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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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침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 출간되었다. 1989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현재까지 일본 추리소설 사상 최고 걸작 중 한 편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199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뽑은 과거 10년간 베스트 1위, 1988-2008 베스트 오브 베스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는 2위(1위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도쿄 쇼겐샤 선정 본격 추리소설 100선에서도 당당 1위를 기록, 타이틀 만으로는 국가대표급 추리소설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의 출간에 약간 관여한 바가 있어, 과연 어떠한 작품일까 엄청 큰 기대를 하며 읽었다. 670쪽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라 며칠 시간은 걸렸지만, 다행히 만족스런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고 명성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기분 좋은 결론을 내렸다.

 

무대는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 마을이다. 일본 작가가 쓴 작품이지만 주인공이자 탐정역, 그리고 시체역을 맡은 그린이 일본인 혼혈아일 뿐 등장인물은 전원 미국인.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한 '툼스빌' 마을의 스마일 공동묘지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거대 공동묘지의 소유주이자 대를 이은 장의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발리콘 가문의 수장 스마일리는 병에 걸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두 번의 결혼으로 얻은 자식들은 모두 여섯 명. 이들 중 사고나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사망한 자식들을 제외하면 유산의 상속권자는 총 다섯 명이고, 스마일리 발리콘의 손자인 펑크족 청년 그린에게도 권리가 있다. 이제 추리소설의 필수 공식 중 하나인 유산을 둘러싼 반목과 유언장 공개 등이 수순대로 일어나는데, 홍차를 마시는 다과회 자리에서 스마일리는 자신에게 선물로 들어온 초콜릿을 먹기 싫다며 그린에게 준다. 자기 방에 누워 빈둥대다 초콜릿을 먹은 그린은 아뿔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초콜릿에 맹독인 비소가 들어 있던 것이다!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야기가 끝이 나나? 생각하겠지만 남은 페이지는 아직도 500쪽.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고 분개하지 마시라. 본인이 한 가지 중요한 설명을 빠뜨렸으니까.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 나온 대로, 최근 미국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는 기이한 일들이 연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은 미국 사회를 충격에 던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부활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등장인물 중 하나인 사학(死學) 전문가 허스 박사의 입을 통해 다양한 가설이 소개되긴 하지만 누구도 진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린을 보면 알 수 있듯 분명 호흡도, 맥박도, 땀도 흘리지 않는 시체가 되살아나는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린은 젊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된 억울함과 분노를 풀기 위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려 한다. 일체의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피나 살이 곧 썩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는 혈액을 방부제로 교체하고, 변색되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 '시체'라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고 탐정 활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발리콘 일족들에게 제2, 제3의 죽음이 연속되면서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마냥 모든 진실은 아리송해질 따름이다.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라는 제목 자체가 통째로 아이러니다. 시체가 살아 있다니, 거기다 그 살아 있는 시체가 또 죽다니 하고 의아해지는 게 당연한 제목이지만 책을 다 읽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일종의 좀비가 나오는 소설이라 혹시 호러소설이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추리소설, 그것도 독자와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아귀가 딱딱 맞는 논리로 충만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비록 비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기묘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반칙은 없다. 세세한 설정 하나까지 전부 사전에 설명되고, 도처에 복선이 가득해 반드시 꼼꼼이 읽어야 한다. 끝까지 읽고, '작가에게 당했다!'는 말은 나올지언정 결코 '작가에게 속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맨 나중에 '살아 있는 시체'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범행 현장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있다는 게 밝혀지거나 하는 식이 절대 아니다. 주인공 그린이 '살아 있는 시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린의 경우를 통해 '살아 있는 시체'의 능력이나 심정, 행동 원리 등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다. 