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계약 1 뫼비우스 서재
할런 코벤 지음, 김민혜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적인 인기 작가 할런 코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유괴, 살인 등의 범죄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어 온갖 고생을 하다 겨우 일상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아찔한 반전 한 방으로 모든 게 뒤집어진다는 설정을 가진 일련의 완성도 높은 서스펜스 스릴러들로 정평이 나 있다. 국내에도 <영원히 사라지다> <밀약> <마지막 기회> <단 한 번의 시선> 같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반응이 괜찮았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다른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독립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서로 이어지는 바는 거의 없다(일부 작품들에서 등장인물을 한두 명 정도 공유하는 정도). 하지만 코벤의 진정한 출세작은 따로 있었으니 스포츠 에이전트인 마이런 볼리타가 매번 주인공으로 등장해 활약하는 8편의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은 독립적인 작품들(보통 스탠드 얼론이라 부른다)에만 몰두하고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는 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튼 1995년에 발표된 <위험한 계약>은 할런 코벤이 분신과도 같은 마이런 볼리타를 세상에 처음 선 보인 작품이라 제법 의의가 있다 하겠다.

 

작가가 아무리 같은 주인공으로 연속되는 시리즈를 쓰고 싶어도 독자들이 환영하지 않으면 제대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 텐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마이런 볼리타는 너무도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라 무려 8편이나 되는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날리던 농구 실력을 가진 그는 백인은 점프를 잘 못한다는 속설과는 달리 점프도 높았고, 투견과도 같은 투지가 있어 발군의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을 자랑하는 포워드였다. NCAA(전미대학농구)에서 우승컵도 거머쥐고, NBA에서도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 8위로 지명되지만 시즌 초반에 다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첫 해에 은퇴하는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올해야 보스턴 셀틱스가 잘나가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2순위로 뽑은 선수가 약물로 사망하는 등 악재가 무척 많았는데, 만약 마이런 볼리타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셀틱스의 저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뛰었어도 크게 빛을 보긴 힘들었을 거라고 보는 게 고작 193센티미터의 백인 포워드가 NBA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NBA팬으로서 순간 흥분해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선수로서는 운이 좋지 못했지만, 다른 스포츠 에이전트와는 달리 직접 스포츠 세계의 한복판에서 뛰었던 경험을 살려 선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마이런 볼리타. 아직까지는 햇병아리 에이전트에 불과하지만 풋볼 계의 대학 최대어 크리스천을 손에 넣은 뒤로 모든 것이 달라질 태세다. 그런데 미남에 에이스 쿼터백에 성격도 좋은 크리스천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으니, 치어리더였던 애인 캐시가 대학 내에서 실종된 채 2년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캐시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 마음은 어디 그럴까. 재미있는 건 지금은 헤어졌지만 마이런과 전에 사귀던 애인이 캐시의 언니 제시카라는 것이다. 제시카가 크리스천에게 마이런을 에이전트로 소개시켜줘 지금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보면 틀림없을 듯. 캐시는 비록 없지만 관계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 서서히 아픔도 잊혀져갈 무렵 모든 것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었다고 생각한 캐시의 누드 사진이 실린 잡지가 크리스천에게 배달되어 오고, 캐시로 추정되는 목소리로부터 전화도 걸려온다. 게다가 캐시 실종 사건을 나름 혼자서 조사하던 제시카와 캐시 자매의 아버지도 거리에서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제시카는 사건의 재조사를 옛 애인 마이런에게 부탁하는데, 그는 제시카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그리고 고객인 크리스천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미국의 미스터리/스릴러에 등장하는 탐정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필립 말로나 루 아처같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얼싸안은 듯한 우울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탐정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사건의 핵심을 파고들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농담을 구사할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듯한 유쾌한 재치꾼 타입이 또 있는 것 같다. 재치꾼 타입 하면 고전에 해당할 렉스 스타우트의 아치 굿윈 탐정도 있고,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플레치나 로렌스 샌더스의 맥널리가 떠오를 법한데, 마이런 볼리타 역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끝내주는 농담 실력과 확실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재간둥이다. 그에게는 캐시의 실종이라는 핵심 사건 말고도 그가 관리하는 선수가 갱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는다는지 하는 온갖 악조건이 넘쳐나는데, 어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농담을 그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종일관 미소를 띄며 페이지를 넘겼다. 꼬이고 꼬인 난제들을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마이런과 그의 절친한 친구 윈의 활약은 그야말로 시원시원해 적수가 없을 지경. 참고로 윈은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큰데, 엄청나게 잘 생긴 얼굴에 적들은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냉혹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천을 모든 걸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다면 마이런 역시 마찬가지다. 래리 버드 같은 농구 솜씨에 제리 맥과이어 같은 인간미,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 같은 유머 감각과 터프함, 셜록 홈스 같은 추리력을 한몸에 겸비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닐런지. 마이런은 그간의 치밀한 조사를 통해 용의자를 몇 명으로 압축하고는 결말 즈음해서 용의자들에게 함정을 판다. 원래 미스터리/스릴러에서 논리와 추리로 범인을 압축하지 못하고, 함정 수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건 하수의 방법이다. 할런 코벤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낸단 말야, 하고 혀를 찼는데 기우였다. 범인의 정체를 마이런은 미리 알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결말에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추리로 밝혀낸다. 유머와 하드보일드적 세계관, 정통 미스터리가 공존하는 독특한 맛이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 수준이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마이런 볼리타는 한번 믿어봐도 괜찮은 놈이라는 걸 보증한다.

