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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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나이가 들수록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따스한 분은 아니셨다. 그래도 내게는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분이셨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세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더 나아가 세상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의 관계들이 하나의 단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관계들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나면, 다른 모든 감정들은 사라지고 단순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지면 자기중심적이 되고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계급 갈등, 지역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어려운 것은 이런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사의 감정을 아주 묘한 필치와 세련된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가 있다. SF 작가로는 드물게 흑인이며, 또한 여성인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세계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있다. 그중 계속 소장하면서 읽고 있는 시리즈가 비채 출판사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실력을 인정받은 해외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이다. 이미 단편집인 [블러드 차일드]와 장편소설인 [킨]이 출간되었고, 얼마 전 [와이들 시드]가 출간되었다. 항상 그렇듯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은 환상적이면서도 묘하다. 어떻게 보면 뒤틀려 있는 듯한 괴상한 세계와 그 세계 속의 관계들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필립 K, 딕과 어느 부분에서는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와이들 시드]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의 '도로'라는 존재는 타인의 육체를 바꾸어가며 4천 년간 생명을 이어가는 불사의 존재이다. 도로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손들을 퍼뜨렸고, 이제 이 자손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이주시키면 새로운 종족을 만들고 있다. 그의 목적으로 오로지 자손들의 번식을 통해 강한 능력을 가진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도로가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오지의 부족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300년 동안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야낭우라는 늙은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불사의 몸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치유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육체를 바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숨긴 채 자신의 부족 속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늙어 가는 육신은 타인을 속이는 방법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20살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감추고 있었다. 도로는 이런 야낭우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야낭우 역시 도로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막강한 힘을 느낀다. 도로는 야낭우에게 자신을 따라오고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그녀는 도로의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그에게 저항해 본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쪽으로 빠지는군, 나는 여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 도로. 명령하는 남편은 이미 열 명이나 겪어봤어. 당신을 열한 번째 남편으로 맞이할 이유가 있을까? 거절하면 나를 죽일 거라서? 당신 고향에서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아내를 맞이하나? 죽이겠따고 협박해서? 글쎄, 어쩌면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디 한번 확인해볼까?" (P 48)

 

그럼에도 야낭우는 도로가 사신의 자손들을 죽인다는 협박과 자신에게 죽지 않는 아들을 낳아준다는 유혹에 빠져 그를 따라나선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도로이지만 야낭우의 야생성을 다루기에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도로는 야낭우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이 도로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 된다. 야낭우를 복종시키거나 죽여야 하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

 

"그녀는 돌아서서 도로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뒤따르며 최대한 빨리 아이를 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반항하지도 못할 테고, 독립심은 사라질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죽이기에는 너무 귀중한 존재이지만 후손을 납치했다가는 분명히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보 하는 갓난아기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격리되어 있으면 결국 복종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P 62)

 

도로와 야낭우는 함께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바다에 이르러 도로에게 속해있는 노예선을 타고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도로가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는 한마을에 정착을 한다. 도로는 그곳에서 야낭우를 자신의 아들인 아이작과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아이작은 도로의 아들로 신비한 능력은 있지만, 도로와 야낭우처럼 불사의 존재는 아니다. 결국 아이작은 죽고, 도로와 야낭우는 다시 만난다. 야낭우는 도로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라져 가는 인간성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도로 역시 야낭우가 절실하다. 둘에게는 세월의 시간만큼의 적대감이 있지만, 또한 둘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고 대등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는 전혀 접해 보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SF 소설이라고 정의하기도 힘들고, 판타지 소설이라고도 정의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은 살육과 지배욕의 화신인 도로라는 존재와 생명과 치유의 존재인 야낭우라는 존재의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힘들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과의 관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적대적인 관계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또 다른 단편소설인 [블러드 차일드]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외계종에게 지배를 당한다. 외계종은 인간 아이를 양육하고 키우고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그 외계종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도 아닌, 증오의 관계도 아닌 묘한 관계를 이룬다. 마치 도로와 야낭우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미국사회에서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또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가 속했던 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마치 암호문처럼 자신의 소설에 특별난 존재와 특이한 관계 속에서 펼쳐 놓치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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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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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이 항상 실재 상황이고, 내가 기억하는 것이 항상 진실이라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 놓이고 이로 인해 몸이 아프거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압박을 받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땐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잘못 봤나 보다!' '그땐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왜곡되게 생각했나 보다!'라고 넘길 때가 많다. 심지어 주변 사람까지 그렇게 말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본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할까.