작가가 손에 쥔 카드를 완전히 공개하는 셈인데, 여기 어디에 반칙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규칙만 확실하고 공정하게 지정해주면 가령 절대 죽지 않는 그리스 신들의 살신(殺神) 사건 같은 것도 충분히 추리소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량의 압박이 제법 있지만, 넘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이나 언어유희, 재기 넘치는 그린과 여주인공 체셔의 대거리 등의 유머가 풍부해 지루하지 않고 술술 잘도 넘어간다. 본격 추리소설답게 탐정이 모든 용의자들을 모아놓고 '폭로쇼'를 벌이는 장면도 두 번이나 나온다(민완경감이 탐정이 되어 진행한 첫 번째 폭로쇼는 대참패로 끝나지만).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결말도 너 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현실에 치중하는 영미권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진행하는 작품이 많은 현재 일본 추리소설의 개성을 확립한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특히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역시 교고쿠의 작품들처럼 분량도 제법 되고, 개성 강한 등장인물이 나오며, 은근한 유머는 물론 사학, 미국식 장례식, 엠바밍 등의 잡지식으로 넘쳐나는 걸 보고 그리 생각해보았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나라에 소개된 타이밍이 조금 늦은 감이 있어, 오히려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할 후배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만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1989년작이라는 출간 시기를 감안해보면 작품의 크리에이티브가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해한 '매직'을 철저한 '로직'으로 풀어내는 본격 추리소설의 명편,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의 한 경향을 만든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의 진면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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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1-2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요? 몰랐네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jedai2000 2009-11-2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그냥 제 생각일 뿐이예요ㅠ.ㅠ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는데,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것 같아요^^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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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작년 일본 문단 최고의 화제작이라 불릴 만한 소설이다. 2009년 5월에 일본 현지에서 출간되어 수백만 부가 팔려나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 우리나라에 3개월만에 번역 출간되어 현재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우리나라와 일본의 출간 시차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고백> 역시 우리말로 소개되기까지 딱 1년 정도가 걸린 셈이라 우리 독자들은 미나토 가나에가 대체 어떤 책을 썼기에 일본 열도를 그토록 진동시켰는가를 비교적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백>은 2008년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아마존 재팬 상반기 소설부문 2위, <소설 추리> 신인상, 무엇보다 서점직원들이 직접 가장 팔고 싶은 책을 뽑는 2009년 일본 서점대상에도 1위로 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밀리언셀러에 조금 못 미치는 판매고를 올린 걸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비평계뿐 아니라 독자들의 눈도장까지 확실하게 찍었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니 앞으로 연거푸 몇 작품이 미끄러지지 않는 이상 성공의 탄탄대로에 오른 행복한 작가라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지금은 출판사에 다니지 않지만 몇 년 일을 한 덕에 편집자 지인이 제법 있다. 덕분에 아직 서점에도 완전히 깔리지 않은 <고백>을 우연히 남들보다 빨리 받아들 수 있게 되었는데, 가뭄에 콩나듯 이런 호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출판계에 몸담았던 거의 유일한 장점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대단한 화제작이라는 걸 작년부터 알고 있었기에 출판사에 다닐 때 판권을 사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윗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해 계약을 하지는 못했고 나오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만 하며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아는 분이 다니는 출판사에서 판권 계약을 해 이렇게 멋진 책으로 만들어주었으니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이 책이 그렇게 내가 계약을 따내고 싶어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을까, 만약 내가 이 책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등등 책을 읽기 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당시 시각은 새벽 0시 30분. 늦었으니 조금만 읽다 자야지 생각하고 몇 장을 넘겼는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새벽 3시 15분. 조금의 딴 생각이라든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든가 하는 일체의 딴 짓을 할 수 없었다. 경악, 또 경악. 대단한 몰입감이었다.



