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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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는 살성殺星 긴다이치 코스케(물론 그가 사람들을 죽인다는 건 아니다. 워낙 명탐정이다 보니 도처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에 두루 참가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듯). 끝없이 죽고 죽이는 인간군상들의 악귀 같은 모습에 지쳐서일까, 모처럼 쉬면서 휴양을 하기로 한다. 그가 선택한 장소는 예전 <옥문도>와 <팔묘촌>에서 난해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어 인연이 깊은 오카야마 현. 돈 안 되는 탐정 일만 주로 맡았던 사람이라 주머니 사정도 별로기에 귀수촌이라는 산골 마을에 틀어박혀, 고급 온천도 아닌 2류 여관 '거북탕'에서 당분간 유유자적하려 했으나 추가로 지출이 계속 발생하게 되니, 꽃다운 이십대 처녀 3명이 하루에 하나씩 살해되는 터에 부의금으로 허리가 휘게 생긴 것이다(실제로 긴다이치는 부의금을 낸다). 역시 명탐정의 운명을 타고난 긴다이치 코스케, 이쯤되면 그가 사건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그의 뒤를 쫓아온다고 할 수 있으렷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5년도는 이미 일본 사회가 패전의 멍에를 벗고 점차 발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던 시기였으나, 귀수촌은 여전히 과거의 인습에 꽁꽁 묶여 있다. 전통적인 일본의 주군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마을 사람들은 양대 세력인 니레 가와 유라 가로 편이 갈려 서로 반목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대결을 펼친다. 또한 원래 귀수촌을 지배했던 영주 가문의 후손인 다타라 호안은 아내를 8명이나 갈아치우며 유유자적하다 완전히 몰락했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하지만 두 가문의 치열한 싸움은 20년 전 유라 가가 사기꾼 온다의 꼬임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더군다나 그 사기꾼 온다가 자신의 사기를 눈치챈 거북탕(긴다이치가 현재 머물고 있는)의 아들까지 살해하고 잠적하면서 니레 가에게로 완전히 패권이 넘어간다. 과거는 망령처럼 언제까지고 죽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 귀수촌에서 현재 발생한 연속살인사건에는 아픈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니레 가고 유라 가고를 떠나서 전후는 가문이 중심이 아니라 인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어른들끼리의 반목은 떠나 그들의 후손들은 스물 전후의 진취적인 젊은이들답게 서로들 친하게 지내고 있다. 사기꾼 온다의 딸이자 현재 일본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오조라 유카리가 귀수촌으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을의 선남선녀들은 힘을 모아 떠들석한 축하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유카리가 돌아온 날, 다타라 호안이 집에서 실종되고, 사흘 연속으로 밤마다 살인이 계속되는데, 첫째 밤은 유라 가의 딸, 둘째 밤은 니레 가의 딸, 마지막으로 거북탕의 딸이다. 개가 변을 끊지 긴다이치가 어찌 사건을 끊으랴. 그는 휴양이라는 본래 목적도 잊고 사건에 뛰어드는데, 곧 귀수촌에는 전래의 '공놀이 노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공놀이 노래의 내용과 비슷하게 살해당한 처녀들, 긴다이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곧장 사건의 핵심에 뛰어든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 국민추리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후기 수작이다.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1960년으로 사실상 요코미조 스타일의 본격 추리가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점과 선> <제로의 초점> 등의 작품으로 기존 추리소설의 낡은 면모를 일신하고 당대 현실을 작품 안에 끌어들여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던 사회파 추리소설을 대유행시킨 게 1957년경이니 이미 1930년대부터 활동했던 요코미조 세이시는 올드패션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듯 인기가 밀린 요코미조가 절치부심 내놓은 작품이라 하겠으나 실제로 읽어보면 그다지 조급해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느긋한 필치로 익숙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규칙들을 차근차근 펼쳐내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고 자동차가 다니며 비행기가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낡은 인습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비극을 부르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해, 죽음조차 한없이 아름답게 그리는 극도의 탐미주의(이번 작품에서는 늪 속에 빠져 시체로 발견된 유라 가의 딸 야스코의 기모노가 물 속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을 특별히 공들여 묘사하는데, 어쩌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즐겨 연쇄살인을 그리는 이유는 아름답게[?] 단장된 시체에 거의 패티시즘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가 장기를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도면밀하게 단서를 배치하고 결말에서 그동안 모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명탐정의 활약에 집중하는 서양 본격 추리소설의 일본화(<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는 동요에 맞춰 살인이 일어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식 마더구스 추리소설을 일본화하는데 주력한다)까지 긴다이치 코스케 스타일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세태에 따라 달라진 추리소설 팬들의 입맛에 나까지 굳이 맞춰야 하냐는 노장의 자존심이 엿보인다고 해야 할 듯.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보려면 한없이 복잡해지는 법, 되도록 하나하나 순서대로 단순하게 봐야 풀리는 게 세상의 이치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 긴다이치가 해결하는 사건의 진상도 실상은 정말로 단순해 외려 허를 찔리고 만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되기 십상인데, 다행히 요코미조는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 장면장면마다 "여기에 긴다이치가 주목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긴다이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운운하며 독자에게 공정한 힌트를 주려 노력한다. 역시 본격추리라고 지나치게 머리 싸매고 볼 필요는 없고 그저 잠깐 쉬어가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보라는 작가의 씀씀이같아 흐뭇해진다. 언제나 그렇듯 동기가 약간 허망하지만 어차피 요코미조의 세계에서 동기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에게 추리소설은 현실과 무관한 순수한 도락이요, 온전한 즐거움이 전부니까.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빠른 운송수단은 자전거, 비가 오면 하룻밤 쉬어가는 여유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트릭을 만끽할 수 있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서서히 작가생활의 황혼기를 맞아가는 노 추리작가가 느긋한 마음으로 풀어낸, 그래서 독자 역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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