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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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 가을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본 얼티메이텀>의 영향 때문일까. 최근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 순위에서 스파이가 뜨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스파이들의 광대한 세계가 최근 한 편의 영화 때문에 갑자기 조명받고 있다는 건 그냥 농담이고, 사실 스파이는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한 이래 늘 존재한 거니까 그 역사가 무궁무진하다. 왜 동양 최고의 병법서라는 손자병법에도 '용간(첩자)편'이라는 항목이 있어 필승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적진 한복판에서 온갖 위험과 맞닥뜨리는 와중에 기지와 결단력을 발휘해 핵심 정보를 가져와 자국을 승리로 이끄는 스파이들의 이 유서 깊은 활약에는 누구나 다 관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들의 행동 방식이 워낙 은밀하다 보니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물론 실체가 알려져서도 안 되겠다). 그래서 <본 얼티메이텀>의 제이슨 본 같은 무지막지한 암살자 스타일의 과장된 스파이도 대중문화 속에서 그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제이슨 본같이 활동하는 스파이가 있다면 3일 안에 몬테카를로 앞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를 듯(영화처럼 기억만 상실된다면 다행이고).

 

베일에 쌓여 있지만, 오늘도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들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답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1931년생 존 르 카레는 20편 남짓한 작품들 모두에 스파이를 등장시켜 스파이 소설 분야에서는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작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1963년 미국과 영국의 양대 추리문학상인 에드거앨런포상과 골드대거상을 휩쓸었으며, 2005년에는 영국추리작가협회 창설 50주년을 맞아 그간의 골드대거상 수상작 중에서 베스트를 뽑는 자리에서도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그 자신은 미국,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공로상 격으로 각각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 그랜드 마스터와 다이아몬드 대거를 모두 획득했고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았으니 스파이로 가장 덕본 사나이라고 해도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존 르 카레는 어떻게 이렇듯 거대한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까? 그는 1961년에 이 작품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통해 등단했다. 하지만 그가 이 방면의 선구자는 아니었다. 이미 1950년대부터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가 충분히 스파이라는 매력적인 존재를 대중들에게 충분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존 르 카레는 뭔가가 달랐다. 문장에는 품격이 넘쳤고, 무엇보다 007시리즈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할 법하지 않은 영웅의 대활약을 그리는 오락 소설이었다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에는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내는 '인간'이 있다. 배신과 암투, 간계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쓸쓸해하는, 국가라는 거대 조직 속의 부산물에 다름 아닌 스파이의 뒷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존 르 카레는 스파이를 등장시킨 무수한 작가들 속에서 그 혼자만이 찬란히 빛날 수 있는 차별성과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는 처녀작이지만 존 르 카레 작품의 특징이 대부분 담겨 있는데,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는 스파이계의 노병 조지 스마일리가 처음 등장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공작을 펼쳤던 노련한 스마일리는 중년이 지나 현장에서 뛰기 곤란해지자 정보부의 한직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외교부의 고관이 대학 시절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자 스마일리는 그와 면담을 한다. 그에게서 그럴 듯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스마일리는 면담을 종료하지만, 다음 날 고관은 권총 자살을 한다. 유서에는 스마일리에게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며, 모멸감에 자살한다고 밝혔다. 분명히 면담 분위기는 좋았는데 왜 그가 그런 말을 남겼을까. 스마일리는 조사를 위해 이른 아침 죽은 남자의 아내를 만나는데 정확히 8시 30분에 남자가 신청한 모닝콜이 울린다. 죽기로 결심한 남자가 왜 다음 날 아침 일찍 깨워달라는 전화를 부탁했을까?

 

