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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한 달 사이에 거의 5권이 나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온다 리쿠의 작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흑과 다의 환상>과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빼고는 국내에 나온 건 다 읽어본 셈인데, 재미있는 사람들 사이의 취향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두고 두 작품 이상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갈리더라 이거다. 어떤 작품은 좋고, 다른 작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고 그저 취향의 차이거니 해야지. 내 취향에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가장 좋았고, <네버랜드>와 <여섯 번째 사요코>는 볼 만했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밤의 피크닉>은 그저 그랬다.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인 <빛의 제국>은 어땠냐고? 개인적으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같은 수준의 베스트고, 비미스터리 쪽에서는 최고로 꼽는다.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집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코노 일족의 사람들은 각각 다른 이의 기억을 읽어내기도 하고,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훤히 듣거나 보고, 바람처럼 날아다니기도 한다.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고 약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 수록된 10개의 이야기들은 그 내용과 이끌어가는 방식,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은근히 도코노 일족의 그림자가 휘감겨 있다. 다소 짧은 단편들이라 이야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작품집은 전체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몸 부분부분이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것처럼, <빛의 제국>에 수록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도코노 일족의 빛과 어둠을, 그 머리를, 몸통을, 꼬리를 하나하나 보게 된다. 그렇게 모인 작은 부분들이 결국 하나의 전체를 이뤄 도코노 일족의 장엄한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뒤표지에 '단편을 읽었는데, 이상하게 거대한 장편의 여운이 느껴진다'는 아마존 독자의 코멘트가 실려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거라고 믿으며, 본인도 크게 동감한다. 근래 들어 이렇게 거대한 여운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스러져가는 도코노 일족의 모습.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꿈꾸며 다시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다 좋지만 역시 표제작인 '빛의 제국'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독자들이 행간에서 도코노 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꾸민 단편들과는 달리 이 단편은 직접 도코노 일족에 얽힌 박해의 역사를 그린다. 태평양 전쟁 무렵 산으로 숨어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민 도코노의 소년 소녀들과 일족의 지도자격인 두루미 선생님, 몇 명의 선생님들. 다들 상처를 안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지만 서로를 위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전황이 패색으로 짙어지자 그들의 초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총칼을 들고 산으로 찾아온 군인들. 군인들의 손에 하나둘씩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을 줄줄 흘려버렸다. 결국 다시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된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만든 기도문만 처연하게 떠돈다.
"우리는 억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실수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이 드는 것처럼,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꽃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풀에 볼을 비비고,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앨매를 따서 먹고, 별과 새벽을 꿈꾸면서 이 세상에서 살자. 그리고 언젠가 이 눈부신 빛이 태어난 곳으로 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자."
10개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의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다른 이야기에서 나오는 등 이어져 있는 것이 많으며, 도코노 일족 시리즈의 제2편 <민들레 공책>과 제3편 <엔드 게임>으로 확대되어 일종의 온다 리쿠표 '도코노 월드'를 이룬다. <빛의 제국>의 이야기들은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장편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소재가 흥미로우며 내용이 탄탄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총력전을 펼치는 심정으로 10개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는데, 이야기 만드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다 덮고 나면 눈 앞에 환한 빛으로 덮여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도코노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 빛은 따뜻한 느낌이 든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빛에 몸을 씻으며 돌아온 도코노 사람들, 그들을 더 알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