃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몇몇 어색한 부분들을 수정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는 작품이라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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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시 2007-07-2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감사합니다^^ 고민이 해결됐어요.

jedai2000 2007-07-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살지 말지 고민을 하셨나보네요 ^^ 아이 유괴 같은 건 정말 최악의 범죄니까 그런 점에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면은 있지만 구조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135회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미우라 시온의 작품. 작년인가 어느 단편집에 그녀의 아주 짧은 단편 하나가 실려, 나와는 그 작품으로 첫 대면을 했는데 한 남자 사극배우와 그의 애인이 등장하는 사랑이야기였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남자가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의 떨림이나 청춘만이 내뿜을 수 있는 들뜬 열기가 인상적인 괜찮은 소품이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후 나름 주목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아 항상 섭섭하다가 마침내 현재까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쿄 변두리의 마호로 시(가공의 도시지만 모델이 된 실제 도시가 있다 한다)에서 심부름집을 홀로 운영하고 있는 다다. 아픈 사연을 간직한 삼십대 이혼남인 그는 안정된 회사를 박차고 나와 여행 간 주인을 대신해 치와와를 돌봐준다거나, 개집을 고쳐준다거나, 문짝을 수리해주는 등 별 볼 일 없는 일들을 대행해주며 살아간다. 매서운 바람이 차가운 어느 겨울날, 여느 떄처럼 시시한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과 가정집을 겸하는 심부름집으로 귀환하려는 찰나 인생의 전환점이 될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추운 날, 맨발에 샌달을 신고 궁상맞게 앉아 있는 남자의 이름은 교텐. 공교롭게도 다다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괴짜 교텐과는 사실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관계지만 다다에게는 그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었다. 미술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재단기에 교텐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린 것이다. 다행히 손가락은 붙일 수 있어 피는 통하지만 감각은 죽어버려 움직일 수는 없다. 항상 그게 미안했던 다다는 갈 곳이 없어 보이는 교텐을 집으로 데려온다(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 갈 곳이 없었다). 그날부터 교텐은 진득이 눌러앉아 다다의 심부름 일거리에 따라다니는데, 별로 일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멀거니 서 있다 마지못해 도와주는 정도. 하지만 매사 즉홍적이고 감정적인 교텐은 일을 도와주기보다는 만드는 편이니 다다가 속이 좀 많이 타겠다.

언제나 지나간 아픔에 매여사는 다다와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새끼손가락의 상흔만큼이나 역시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교텐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어간다. 이외에도 다다 심부름집에 일을 맡긴 콜럼비아 창녀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초등학생, 부모를 살해한 용의자의 친구 여고생, 가정 형편 때문에 기르던 치와와와 이별해야 하는 소녀 등 다양한 의뢰인들과의 만남이 두 사람에게 삶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내내 고독하고 허무했던 두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느끼고 절망으로 가득찬 인생에서 한 발짝을 내밀어 마침내 탈출한다는 고전적인 문학의 주제를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나오키상 수상작치고는 약간 가벼운 느낌이지만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주제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다, 교텐, 그리고 독자를 이끌어가는 미우라 시온의 솜씨가 인상 깊었다. 깃털같이 가볍고 무난하다가도 어느 순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메시지를 던지는 느낌이 썩 괜찮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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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시 2007-07-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 말까 고민이 많은 책입니다^^;;

jedai2000 2007-07-17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큰 기대만 않는다면 읽는 재미도 있고, 여운도 남는 좋은 책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쥬베이 2007-08-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었습니다. 바로 위 제다이님 평이 와닿는군요. 큰기대 안하면 괜찮고. 기대하면 이하

jedai2000 2007-08-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그래도 전반적으로 따뜻한 이야기라 느낌은 좋았던 것 같아요. 아주 힘 안 주고 적당히 훈훈한 이런 이야기 좋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