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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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꽃밥]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신작이라 큰 기대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작가는 [꽃밥]으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호러소설 작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막상 작품을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괴이하고 신비한 이야기 혹은 약간 소름끼치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의 오랜 기담, 괴담 문학 전통의 계승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제법 아니 꽤 잘 쓰는 작가다. 다소 노골적인 제목, [새빨간 사랑]을 달고 나온 이 단편집은 버려진 마론 인형처럼 처연한 느낌을 주는 금발머리 소녀가 표지를 장식한다. 과연 이 소녀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는 투병 중인 동생이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절망하는 언니가 주인공이다. 이제 갓 스물인데 한 순간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동생의 운명에 슬퍼하는 언니를 보다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묘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죽은 사람을 예쁘게 장식한 다음 사진 속에 담아 내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추억하게끔 한다는 장의사가 있단다. 언니는 결국 장의사와 연락해 동생이 결코 입어볼 수 없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동생을 잘 돌봐주던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그 장의사와 관계된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대개 아시겠지만 이쪽 장르, 은근히 교훈적이다. 청춘 난도질 호러 영화가 난잡한 성관계를 즐기는 10대들이 주로 당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포 영화의 피해자는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이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의 교훈은 망자는 기억 속에 아름답게 묻어야지 너무 과도한 애도의 표현은 좋지 않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가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유령소녀 주리>는 제목에 상당한 스포일러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학교도 가끔 가는 한 소녀가 있다. 엄마의 푸념에 견디다 못해 모처럼 학교를 나가는데, 이게 웬 일 학생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네. 알고보니 그녀는 진짜 유령소녀였다. 누군가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뭐든지 귀찮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이 그립기만 할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지만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기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순간의 절망감은 너무 아프게 느껴져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단편을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 있어야 남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단편에도 교훈이 있는걸.

 

<레이니 엘렌>은 미스터리 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를 그린다. 대기업을 다니는 미모의 여사원이 밤에는 매춘을 일삼다 피살되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 일단 기리노 나쓰오가 그토록 멋지게 요리해낸 소재를 또 한 번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어차피 장르가 완전히 다르니까 부담은 약간 적었을 것이다. 러브호텔 밀집지역에서 채팅으로 만난 두 중년남녀, 싸구려 잠자리를 준비중이다. 남자는 대학교 때 만나 짝사랑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를 회상한다. 그 여자친구와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그후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모의 커리어우먼이자 매춘부가 된 여자친구는 결국 밤거리를 떠돌다 목 졸려 살해되고 말았다. <레이니 엘렌>에서는 러브호텔 거리를 가득 메운 풍선을 통해, 이 도시를 부유하는 정체불명의 욕망을 그린다.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바로 그 욕망을.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마치 에도가와 람포를 연상케 하는 이상성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인데, 화자인 젊은 여성이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간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녹음해 보내면서 그녀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이단 종교에 매몰된 가족을 둔 그녀의 최대 고민은 원인 모를 도벽이다. 어떻게도 참을 수 없는 이 도벽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도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팔면서 생활한다. 매춘 생활 중 만난 남자는 유달리 신사적이고 성품이 훌륭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요구를 하는데...끈적끈적한 분위기와 기묘한 인간군상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성욕을 그려 독자를 훌륭하게 빨아들인다.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는 소품이다. 초등학생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젊은 남자와 알게 된다. 그의 집에는 지구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어떤 것이 살고 있는데, 그 생물(?)을 키우는 데는 품이 무척 많이 든다. 이 작가는 [꽃밥]에서 '요정생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집착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지은 바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그 생물(?)에 홀려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짤막하게 수록작을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전부 되어 있고, 내용도 다 재미있어 금세 읽힌다. [꽃밥]과 비슷하게 공포와 사랑, 에로틱한 정서, 욕망 등의 내밀한 인간 본성을 그리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꽃밥]의 이야기들은 전부 유년시절의 풍경을 담아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좋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성인들이 주인공인 [새빨간 사랑]은 그만큼 노골적이라 약간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정은 [꽃밥]이 위다. 하지만 둘 다 재미있다.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슈카와 미나토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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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을 읽어야겠군요. 그나저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는 정말 님 말씀처럼 작가의 배짱인것같네요^^

