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트로드 모중석 스릴러 클럽 42
로리 로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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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스릴러를 읽는 이유를 스릴러가 가지고 있는 긴박감과 속도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긴박감과 초반부터 몰아붙이는 속도감이 스릴러의 장점이다. 로리 로이의 [벤트로드]는 이런 긴박감과 속도감을 추구하는 독자들이라는 이 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며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소설 전반부에 흐르는 긴장감은 유지하고 있지만, 소설은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감으로 독자를 몰아붙이지를 않는다. 반면 이 소설은 독자들을 1960년대 미국 캔자스 시골 마을로 우리를 데려간다. 광활한 벌판과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이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벤트로드로 불리는 마을은 결코 평온하지는 않다. 벤트로드는 마치 한국 영화의 [곡성]처럼 무언가 심각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같이 타인을 적대하고 의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소설은 디트로이트에서 살던 아서와 실리어 가정이 디트로이트의 흑인 폭동을 겪은 후,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세 자녀인 일레인과 대니얼, 에비와 함께 고향인 캔자스의 시골로 내려간다. 아서가 고향을 떠난 지 25년 만이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아서의 어머니인 리사와 누나인 루스, 그리고 누나의 남편인 레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실리어는 오랜 알코올중독으로 망가진 레이의 눈은 자신의 몸을 음탕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아서의 가문과 마을 전체에는 오래전 죽은 아서의 큰누나 이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져 있다. 웬일인지 아서는 이브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것처럼 여기고, 리사와 루스 역시 이브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루스 역시 이런 죄책감 때문에 한때는 죽은 이브와 결혼을 약속했던 레이와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브를 죽인 사람이 레이라고 굳게 믿고, 그를 경계한다.

아서 가족이 마을에 도착하던 다음날 우연하게도 이브를 닮았던 금발 머리의 소녀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브를 못 잊은 레이의 소행으로 본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레이가 술을 먹고 루스를 구타해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서는 레이를 두들겨 패며,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이제 마을은 사라진 소녀에 대한 공포와 25년 전에 죽은 이브라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겹쳐지면서 어둡고 공포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아서네 가정, 그리고 실리어와 그의 자녀들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드리워진다.

사라진 소녀와 이브의 죽음에 대한 비밀은 거의 소설의 말미에서나 풀린다. 그때까지는 이런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소설에 전박적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브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풀리자, 레이가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아서가 왜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또 마을 전체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비밀들이 모두 풀린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레이라는 인물이 매우 포악한 괴물로 그려지지만, 소설 후반부에 와서는 왠지 레이에 대한 동정이 생긴다. 소설은 주로 아서와 실리어 그리고 그의 자녀들의 여러 시각에서 진행되지만, 주로 실리어와 아들인 대니얼의 시각에서 많이 진행된다. 낯선 도시에 와서 느끼는 도시 여성으로서의 당혹감과 그동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남편에 대한 낯섦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반면 대니얼의 입장에서는 마치 성장소설과 같다. 1960년 캔자스 벌판에서 남자가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에서는 대니얼이 사람을 죽임으로써 남자가 된다. (이 이상은 스포가 되기에 언급을 자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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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합리화의 힘 - 나를 위한 최소한의 권리
이승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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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까지 생기자 가장으로서의 짐이 무거워진다. 가정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끌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는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라고 자부하는 선택도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왜 이렇게 선택했을까 하는 후회가 되는 선택도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아내와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게 된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해서 나와 가족을 힘들게 했을까?’
 
어떤 때는 자기 합리화라는 동굴 속에 잠깐 숨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자기 합리화와 나는 친하지가 않다. 나의 잘못된 선택은 누구의 잘못보다도 내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철저히 모든 화살을 내 자신에게 쏘아 댄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으며 자기 합리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자기 합리화라는 개념을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방어기제라는 것을 설명한다. 방어기재란 자신이 심리적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대응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폭력적으로 대응하거나, 타인이나 세상을 탓을 하거나, 아니면 퇴행이나 억압 같은 극단적인 심리 상태로 반응하는 것이 방어기제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방어기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숙과 미성숙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인조지 베일런트는 방어기제는 성숙한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방어기제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베일런트에 따르면, 자아의 성숙이라는 것은 결국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반면 자기애적이고 미성숙한 방어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신병리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P 31)
 