 

 

 

 

p.s/ TV쇼나 시트콤 등 대중문화에 기반한 농담이 엄청나게 많은데 일일이 역주를 단 번역자, 편집자의 노력 덕분에 한층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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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런 볼리타'가 전 너무 좋네요..페이드 어웨이도 출간되었으니 다음 시리즈도 꼭 나와주길 바래봅니다.

jedai2000 2008-05-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페이드 어웨이> 봐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시원한 스릴러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
 
가타부츠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가타부츠'란 생소한 단어는 책의 설명을 따르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 혹은 착실하고 품행이 바른 사람을 뜻한다고 하네요. 비슷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이 단편집은 무척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고초를 치루는 사람도 나오고,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약간의 일탈을 하거나 쉽게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를 만나는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흔하고 평범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사람은 특별하다는 말 그대로 적은 수를 차지할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대범하지 못해 다른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여 잠도 오지 않고,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우리 소박한 사람들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가타부츠]. 그러나 주인공들은 모두 갑남을녀에 불과해도 6편의 이야기마저 그저 평범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모두 나름의 독특한 맛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맥이 꾼 꿈>은 불륜남녀가 나옵니다. 첫눈에 반해버린 남녀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둘다 워낙에 심성이 고운 사람들인지라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전전긍긍하죠. 내내 상대에게 끌리는 마음과 망설이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다 두 사람은 차라리 죽기로 결심합니다. 죽어야만 이 관계가 끝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둘의 불륜 관계는 한 사람만 사라져도 지속될 수 없죠. 때문에 서로 자기가 죽겠다고 다투는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결국 의견 통일이 되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알리지 않은 채 각자 있는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는데, 뜻밖의 결말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산뜻한 마무리 느낌이 괜찮지만 너무 소품인지라 그저 가볍게 읽을 만한 작품입니다.

 

<주머니 속의 캥거루>는 철없는 여동생에게 시달리는 오빠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유독 남자 문제에 있어서만은 지나친 소유욕으로 인해 늘 버림받고 상처받고 망가지는 여동생과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느라 정작 자기 실속은 못 챙기는 오빠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빠에게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기 싫은 애인이 생기게 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여동생은 오빠에게도 강렬한 독점욕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오빠는 자기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여동생을 물리쳐야 그녀의 삶도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변할 거라 생각합니다만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끈적끈적한 끈이 남매 사이에는 있었죠. 보는 내내 오빠의 결단을 강력하게 응원했지만 운명에 휘둘리고 마는 어쩔 수 없는 마무리에 깊은 안타까움이 남았던 작품이예요.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웬만큼 쓰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이상심리를 다룹니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은 묘한 취미가 있는데 그건 역에서 약속한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입니다. 초조하게 개찰구를 들여다보고, 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면 기대와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약속한 사람을 애타게 찾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애잔하고 비탄에 찬 아름다움이 있어 주인공에게는 일종의 감동까지 주죠. 평소와 같이 역에서 취미 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눈을 사로잡는 여인이 있습니다. 몇 시간이고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을 보며 흡족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마침내 여인이 기다리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반갑게 다가가는 여인과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행동하는 남자, 기묘한 풍경이죠? 그날 주인공은 남자를 뒤따라가서 죽이고 맙니다. 그 이유가 밝혀지는 마지막 문장이 꽤 소름 끼치는 마무리를 만들어냅니다.