jedai2000 2007-05-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이 더 좋습니다. <그로테스크>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당시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긴 했나 봐요 ^^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나가시마 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나가시마 유의 2005년도 작품으로 두 개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데도 200쪽 남짓한 페이지도 부담이 없고, 또 너무 미스터리에만 편향된 독서를 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잡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표제작인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무쓰미라는 한 평범한 직장 여성이 직장 동료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가 마음속에 자리잡지만 결국 바라만 보다 끝나는 짝사랑 이야기인데 커다란 드라마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들이 영화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 결국 인연으로 맺어지는 드라마틱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그냥 미소지을 때 어쩐지 쓸쓸함이 감도는 옆얼굴이 마음에 들더라, 하는 식의 소박한 이유가 대다수다.

 

이 작품에서 무쓰미가 남자 동료에게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순간은 그가 노래방에서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노래 자체도 무난한 히트곡이 아니고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노래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라고 해석될 그 제목을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사실 남자가 무식해서 제목을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런 무난한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왜 이 남자는 그렇게 해석한 것일까, 혼자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설레여 한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슨 뜻일까 하며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괜히 흐뭇해지고 때로 쓸쓸해하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쓰미의 내밀한 심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절망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관찰할 뿐인데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무쓰미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자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에피소드처럼 내일이면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속으로만 삭이는 무쓰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현대의 직장 여성으로서 출퇴근 시간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무쓰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단상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자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뱀처럼 긴 줄을 이루며 출근하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기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앞뒤로 서서 행렬을 이룬다.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실상은 단절되어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출근길에 땅바닥에 덮여 있는 나무판자를 누군가 물이 튀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두었다는 걸 깨닫고 감동받는 무쓰미. 역시 우리는 선의로 이어져 있어, 라고 기뻐하지만 그 감격을 이야기할 상대는 출근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없다. 결국 혼자인 것이다. 아마 나를 비롯해 이 에피소드에 공감할 독자들이 무척 많을 거라 믿는다.

 

'센스없음'은 표제작보다 더 인상적이고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걸 발견한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빌려놓은 성인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가 쌓이는 걸 알고는 비디오를 갖다주러 대여점이 있는 역까지 걷는다. 남편이 그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눈내린 거리를 사진에 담으며 그저 걷는다. 결국 파국으로 끝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느껴지는 환멸감과 곧 헤어질 거면서 남편의 성인비디오를 갖다주기 위해 걷는 상황의 묘함,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예전 학창시절의 달콤씁쓸한 기억까지 여자의 혼돈스런 사고가 내내 이어진다. 역시 끝까지 큰 사건은 없고 그저 걸을 뿐인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인데도 여운이 굉장히 크고 깊다. 나가시마 유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지만 담백한 심리 묘사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마음을 적시는 여운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재미로 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풍의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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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반가운 작가의 반가운 작품입니다. 이미 국내에 [사라진 이틀]과 [클라이머즈 하이]가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스터리 연작 단편집으로 미스터리 팬이라면 아주 반색을 할 만한 작품이라고 보증합니다. 사실 요코야마 히데오가 일본에서의 명성이나 판매에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많이 평가절하된 게 사실인데, 앞서 나온 두 작품이 미스터리보다는 '감동'에 무게가 실린 작품이고, 또 중반부까지의 놀라운 재미에 비해 결말이 좀 급작스럽고 서둘러 감동 한 마당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어 시작부터 결말까지 완벽하게 뛰어난 작품만을 사랑하는 한국 독자들의 한뼘 높은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한 경향도 있긴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진 작품'에서 '앞부부만 완벽한 작품'. '끝이 좋으면 다 좋은 작품', '끝은 아쉽지만 정말 재미있는 작품'까지 전부 좋아하는 제게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남아 있지만 말예요. 결말이 좀 아쉽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비할 데 없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결말만 약간 시시하다고 "쓰레기네, 형편없네" 하고 말아버린다면 끝까지 책을 읽느라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 비참해질 테니까요.