제목 그대로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의 미스터리를 푸는 이 작품은 역자후기에도 적혀 있듯이 전통적인 미스터리 소설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시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풍의 본격 미스터리가 마지막 불꽃을 태웠을 시점이라 존 르 카레도 그 영향을 받아 초기작 2편에서는 플롯에 본격 미스터리 성향이 엿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장기는 숨기지 못하는 듯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에서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처럼 이념이나 헛된 이상을 좇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이를 먹어 사랑도 떠나고 공허감만 가득해진 중년 스파이들의 애상이 그려진다. 결말도 무척 좋고,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등장한 몇몇 반가운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 무시무시한 독일 스파이 문트까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요즘처럼 첩보위성이나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스파이와 접선자가 극장에서 라커룸 번호표를 바꿔 비밀 정보가 든 가방을 교환한다는 식의 고전적인 스파이 기법을 보여준다. 로테크(lowtech) 시절의 스파이들에 동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존 르 카레가 그렇게 스파이들의 세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실제 영국 정보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란다. 본명이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인데, 존 르 카레라는 필명을 쓴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가 그리는 스파이들과 그들의 세계가 그렇게 정교하고 실제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 스파이나 정보부 일을 했던 사람이 꽤 있다. G.K. 체스터튼, 존 버칸, 이든 필포츠 등은 1차대전 때 활약했고, 007시리즈의 이언 플레밍 역시 정보부 출신인데, 사람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고 문 앞까지 갔다가 차마 못하고 돌아온 일화가 있단다. 아마도 자기가 못해서 007을 시켰나 보다.  

 

 

p.s/ 번역, 윤문 상태 아주 안 좋다. 다음에 나오는 작품에는 신경 좀 더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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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0-2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래서 스파이를 잘 알았던거군요^^

jedai2000 2007-10-2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궁금한 작품인 '카를라를 찾아서' 3부작도 꼭 완간됐으면 좋겠어요 ^^
 
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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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본래 욕심이 끝이 없고 죄가 많은 동물이라 그런지 뉴스를 보면 하루에도 수십 건의 범죄가 저질러지곤 한다. 그렇게 다양한 범죄 가운데서도 내가 항상 답답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유괴를 저지르는 범인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잡히는 모습이 나올 때다. 아니, 하고 많은 범죄 중에 왜 하필(?) 유괴를 하느냔 말이다. 일단 납치하기도 어렵고, 납치 대상을 관리하기는 더 어렵고, 납치된 사람이 범인의 용모나 특징, 행동을 기억하기도 쉽고, 게다가 무엇보다 몸값을 받아내는 건 더 어려운데 말이다. 지상 최고의 유괴를 다룬 이 책 <대유괴>에서도 작가 역시 유괴 실행범 중 리더의 입을 통해 유괴의 난점들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으니 앞으로 영리를 위해 유괴를 저지르려고 작심하고 있는 멍청한 자들은 필히 참조하기 바란다. 

 

유괴란 범죄는 본질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어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1. 인질을 유괴하는 일 자체의 어려움
2. 인질 신병을 극비리에 확보하는 장소와 방법의 어려움
3. 몸값을 받는 방법(가족에 연락하는 방법 포함)의 어려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3항인 몸값을 밥는 방법으로 1과 2는 마지막 3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한 이 3항의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1. 인질을 풀어준 뒤의 안전 확보
2. 팀 분열의 방지
3. 몸값의 사용 방법
이 세 항목도 중요한 문제로, 이들 6개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 비로소 유괴는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


 

<대유괴>는 감방 동기인 청년 3명이 유괴단 '무지개 동자'를 결성하여 어마어마한 거부 야나가와 할머니를 유괴하는 기둥 줄거리를 갖고 있다. 야나가와 할머니의 재산은 간단히 말해 오사카의 20퍼센트 면적에 해당하는 산을 소유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산가. 무지개 동자들이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할머니의 동선을 파악하고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유괴에 성공하는 게 초반부까지의 이야기인데, 범행 준비 단계부터 계획을 실행하는 모습까지 실제 옆에서 지켜보는 듯 실감난다. 그런데 무지개 동자들의 손에 떨어진 할머니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어벙한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가 하면 약소한 5천만엔의 몸값에 오히려 분노하며 내가 그렇게 싸구려로 보이냐며, 100억엔은 요구해야 자존심에 걸맞는다고 큰소리를 친다. 무지개 동자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5천만엔은 가방 하나면 되는데, 100억엔이라는 돈은 아무리 거부의 집이라도 마련하기 어렵거니와 커다란 트렁크 가방 수십 개에 담아야 하니 그걸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무지개 동자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

 