<고백>의 도입부는 어느 중학교 1학년 여교사가 학년이 끝나는 종업실 날 반 아이들에게 1년간의 소회를 담담히 털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교사가 이제 7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술렁거린다. 이유를 알고보니 몇 달 전 그녀의 아이가 사고로 죽었기 때문. 싱글맘인 여교사는 매주 교무회의가 있어 늦게 끝나는 수요일에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미리 데려와 양호실에서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나 사고가 생긴 그날, 아이는 양호실을 빠져나와 학교 수영장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실수로 발을 디뎌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려나 보다, 하고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 여교사는 충격적인 말을 던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직하는가? 딸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대체 이날 무슨 일이 생겼길래, 하며 홀린 듯이 책장을 넘겼다. 그래서 마침내 드러난 이날의 비밀도 충격적이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법으로 만족할 만큼 처벌하기 힘든 소년범들에게 여교사가 개인적으로 감행한 복수의 진상이 드러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웠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먹은 것이 일시에 올라오는 기분이랄까(이 책을 읽어보면 내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그야말로 진짜 '올라온다').



여기까지가 <고백>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던 단편 '성직자'의 내용이다. 사실 <고백>은 이 '성직자' 편에 다섯 개의 뒷이야기를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든 소설이다. 원래 단편으로 썼던 내용을 장편으로 클로즈업했다고 할까. 각 장의 제목은 1장 '성직자', 2장 '순교자, 3장 '자애자', 4장 '구도자', 5장 '신봉자', 6장 '전도자'로 되어 있으며, 20페이지 남짓한 6장을 제외하고 모두 50페이지 내외라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어떤 두꺼운 책도 주기 힘든 강렬함이 있다. 각 장마다 1장에 등장했던 여교사뿐 아니라 범인A와 범인B,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같은 반 소녀 등 사건과 관계된 등장인물 개개인의 고백 형식으로 이뤄져 있어 누군가의 충격적인 비밀을 몰래 엿듣는 듯한 몰입감이 훌륭하며 형식적으로도 통일성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단순히 재미로도 빼어나지만 <고백>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만 14세 이하의 소년범 문제, 범죄 가해자의 인권에만 신경 써 정작 피해자의 인권은 실종되는 씁쓸한 상황,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심판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 문제인가 하는 등 여러 가지 주제의식도 아울러 담고 있어 독서를 마치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고교 교사 경력이 있다는데, 그 경험을 살려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제자 간의 참혹한 복수극을 다룬 이 책을 현실감 넘치게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잘한 복선 하나조차도 나중에 끔찍한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니 모든 장면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라. 데뷔작부터 미야베 미유키의 스토리텔링과 기리노 나쓰오의 강렬함을 아울러 선 보인 필력을 봤을 때 앞날이 유망한 작가라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 1장 '성직자'가 원점이 된 소설이니만큼 1장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지만 소설 전체의 결말이 드러나는 6장 또한 끔찍하리만큼 충격적이다. 물론 소설 전체적으로도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나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낱말이 충격, 경악, 끔찍 등인데 아마 앞으로 읽을 누구나가 다 동의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에게 비정한 제재를 가하는 교사가 나오는 소설이라 도덕적인 면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좋아할 사람만큼 혐오하게 될 사람도 분명히 나오리라 본다. 그러나 이 책을 좋아하게 될 독자든 반대로 거품을 물고 씹을 독자든, 내가 한 가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건 누구든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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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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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읽는 사립탐정 소설이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 출신의 엘비스 콜은 파트너 조 파이크와 함께 LA에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반해 이름을 엘비스로 개명시켰다는 재미난 일화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농담을 일삼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베트남 전 때 만난 조 파이크는 과묵하고 악당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병기다. 이렇게 성격은 달라도 두 사람은 큰 공통점이 있으니 둘다 정의감이 무척 강하다는 것, 그리고 약한 자의 슬픔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엘비스는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달라는 엘런의 의뢰를 받아들이는데, 할리우드 에이전트였던 엘런 남편의 실종을 조사하면 할수록 이 사건이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읽는 동안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리쎌 웨폰>이 떠올랐다. 마침 <리쎌 웨폰>과 이 책이 발표된 시기도 1987년으로 동일하다. 물론 누가 누구를 표절했다는 건 아니고, 몇 가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두 작품 다 LA 배경에, 주인공은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고, 그에 따라 강렬한 액션 씬이 연속되며, 서로 이질적인 성향의 두 파트너가 점차 가까워지는 걸 묘사하는 일종의 버디 액션 장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의 사립탐정 소설에서는 유독 무지막지한 파트너가 자주 등장하는 듯하다. 로버트 파커가 창조한 스펜서와 호크, 할란 코벤의 마이런 볼리타와 윈,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부바 등이 언뜻 떠오르는데, 전부 후자의 인물들이 무시무시한 액션 히어로들이다. 이렇게 모든 게 다른 두 명의 파트너를 작가들이 자주 한 팀으로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각각 개성과 가치관은 달라도 정의 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단결해, 사악한 적들을 물리치고 더욱 끈끈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파트너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걸 독자들이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책없이 두꺼운 요즘 스릴러들에 비해 370페이지로 깔끔한 분량이다. 엘비스는 끊임없이 배꼽 빠지는 농담을 날리지만, 분량도 그렇고 사건의 구조가 비교적 단선적이라 머리 쓸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작가 로버트 크레이스는 사건의 핵심에 이르러서 마침내 나타나는 지하 세계의 거물 대 엘비스 콜-조 파이크의 정면대결에 소설의 모든 힘을 집중시킨 느낌이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했던 것처럼 얼굴에 온통 붉은 칠을 하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적 아지트를 기습하는 결말의 박력은 정말이지 원초적인 쾌감이 넘친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여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베트남의 정글과 네온으로 번쩍이는 할리우드의 거리는 그 모양부터가 전혀 다르지만, 돈과 마약, 환락으로 미쳐 돌아가는 LA도 베트남의 정글과 비교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액션이 한층 강화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는 느낌, 혹은 기가 막힌 농담들이 추가된 로버트 파커의 스펜서 시리즈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수표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던 전업주부 엘런이 가정에 닥친 비극 앞에 점점 강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 마지막에 엘런이 결혼생활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님이 확인되는 장면 또한 무척 상쾌하다. 작가는 엘비스 콜 시리즈를 현재까지 총9편 썼고, 파트너 조 파이크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는 스핀오프 시리즈도 쓰고 있다는데 개인적으로 터프가이 조 파이크 시리즈도 꼭 읽어보고 싶다. 내 생각에는 미 육군 출신의 고독한 늑대 잭 리처가 등장하는 리 차일드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날 것 같다(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도  담배나 마약보다 강한 중독성을 자랑한다). 재치 있고 여자도 잘 낚는 재간둥이 엘비스 콜과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조 파이크를 만나보게 되어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헤이, 탐정들. 한국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자주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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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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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전부 16권이나 되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가 출간된 미국에서 이런 광고가 새로 나왔다면 분명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단 2권만이 어렵사리 소개된 우리나라에서는 이 외침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게 못내 섭섭하다. 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시리즈를 모두 즐길 수 없다니, 지금껏 세상에 선 보였던 어떤 탐정보다 매력적인 매트 스커더의 인생역정을 처음부터 따라갈 수 없다니 이것이이야말로 진짜 비극이지 싶다.