 

[종신검시관]을 읽고 든 생각은 어쩌면 요코야마 히데오는 단편에 더 맞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것과 한국에서는 오히려 그의 단편이 더 먹히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편에서 거대한 이야기를 주체 못해 다소 작위적인 감동으로 맺는 것보다, 짧지만 집중력 있는 이야기를 스트레이트하게 펼쳐 보이며 완벽하게 마무리짓는 단편들은 작가에게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결말의 약점을 지적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더구나 [종신검시관]은 우리 미스터리 팬들이 무척 좋아하는 퍼즐 풍의 본격 미스터리죠. 예전 좋았던 시절의 명탐정의 풍모를 재현하는 검시관 구라이시 요시오가 시체 검시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를 바탕으로 명추리를 전개해 수사관들이 내놓은 결론을 뒤짚고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구성으로 전개되는 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종신검시관' 구라이시는 L현경 수사과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입니다. 경찰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보직 변경을 피할 수 없지만 그만은 예외입니다. 경찰 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검시관으로만 활약해 명예로운 종신검시관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워낙 검시 능력이 뛰어나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그동안 맡은 사건을 퍼펙트하게 처리해낸 게 종신검시관이 된 가장 큰 이유지만, 상사한테도 거침없이 반말을 날리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은 그냥 무시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안하무인에 독불장군이라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야쿠자 같은 행동에 보스 기질이 있어 젊은 수사과들이 그를 선생님처럼 몹시 따라 별명도 '교장 선생님'이고 그 구라이시 스쿨의 수많은 제자들이 몸바쳐 그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또 높으신 분들도 그를 아끼기 때문에 그의 위치는 여지껏 무풍지대입니다. 이 작품집에서는 구라이시와 함께 일하게 된 다른 등장인물들의 눈을 통해 그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몇몇 단편에서는 거의 몇 장면 나오지도 않지만 워낙 매력적인 캐릭터라 그의 카리스마가 작품 전체를 압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느낌마저 듭니다.

 

8편의 미스터리는 일본어를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나 트릭을 만들기 위해 다소 억지스런 상황을 설정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무리없이 짜여져 있습니다. 첫번째 수록작인 <붉은 명함>은 고전기의 본격 미스터리가 연상되는 단순하지만 깔끔한 트릭이라 권할 만한데, 무엇보다 최고작은 4번째 작품 <전별>입니다. 이야기는 은퇴를 며칠 앞둔 형사부장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십여 년 전부터 여름과 겨울에 날아오던 연하장이 갑자기 끊기자 궁금해한다는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형사부장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바탕으로 구라이시가 조사해 밝혀낸 진실은 절로 눈물이 터지는 감동스런 비밀을 안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구라이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슬쩍 나타나는 이 단편은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봉사한 노형사들의 우정과 애틋한 모정이 함께하며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이 단편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독자들이 많이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결코 편견에 휘둘리지 않은 채 양옆 시야가 가려진 경주마처럼 증거만 주시해 진실과 대면하는 구라이시의 전문가적인 면모에 빠질 수도 있고, 거칠과 투박한 말과 무뚝뚝한 행동으로 속마음을 감추지만 큰 못이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것처럼 어느새 작품 전체를 포근히 감싸는 구라이시의 인간적인 매력에 포로가 될 수도 있으며, 책 속에 제시된 단서를 잘 분석해 범인을 맞추는 순수한 추리소설적인 즐거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범주 안에서 이렇게 만족스런 단편집은 근래 별로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과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꼭 구라이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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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리뷰를 읽다가 왔습니다. 정말로 제가 참조할 만한 글들이 많이 있어서 즐찾 등록합니다. 다시 와서 찬찬히 읽겠습니다 ^^