 

<유사시>는 남편, 아들과 함께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사는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부는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사고를 당할까봐 늘 걱정하며 꿈에서까지 압박을 받습니다. 처음 낳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주부의 고민은 조금 다릅니다. 아이에게 사고가 생길 때, 즉 유사시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주부니만큼 운동 신경도 없고, 남들보다 강한 모성을 가진 것도 아닌 것 같아 주부는 거의 강박증에까지 시달립니다. 아들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가 있어도 안절부절못하고, 아들이 혹시 베란다에 매달리게 될 때 즉시 달려가는 동선에 방해될까봐 베란다에 쌓인 물건들도 모두 치워뒀어요. 이렇게 거의 정신에 균형을 잃을 정도로 유사시 강박증에 매몰될 때쯤 진짜로 주부의 가족에게 사고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주부는 그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를 하는 모습을 보여, 마침내 자기를 침몰시키고 있었던 고민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며, 더구나 따스한 심성으로 가족을 배려하는 몇 뼘쯤 성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흐뭇하고 감동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뛰어난 단편입니다.

 

<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미스터리나 서스펜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억상실을 소재로 썼습니다. 결혼을 앞둔 남자가 아내될 애인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갑니다. 바닷가 시골이라 여행하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 가는데, 애인이 어느 해변에서 잠깐 쉬다 가잡니다. 내려보니 웬지 낯설지가 않네요. 분명히 처음 와보는 곳인데 말입니다. 사실 그 해변에서는 3년 전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정말 공교롭게도 남자는 딱 그 시점에 교통사고를 당해 3일 간의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내가 죽인 건 아닐까, 번민하는 남자. 그래서 처음 와보는 해변이 낯익은 건 아닐까? 혹은 결혼 전 우울증(매리지 블루)은 아닐까도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자기가 범인인 것만 같습니다. 가장 미스터리 소설 분위기가 나는 작품이고 결말에 반전이 한번 더 있습니다만 작가의 과욕이 낳은 빗나간 반전이 아니었나 싶네요. 왜 남자가 그 해변에 익숙한지도 후반부에 깔끔하게 설명되며, 한결 같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남녀의 모습도 보기 좋은데 또 한번의 반전을 통해 찝찝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게 만듭니다. 한번 더 비틀면 그만큼 충격을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동안 공들여 쌓아온 이야기, 분위기와 맞는지를 작가는 잘 살펴야 했습니다.

 

<무언의 전화 저편>도 굉장히 뛰어나 일상계 미스터리의 수작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 된 친구. 이 친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할 말은 하는 올곧고 성실한 사람입니다만 의외로 주변의 인기는 없습니다. 왜 이 좋은 사람을 몰라줄까 생각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친구가 그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살인범에게 쫓기던 여자가 살려달라고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신고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도 경찰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죠. 다음 날 몰인정한 현대인이라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쏟아져서 친구도 인터뷰를 하지만 '떳떳하지 않은 짓은 하지 않았다'고만 밝힙니다. 그 태도에 친구는 사회 전체에 이지메를 받게 된 것이며, 애인과도 헤어져야 했고, 매주 토요일 새벽 3시 10분에 걸려오는 무언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친구를 비난하려 무언의 전화를 거는 것일까요, 아니면 저승에서 살해당한 여자가? 전화의 정체와 왜 항상 올곧았던 친구가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가 드러나는 결말이 기가 막힙니다. 무책임한 언론의 횡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예요.