전반적으로 따스함과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도저히 납치되었다고는 믿기 힘든 야나가와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행동들로 어느새 유괴범들과의 관계가 역전되고 마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웃음의 주된 부분이고, 뼛속까지 악인은 아닌 무지개 동자들의 순박함에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작품 <대유괴>는 197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세상에 나온 지 이미 30여년이나 된 고전이지만 당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비롯한 상들을 휩쓸었고, '문예춘추'에서 각계 미스터리 전문가들의 투표로 뽑은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랭킹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야말로 전설이라 부를 수 있을 듯. 사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 포털 사이트에서 어떤 영문인지 700원만 투자하면 이 책을 e-북 형태로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700원 결제를 하고 반 정도를 보았다가 갑자기 취직을 하게 되면서 바빠져 끝까지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책으로 묶여져 나와 눈의 피로도 덜고 종이책으로 영구히 보관하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암암리에 유명했던 작품이라 너무 늦게 소개된 감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독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무척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즐거움 반 아쉬움 반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세월의 흔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무지개 동자들은 유괴의 여러 난점들을 타파하는 데 매스컴을 이용한다거나, 특별한 운송 수단을 사용하며 위기를 넘기고 목적을 달성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건 본문 중에 무지개 동자를 쫓는 뛰어난 경찰관인 이카리가 수사에 사용하려고 전파상에서 27인치 텔레비전을 빌려왔다는 대목인데, 일반 TV의 2배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대형이란다. 이미 50인치도 우스운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대유괴>가 어느 정도는 낡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독자들은 아마 매스컴의 허를 찔러 야나가와 할머니의 무고를 생방송으로 중계하며, 몸값을 전달받는데도 위에 언급한 특별한 운송 수단을 사용하여 경찰들을 농락하는 신출귀몰한 무지개 동자들의 모습에 커다란 쾌감을 느꼈을 듯하다. 하지만 이미 범죄자의 추적 과정이 TV로 생중계까지 되며, 어떤 운송 수단도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는 크게 기발한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물론 1970년대 작품이라 무조건 낡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1930년대 애거서 크리스티의 트릭이 인간 심리의 보편적인 면에 호소해 그 옛날에 봐도, 지금 봐도,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데 반해, 당대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트릭은 그 하이 테크놀로지가 어느덧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 미래에는 어쩔 수 없이 그 감흥이 줄어들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즐거운 점을 말해보라면 사실 차고 넘친다. 야나가와 할머니 유괴 사건은 그 기묘함과 엉뚱함이 세상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사람들은 마치 한바탕 축제처럼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전 세계가 떠들석한 이 소란스런 난장판은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더 유쾌하게 만들며, 유괴를 당한(혹은 당해준) 할머니의 진짜 목적이 밝혀지는 결말의 반전은 짜릿하다. 대책없이 순박한 노인만이 아닌 비장의 한 수가 있는 책사로 할머니의 캐릭터를 설정한 건 작가의 탁월함이라 하겠다. 사실 그런 두뇌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큰 재산을 일구었겠는가. 전편에 흐르는 유머와 인간미, (지금 내 기준으로는 약간은 퇴락했다고 생각하지만) 준수한 트릭과 두뇌싸움, 무엇보다 반전이 돋보이며, 유괴의 준비부터 무사히 몸값을 전달받기까지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유괴소설로서 꽤 높이 평가받을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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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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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창시절에 누구나 가장 꿈꾸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 예쁜 교생 선생님과 연애를 해보고 싶다거나, 교내 농구대회에서 역전의 3점슛으로 스타가 되는 것도 있을 테고, 전교 1등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다양한 꿈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짜릿한 건 역시 시험 전날 남들은 다 어렵게 공부하는데 몰래 답안지를 훔쳐내어 간단히 100점을 맞는 것일게다. 솔직히 이런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도 시험 전날 외워도 외워도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물리 공식이나 국사 연대기 등에 혼절 직전의 상태가 되어 아, 시험지 훔치고 싶다 하는 공상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런 멋진(?) 계획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세 명의 악동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생님들도 포기한 문제아 기타, 조지로, 다치바나였다. 어차피 대학도 포기했고, 성적 잘 받아봐야 써먹을 데도 없지만 얄미운 선생님들도 골려주고 졸업 직전 마지막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그 이름도 멋진 '루팡 작전'을 짜낸다. 시험지가 어디 잠들어 있는지는 이미 파악됐다. 교장실 안에 있는 육중한 철제금고에 있다. 세 악동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침투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무사히 잠입해, 보아둔 열쇠로 금고를 열고 시험지를 사뿐하게 가져가려는데, 글쎄 금고 안에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살펴보니 영어를 담당하는 글래머 선생님이다. 그들은 시험지고 뭐고 그냥 금고를 닿고 도망쳐 나오는데,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시체는 옥상 밑 화단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어 의혹은 깊어져가지만,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사건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풍화되고 만다. 그런데 15년 후 어느 날 시효를 하루 앞두고 경찰 측에 의문의 제보가 들어간다. 여선생님은 사실 살해됐고, 비밀은 루팡 작전 안에 있다고.