jedai2000 2007-07-0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저도 즐찾 등록할게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읽을 만한 것들이 몇 개는 될 거예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럭키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
세오 마이코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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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뜻한 표지 그림이 우선 시선을 잡아끄는 <럭키걸>은 이미 <행복한 식탁>으로 국내에 선을 보인 세오 마이코의 작품이다. 일본에는 제법 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막상 <행복한 식탁>을 읽어보니 잔잔하다 못해 약간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럭키걸>에 실린 작가 소개글을 보니 세오 마이코는 현직 중학교 교사로서 작가보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며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들도 함께 볼 수 있는 소설을 쓰는데 주력한단다. 어떻게 보면 '쥬브나일Juvenile' 혹은 '영어덜트' 계열 작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같이 닳고 닳은 성인 독자에게는 심심한 작품일지 몰라도, <행복한 식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느니 눈물을 흘렸다느니 하는 중학생 팬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인과 중학생이 같이 볼 수 있는 작가로서 폭력이나 범죄가 없는 건전한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세오 마이코는 분명히 소구하는 바가 있는, 나름의 매력이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겠다.

 

<럭키걸>은 실제로 다른 이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없지만, 손님들에게 적당히 듣기 좋은 말을 해주어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편안함을 안겨주는 루이즈라는 점성술사가 주인공이다. 그녀가 몇 년 전 손님으로 만난 미치히코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행운을 타고난 남자. 루이즈는 강운의 소유자인 미치히코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성공리에 꼬득여 현재 동거중이다. 루이즈가 만나는 특이한 손님들이 가져오는 고민을 해결해주면서 덩달아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사랑도 더욱 깊어져간다는 네 개의 예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첫번째 손님은 아빠와 엄마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가르쳐달라는 꼬마아이. 이혼한 부모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망설이는구나, 생각한 루이즈는 아이의 아빠와 엄마를 모두 만나게 되는데...그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기함을 지르고야 말았다. 좋게 말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척이나 시시한 그 비밀에 잠시 당황하고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을 청했다. 이건 너무하잖아. 두번째 손님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넘어뜨릴 방법을 알려달라는 여고생. 이 이야기는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는 평범한 생활의 한 부분도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라면 보석같이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세번째, 네번째 손님은 직접 만나보도록.

 

예전에 어느 번역자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이 초등학교 때는 동화를 읽었고, 중학교 때는 조흔파 선생의 <얄개전> 같은 중학생용 소설을 읽으며 낄낄거렸다고. 그런 식으로 그 나이에 맞는 책들이 단계별로 놓여 있어 항상 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며 자랄 수 있었다 한다. 하지만 요즘은 어디 그런가. 초등학교 때 읽을 명작동화나 아동용으로 축약된 세계 명작 등은 있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중학생들이 읽을 만한 소설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본인 같은 경우도 그 시절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암흑가 비화 등으로 선회해 지금까지 죽고 또 죽이는 책들만 골라 보는 피폐한 정신 상태를 소유하고 이 나이 먹도록 애인도 없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갑자기 너무 흥분했다). 아무튼 세오 마이코의 <럭키걸>은 소란스럽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재미와 그리 머리 아프지 않은 깨달음이 공존한다. 실제로 중학생 자녀나 조카, 동생이 있는 사람이 선물한다면 멋진 아빠엄마, 삼촌, 오빠 소리 들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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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월드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미미즈(지렁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등학교 3학년생 소년이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 충동적으로 어머니를 죽이고는 세상의 분기점에 놓이게 된다. 매일같이 밥을 먹고 학교를 가서 공부하며 다른 아이들처럼 살아가는 세계와 엄마를 죽인 패륜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경찰을 피해 한없이 도망쳐야만 하는 '앞으로' 겪을 세계는 분명히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미미즈에겐 그 '앞으로'의 세계가 현실, 즉 리얼 월드다.