 

뭐 미국만큼은 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높이 평가했던 바로 그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하지만 전에 출간됐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1982년작으로 1992년에 발표된 본작 <무덤으로 향하다>와 무려 10년의 간극이 있는 건 안타깝다. 두 작품 사이에 출간된 총 네 편에서 매트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무슨 변화를 겪는지는 그저 독자들이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래전에 고려원에서 미국에서 <무덤으로 향하다>의 1년 전에 출간됐던 <백정들의 미사>가 나온 적은 있다. <백정들의 미사>는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단 두 문장으로 이뤄진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스피치를 선 보인 바 있는 매트는 알콜 중독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허름한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무면허 사립탐정이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해 번민하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술을 완전히 끊고(물론 사건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 술병을 잡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만), 엘레인이라는 여인과 사귀고 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에 완전히 절망했던 염세주의자 매트가 점차 세상과 화해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트가 부녀자를 납치한 뒤 잔인하게 강간살해하는 유괴범과 대결하는 <무덤으로 향하다>의 또 하나의 기둥 줄거리는 창녀일을 하고 있는 엘레인과의 로맨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창녀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한번 결혼에 실패한 매트는 어쩐지 그녀를 완전히 책임지기가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번잡한 구속을 하지 않는 지금의 관계가 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점차 엘레인의 손님들이 신경 쓰이고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매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잡아! 속으로 10번도 더 외친 듯. 독자들의 생각보다 두 배쯤 아름다운 로맨스의 결과는 직접 확인하시길.

 

1966년에 데뷔해 수십 편의 장편 추리소설을 남긴 이 장르의 대가 중의 대가 로렌스 블록. 그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늘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창의성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1982년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을 보면 살해된 어느 흑인 창녀의 사건을 수사하는 매트의 이야기와 로스 맥도널드, 로버트 파커 류의 하드보일드 소설과 특별한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덤으로 향하다>에 와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건> 같은 작품들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사이코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백정들의 미사>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악당들과 대결하기도 하는 등 다루고 있는 범죄의 양상이 매번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 작가로서 한번 확립된 시리즈의 안정된 공식을 마다하고 매번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며 항상 사회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의 눈을 거두지 않는 로렌스 블록이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그랜드 마스터 반열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멈추지 않는 창의성을 증명하는 또 한 가지 예는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재기발랄한 유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바니 로덴바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는 사실. 낮에는 끝간 데 없이 어두운 탐정 매트의 이야기를 쓰고, 밤에는 방방 뛰는 도둑 바니의 이야기를 쓰는 셈이니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난 건지...

