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지음, 금정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였던 2002년 여름, 방학 중이었던 나는 당시도 솔로라 누구 만날 사람이 있기를 하나, 어디 놀러갈 데가 있기를 하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지막지한 썰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심심타파를 위해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내 최초로 신촌에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비슷한 처지의 연애 낙오자들 몇 명을 모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그날 점심 때쯤 가서 차 끊길 때까지 놀았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개강을 하고 나서도 보드게임방에 상주하며 물경 수백 만원의 돈을 쓰고 배운 게임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보드게임 마니아가 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스코틀랜드야드 게임>도 사실은 유명한 보드게임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원래 5명이 하는 게임으로 1명이 범인이 되어 지하철, 택시, 버스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해 도망치고, 나머지 4명이 형사 팀을 짜서 같은 교통 수단으로 정해진 턴 안에 범인을 잡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범인이 불리하니까 여러 가지 특전이 있는데, 워낙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다니는 범인의 역량에 게임의 재미가 좌우되므로 서로 내가 범인하겠다고 다투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보드게임이므로 5명 정족수가 맞으면 꼭 해보시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은 이 게임의 기본 규칙-정해진 24턴 안에 범인을 잡는다는-에서 착안해 순박한 한 남자가 생기발랄하면서도 아픔을 간직한 여자의 마음을 24일 동안의 만남 안에 사로잡는다는 내용으로 이끌어간다. 줄을 잘못 서서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회사 상사와 유일하게 술을 마셔줄 정도로 착한, 어쩌면 실속 하나 못 차리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차가 끊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24시간 만화카페에 들어가 밤을 새우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울고 웃고 하여튼 소란스럽게 만화를 보는 여자와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데 옛 말에 싸우다가 정든다고 느낌이 그리 싫지는 않다.

 

며칠 후 우연히 병원에 가게 된 주인공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데, 그녀는 생명 수호의 최전선인 병원 응급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사였다. 환자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반해버린 주인공은 외롭던 차에 어떻게 잘 꼬득여서 여자친구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하는데, 이게 웬 걸. 그녀는 애인이 있다는 게 아닌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라지만. 그래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골키퍼도 자리를 비운 상태 아닌가. 용기를 내보려던 찰나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녀의 애인은 몇 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쉽사리 서로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가 아니라 아예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인 셈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걸작 만화 <터치>에서도 보듯이 연적 가운데 최고는 역시 죽은 사람과의 대결.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한없이 예쁘고 멋지게만 미화되는 영영 떠나간 이는 더 이상 이미지가 훼손될 염려도 없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좋았던 그 모습 그대로만 남기 때문에 곁에서 때로 실망도 주고 잦은 만남에 질리게도 만드는 산 사람이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의 주인공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불가능에 도전하려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무엇보다도 단 24일이라는 강력한 제약이 있긴 하지만(왜 꼭 24일이냐고? 독서의 재미를 위해 밝힐 수 없지만 약간은 초자연적인 이유가 끼어든다).

 

작가인 노지마 신지는 내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101번째 프로포즈', '고교교사' 같이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들의 각본가로 명성이 높다는데, 과연 작품 분량의 거의 대부분이 주인공들이 핑퐁같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뤄져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1988년에 데뷔한 작가면 이제는 중견 혹은 노장 축에 들어갈 작가일 텐데도 상대방 말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대사들이 귀엽기 짝이 없다. 아마도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간 자기가 썼던 드라마의 공식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굴곡없는 미적지근한 연애사를 그리면 누가 보겠는가. 필연적으로 남녀 주인공이 죽어 슬픔의 정서를 극한까지 증폭시키거나 요상한 출생의 비밀이 끼어들거나 하면서 과장하기 일쑤인데, 노지마 신지는 자기를 비롯한 작가들이 그런 드라마에서 죽음이 갈라놓아도 언제까지고 사별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만들낸 게 아닌가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자, 죽은 사람과의 추억도 소중하지만 지금 바로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못지않게 소중함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만다.

 

주인공의 사랑의 행방이 결정되는 결말 부분이 약간 급작스럽고 남자 작가가 남자의 시점에서 쓴 작품이라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약간 피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그 사람의 숫자 만큼이나 제각각의 연애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 많은 연애들을 전문적으로 예쁘게 가공하고 포장해 성공을 거뒀던 작가이니만큼 몇몇 장면에서 주인공의 연애 심리에 대한 통찰이 특히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할 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곁에서 지켜주고 기댈 수 있게 도와주는 오빠는 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느끼지는 못할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결국 주인공은 힘들어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준다. 이 순간의 비통하고 헛헛한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역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뜬구름잡는 공허한 이야기보다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쪽에 마음이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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