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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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저는 그녀의 이름을 한번씩 쓸 때마다 웬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골수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거의 예수와도 같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오래 되서 누가 한 말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을 X선으로 비추면 추리소설의 뼈대가 나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1퍼센트의 주저도 없이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어요. 적어도 크리스티는 클래식한 퍼즐 미스터리 분야의 창조주요, 그 장르의 완성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요.

 

그러면 크리스티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준 추리소설의 뼈대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 권쯤은 읽어봤다시피(그녀의 판매 부수는 억 부를 가뿐히 뛰어넘죠), 어느 살인사건을 맞아 명탐정이 기회와 동기를 가지고 있던 몇 명의 용의자들 중에서 치밀한 조사와 논리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지적 유희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80권이 넘는 그녀의 소설 대부분이 이런 구조라 빤하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4편의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그 함정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찾는 그녀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10명의 용의자 모두가 범인인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결말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중간에 피살된 판사가 범인이지요. 흔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 시체가 된 인물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독자들의 부주의를 간파한 멋진 트릭입니다. <커튼>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보는 노련한 크리스티의 독자들마저도 빼놓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 즉 에르큘 포와로 탐정이 범인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리스티의 동반자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한 정의의 상징 포와로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퇴역시키다니, 이쯤 되면 어떻게든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크리스티의 집념에 일종의 장엄함까지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추리소설인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부터 등장해 결코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왓슨'역의 화자(포와로 못지 않게 독자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독자는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술하는 화자를 무의식중에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가 범인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포와로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며 충실히 기록하는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질 때 당시 독자들이 느껴던 충격과 분노(?)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페어와 언페어 논쟁이 뜨거울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 기법상의 혁명을 불러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기가 놀라운 추리소설, 혹은 크리스티와 추리소설에 대한 분석서, 독서 행위 자체에 대한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의 문학 교수이자 정신 분석가인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첫 장에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들을 살펴보며(그녀의 작품 수십 편의 스포일러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옵니다), 그녀의 핵심 트릭을 몇 가지로 정의합니다. '위장'은 말 그대로 범인의 특징을 철저히 위장함으로써 범인의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 예를 들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범인은 자신을 시체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전환'은 독자의 주의를 교묘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징표들을 나열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범인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피해자 이름의 알파벳 순서대로 세 건의 살인이 벌어지는 <ABC 살인사건>의 범인은 실은 그중 한 명만이 진짜 목표였지만, 기묘한 연쇄살인이라는 그럴 듯한 외형을 만들어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전시'는 너무도 뚜렷한 단서를 독자의 눈앞에 대놓고 제시해 오히려 이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트릭입니다. 포의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보시길.

 

한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크리스티는 이 방법들 외에 '생략에 의한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트릭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화자인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임에도 자신의 행적을 모조리 다 적을 수 없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죠.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를 전부 적으면 자신의 범행 장면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식 퍼즐 추리소설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본디 고집이 몹시 셀 뿐 아니라, 억지를 쓰면 쓸수록 더욱 굳어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편지를 마저 읽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를 나온 것은 정확히 8시 50분이었다. __<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중에서