 

이상 6편의 수록작을 살펴보았습니다. 뒤표지 문구에 "소박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위한 오마주, 다채로운 레파토리,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맛의 단편집"이라 되어 있는데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평범해 역시 평범한 제가 읽기에 한창 더 몰입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은 비슷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다양한 요리를 한 상 쫙 펼쳐두고 먹는 기분이었어요. 아주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절대로 심심하지 않은 이야기들. 사와무라 린이라는 작가와의 첫 대면은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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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1-2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jedai2000 2008-01-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만족스러웠어요 ^^

그린브라운 2008-01-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멋져보입니다 ^^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jedai2000 2008-01-22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저는 아주 좋게 읽었는데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네요 ^^
 
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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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을 떠올려보라면 밤새도록 며칠이고 술판을 벌인 축제도 있고,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나갔다 실망만을 안고 돌아오던 미팅도 있겠지만 역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MT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낭과 버너, 각종 밑반찬과 술(!)을 바리바리 싸들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MT! 직장에서 가는 야유회와는 달리 의무도 아니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이기 때문에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밤이 깊어가면 한두 명씩 눈이 맞은 남녀가 사라져 로맨스도 꽃피고, 술에 떡이 되도 그자리에서 누워 자면 되기 때문에 부담도 없죠. 게다가 술 취한 멤버가 벌이는 막장 주정은 훗날까지 오래오래 회자되어 당사자를 창피하게 만드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아, 이렇게 적고보니 당장 MT를 떠나고 싶네요. 그때 그 멤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지...

 

대학 문화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디든 비슷한지 에이토 대학의 법학부 신입생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첫 여름 방학 때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MT를 떠납니다. 물론 경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필수겠죠. 그런데 아리스가 몸담은 동아리는 추리소설연구회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장인 4학년 에가미 지로를 비롯해 만담가에 가까운 2학년 모치즈키와 오다 선배, 아리스 본인은 모두 미생미사, 미스터리에 죽고 미스터리에 사는 골수 마니아들입니다. 기찻간에서도 미스터리 소설 이름으로 끝말 잇기를 할 정도니까요(그런데 이 장면은 일본어로는 끝말 잇기가 되는데 한글로는 맞지가 않아, 번역자 주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지인 야부키 산의 캠프장에 도착한 그들은 놀러온 다른 대학의 세 동아리와 합류하게 되는데, 스터디 그룹도 있고, 산행 동아리도 있네요. 결국 총 17명의 대식구가 된 그들은 모두 젊기에 낯가림도 없이 금방 친해져 캠프 파이어도 하고, 서서히 남녀상열지사도 이뤄지며, 다시 올 수 없는 청춘의 즐거운 한때를 보냅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휴화산이던 야부키 산이 분화하며 평화로운 정경은 지옥의 한복판처럼 변해버립니다. 게다가 산을 내려갈 수 있는 길도 지진으로 끊어지고 말았어요. 완벽하게 고립되고 만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식사량도 제한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또 하나의 재앙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멤버들이 한 명, 한 명 살해되어 시체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힘을 모아도 살아날까 말까인 상황에 연쇄살인범까지 숨어 있다니...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차디찬 시체가 될런지, 또한 대체 누가 범인일까요?

 

<월광 게임>은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신본격 미스터리 열풍을 이끌었다고 알려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1989년 데뷔작입니다. 부제는 'Y의 비극 88'로 아마도 엘러리 퀸의 명작 <Y의 비극>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나 싶은데, 이 작품에서는 두 명의 피살자가 죽어가면서 'y'로 보이는 다잉메시지를 남기고 그것들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까닭에 'Y의 비극 88'이란 부제를 단 것 같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본격파로 많은 작품을 써내고 있는데, <월광 게임>에 등장하는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대학생 아리스가 등장하는 몇 작품을 비롯해, 에이토 대학 범죄사회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유명하다고 하네요.