그러나 저자는 방어기제로 성숙과 미성숙을 구분하는 기존의 심리학에 반대한다. 그는 방어기제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어기제의 대표적인 것이 자기 합리화이다. 자기 합리화란 자기 비난의 화살을 타인이나 세상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 단어가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비난을 통해 스스로 자학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자기 합리화라는 수단을 통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성숙하든 성숙하지 않든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에 더욱 자신을 노출시키고, 그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내려 한다. 못에 찔려 아픈 상처에 소독하고 약을 바르기는커녕 못을 더 깊숙이 찔러 넣어 고통의 극한까지 가보려는 태도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P 50)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시선을 읽다 보면 그것이 무조건 좋다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자기 합리화는 어쩌면 최소한의 자기 보호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합리화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으로 자기를 학대하고, 망신창이가 되어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는 이런 최소한의 수단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하길 원하고 있다.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원하는 세상이다 중략 세상은 내면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상처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더욱 상처를 받으라고, 당신은 잘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항상 남들에게 배우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이런 권유와 충고는 때로는 너무 가혹하다. 우울과 불안은 아랑곳없이 발전만을 강요한다. 진료실에서도 스스로에게 모진 잣대를 적용시키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냉철하고 엄격하며, 잘하는 게 없다며 평가절하하고, 타인을 부러워하며 극한 우울 속으로 빠져든다. 그 속에 나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없다. 무방비 상태로 심리적 공격들을 제 몸을 노출시킨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나를 변호하는 게 무슨 소용 있나요. 난 변호받을 자격도 없어요절망의 절벽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브레이크를 걸기 어려울 정도이다.” (P 114)
 
나의 발전을 위해서, 성수간 인격의 함양을 위해서 타인의 공격과 나의 실수에 비탄과 좌절만을 느끼는 사람의 예후는 어떨까. 뾰족한 자갈만이 깔려 있는 길을 맨발로 걷는, 수고로운 고행을 감내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 사람은 더욱 단단하고 튼튼한 발, 어떤 고통에도 대처할 수 있는 인내력을 원하기에 기꺼이 그러한 일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기 시작한 후 머지않아 발에서 피가 넘쳐흐를 것이며, 감염이 되어 열나고 붓고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걷기 힘든 상황이 올 것이다.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상처만 커졌을 뿐이다.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 못할 상황이 생겨버렸지만, 후회는 늦었다.” (P 116)
 
합리화는 그러한 고통에서 나를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정말이지 어쭙잖은것일지라도,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고통의 순간에 나를 지켜주는 것은 그 하찮은 합리화이다.” (P 116)

 

 


 

그 동안은 자기 합리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나부터도 자기 합리화를 싫어했고, 자기 합리화의 동굴 속에 숨는 타인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충고를 했다. 상황과 자신을 직시하라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절벽에 몰려 있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그 사람을 절벽 밑으로 미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그 사람이 자기 합리화라는 그늘 속에서 쉬게 해 주는 것도 그 사람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때로는 그런 그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런 자기 합리화가 중독처럼 매사에 지나치게 작동을 하다 보면 이 또한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 부분은 적절하게 나 자신에게 사용해야 할 나의 마지막 보호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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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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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여러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혀 있었다. 특히 내가 가입했던 서클이 조금은 불량서클 비슷해서인지, 복잡한 선후배의 관계에 얽혀서 무척 스트레스를 받아던 기억이 난다. 한 번 이렇게 얽힌 인간관계는 좀처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혀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런 동아리도 들지 않고, 선후배와의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고, 혼자 책만 읽으며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새로운 시도는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곧 다시 이런저런 인간관계에 얽히고, 새로운 동아리를 들고, 다시금 북적북적하고 여기저기 얽히는 인간관계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풋풋한 고등학교 1학년의 주인공이 중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는 이야기가 있다. '고전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추리소설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가 쓴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의 고바토 조고로와 오사나이 유키가 그 주인공이다. 흔히 소시민 시리즈로 불리는 이 작품은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탐정 행세를 하던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고바토는 스스로 터져 나오는 추리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탐정 행세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재수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보아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조용한 소시민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런 결심은 오사나이도 마찬가지이다. 둘은 서로의 소시민적 삶을 지지하지만, 친구이기는 애매하고, 연인이라고 하기는 더 애매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의 둘이 붙어 다니며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난다. 고바토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한다. 때로는 오사나이의 핑계를 대면서 서로를 감추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잠자고 있던 고바토와 오사나이를 잠자는 본능을 자극하는 일이 발생한다. 자신을 감추고 오로지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는 오사나이가 벼르고 별러서 구입한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를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오사나이가 아끼던 자전거와 함께... 더군다나 이 자전거가 범죄에 이용되면서 오사나이는 교무실로 끌려다니는 일이 발생한다. 겨우 자전거를 찾았지만 자전거는 온통 부서진 상태이다. 이제 잠자고 있던 고사토의 본능이 깨어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고바토가 아니라 오사나이였다!

소설의 초반에는 주로 고바토에 중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오사나이는 고바토 등에 숨어서 자기를 감추고, 낯선 사람과 대면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키 작고 마른 여자아이로 묘사된다. 특히 오사나이는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한다.