 

그밖에 꼭 말해두고 싶은 건 로렌스 블록의 대사 쓰는 실력이다. 흔히 미국식 대화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에드 맥베인에 비해 전혀 꿀리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넘실대는 미국식 유머와 간결하면서도 통렬한 메시지를 간직한 대사들은 특히 한없이 늘어지기 일쑤인 지루한 대사를 양산하는 얼치기 작가들이 꼭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닐까. '작가들의 작가'라는 세평을 듣는 거장답게 한 수 제대로 배운 느낌이다. 공들여 구상한 플롯을 A-B-C...순서대로 진행시키는 데만 여념이 없는 작가 지망생들에 비하면 매트는 여유가 있다. 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미술관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매트. 그러다 단서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사건은 실타래가 풀리듯 순식간에 진행된다. 느긋한 여유와 빠른 페이스를 교차시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완급 조절에 감탄을 넘어 감동하고 말았다.

 

담배는 어떤 걸 피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모든 게 궁금해지는 매트 스커더는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느리지만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필립 말로나 루 아처의 계보를 잇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설 속 인물이다. 이 개성 넘치는 매트 스커더 시리즈를 창조한 로렌스 블록 역시 루스 렌들이나 PD 제임스 급의 현존하는 세계 최고 거장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영광일 정도의 작가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근사한 두 남자의 조합을 놓쳐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방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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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ㅜ.ㅜ
언제 쌓아놓고 차례대로 볼 수 있을까요...

jedai2000 2009-05-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리즈 하나만 선택해서 국내에 다 낼 수 있다면 매트 스커더를 고르고 싶네요...쓰고 보니 잭 리처 시리즈도 탐나네요 -_-;;;

앨런 2009-05-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렇게 감질나게 하지 말구, 시리즈로 촥촥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jedai2000 2009-05-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런님...저도 소원입니다만 과연 쉽게 이뤄질지 모르겠네요 ㅠ.ㅠ
 
고모라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7
로베르토 사비아노 지음, 박중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바로 지난 3월 2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마피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참가 인원이 무려 15만 명. 좁은 도시에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썩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폭력 조직이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웬 오버? 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충격적인 르포소설 <고모라>를 보게 된다면 그런 안이한 감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깊이 깨닫고 말 것이다. 실제 나폴리 토박이인 사비아노는 나폴리의 마피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부를 축적하고, 살인과 테러로 어떻게 나폴리를 공포의 생지옥으로 물들이고 있는가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했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강렬한 분노와 예리한 분석, 뛰어난 문학성이 어우러진 <고모라>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책 중 가장 읽어볼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탈리아의 범죄 조직 하면 흔히 마피아를 떠올린다. 사실 마피아는 코사 노스트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시칠리아 본토의 범죄 조직만을 가리키며, 190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주한 시칠리안 갱들의 활약(?)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조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아메리칸 마피아 신디케이트를 만든 전설적인 뉴욕의 찰스 '럭키' 루치아노, 시카고의 알 카포네 같은 보스들의 이름은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았을 듯. 이렇듯 미국의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을 통칭해 보통 마피아라 부르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마피아) 말고도 다양한 범죄 조직이 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 풀리아 지방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그리고 나폴리의 카모라가 이탈리아의 4대 범죄 세력이다. 아직도 코사 노스트라는 가입식 때 성모 마리아 그림에 피를 묻힌 다음 불태우는 전통 의식을 행하지만 전통과 형식, 위계를 그닥 중시하지 않는 카모라는 낡은 의식 따윈 생략이다. 철저히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카모라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900명에 달하는 일종의 '범죄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책 못지않게 영화도 좋아하는 나를 늘 개봉과 동시에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으니 그건 갱이 나오는 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영화 중 하나도 프란시스 코폴라가 미국으로 이주한 마피아 일족의 삶을 바로크적인 장중함으로 그려낸 <대부>며, 아메리칸 갱들의 흥망성쇠를 리얼하게 담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늙은 갱이 결국 과거로부터 찾아온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꿈이 이뤄지기 직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 같은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았다. <벅시>, <카지노>, <스카페이스>, <도니 브래스코>, 심지어 홍콩의 변종 갱 영화들인 <영웅본색>, <열혈남아>, <천장지구>, <고흑자> <무간도>,  갱이 토착화된 발음인 우리나라의 깡패를 그린 <게임의 법칙>, <비열한 거리>, <우아한 세계>까지 갱이 없으면 누굴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들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영화들이 폭력 조직을 그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갱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비밀스런 판타지가 충족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영화들에서 갱 우두머리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법이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도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비록 불법이라지만 돈은 썩어넘칠 정도로 흘러 들어오고, 미모의 애인도 여러 명,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버튼만 누르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이런 게 바로 남성 판타지의 정수가 아닐까. 우리는 설레이는 꿈으로 가득차 사회 생활을 시작하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고 배우는 거라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하게 명령에 따라야 할 때, 괴로워도 슬퍼도 참아야만 할 때 내게도 힘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라. 마피아를 비롯한 폭력 조직이 검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니까.