 

두 시리즈에 모두 등장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직업, 즉 학생과 작가에서 시리즈명을 따와 각각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로 나뉘어진다고 하는데 두 아리스 사이에 접점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소설가다운 재미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로 '학생 시리즈'는 <월광 게임>을 비롯해 단 3작품만 나와 있었는데 작년에 15년 만에 4번째 작품 <여왕국의 성>이 나와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고 합니다. 편수가 적은 '학생 시리즈'는 물론이고 꼭 '작가 시리즈'에서도 대표작들을 골라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부제에서 엘러리 퀸을 떠올릴 수 있듯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엘러리 퀸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러리 퀸 하면 역시 독자와의 페어플레이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논리를 중시한다는 걸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월광 게임>에서 작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엘러리 퀸을 떠올리게 합니다. 폐쇄된 공간, 한정된 등장인물, 독자에게 숨김없이 모든 단서를 공개하는 공정함, 논리적 해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장'까지 모든 점에서 엘러리 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대학생들 이야기다 보니 학생 아리스가 유력한 용의자를 연모해 수사에 혼선을 빚는다든가, 살해 동기가 사랑에 기반한다든가 하면서 로맨스에도 주력하는 건 약간 달라 보입니다(동기가 그다지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류의 본격 미스터리에서 하이라이트는 역시 탐정이 등장인물들을 모두 모은 후에 '추리쇼'를 펼치는 장면이 아닌가 싶네요. <월광 게임>에서도 탐정역인 에가미 지로가 하산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두를 모아두고 진상을 밝히는 장면이 백미입니다. 하나하나 상황과 단서를 짚어 범인을 추려내는 과정은 정말이지 짜릿함마저 느껴질 정도예요. 하지만 핵심 단서 중 하나인 다잉메시지 'y'의 정체를 우리나라 사람은 온전히 추리할 수 없다는 건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물론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등장인물이 무척 많고 때로는 성으로, 본명으로 심지어 별명으로까지 부르기 때문에 계속 맨 처음 페이지 등장인물 소개면을 왕복하면서 읽어야 했습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다잉메시지의 전모를 절대 알 수 없다는 단점도 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아리스를 비롯한 추리소설연구회 멤버들이 너무도 호감 갑니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그들은 그간 읽었던 추리소설들을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끼거든요. 죽기 직전에도 유일한 아쉬움이 절판된 미스터리 소설을 못 구한 거라니, 이건 완전히 우리 미스터리 마니아들의 습성 그대로 아닙니까?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 4인방의 피 속에는 추리소설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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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1-09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입니다.^^흐흣...
추리소설의 DNA라...멋진데용..ㅇ.,ㅇ 고전추리소설을 떠올리면서 읽으면 괜찮을듯..
저도 사려고 담아놓았는데, 평쓰신 분들의 평점이 화끈하게 별 다섯개쯤 나와주지는 않네요.;;;;그..그래도 봐야지!

물만두 2008-01-0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추리마니아의 피를 끓게 만드는 동질의 그것!!!
별이 짜다해도 애플님 보셔야죠~

jedai2000 2008-01-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너무 오랜만에 써봤네요. 제가 갑자기 백수가 되서 이제 리뷰를 좀 많이 쓰려고 생각 중이예요. 고전 추리소설을 멋지게 현대에 재현한 작품인 듯 합니다. 무엇보다 대학생들 이야기라 옛날 생각도 나고 그 분위기 자체가 좋아요. 아무래도 다잉메시지가 한국인들은 이해불가라 점수가 좀 짜지지 않았나 싶네요 ^^

물만두님...별 4개면 아주 짠 건 아닌 것 같고, 아주 재미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꼭 보시라고 애플님께 전해주셔요 ㅎㅎ

쥬베이 2008-01-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축하드려요^^
1월 3째주 이주의 마이리뷰 선정입니다ㅋㅋㅋ

jedai2000 2008-01-2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아, 축하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 한 2년만에 된 것 같은데 기분 너무 좋네요. 호호

boogie 2008-01-2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추리문학을 좋아하는데..
잘 읽고 갑니다...
자주 보고 가겠습니다...^^

jedai2000 2008-01-2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기님...추리문학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 앞으르도 가끔 리뷰 올릴 테니 놀러오셔요^^

이매지 2008-01-2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제다이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얼마 전에 네이버 메인에도 뜨셨던데 ㅎㅎㅎ
일본의 신본격미스터리와 비교적 코드가 맞는 것 같아서 이 작품도 땡기는군요 :)
미스터리 동아리의 일원이 여행을 가서 일을 당하는 내용을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십각관인 것 같기도 한 데 맞나 -ㅅ-a)
어쨌거나 별 다섯은 아니라 망설여지지만 보고 싶네요 :)

jedai2000 2008-01-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아, 고맙습니다 ^^ 네이버 메인에 뜨니 무섭더라구요. 하루에 3만 명 가까이 들어오시다니 ㅎㄷㄷ 근데 네이버는 조금 우스운 게 일단 메인에 띄워놓고 나서 나중에 통보를 해주더군요. 저야 상관없지만 조용하게 블로그 운영하시고 싶은 분들은 기겁하시겠던데요 ^^