실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행은 셰퍼드 의사가 서재에 있다가 별 소득없이 나왔다고 주장한 8시 40분과 8시 50분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셰퍼드 의사는 위에서 말한 이유에 걸맞게 자신의 구체적인 범행 장면을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한 번 생략을 통한 거짓말(즉 셰퍼드 의사의 기술을 이제 누구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을 시도한 셰퍼드가 다른 부분에서 또 비슷한 생략과 거짓말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 본질적인 의문점을 토대로 셰퍼드의 기술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 등을 샅샅이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와로조차 완전히 간과한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읽은 지가 이미 십여년이 지나 피에르 바야르의 이 책을 보다 재미있게 읽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렇게 두 권을 순서대로 보니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의 세세한 설명 하나하나가 너무도 쉽고 재기발랄하게 다가오더군요. 아, 모처럼 정말 짜릿한 추리소설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피에르 바야르의 정신 분석과 문학 비평이라는 두 분야를 오가는 화려한 논리에 흠뻑 빠져서 내내 킬킬 거리고 말았다구요. 비길 데 없는 명탐정 포와로가 순식간에 고집불통 망상 늙은이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하하. 그러나 다만 해석망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은 문외한이 보기엔 지나치게 어려워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미칠 듯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크리스티를 숭배하는 분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경전으로 모시는 분들은 이 책을 보며 어쩌면 우상이 망가지는 데서 오는 불경스러운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수준높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망가뜨린다면(?) 하늘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도 그닥 큰 불평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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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4-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에 이렇게 강력한 지름신을 ;;;;
크리스티 이름 들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 씻고 싶다는 첫문장 읽고 '이건 바로 내 얘기야!!!!' 하면서 구경하러 갔다가 마침 중고가 있길래 바로 주문 버튼 눌러서 결재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_-;;; 땡스투라도 드려야 하는건데 ㅠㅠ 추천이라도 누르고 갑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너무 기대돼요 >_<

비연 2009-04-1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쑈옹~ 넣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해요~

jedai2000 2009-04-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앗^^ 키티님도 크리스티 신자셨군요~ 넘 반갑습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소개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이 친구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도 깠(?)다니, 너무 보고 싶네요 ㅠ.ㅠ 챕터3이 제 수준에 지나치게 어려웠는데, 다른 장들은 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좋은 말씀 넘 감사드립니다 ^^

비연님...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시고 연달아 읽으심 쵝오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듯 하옵니다 ^.~

젠장 2009-05-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는 문장은 못 봤네요. 안돼 ㅠ.ㅠ

jedai2000 2009-05-2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님...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더 눈에 확 띄는 곳에 써뒀어야 하는데...추리소설을 읽을 때 스포일러 뿌리는 사람만큼 증오스런 게 없죠. 본의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절규성 살인사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절규성 살인사건>의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지형도 안에서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좋은 맞수가 되는 것 같다. 각각 도시샤 대학과 교토 대학의 미스터리 창작 동호회에서 습작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다, 80년대 중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아리스는 아유카와 데쓰야, 유키토는 시마다 소지라는 거장급 멘토의 추천을 받고 데뷔했으니 얼추 그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확실한 팬 베이스를 만들어준 시리즈를 둘다 보유하고 있는데, 유키토는 위에서 말했듯 그 유명한 '관 시리즈', 아리스는 현재까지 4권이 나온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그 밖의 대부분의 작품이 포함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미스터리 스타일은 어디까지나 다른데, 유키토가 기발한 서술 트릭과 깜짝 놀랄 만한 반전, 하나하나 기괴한 개성을 가진 저택 등 추리소설다운 분위기를 강조한다면, 아리스는 철저한 논리와 페어플레이 정신, 주인공들의 행동과 심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간미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유키토는 독자의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보통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곤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도 등장시키는 등 다소 무리한 수도 주저없이 쓴다. 사회파의 거두 마쓰모토 세이초가 리얼리티가 부족한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결점으로 지적했던 '요란뻑적지근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추리놀음'을 아예 시리즈 테마로 잡았으니 역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도 없다.


반면에 아리스는 유키토처럼 여러 번 뒤집히고 끝에 가서 한 번 더 뒤집는 그런 결말보다는, 살인사건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앞에 제시하고 탐정과 조수가 단서를 하나둘씩 수집해 냉철한 논리로 핵심에 파고 드는 고전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배경도 유키토처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저택이 아니라, 산 속 휴양림, 외딴섬 등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가 서양 미스터리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엘러리 퀸이라고 하는데, 과연 일본판 엘러리 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다. 왜 반전의 깜짝쇼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작품 앞부분에 공들여 쌓아둔 설정이 뒤의 반전과 충돌하면서 작품의 내적 구조가 스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악수가 나오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아리스의 작품은 건실한 돌탑을 보는 것마냥 단단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화려한 기술을 가진 유키토는 도미, 아리스는 가자미인가-_-;