 

사비아노에 따르면 마피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나 권력에 굴복하고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얻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 그 마음에 기생해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돈과 힘으로 어떻게든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고, 경쟁자는 골통을 날려버려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아름다운 나폴리에 카모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카모라의 물리적인 폭력보다 나도 카모라의 힘에 호소해 정점에 서고 싶다는 나폴리 사람들의 비뚤어진 사고방식 자체가 카모라라는 병근을 제거하는 치료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구의 44퍼센트가 카모라와 관련된 나폴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돈과 권력에 미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는 전 세계의 어디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비아노의 근원적인 문제 제기로 역시나 금권주의로 인한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고민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모라의 주 수입원은 너무도 다양하다. 재봉사들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몰아놓고 명품 의류를 싼 가격에 공급해 폭리를 취하는가 하면,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자체다. 유통업과 건설, 쓰레기와 폐기물 처리 사업까지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카모라의 연간 수입은 수십 억 유로로 원화로는 수 조 단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사비아노는 스크래치라는 아주 재미난 표현을 통해 해답을 준다. 마약 등의 불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법적인 곳에 투자하다 자금난 등이 생기면 치기직칙, 레코드 판으로 스크래치를 하듯 잠시 사업을 멈추고 다시 불법 행위로 돈을 끌어들인 다음 치기직칙, 다시 스크래치를 걸고는 합법적인 사업에 재투자. 이 합법과 불법의 스크래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막대한 돈이 쌓이는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카모라의 암약에 강렬한 적개심을 보이는 사비아노의 한 마디, 한 문장을 읽으며 마치 애미넴 같은 래퍼가 떠올랐다. 끝없는 분노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의 용기 있는 외침은 마치 성서의 죄악으로 가득찬 타락의 도시 '고모라'의 유일한 선지자 '롯'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어느 시대나 의인은 어려움이 많은 법인지 과연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카모라 보스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로부터 엄중 경호를 받고 있다는데,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그가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건설업자들, 은행과 요트의 소유주들, 가십의 왕자들, 창녀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숨긴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수입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히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헌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사의 부가 무엇인지를 안다. 모든 기둥마다 다른 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결코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__'시멘트' 장에서 

 

카모라는 어느 보스의 카리스마나 지도력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너무도 공고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이 없어도 곧바로 대체자 한 명이 들어오고 그동안처럼 별다른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카모리스타(카모라 조직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국 폭력과 범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경찰에 잡힐 수밖에 없다. 산더미 같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하며,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결국 자기도 언제든 나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을 우려가 있으므로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야 한다. 돈과 힘이 제아무리 많아도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바로 카모리스타의 인생일 뿐이다. 한국판 카모라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일부 철없는 범죄 조직 지망생들은 사비아노의 이 통찰을 명심하기 바란다.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 1979년생 젊은 작가로 누구나 겁내는 카모라에 문학으로 맞서는 대단한 사나이다.>

 

 

 <사비아노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고모라'.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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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1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모라에 대해 나온 거 봤는데 정말 대부는 심각한 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9-04-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피아에게 로맨틱한 요소는 있을 래야 있을 수가 없죠. 영화가 꼭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은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