 

이미 3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처녀작이다. 사실은 미스터리 소설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지만 책으로 나오지는 못한 작품을 유명작가가 되고 나서 개작한 것이라 하는데, 요코야마 팬들에게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환상의 처녀작'을 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어 제법 화제가 됐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요코야마 히데오는 초반부, 중반부까지는 신필이지만, 결말에서 작위적인 감동을 강조하는 신파극으로 돌변하는 약점만이 크게 부각되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요코야마 히데오 열성팬의 입장에서 이런 세평이 약간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만약 <클라이머즈 하이>의 종반부에서까지 앞부분의 박력과 재미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일본 미스터리 올타임 베스트 1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루팡의 소식>은 그런 약점을 상당히 뛰어넘고 있어 누가 봐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간략히 소개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마도 요코야마 히데오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루팡의 소식>을 준비할 때, 기존에 유행했던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을 참조한 듯 기본적으로 본격 미스터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금고에 있던 시체가 화단 아래로 이동한다는 플롯 자체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15년 전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현재 관계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특유의 작풍-개작할 때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강했을 듯-도 여전하여, 시효를 하루로 설정해 24시간 안에 사건을 풀어야 한다는 긴박감이 출중하며,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은 때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부대끼는가 하면, 상대의 실력에 감복하고 우정을 확인하는 등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조직 사회의 진면목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요코야마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청춘소설의 분위기도 있어, 세 악동들의 난장짓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스'나 무라카미 류의 <69>에 나오는 청춘들을 연상시킬 정도다. 15년의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세 악동의 현재의 모습은 꿈많았던 학창시절을 통과해 어느덧 세상의 때가 묻은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켜 이루 말할 수 없는 소회를 주며, 그 중 한 명인 다치바나가 세상과 손을 끊고 말을 잊은 채 노숙자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밝혀지는 결말부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미스터리의 면에서는 한 가지 이상 설명이 부족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고, 아마도 개작하면서 첨가되었을 거라 보이는 반전에서 사건의 진짜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이 좀 뜬금없고 그동안 유지되었던 작품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옥의 티가 되는 것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기준을 통과한 아주 우수한 미스터리 대중소설로 이 책이야말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가를 우리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데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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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코야마 히데오의 &quot;루팡의 소식&quot;
    from 맥, 기술, 영화, 도서 그리고 삶 2008-07-24 23:20 
    바티스타 수술팀의..을 읽고 감상문을 올렸더니.. happyseeker가 추천해준 책..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도서관에 가서 덥석 들고 와서 읽었다.. 루팡의 소식이라는 이름에서 루팡과 관계가 있나 싶었는데..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공소시효가 1일 남은 상황에서 (그것도 이미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거 자살로 처리된 사건이 살인사건이라는 제보를 받고 그 살인범을 밝힌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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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는 여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다카무라 가오루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작가 노나미 아사도 일본에서 상당히 평가받는 여성 미스터리 작가인데, 같은 작품으로 1996년에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데뷔도 1988년에 했으니 이미 중견 작가, 아니면 베테랑이라 불러야 할 듯. 작품 수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표작은 역시 <얼어붙은 송곳니>에 등장하는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가 등장하는 몇 편의 장편과 단편집이라 한다.

