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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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에서 그해 데뷔한 가장 우수한 신인에게 수여하는 에도가와 란포 상을 탄 다카노 가즈아키의 두번째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기리노 나쓰오처럼 같은 상을 타고 안정적으로 데뷔해 오늘날까지 히트작을 양산하는 성공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요즘 뭐하면서 먹고 사나, 싶게 낙마한 작가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다카노 가즈아키는 <13계단> 수상 당시 최근 10년 내 최고의 수상작이라는 절찬을 들었던 유망주이니만큼 데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내며 평자나 독자들에게 호의적인 평을 받고 있어 미스터리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다소 묵직한 주제였던 일본 내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과 사형 집행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의 누명을 벗기려 분투하는 주인공들의 모험이라는 오락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13계단>은 확실히 처녀작답지 않은 탄탄함이 돋보인 수작이었다. 반면 <그레이브 디거>는 메시지에서는 조금 후퇴한 인상이고 소설의 재미라는 측면에 더욱 방점을 찍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 프로필을 보면 영화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영화적인 글쓰기가 체질화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가 보기에 조금이라도 지루할 수 있는 장면은 최대한 빨리 넘어가 작품 전반에 속도감이 굉장하며(소설은 대화나 지문이 어느 정도 길어도 그러려니 하지만 영화에서는 장면이 한없이 늘어져버리면 관객이 견디질 못한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장면을 전환해 긴장감을 더하고 주인공의 생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기법은 영화로 치면 교차편집이 아닐까. <그레이브 디거>는 대부분 영상문법으로 씌어진 작품이고 그래서 당장 영화화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끝에 비뚤어져서 양아치가 되어버린 야가미. 서른을 넘기고 이제 새 삶을 살겠다는 각오로 충만해 있다. 그는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골수를 기증할 결심을 하는데, 이식수술이 성공하면 야가미와 그 아이 모두 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한 남자는 정신적으로, 다른 아이는 육체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생전 처음 좋은 일을 하려는 야가미 앞에 암초가 나타난다. 정체불명의 추적자들이 나타나 이유도 모르고 쫓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 그러는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칼을 꺼내는 위험한 추적자들 중 한 명을 정당방위로 살해한 야가미는 결국 경찰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추적자들에게 잡히면 물론이요, 특히 경찰에 체포되면 무죄가 입증되더라도 골수 이식수술 시간에 맞춰갈 수 없게 된다. 야가미는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단 하나의 결심으로 생명을 걸고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으로 병원까지 달음질쳐간다. 남은 시간은 단 12시간, 이동해야 할 곳은 도쿄 북단에서 남단까지 30킬로미터. 야가미의 질주에 어느덧 독자는 모든 걸 잊고 빨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상이 아주 간단히 요약한 대강의 내용인데, 실제로는 중세 유럽 전설을 차용한 암살자 '그레이브 디거'가 벌이는 연쇄살인극부터, 수사과와 보안과 형사들의 경찰 내부 알력다툼이라든가, 유력 정치인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래도 야가미와 추적자들의 쫓고 쫓기는 도시추적극과 왜 야가미가 쫓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융합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플롯에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초에 추적자들에게서 벗어난 야가미는 택시를 타는데 가다 보니 돈이 없는 걸 알고 그냥 내려 위기를 자초한다. 당시는 아직 경찰쪽에서는 비상선이 쳐지지 않은 상태라 병원까지 아무 문제없이 한 번에 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야가미가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었는데 그 정도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할까. 더구나 야가미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여의사가 있지 않았는가. 나중에 갚을 테니까 일단 내려와서 택시비를 치뤄달라, 그 말을 못했을까. 게다가 야가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던 핸드폰과 노트북은 강물에 푹 담궈졌는데도 잠깐 말리니까 곧 제 기능을 한다. 또한 그레이브 디거의 정체라든가 그의 범행의 목적이라는 플롯 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도 속속 나타나는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별 무리없이 금방금방 밝혀지는 것도 작가의 고민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처럼 아쉬운 부분도 자주 눈에 띄지만 워낙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 큰 문제로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악인이었지만 과거를 버리고 착한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쇠 로봇처럼 굳건한 의지를 보이는 야가미는 누구도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야가미가 그렇게 갑자기 좋은 사람으로 변한 동기는 크게 설득력 있게 그려지진 않는다). 택시, 지하철, 페리호, 렌터카와 경찰차, 심지어 두 발이 부서져라 뛰기까지 하는 야가미의 한 밤의 질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교통수단을 활용하므로 더 아기자기하고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자주 언급한 소설의 속도감은 정말 일품이고, 최종적인 사건의 진상도 그 얼개가 잘 맞는 편이다. 특히 병원 코앞에서 결국 잡혀버린 야가미가 역전의 한 방으로 적들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시원한 소나기같이 통쾌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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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3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가미때문에 별 하나를 더 줬답니다^^;;;

보석 2007-08-0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여름 읽을 책으로 쟁여두고 있는데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레몬향기 2007-08-0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계단은 참 재밌게 읽었는데.. 역시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jedai2000 2007-08-0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오, 야가미에 꽤 매력을 느끼셨나 보네요. 하기야 얼굴이 못 났어도 마음이 비단결인데 누가 미워하겠어요 ^^

보석님...올 여름에 보시기 가장 좋은 책일 겁니다. 일단 시원시원하니까 ^^

적님...재미로는 <13계단>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 전작의 메시지같이 공감가는 부분은 약간 적어져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