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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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태롭고 불행한 일들의 시작이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아홉살 소녀 트리샤에게 일어난 일도 시작은 별 것 아니었다. 부모가 이혼을 한 덕에 엄마 밑에서 오빠와 자라는 트리샤. 그러나 오빠는 매사 불만투성이에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어서 자신을 아빠에게 보내 달라고 매양 엄마와 싸운다. 주말을 맡아 광활한 미국 북부의 애팔래치아 숲을 하이킹하러 온 트리샤 가족. 그러나 트리샤는  쉴 틈없이 투덜대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넌더리가 나 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잠시 멈춰선 트리샤는 길을 벗어나 소변을 본다. 그리고 길을 잃는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그 팀의 구원투수 톰 고든을 숭배하며, 인기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도시소녀 트리샤가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숲속을 헤메게 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공포소설을 잘 쓴다는 스티븐 킹이 이번에도 또 한 번 퍼펙트 게임을 펼쳐내었다. 이번 작품에서의 공포의 대상은 괴물이나 유령은 아니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다. 다름 아닌 숲 자체가 트리샤와 독자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깊은 숲을 가보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으면 무섭다. 더구나 뼈를 닮은 회백색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밤이라면, 아무리 담력이 있는 사람도 혼자서 밤을 지새우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트리샤는 단 아홉 살에 불과하다. 육체적 완력이나 강인함을 기대할 수 없는 연약한 소녀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게다가 숲이 주는 위험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안감을 자극하는 적막과 고요, 틈만 나면 피를 빨려 덤벼내는 모기떼,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비롯한 악천후, 참을 길 없는 갈증과 굶주림까지 숲이 보여주는 공포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얼굴을 바꾸며 트리샤를 압박한다.

 

트리샤는 만루홈런을 맞은 패전투수처럼 이대로 무너지고 말 것인가? 그러나 트리샤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보스턴 팀의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를 이겨낸다. 트리샤에게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힘을 주는 톰 고든이 있었다. 톰 고든은 기아와 질병으로 거의 환각 상태에 이른 트리샤에게 찾아와 승리 공식을 가르쳐준다. 희망과 신념, 집중과 의지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이 작품에서 소녀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 야구라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야구야말로 미국인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길잃은 숲속에서 소녀가 야구 방송을 들으며 철저한 고립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야구장에는 핫도그가 있으며, 콜라와 맥주, 환성과 한숨, 승리와 패배, 경쟁과 화합이라는 미국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홀로 숲속에 동떨어진 트리샤가 절대 맛볼 수 없는 것들이다. 트리샤는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한다. 다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간절한 애원, 그것 뿐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답지 않게 분량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분량 이상으로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숲은 대단히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 책을 덮고 나면 숲에 가보고 싶어진다. 작가가 숲의 여러 가지 풍경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고립과 공포의 순간이 겨우 지나가면 찾아오는 벅찬 풍경들, 별똥별 무리는 하늘 가득 오렌지색으로 수놓고, 새끼사슴과 비버는 눈을 즐겁게 한다. 굶주려 죽어가기 직전 발견한 백옥나무 열매는 어쩌면 그리 맛있을까. 스티븐 킹이 묘사한 숲은 이렇게나 무섭고, 아름답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트리샤를 괴롭히는 대목에서는 조금 눈쌀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감동적인 결말이 모든 것을 보상한다. 숲과의 기나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소녀가 취하는 행동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지 숲이라는 대상만이 공포감의 전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트리샤를 노린다. 숲을 헤매고 다닌 지 며칠째, 트리샤가 자고 일어나보니 둘레는 온통 거대한 발톱자국이고 자신의 몸 주변은 흙으로 빙둘러 원이 쳐져 있다. 너는 내 먹이,라는 표식일지도 모른다.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숲이라는 절망의 공간을 벗어나 희망의 세계로 날갯짓을 펼치는 한 소녀의 믿음과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트리샤의 몸을 빌어 우리에게 공포와 허무, 절망들을 상대로 정면승부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 단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트리샤에게는 그 용기가 있었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p.s/ 요즘 PSP 게임으로 메이저리그 게임을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보스턴 레드삭스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며칠 전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와의 게임 때, 구원투수로 톰 고든이 나오는 걸 보고 무지 반가웠다. 이 작품에서만 해도 보스턴의 붙박이 마무리였는데, 언제 뉴욕으로 갔는지 궁금했다. 참고로 나는 톰 고든을 난타해 강판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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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5 0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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