"세일러 교복을 입은 오사나이는 존재감을 억눌러 '음울', '수수', '음침'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오늘 오사나이는 복숭앗빛 탱크톱에 하얀 상의를 걸치고 무릎 위까지 오는 크림색 데님 바지를 입었다. 단발머리는 낙낙한 가죽 모자에 덮여 눈에 뜨지 않는다. '평소에는 발랄한 여고생, 하지만 오늘은 조금 울적해'라는 분위기다. 같은 반 아이들 눈에 띄어도 언뜻 보면 오사나이 유키인 줄 모를 것이다." (P134)

그런 오사나이의 봉인 되었던 과거의 모습이 처참히 부서진 자전거와 사라지 딸기 타르트 때문에 깨어난다. 이런 오사나이를 각성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고바토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 겐코에게 오사나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옛날에 여우였다면, 오사나이는 늑대였어." (P267)

봄날에는 모든 것일 설렌다. 화사한 벚꽃과 날리는 꽃잎들, 신학기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그곳에 연인도 친구도 아닌 남녀 고등학생, 그리고 이들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 모처럼 밝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었다. 혹시 봄날에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이 있다면, 기분 전환을 위해 추천하고 싶다. 물론 뒷 부분의 오사나이의 각성으로 조금 분위기가 심각해지나 싶었지만, 이 또한 재미있게 마무리가 된다. 소시민 시리즈는 계속해서 출간된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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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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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꿈을 꾼다. 백마 탄 멋진 왕자를, 아름다운 궁정과 같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질 로맨스를...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소녀들은 이렇게 꿈을 꿀 것이다. 그런데 항상 이런 로맨스는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삶은 장미 빛보다 진흙 빚을 닮아 있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진흙 빛 속에서도 장비 빛을 피워내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그래서 삶은 살아간다고 표현하지 않고, 살아낸다고 표현하는 것 아닐까.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내 계획과 다른 현실 앞에서도 그 삶을 억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이기며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 요즘 드라마로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임당 빛의 일기]의 원작 소설이다. 우리는 흔히 사임당을 생각하며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조선의 천재로 불리는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로만 생각한다. 특히 시와 서화에 능한 고귀한 여인의 이미지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임당을 굴곡진 삶을 산 영인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먼저 현대의 지윤이란 여성을 이야기한다. 지윤은 일류 대학의 강사이면서, 정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이다. 출세 가도를 달리는 남편과 자식과 며느리, 손자 자랑에 바쁜 시어머니, 그리고 너무나 똑똑하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아들을, 지윤에게는 모두 것이 버겁다. 특히 그녀는 정교수가 되기 위해 학계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민 교수의 밑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민 교수가 새로 발견한 안 겸의 [금강산도]라는 작품을 진품으로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다가 학계에서 매장을 당한다. 이런 와중에 그는 사임당의 일기를 발견하고, 그 일기 속에 숨겨진 금강산도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현대의 지윤과 과거의 사임당의 삶이 반복되며서 진행된다. 사임당은 어린 시절 시와 서화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면서 조선의 천재 화가 이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임당이 쓴 시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들의 눈에 거슬리면서 그 화를 당하게 된다. 사임당은 그 화가 이겸에게까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별 볼일 없는 이원수라는 사람과 결혼한다. 소설이며 드라마에서 이원수라는 인물이 너무 형편없이 묘사되어서, 실제 이원수라는 인물이 알았다면 몹시 기분 나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결국 사임당은 항상 사고만 치는 남편과 네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한양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제 그녀에게 삶은 아름다운 장미 빛이기보다는 진흙 빛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삶을 당당히 살아가며 빛으로 바꾸어 간다.

"울먹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임당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다. 삶이 참 어렵다. 매 순간 풀어야 할 문제 같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기에 버틴다.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딸이기에, 어머니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눈물이 그치고 기와집 담장에 피어 있는 분홍빛 패랭이를 보며 웃어본다. 북평촌에서 보던 꽃을 낯선 땅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 (P 189)"



그리고 이런 사임당의 일기를 보며 지윤 역시 무너져 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지윤은 사임당 일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읽은 사임당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사라지고 나앉게 생긴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 같았고, 사임당의 셋째 아들 현룡은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은수 같았다. 어디서 뭘 하는지, 일만 저질러놓고 사라진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지금의 민석과 닮아 있었다." (P 190)



소설은 또 한때 사랑을 약속했으나 서로 다른 길을 가며, 멀리서 서로만을 바라보는 이겸과 사임당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임당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이유를 몰라 20년 동안 파락호로 살던 이겸은 다시 사임당을 만나며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사임당의 아들 현룡을 조용히 후원한다. 이 과정에서 사임당을 적수인 민치겸과 휘음당과도 대결을 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내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임당과 이겸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을 살아내는 삶에 대한 사임당의 열정이 느껴졌다. 아직 상편만이 출간되어서 하편은 읽지 못했지만, 하편에 이어질 휘음당과의 대결과 밝혀질 금강산도의 비밀들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현실의 지윤은 또 그녀의 버거운 삶을 어떻게 이겨낼지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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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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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다시금 읽고 싶어지는 책이 많아진다. 한편으로 내 독서가 너무 편협적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나와 세상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저자의 방대하고 깊이있는 독서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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