 

미미즈가 저지른 모친 살해사건에 우연히 엮이게 된 네 명의 절친한 여고생. 그중 가장 평범한 축인 도시코는 여고생을 상술의 대상이나 성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회에 지쳐 '호리닌나'라는 가명으로 리얼 월드에서 도피하며 살아간다. 호리닌나가 미미즈에게 보이는 반응은 대다수의 평범한 여고생들처럼 '나와는 상관없어.' 성적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는 유잔은 어머니를 죽인 미미즈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를 포기한 자신을 동일시해 그를 도우며, 두뇌 명석한 데라우치는 손쉬운(?) 해결을 택한 미미즈를 경멸하고, 친구들 사이에선 요조숙녀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노는 여고생인 기라린은 살인자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의 신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적당히 웃고 떠들며, 그럭저럭 우정을 나누던 네 소녀가 한 살인자 소년의 범죄에 맞닥뜨림으로써 어두운 마음의 그늘을 가진 소녀들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고 그토록 애써 유지했던 가짜 세계가 산산히 조각나버린다. 바야흐로 그들은 압도적인 현실감이 넘치는 리얼 월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다섯 명의 소년소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것은 각자 비밀을 갖고 있는 네 소녀가 자기는 그 비밀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이미 그 비밀을 알고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들이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들 사이가 사실은 한쪽 발은 차도에, 한쪽 발은 인도에 걸치고 걷는것마냥 간신히 유지되는 위태로운 친구 관계였다는 것임이 확인된 것이다.

 

작품 맨 뒤에 실린 작품 해설을 보니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기리노 나쓰오는 여성들의 4인 구도를 즐겨 사용하고, 거기에 한 명의 남자를 더한다고. 그러고 보니 <아웃>도 네 명의 주부가 주인공이었고, <그로테스크>도 네 여성들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주로 사람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에 천착하는 '관계 문학'을 하기 때문에 가장 역동적으로 관계를 주고받을 수 있는 4자 구도에서 작품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설자는 적었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좋든 싫든 다른 이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러한 인간 관계의 본질, 심연 그리고 파국을 냉혹한 심리 묘사로 묘파하는 데는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오른 작가다.

 

<리얼 월드>는 어린 고교생들의 이야기다 보니 다른 기리노 나쓰오 작품들보다 더 빠르고 역동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등장인물들 개개인이 점차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에 작품 전체에 어딘지 요사스런 기운도 감돌고 있으며 여전히 빈틈없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로테스크>나 <내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같은 최고 수준의 작품들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는 면이 있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니만큼 평소처럼 인간의 병든 마음을 극한까지 후비고 파내기는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 작품을 기리노 나쓰오가 아닌 다른 신인 작가가 썼다면? 대단한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군에서 약간 처지는 수준이라는 것이지 일반적인 잣대에서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가작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끝을 보아야만 했다. 이 정도의 작품도 기리노 나쓰오가 쓴 것 중에선 비교적 무난하다, 는 평가를 받는 이 작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p.s/ 지나가는 디자인학원 수강생을 붙잡아놓고 시킨 것 같은 표지와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 최소한의 편집 과정만 거친 듯한 만듦새는 아쉽다. 기리노 나쓰오가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작가는 절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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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0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해설이 작가의 작품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줘서 좋았습니다^^

jedai2000 2007-05-0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과 의사가 한 평론이라 그런지 제게는 사용된 단어들이 어렵더군요. ^^ 그래도 <대답은 필요없어>에서 미야베 해설한 사람같이 내용없지는 않았으니까 좋았습니다.

nemuko 2007-05-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에 절대 동감.

jedai2000 2007-05-0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무코님...이 마야라는 출판사는 국내에 <범인에게 고한다>의 시즈쿠이 슈스케나 이 작품처럼 좋은 작품은 소개하면서도 완성도에는 의문이 들어 항상 아쉬움이 남네요. 기왕 돈들여 소개하는 책 잘 좀 만들어서 내면 판매도 더 좋아질 텐데 말입니다.

oldhand 2007-05-0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출판사 책들 번역은 다 직역인건가보네요.

jedai2000 2007-05-0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윤혜원이라는 분께서 모두 맡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주변의 번역 잘 된 책들을 좀 찾아보고 공부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