꼭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유한 스타일일 뿐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아니니까. 나는 유키토의 신작을 보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독특한 저택이 나올까, 무슨 반전으로 뒷통수를 때릴 것인가 기대하며 그가 공들여 안배한 설정들을 즐거이 소비한다. 아리스의 작품을 보면서는 꼼꼼하게 타임 테이블을 그리며, 얘는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으니까 절대 범행이 불가능하지, 하면서 나름의 논리와 소거법으로 범인을 맞춰보려 노력하는 맛에 빠져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 과연 추리소설의 재미란 이렇게나 다양한 법이군.


어쩌면 유키토의 장기에 도전하고 싶었던 걸까. <절규성 살인사건>은 '관 시리즈'처럼 6개의 기묘한 외형을 가진 건물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다(표제작인 '절규성'은 실체가 있는 건물은 아니다).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에 나온 에가미 선배와 풋풋한 대학생 아리스가 주인공이 아니라, 국내에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서 첫 선을 보인 바 있는 임상범죄심리학자 히무라와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 탐정과 조수 역으로 사건을 푼다. 그러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란 말씀. 표제작을 제외하고는 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아주 난해하지도, 여러 번 꼬여 있지도 않은 깔끔한 추리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들의 수준 편차도 별로 없이 적당한 재미가 다 있어 한마디로 만족스럽게 읽었다. 경천동지할 트릭이나 경악스런 반전은 없지만, 해답을 알고 나면 무릎을 한번 탁 치게 되는 절묘한 맛이랄까(위에서 '관 시리즈'와 비교했지만, 건물의 구조나 특징을 이용한 단편은 몇 개 없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모든 내공이 응축된 그런 대작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크게 머리 쓰고 싶지 않고 기분 좋게 책장을 열었다가 개운한 맛으로 덮고 싶은 그런 심정의 독자라면 충분히 좋아할 단편집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비행청소년 남녀가 폐쇄된 호텔 설화루에서 노숙하다 그중 남자아이가 추락사하는 '설화루 살인사건'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미숙한 두 아이가 때로 싸우고 소리치고 서로를 원망하다, 그래도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는 따뜻하고도 쓸쓸한 이미지가 뇌리에서 오래오래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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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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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벌써 작년인가, 인기 여성 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잘하는 보컬 태연 양의 아버님과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말씀은 그분의 아버님(태연 양의 할아버님)이 1950년대에 안경점을 여셨고, 아버님은 1980년대부터, 그 아드님(태연 양의 오빠)도 가업인 안경점을 이어받기 위해 안경 관련 학과를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삼대가 같은 일을 한다라. 요즘같이 휙휙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가족이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다는 건 당연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는 데는 그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준 직업인으로서의 올곧은 자세,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커다란 의미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경관의 피> 역시 경찰이라는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리는 장편소설이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도처에 부랑아들이 들끓고 범죄가 빈발하는 생지옥이 된 일본(물론 자업자득이다만). 치안을 위해 그저 그런 교육만 몇 달 받으면 경찰이 될 수 있었던 시대다. 막 임신한 아내를 둔 안조 세이지는 생계를 위해 경찰에 투신해 하급 순사가 된다.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다같이 못 사는 처지에 남을 등 처먹는 사기꾼도 잡고, 어려운 사람 돕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단칸방이나마 마련할 수 있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오손도손 지내는 거지만. 서서히 공을 세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덴노지 주재소에 부임한 세이지는 몇 년 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모의 남창 살해사건을 끈질기게 조사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다.