신본격 미스터리 초기작이죠. 여행가서 일 당하는 건 십각관이 맞는 것 같네요. 근데 십각관에서는 둘 빼고 다 죽지만, 여기선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습니다ㅎㅎ 일본어를 이용한 다잉 메시지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 부분을 빼더라도 논리적인 맛이 있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재미있어요 ^^
 
사명과 영혼의 경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히무로 유키는 심장외과 수련의로 격무에 시달리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가며 의술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심장에 문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사명감도 없진 않지만, 사실 그녀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녀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대동맥류라는 심장 질환으로 수술을 받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아버지의 집도의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니시노조 선생으로 누구나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던 수술에 실패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시에는 수술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 늘 100퍼센트 성공할 순 없었을 것이라며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아버지 사후 니시노조 선생과 유키의 어머니가 사실상의 애인 관계로 발전함에 따라 의혹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혹시 니시노조 선생이 어머니를 얻기 위해 일부러 수술에 실패해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닐까?"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들에 가야 뱀을 잡는 법, 유키는 그 의혹을 풀기 위해 니시노조 선생의 지근거리를 맴돌게 된 것이다.

한편 유키가 일하는 병원에는 또 다른 불운한 기운이 감돈다. 전자기기 회사의 엔지니어인 나오이 조지가 병원 간호사에게 접근해 병원의 정보를 빼내가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산업 스파이? 아니었다. 그는 병원이 은폐하고 있는 의료사고 기록을 공개하지 않으면 병원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의 협박장을 보낸다. 아무리 찾아봐도 별다른 의료사고 기록이 없는 병원 측은 난감해하고 결국 경찰에 신고하지만 협박장은 계속되고 중요한 수술이 잡혀 있는 날을 타깃으로 한, 목적을 알 수 없는 조지의 병원 테러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간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이렇듯 유키의 과거에 얽힌 비밀과 현재 조지가 꾸미는 테러가 맞물려 돌아가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메디컬 스릴러다. 언제나 그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구구절절한 해설이 필요없고 짤막한 내용 소개면 충분하다. 워낙 흥미진진한 플롯을 잘 짜기로 이름이 높고, 작품의 핵심 콘셉트 자체가 시쳇말로 독자를 백발백중 낚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들은 아마 대단히 기대가 컸을 것이다. 지난 날의 미스터리한 의료 사고와 현재의 긴박한 테러가 겹친다니, 이거 하나도 아니고 둘이네, 완전히 재미의 혼수상태로 빠져들겠군, 하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에서는 살짝 기대를 접어도 좋을 듯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의 혼수상태를 맛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밀>이나 <게임의 이름은 유괴>같이 뒷 이야기가 전혀 짐작이 안 되는 작가의 페이지터너들에 비해서 이 소설은 너무 빤하다. 마치 처음 시도되는 무슨 인터랙티브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으니까. 내가 상상한 내용 그대로가 페이지에 펼쳐지니 심지어 신기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에 익숙한 독자 혹은 그렇지 못한 누가 읽어도 점쟁이가 방구들에 앉아 천리 밖을 내다보듯 훤히 결말이 내려다 보일 것이다. 화투 패 다 까고 치면 그걸 무슨 재미로 하나. 적어도 미스터리라는 딱지를 붙이고 나온 작품이라면 이보다는 더 치밀했어야 한다고 느낀다. 하다못해 반전이라도 그럴싸한 게 나와주면 좋았을 텐데, 게이고가 요즘 줄기차게 밀고 있는 감동 코드에 대한 집착으로 한 방을 끝까지 기대했던 내 기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의 신파에 가까운 감동으로 제법 재미를 보았을까. 이 작품도 기어이 독자를 울리려 하는 것 같은데, 감동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지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언급한 두 작품이 출중한 미스터리적인 재미에 감동의 요소를 버무려 미스터리 애호가와 보통 독자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미스터리로서는 실패했고,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끝에 가면 모두가 다 착해지는 종잇장같이 얄팍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억지 감동 일변도라 점수를 높게 줄 수 없다. 사실 이 작품에서 조지가 꾸미는 계획이라는 것도 대전제 자체가 말이 안 되고 너무 불안요소가 많아, 이 책을 보고 실제로 같은 계획을 꾸미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을 지경이니까. <백야행>이나 <편지> 같은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관객의 눈시울을 적셔 주머니를 털어내는 말랑한 작가만은 아닌데, 요즘 입금이 잘 되는 모양인지 약간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몇몇 흥미로운 소재를 짜집기해서 철저히 기계적으로 쓴 작품이라 장인의 화려한 솜씨는 느낄 수 있을지언정 깊이 배어나오는 맛이 없다. "그 정도 벌었으면 이제는 좀더 매 작품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셔야죠"하고 작가에게 투정하고 싶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굉장한 다작 작가라 그만큼 범작이나 태작이 나올 확률도 높은 것 같다(당연히 걸작이 나올 확률도). 물론 범작이라도 게이고 특유의 미칠 듯한 '읽히는 맛'은 항상 있고, 이번 작품에서 강조하는 사명이라는 주제에도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지만 가장 아끼는 작가라 부득이 쓴소리를 적는다. 사실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내가 좋아하고 기대하는 게이고의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니라서. 작가의 사명은 역시 언제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전작보다 늘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닐까. 독자에게 또 한 번의 신선한 충격을 전할 수 있는 그의 신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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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7-11-2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평점은 후하게 주셨어요..^^헤헤..
히가시노 게이고는 별로 취향이 아닌지라 소설을 본것이 몇개 없긴 하지만,
딱 그 느낌이었거든요. 먹힐만한 코드 몇개를 적절히 버무려서 내놓은 기계적인 소설같다는 느낌이...많이 보기도 전에 중견작가의 매너리즘이 깊이 느껴진다는..^^;