 

이 작품은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 추운 어느 겨울날, 심야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 손님의 몸에서 갑자기 불이 솟구친 것, 결국 불은 건물을 거의 전소시킬 정도로 크게 번지고 만다. 수사에 착수한 형사들은 새까맣게 탄 남자의 몸에서 짐승의 이빨자국을 발견하고, 긴급히 수사반이 편성된다. '도마뱀'이라 불리는 오토바이 기동수사대 멤버 중 한 사람인 오토미치 역시 수사반에 차출되는데, 그의 파트너는 형사가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가진 중년의 꽉 막힌 다키자와 형사다. 별다른 단서가 없어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는 한편 도심 한복판에서는 연이어 짐승에 물려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대표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인체 자연발화와 흉포한 야수의 공격이라는 이중의 수수께끼가 제시되는 도입부가 아주 흥미로웠다. 그러나 작가 노나미 아사의 장기는 추리가 아니라 심리 묘사에 있다는 듯 작품은 주인공 오토미치의 심리를 세밀하게 쫓아가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특히 철저하게 남성 위주 사회인 경찰세계 속에서 그녀가 겪는 소외감이나 고독, 절망 등의 심리가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파트너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녀야 하는 '황제펭귄' 다키자와와의 신경전은 서로에 대한 적의와 무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파고들어 짜증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렇듯 초반부에는 오토미치가 느끼는 좌절감과 쉽게 진전되지 않는 수사 과정의 막막함이 맞물려 독자들은 깊은 못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예전부터 노나미 아사가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명쾌하고 논리적인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오토미치, 다키자와 콤비가 사건의 해결에 크게 기여하거나 톱니바퀴같이 단단하고 체계적인 경찰 조직이 범인을 압박해 들어가 스스로 꼬리를 노출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우연이나, 범행이 계속 저질러지면서 피해자들의 관계에서 접점이 생기고, 혹은 범인들 내부의 분열에 의해서 단서가 발생하는 식이라 약간 섭섭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경찰소설에 가깝고, 또 실제 경찰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누구 한 사람의 절묘한 아이디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범인의 결정적인 실수나 새로운 단서 등이 발견되면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어쩌면 더 사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순수하게 경찰소설 측면에서 바라보면 수사진 편성과 실제적인 수사의 양상, 때로 반목하고 때로 화합하는 수사원들 사이의 관계 등이 대단히 현실적이며, 사실상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에 치중하느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잃게 되는 수사원들의 애환은 무척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백미는 마지막 100페이지의 추격전에 있다. 처음부터 작가는 오토미치가 오토바이를 능수능란하게 탄다는 걸 암시하고 기동수사대장의 입을 통해 범인을 압박할 때 그녀의 오토바이가 쓰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슬쩍 제시함으로써 밑밥을 깔아둔다. 결국 그녀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범인을 추적하는데 수십 페이지 가량 이어지는 추격전의 쾌감은 정말 대단하다. 그토록 억눌려 있었기에 오토바이로 질주하며 도시를 마음껏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해방감마저 제공한다. 더구나 그녀가 상대하는 범인 역시 사실은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를 인정하며 한계를 초월해 함께 달리는 장면에서는 웅장한 박력과 역동적인 에너지는 물론 책장을 덮어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깊은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작가는 제일 먼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로 도시를 질풍처럼 달리는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집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생생하게 잘 쓴 장면이다.

 

두 파트너는 남녀를 떠나 서로에게 어느 정도 탄복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게 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다키자와는 사건이 끝나고 다시 남자 파트너와 일하게 되자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고, 오토미치 역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쁜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또 같이 일하기는 싫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결말인가(그런데 후속작에서 다키자와가 다시 등장한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풀릴지 몹시 궁금하다). 아주 솔직히 말해 초반부 남녀 주인공의 기나긴 대립은 읽기 불편했고, 지나친 심리 묘사는 약간 지루할 정도였다. 저절로 풀리는 사건의 진상은 슬쩍 허무하다. 하지만 마지막 100페이지가 모든 걸 보상해준다. 감정이 고조되어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최후 추격전의 임팩트만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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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등장한 개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요..어휴..기특한것..마지막100페이지!!!
확실히 보상해 주죠^^ 노나미 아사 담책나오면 무조건 읽을거예요^^

jedai2000 2008-05-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풍'이죠 ^^ 노나미 아사의 오토미치 시리즈는 4편인가가 더 있는데 다른 작품들은 상업성이 떨어져 출간을 현재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네요. 흔치 않은 노나미 아사 팬이시라니 반갑습니다 ^^
 