 

듬직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늘 동경했던 세이지의 장남, 다미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다. 다미오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것. 하지만 다미오가 경찰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전공투'라 불리는 좌파 학생운동이 극심했던 1960년대 초. 다미오는 훗카이도 대학교에 위장 입학해, 흔히들 프락치라 부르는 스파이가 된다. 아버지처럼 평범한 경관이 되어 서민을 돕고 싶었지만, 노도 같은 시대의 흐름이 그의 작은 소망을 외면한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생명이 위험한 스파이 생활을 몇 년 겪고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져버린 다미오는 이제 폭력남편에 불과하다. 더 이상 스파이짓을 하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간신히 일반 제복경관이 된 다미오는 지역의 평범한 소시민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예전의 꿈을 이루며 서서히 바른 정신을 회복한다. 그러나 아버지 세이지와 관련된 과거 때문일까. 다미오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이제 바톤은 손자 가즈야에게 넘어왔다. 50년을 넘게 끌어온 일족의 비극의 역사를 해결해야 할 숙명을 가진 가즈야의 활약을 지켜보시길.

 

두꺼운 책으로 2권 분량이지만 숨 쉴 틈 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없이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묘하게 박력 있고, 흡입력이 뛰어나 이게 거장의 솜씨구나, 했다. 작가 사사키 조는 1979년에 데뷔해 모험소설, 첩보소설, 하드보일드 등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왔는데,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스파이전을 소재로 한 1990년작 <에트로프발 긴급전>이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든 작가로 이 작품도 국내에 소개된다니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경찰소설에 매진한다는데, <경관의 피>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베스트 1위에 올라 노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2008년 일본 미스터리의 정점에 오른 <경관의 피>는 또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경관 삼부자의 이야기 속에 담아내 시대소설 혹은 사회소설의 맛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1940년대 세이지의 사건이 강매, 야바위, 들치기 같은 소박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 다미오의 그것은 좌익 세력에 의한 폭탄 테러 등이고, 1990년대 가즈야는 마약이나 권총 밀거래, 동료 경관의 독직 사건 등을 수사하는 것이 시대상을 절묘하게 반영한 듯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미스터리보다는 감동과 인간, 긍지 높은 삶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라고는 해도 미스터리 구조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더 허약했다는 약점, 또 공공봉사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부정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경찰관'에서 도덕적 모호함을 강요받는다는 찝찝함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책이든 어떤 작가든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고, 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 즐거웠다. 무엇보다 경관이라는 직업 속에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가족과 직업윤리, 명예와 긍지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경찰의 이미지란 흔히 정권의 시녀로 약한 시민들 때려잡고, 뒷돈이나 받는 불한당 정도에 그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민의 안녕을 위해 생명을 걸고 분투하는 경찰도 분명히 있다. 앞으로 나쁜 경찰은 나쁘다고 계속 욕하더라도, 좋은 경찰, 훌륭한 경관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시민은 경찰을 돕고, 경찰은 시민을 지키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관의 피>같이 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잘쓴 소설이 나와 그런 사회 풍조 조성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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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 블로그에 멋진 리뷰를 보고 싶으면 제다이님 블로그로 가보래서 와봤읍니다.정말 리뷰 멋지시네요.종종 놀러 오겠읍니다^^

jedai2000 2009-03-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카스피님^^ 멋진 리뷰라니 완전 감격이어요 T.T 한동안 서재에 안 와봐서 이렇게 기분 좋은 칭찬 글을 못 봤네요. 좋게 말씀해주시는 카스피님 같은 분들 때문에 리뷰쓰는 보람을 느껴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__)
 
아자젤의 음모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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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의 러시아는 내게 신비와 낭만으로 가득찬 시대다. 둥그런 지붕의 교회당과 돌바닥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륜마차들.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양산을 쓴 숙녀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차르와 대공, 왕녀, 귀족들, 그리고 요사스런 만능의 라스푸틴까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19세기 문학이나 예술, 철학 사조 등이 비교적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된 데 비해 구소련과 관계된 정치적 문제로(주로 1980년대까지) 제정 러시아에 대해서는 사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해볼 기회가 적어 어쩐지 더 호기심이 가는 듯하다.

