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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나가시마 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나가시마 유의 2005년도 작품으로 두 개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데도 200쪽 남짓한 페이지도 부담이 없고, 또 너무 미스터리에만 편향된 독서를 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잡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표제작인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무쓰미라는 한 평범한 직장 여성이 직장 동료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가 마음속에 자리잡지만 결국 바라만 보다 끝나는 짝사랑 이야기인데 커다란 드라마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들이 영화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 결국 인연으로 맺어지는 드라마틱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그냥 미소지을 때 어쩐지 쓸쓸함이 감도는 옆얼굴이 마음에 들더라, 하는 식의 소박한 이유가 대다수다.
이 작품에서 무쓰미가 남자 동료에게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순간은 그가 노래방에서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노래 자체도 무난한 히트곡이 아니고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노래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라고 해석될 그 제목을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사실 남자가 무식해서 제목을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런 무난한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왜 이 남자는 그렇게 해석한 것일까, 혼자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설레여 한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슨 뜻일까 하며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괜히 흐뭇해지고 때로 쓸쓸해하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쓰미의 내밀한 심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절망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관찰할 뿐인데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무쓰미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자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에피소드처럼 내일이면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속으로만 삭이는 무쓰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현대의 직장 여성으로서 출퇴근 시간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무쓰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단상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자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뱀처럼 긴 줄을 이루며 출근하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기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앞뒤로 서서 행렬을 이룬다.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실상은 단절되어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출근길에 땅바닥에 덮여 있는 나무판자를 누군가 물이 튀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두었다는 걸 깨닫고 감동받는 무쓰미. 역시 우리는 선의로 이어져 있어, 라고 기뻐하지만 그 감격을 이야기할 상대는 출근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없다. 결국 혼자인 것이다. 아마 나를 비롯해 이 에피소드에 공감할 독자들이 무척 많을 거라 믿는다.
'센스없음'은 표제작보다 더 인상적이고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걸 발견한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빌려놓은 성인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가 쌓이는 걸 알고는 비디오를 갖다주러 대여점이 있는 역까지 걷는다. 남편이 그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눈내린 거리를 사진에 담으며 그저 걷는다. 결국 파국으로 끝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느껴지는 환멸감과 곧 헤어질 거면서 남편의 성인비디오를 갖다주기 위해 걷는 상황의 묘함,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예전 학창시절의 달콤씁쓸한 기억까지 여자의 혼돈스런 사고가 내내 이어진다. 역시 끝까지 큰 사건은 없고 그저 걸을 뿐인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인데도 여운이 굉장히 크고 깊다. 나가시마 유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지만 담백한 심리 묘사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마음을 적시는 여운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재미로 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풍의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