jedai2000 2007-11-29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별 두 개 반 주고 싶었는데 반 개짜리 별이 없어서요 ^^
워낙 다작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기계적인 소설 느낌이 나는 작품들도 있고, 범작들도 많이 양산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큰 야심없이 내가 재미있는 얘기 들려줄 테니 한번 들어보라구, 하는 그런 썰 잘 푸는 친구 같은 느낌인데 먼 훗날 문학적인 평가는 받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독자들 기호를 가장 잘 꿰고 있는 대중작가로서 분명히 인정받을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래서 기대에 못 미친 이번 작품은 좀 씹었구요, 대부분의 작품은 옹호합니다. 애플님께서도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비밀> <백야행> <편지> <붉은 손가락> 같은 작품들을 보시면 평가가 약간 후해지실 것 같긴 한데 ^^

Apple 2007-11-2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비밀과 편지는 보았는데, 게임의 이름은 유괴는 관심이 좀 갔었는데 그걸 봐야겠군요..^^

jedai2000 2007-11-29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임의 이름은 유괴> 잼있죠 ^^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읽으시면서 뭘 얻겠다, 이런 자세가 아니라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로 봐야 가장 재미있습니다. 심심할 떄 가볍게 읽어보세요. 꽤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
 
얼론
리사 가드너 지음, 박태선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미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 경우에는 할리우드다. 영화 산업은 20세기 초반부터 미국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세계 만방에 미국과 미국인의 (조작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어찌 보면 미국의 근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한 편 만드는데 1천억씩 쓰는 나라가 미국 외에 어디가 또 있겠는가. 이렇게 영화가 발달한 나라다 보니 미국의 대중소설가들은 대부분 애초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거나, 혹은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봐왔던 영화의 영향을 무의식 중에 받아 글을 쓰는 것 같다. 스릴러 작가들에게 이런 경향은 연쇄살인범을 등장시켜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육을 저지르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 <양들의 침묵>의 토머스 해리스 이후에 더욱 심화된 듯하다. 인육을 먹고 시체 입에 나비 유충을 넣어두는 등의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라 영화화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던 것이다.