 

<아자젤의 음모>가 1867년을 배경으로 청년 탐정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몹시 관심이 가서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 요 며칠 동안 정말 즐거웠고, 좀 과장해서 독서의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그토록 궁금했던 제정 러시아의 뒷골목과 선술집, 경찰서, 호텔, 대저택까지 진부한 표현을 용서한다면 마치 그곳을 직접 거닐어보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정말 19세기의 고전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감 가는 인물들이 가득하고, 플롯은 요즘의 현란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지나치게 꼬여 있지 않다. 뒤마나 코난 도일, 쥘 베른 등의 작품을 읽듯 즐거운 기분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일급의 대중소설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한때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고아 신세가 된 약관의 판도린은 경찰서의 최하급 서기로 출발한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별일도 아닌데 다짜고짜 권총으로 자살한 어마어마한 거부의 아들, 코코린. 다들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유약해, 하고 말지만 판도린은 자살 직전 그의 행적과 목격자들의 각기 다른 증언, 묘한 유언장 내용에서 심상찮은 느낌을 받고는 월급을 쪼개 독자적으로 수사에 나선다(용의자 추격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월급으로 사려던 빵을 포기하고 오늘날의 택시와 같은 마차를 타는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코코린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는 걸 밝혀낸 판도린은 전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국가 전복을 꾀하는 '아자젤'이라는 조직에 대해 알게 된다. 자, 여기서부터 판도린의 모험은 논스톱이다. 우리의 판도린은 죽음의 위기를 두세 번 겪으며, 혼이 빠지도록 아름다운 두 명의 미인을 만나게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장기인 숨 참기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역전을 일구어내기도 하며, 명석한 추리력으로 결국 아자젤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성공한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은 본명이 그리고리 샬로비치 치하르티시빌리(기, 길다,,)라는데 일본 문학을 평론하고 번역하는 등 러시아 문학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란다. 아쿠닌이라는 필명은 일본어로 악인(惡人)이라는군. 1998년에 <아자젤의 음모>로 판도린 시리즈를 시작하고 나서 판도린이 활약하는 총 10권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재미난 건 각 작품마다 추리소설의 소 장르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 <아자젤의 음모>는 음모 추리소설, 동시에 출간된 <리바이어던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식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판도린 10권을 다 읽으면 추리소설의 모든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정말 제발 전권을 보고 싶다. 사실 시리즈 전작 출간이 얼마나 리스크가 크고, 만만치 않은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판도린 시리즈만큼은 진심으로 전작 출간을 졸라보고 싶어진다.

 

내 생각에 판도린은 셜록 홈스, 브라운 신부, 필립 말로 등 어떤 탐정과 비교해도 그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약관의 소년에 가까운 나이에 가끔 머리를 똑바로 쓰기도 하지만, 역시 미숙한 나이답게 어리버리한 실수도 곧잘 저질러 정말로 귀엽다. 팜므파탈의 매력에 휘둘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해서 공적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고속 승진을 하는 장면들에는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 <아자젤의 음모>는 우리의 판도린을 소개하는 스핀오프에 가까운 느낌인데, 그가 어떻게 차르의 나라에서 청년의 나이로 요직에 오르는가, 어떻게 새까만 머리의 귀밑 머리만 하얘졌는가, 왜 명랑한 웃음을 잃고 술에 절은 주정뱅이가 되었는가, 그가 어린 시절과 어떻게 작별하게 되었는가가 그려진다. 흐뭇하지 못한, 아니 너무도 처절한 마무리가 오래도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결말의 여운은 아주 길게 남을 것 같다. <아자젤의 음모>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은 당장 속편 <리바이어던 살인>을 읽는 것뿐. 낭만이 가득찬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꼭 안아주고 싶은 판도린 탐정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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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1-0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샀지만 아직 읽진 않고 있었는데 오늘이라도 당장 읽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리뷰입니다.^^;; 그러나 아직 읽는 중인 책이 2권..후.. 후딱 끝내고 이 책을 잡아야겠군요.+_+

