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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의 묘성 - 전4권 세트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보통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원하고 바랐던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했을 때 특히 하늘을 운운하며 책임을 돌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자주 듣다보면 불퉁스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아니, 잘 되면 제 탓이고 못 되면 하늘 탓이란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그 말이 맞구나 하고 납득하게 된다. 60억의 인구 중 하늘을 이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광대무비한 하늘의 섭리를 어찌 거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내려주는 그늘 아래 사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어찌 불복할 수 있겠는가.
<창궁의 묘성>은 이러한 하늘의 뜻을 받은 인물들이 역사의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는 역사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청나라 말기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19세기 말. 일본 작가가 썼지만 중국이 배경인 셈이다. 확실히 중국은 그 넓고 깊은 역사로 인해 동아시아 작가들에게 언제나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 하기야 <삼국지>만 해도 벌써 몇 번을 우려내었는가.
외세의 침탈로 인해 피폐해진 중국의 시골 마을, 가난한 말똥주이 소년 이춘아와 지방 부호의 서자 양문수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마을의 점쟁이 백태태에게 각각 미래의 예언을 듣게 된다. 백태태는 춘아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는 모든 별의 우두머리인 묘성이 떠 있었다고 말해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역대로 묘성이 떠 있던 사람은 징키스칸과 건륭제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알다시피 천하의 모든 재물을 움켜쥐었단다. 이제 고달픈 현실을 넘어 꿈을 꾸게 된 춘아에게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한편 양문수에게는, 곧 과거에 장원급제해 ‘진사’가 될 것이며, 황제를 보필해 천하만민을 위한 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떨어진다. 고난이 가득한 삶이지만 명예를 잃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초반부의 최고 재미는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는 것을 묘사하는 장면에 있다. 춘아는 그토록 원하던 재물을 얻기 위해 살아있는 보살이라 불리우며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한 서태후의 측근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하지만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그가 어찌 황궁에 입성할 수 있겠는가. 번민하던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된다. 이 과정은 세심한 취재를 통해 너무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특히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럽다. 이제 환관이 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서태후는 변덕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실수한 환관을 죽을 때까지 매를 내리는 걸 반찬삼아 식사를 할 정도다. 이런 서태후를 모시고 출세하라니, 일단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렵겠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춘아는 약간의 운과 타고난 좋은 성품으로 인해 결국 태후마마가 가장 사랑하는 측근이 된다.
한편 양문수는 과거 시험을 보고 하늘의 별을 움직인다는 ‘진사’에 장원급제한다. 중국 수천만의 선비들이 그토록 원하던 문치주의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 시험이 어찌나 어렵냐면은 시험 보는 도중 응시자들이 미쳐나갈 정도다. 양문수의 옆자리에서 시험을 보던 응시자는 아흔이 넘은 노선비. 자기 답지를 채워나가기도 바쁜데, 옆에서는 이 노인이 계속 피를 토한다. 노인을 돌봐주느라 시험을 망치기 직전에 온 양문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해보라. 작가 아사다 지로가 공들여 쓴 이 장면의 몰입감은 정말 놀랍다. 결국 예언대로 젊은 황제, 광서제를 보필하게 된 양문수는 갈고닦은 학문으로 황제를 도와 변법을 선언하지만 필연적으로 구세대 정치인 서태후와 격돌하게 된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나 이토록 방대하고 촘촘한 이 작품을 몇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작품은 결국 본인이 읽어보고 그 감동을 느껴볼 수밖에 없다. 역사 시간에나 짤막하게 배운 인물들이 살아 숨쉰다. 영욕의 인생을 산 ‘철의 여인’ 서태후 자희부터, 강유위(캉유웨이), 담사동 등의 변법 동지, 원세계, 영록 등의 매국노, 증국번, 이홍장 등의 청말 명신까지 등장인물들도 다채롭다. 심지어 소년 모택동도 나온다. 다루고 있는 시기도 다양해 청말뿐 아니라 건륭대제와 조혜 대장군,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의 청나라 건국 초기의 위인들도 출현한다. 여담이지만 건륭제가 짝사랑했던 향비와의 이야기가 특히 안타까웠다.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이 이국의 공주에게 반한 건륭제는 모든 것을 다바쳐 그녀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녀를 얻지 못한다. 철인 건륭제는 여기서 황제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작품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이토록 많은 인물들에게 총천연색 옷을 입힌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고 말았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 <칼에 지다> <프리즌 호텔>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해본 작가인데 앞으로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군에 넣고 싶은 심정이다. 아사다 지로는 마음이 몹시 따뜻한 작가인 듯 등장인물 모두에게 그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주입한다. 예컨대 폭정을 일삼는 서태후에게도 마찬가지다. 선인과 악인의 대결로 압축되는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향인데 작가의 인본주의적 사상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했다는데, 그 자신감에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는 대작이다.
서두에 하늘의 뜻을 인간이 거역할 수 없다 운운했는데,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게 아니다. 인간의 힘, 마르지 않는 그 정신력으로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단다. 근대 중국에서는 “메이화즈(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한다. 외세 열강의 압박으로 국토가 조각나고, 국민들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감을 상징하는 패배주의적인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춘아와 양문수, 서태후, 이홍장 등의 인물에게 “네버 기브업” 정신을 주입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명예롭고 긍지에 찬 인물들로 그려낸다. 결말부 변법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양문수가 황제에게 보낸 결코 닿을 수 없는 편지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신경이 고장난 사람일 것이다. 진실로 감동적인 작품이며 책장을 덮고도 오랜 시간 잊혀지지 않을 걸작이다.
p.s/ 옛날 한경출판사에서 나온 3권 분책으로 보았습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은 4권 분량입니다. 혹시 달라진 바가 있을지 모르나, 아쉽게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 창해출판사에서 나온 표지를 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