 

토머스 해리스 이후에 등장한 베스트셀러 스릴러 작가들, 제임스 패터슨이나 조지프 파인더, 할란 코벤 등의 작품은 별다른 각색도 필요없을 정도로 영화적이다. 작가들로서는 책의 판매 이외에도 천문학적인 영화화 판권 수익이라는 가욋돈을 노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얼론>의 리사 가드너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예 영화화하기 용이하게끔 눈을 사로잡는 박력 있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아내와 아들을 학대하는 폭력 남편이 권총을 들고 두 사람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아내 캐서린은 남편의 눈을 피해 경찰에 신고하고, 신고를 받은 보스턴 경찰국의 저격수 바비가 출동해 맞은편 건물에서 남편을 노린다. 바비는 아직까지 실제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은 전무한 상태로 되도록이면 피를 보지 않고 끝났으면 싶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발광이 심해져 권총을 아내의 머리에 똑바로 겨누자 바비는 결국 방아쇠를 당긴다. 폭죽처럼 터져버리는 남편의 머리.

 

아무리 공무수행이라지만 살인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바비는 내사를 받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보통 세력가 가문이 아니었다. 남편의 아버지인 저명한 가뇽 판사는 아들이 아니라 캐서린, 즉 며느리가 손자를 학대한 것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남편을 죽이기 위해 살살 약을 올려 결국 그의 폭발을 유도한 것이고, 신고를 한 이유도 경찰국의 저격수가 출동해 남편을 대신 죽여줄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바비는 혼란에 빠진다. 나는 명예로운 경찰 저격수로서 한 여자와 아이를 구한 것인가, 아니면 사악한 여인의 계략에 휘말려 살인의 도구로 전락한 것인가. 이 도입부는 정말로 굉장하다. 시종일관 빠른 템포에 강렬한 긴장감과 도덕적인 망설임을 곁들여 바비의 혼란스런 심리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가뇽 판사는 바비를 살인죄로 고소하고, 손자의 양육권을 요구한다. 서로 엇갈리는 가뇽 판사와 캐서린의 모호한 주장들은 각각 설득력이 있어 누구의 말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예컨대 판사는 며느리가 손자의 밥을 제대로 주지 않고, 손자의 배변을 냉장고에 담아두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고 지적하지만, 캐서린은 아들이 희귀병을 앓고 있어 음식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아들의 상태를 매일 체크하기 위해 배변을 보관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더구나 바비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캐서린의 매력에 흠뻑 빠짐으로써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캐서린은 초등학교 때 유괴와 감금, 성폭행을 당한 희생자로서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악몽을 꾸고 있었기에 바비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던 것이다.

 

스릴과 서스펜스, 속도감, 반전까지 구색은 다 갖췄다. 적어도 마지막 50페이지 전까지는 최고의 페이지터너로 부족함이 없고 한 편의 잘 빠진 할리우드 스릴러를 보는 듯한 완성도가 출중하다. 그러나 리사 가드너가 뒤로 갈수록 익숙한 할리우드식 스릴러의 클리쉐들을 반복하면서 몰입감이 떨어지고 말았다. 캐서린을 유괴했던 사이코가 출감하면서 다시 그녀를 노린다는 설정은 사이코 연쇄살인마와 주인공들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전형적인 스릴러 공식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데 그칠 따름이고, 반전조차도 너무 진부해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결말에서 왜 가뇽 판사가 그토록 손자의 양육권을 원했는지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만은 기발하고 전체적인 내용과도 잘 어우러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외에는 전부 안이하게 끝맺었다. 이 정도 이야기를 짜낼 수 있는 작가가 왜 더 도전적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이런 전형성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독자라면 평가가 후해질 여지는 있다. 문장력이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출중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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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1-0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그럽게 봐줬습니다^^

Apple 2007-11-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거 보려고 노리고 있었는데,살짝 아쉬운 작품이었군요..으음...

jedai2000 2007-11-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항상 너그러우신 물만두님 멋져요 ^^

애플시즈님...솔직히 재미있게는 봤는데 마무리가 영 평범해서 걸리네요. ^^ 그래도 한번 읽어보세요.

2007-11-16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11-1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디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