BRINY 2009-01-0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관이라면 몇살일까요? 흥미를 유발하네요

jedai2000 2009-01-0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당장 읽으세요. 절대로 후회 안 하십니다! 재미없으시면 제가 환불....은 못해드려요 ㅎㅎ

브리니님...지금 곁에 책이 없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23일 겁니다 ㅎㅎ 잼있어요. 꼭 보세요^^

보석 2009-01-06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2권이라니까요;; [얼어붙은 송곳니]랑 [최후의 알리바이]. 송곳니는 거의 다 읽었고 알리바이는 이제 60쪽 정도 읽었음. 더 이상 섞어버리면 과부화가 됩니다.;;
그리고, 재미가 없으면 제다이님 서재에 와서 드러누워야겠군요.-ㅂ- 절 이렇게 혹하게 하셨으니.

Kitty 2009-01-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리바이어던 살인을 읽고 있는 1인 ㅎㅎㅎㅎㅎ
워낙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을 좋아해서 리바이어던을 먼저 잡았어요 ^^
한 70페이지쯤 남았는데 벌써 사람은 수두룩하게 죽었고;; 흥미진진하네요. ㅋㅋ
다만 번역이 자꾸 걸려서 그게 옥의 티입니다. 한글번역은 좋은가봐요 ^^

siesta 2009-01-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고 책사러 들어왔다가 이쪽집은 또 첫방문이라,,어딜가도 제다이시네요 ^ ^

jedai2000 2009-01-0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보석님이 제 서재에 오셔서 드러누우시면, 전 빈 보석님 서재로 가서 차지할 거예요 ㅎㅎ 이참에 서재 체인지^^?

키티님...아항, 영어로 보시고 계신가 봅니다. 아주 솔직히 말씀드려 한글 번역도 군데 군데 걸리는 곳이 있답니다 ^^

시에스타님...기분 좋은 아이디네요^_^ 저는 리뷰 같은 거 쓰면, 제 개인 블로그, 해당 책을 낸 출판사의 카페, 하우미스터리, 여기 알라딘 서재에 올려요. 너무 중복이 많은 것 같아 알라딘 서재는 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작년부터 1년에 10여편 정도 쓸 정도로 리뷰 양이 줄어 그냥 알라딘도 올리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

siesta 2009-01-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저 슾입니다. ㅎㅎㅎ

jedai2000 2009-01-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님...ㅎㅎㅎㅎ 반갑습니다 ^^

siesta 2009-01-2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은 스프,,,,, -- ㅎㅎㅎㅎ

jedai2000 2009-01-20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님...압니다 ㅎㅎ
 
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에 아르바이트(이하 편하게 알바로^^) 한 번 안해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한창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대학생 때 놀고도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돈은 없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알바를 해본 적이 있다. 나와 친구 3명이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내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딱 3일 나가니까 힘들고 귀찮아서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갔다가 미모의 여대생이 내일부터 알바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고, 친구들과는 먼저 말 붙이는 사람이 승자로 만원빵 내기를 했지만 다들 소금쟁이 사촌 소심쟁이인지라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고 묻은 돈으로 노래방을 갔던 찌질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인사이트 밀>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자동차가 있으면 여친이 자동으로 생길 것 같아 방학 때 알바를 뛰어서 자동차 마련(과 더 중요한 여친 마련)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아르바이트 잡지를 뒤적이던 주인공 유키. 그런데 잡지 구석에 실려 있던 인문과학적 실험의 지원자를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기겁을 한다. 시급이 무려 11만 2천 엔이라는데...100엔당 원화 환율이 700, 800원대였던 작년과는 달리 최근 환율이 1천 500원이니까, 대충 한 시간에 17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여기서 잠깐 딴 소리, 경제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엔화 환율이 1년 사이에 두 배나 더 뛰다니 비정상적인 일인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음...아무리 생각해봐도 작년과 달라진 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2008년 11월 현재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시급을 보고 유키는 당연히 실험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헌데, 실험 장소는 구비구비 깊은 산중에 있는 기묘한 생김새의 원형 건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건물의 이름하여 '암귀관'. 유키를 비롯한 실험 참가자는 모두 12명으로 불세출의 미남부터, 신비스러울 정도의 우아함을 갖춘 미소녀, 나이도 많은데 로커 차림을 고수하는 아저씨까지 몽타주만 봐도 범상치 않은 그룹이다. 자, 이제 배경과 인물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면 이제 인문과학적인 실험 내용만 공개되면 되는데...