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지음, 금정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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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였던 2002년 여름, 방학 중이었던 나는 당시도 솔로라 누구 만날 사람이 있기를 하나, 어디 놀러갈 데가 있기를 하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지막지한 썰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심심타파를 위해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내 최초로 신촌에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비슷한 처지의 연애 낙오자들 몇 명을 모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그날 점심 때쯤 가서 차 끊길 때까지 놀았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개강을 하고 나서도 보드게임방에 상주하며 물경 수백 만원의 돈을 쓰고 배운 게임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보드게임 마니아가 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스코틀랜드야드 게임>도 사실은 유명한 보드게임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원래 5명이 하는 게임으로 1명이 범인이 되어 지하철, 택시, 버스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해 도망치고, 나머지 4명이 형사 팀을 짜서 같은 교통 수단으로 정해진 턴 안에 범인을 잡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범인이 불리하니까 여러 가지 특전이 있는데, 워낙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다니는 범인의 역량에 게임의 재미가 좌우되므로 서로 내가 범인하겠다고 다투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보드게임이므로 5명 정족수가 맞으면 꼭 해보시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은 이 게임의 기본 규칙-정해진 24턴 안에 범인을 잡는다는-에서 착안해 순박한 한 남자가 생기발랄하면서도 아픔을 간직한 여자의 마음을 24일 동안의 만남 안에 사로잡는다는 내용으로 이끌어간다. 줄을 잘못 서서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회사 상사와 유일하게 술을 마셔줄 정도로 착한, 어쩌면 실속 하나 못 차리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차가 끊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24시간 만화카페에 들어가 밤을 새우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울고 웃고 하여튼 소란스럽게 만화를 보는 여자와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데 옛 말에 싸우다가 정든다고 느낌이 그리 싫지는 않다.

 

며칠 후 우연히 병원에 가게 된 주인공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데, 그녀는 생명 수호의 최전선인 병원 응급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사였다. 환자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반해버린 주인공은 외롭던 차에 어떻게 잘 꼬득여서 여자친구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하는데, 이게 웬 걸. 그녀는 애인이 있다는 게 아닌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라지만. 그래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골키퍼도 자리를 비운 상태 아닌가. 용기를 내보려던 찰나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녀의 애인은 몇 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쉽사리 서로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가 아니라 아예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인 셈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걸작 만화 <터치>에서도 보듯이 연적 가운데 최고는 역시 죽은 사람과의 대결.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한없이 예쁘고 멋지게만 미화되는 영영 떠나간 이는 더 이상 이미지가 훼손될 염려도 없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좋았던 그 모습 그대로만 남기 때문에 곁에서 때로 실망도 주고 잦은 만남에 질리게도 만드는 산 사람이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의 주인공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불가능에 도전하려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무엇보다도 단 24일이라는 강력한 제약이 있긴 하지만(왜 꼭 24일이냐고? 독서의 재미를 위해 밝힐 수 없지만 약간은 초자연적인 이유가 끼어든다).

 

작가인 노지마 신지는 내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101번째 프로포즈', '고교교사' 같이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들의 각본가로 명성이 높다는데, 과연 작품 분량의 거의 대부분이 주인공들이 핑퐁같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뤄져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1988년에 데뷔한 작가면 이제는 중견 혹은 노장 축에 들어갈 작가일 텐데도 상대방 말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대사들이 귀엽기 짝이 없다. 아마도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간 자기가 썼던 드라마의 공식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굴곡없는 미적지근한 연애사를 그리면 누가 보겠는가. 필연적으로 남녀 주인공이 죽어 슬픔의 정서를 극한까지 증폭시키거나 요상한 출생의 비밀이 끼어들거나 하면서 과장하기 일쑤인데, 노지마 신지는 자기를 비롯한 작가들이 그런 드라마에서 죽음이 갈라놓아도 언제까지고 사별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만들낸 게 아닌가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자, 죽은 사람과의 추억도 소중하지만 지금 바로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못지않게 소중함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만다.

 

주인공의 사랑의 행방이 결정되는 결말 부분이 약간 급작스럽고 남자 작가가 남자의 시점에서 쓴 작품이라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약간 피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그 사람의 숫자 만큼이나 제각각의 연애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 많은 연애들을 전문적으로 예쁘게 가공하고 포장해 성공을 거뒀던 작가이니만큼 몇몇 장면에서 주인공의 연애 심리에 대한 통찰이 특히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할 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곁에서 지켜주고 기댈 수 있게 도와주는 오빠는 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느끼지는 못할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결국 주인공은 힘들어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준다. 이 순간의 비통하고 헛헛한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역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뜬구름잡는 공허한 이야기보다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쪽에 마음이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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