하나, 참가자들은 암귀관에서 일주일간을 외부와 완전 격리된 채로 지내야 한다. 각자의 방과 더불어 적절한 의식주는 보장된다.
둘,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면 시급 2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셋,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탐정이 되어 살인자를 밝혀내면 시급 3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등등.


어쩐지 참가자들 사이에 살인을 부추기는 룰이다. 더구나 참가자들은 고전 추리소설의 흉기 한 가지씩을 복불복으로 지급받은 상태. 유키가 받은 건 셜록 홈스 <얼룩끈>에 나오는 부지깽이다. 이래서는 언제 어디서 살인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사실 12명이 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나가기만 해도 시급이 워낙 세기 때문에 일주일에 1천 800만 엔이라는 거액이 보장되는지라 멤버들은 그렇게 하기로 신사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평온하게 참가자들이 수다나 떨면서 일주일을 때우다 나가는 이야기라면 굳이 책으로 쓸 이유가 없겠지. 다음 날부터 12명의 참가자들은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유독 촉이 빠른 분들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집어들 것이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날 끝을 보고 대만족의 환성을 지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몇 명의 참가자가 서로를 죽인다는 설정에서 <배틀 로열>을, 비정상적인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 <큐브>나, 연쇄살인이 철저하게 게임 감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본 드라마 <극한추리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러 장면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 같은 고전 걸작 추리소설에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 지급되는 흉기는 전부 잊지 못할 걸작 추리소설들의 소품이라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 흐뭇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등의 소소한 사건들을 소박하게 풀어나가는 일상계 추리소설로 명성을 떨쳤지만, <인사이트 밀>에서는 의외로 본격 추리소설의 약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작위적인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속도감이 넘치면서 젊은 층의 구미에도 딱 맞는 게임 감각의 재미로 충만한 새로운 스타일의 본격 추리소설을 내놓은 게 이채롭다. 요 몇 년 사이에 나온 책 중 재미 만으로는 최고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결말도 본격풍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진상을 도출해내는데, 범행의 진짜 목적이나 동기 같은 부분까지는 몰라도 단순히 범인을 맞추는 것만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걸 유일한(억지로 찾자면) 약점으로 꼽고 싶다. 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요즘같이 흉흉한 시국에 골 아픈 건 읽기 싫고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집어라.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키리고에...>를... 죄송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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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11-26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제목 보고 얼른 달려왔어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Apple 2008-11-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던 책인데 재밌나봐요~~저도 담아놔야겠습니다.^^

그린브라운 2008-11-2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좋아하는 작가네요 ^^ 기대됩니다

보석 2008-11-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읽기 전엔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첨부터 책장이 정말 잘 넘어가더라고요.

jedai2000 2008-11-27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제 글을 보시고 귀한 돈을 쓰시는데 감사는 제가 해야죠^^ 제가 그만큼 신뢰를 얻었구나 싶어 기분이 늠흐늠흐 좋네요~

애플님...어떤 메시지나 주제보다 철저하게 재미를 위해 봉사하는 책이죠. 애플님 약간 심각한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떨지 걱정되네요. 재미는 최고예용 ^^

다락방님...앗! 좋아하는 작가시면서 아직 안 읽으셨다니 이 잼있는 책을...무지 잼있으니 기대하세요 ^^

보석님...페이지 빨리 넘어가고 잘 읽히기로는 비교할 책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작가가 속편을 써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