 

[우먼 인 윈도] 속의 여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광장공포증'을 겪고 있는 '애나'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한때 잘나가는 소아 정신과 의사였지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직 혼자 집 안에 갇혀서 창문으로만 세상을 내다본다. 남편과 딸아이와도 별거 중이어서 오직 전화로만 대화한다. (사실은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부분은 나중에 밝혀진다) 하루 종일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오직 니콘 카메라의 망원 렌즈를 통해서 이웃집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바깥세상과의 통로이다. 때로는 인터넷의 SNS를 통해 이웃들을 들여다본다.(이것 역시 가상 공간이라는 의미나 빼면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하루 종일 혼자서 스릴러 고전영화를 보고 의사가 준 여러 가지 약물을 절대로 함께 먹지 말라는 술과 함께 여러 신경안정제들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가 생긴다. 이웃집에 이사 온 알리스타 러셀과 제인 러셀의 가정을 반듯한 소년인 이선이라는 아이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집에 이사 선물을 전해 주러 왔다가 그녀와 대화를 한다. 이선은 대화 중에 친구들과 떨어져 먼 곳으로 혼자 왔다며 갑자기 외로움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그런 이선에게 잃어버렸던 정신과 의사로 직업의식과 함께 모성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따스하게 대한다. 얼마 후 이선의 어머니인 제인 러셀도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병이 발병한 후 처음으로 타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히 러셀의 집의 창문을 보다가 제인이 칼에 찔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급하게 911에 신고를 하고 제인을 살리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광장 공포증으로 인해 순간 정신을 잃게 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의사와 형사, 그리고 이웃집의 러셀과 아들 이선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분명히 칼에 찔린 것을 보았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알던 제인 러셀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으로 판명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헛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광장공포증으로 신경 안정제와 여러 가지 약물을 와인과 함께 먹으며 하루 종일 고전 스릴러를 보는 여자가 본 것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그녀도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게 된다.

 

"락트인 증후군 원인으로는 뇌졸중, 뇌간 상, 다발성경화증, 독극물 등이 있다. 신경학적 증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과적인 증상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말 그대로 감금되어 있다. 문은 잠겼고, 창문은 닫혀 있다. 빛이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공원 건너편에서는 한 여자가 칼에 찔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암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나를 제외하고는. 가족과 별거 중인 데다, 술에 절어 세입자와 섹스를 해대는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웃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형사들은 농담하는 줄 안다. 의사는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물리치료사는 나를 그저 가여운 사람으로 여긴다. 갇혀 있는 여자, 영웅도 탐정도 아니다. 나는 갇혀 있다. 세상 밖에." P 338

 

이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40주 동안 베스트셀러로 1위를 한 작품이다. 게리 올드먼과 같은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어서 곧 개봉할 예정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은 현대인의 심리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잔혹한 환경에 의해 상처받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가두어 두고 있는 현대인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내가 쇼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쇼크는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움은 변형되어 공포가 괴었다. 그리고 필딩 박사가 등장할 때쯤, 나는 극심한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박사는 그렇게 간단하고 효율적인 단어로 내 상태를 표시했다. 나는 이 집이 제공하는 익숙한 경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저 거대한 하늘 아래에서, 외계의 야만의 땅에서 이틀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P 456

 

소설을 읽는 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술과 약물,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한 여성의 심리를 내밀하게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내 안에도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적인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악마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비록 내가 환상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나란 존재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 자신이 존재하며, 그 존재만큼은 진실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보고 있는 것도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며 결국 나마저 나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봤다.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라고, 그럼에도 내가 나만은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마저 나 자신을 믿지 못힌디면 결국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아의 붕괴일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본 것을 믿었다. 남들이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가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정말 그녀가 본 것이 진실이었을까. 궁금한 사람은 소설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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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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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있는 상대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무작정 주먹을 날린다. 그 대가로 망신창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지만,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는 계속해서 상대를 향해 달려든다. 상대는 차츰 그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공포까지 느낀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를 꺽어 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했던 일본과 그 일본을 응징해야 했던 미국의 상황이 아닐까?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으로 돌진했을 때 과연 일본은 스스로도 미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본제국 패망사]라는 책은 열자마자 그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본의 광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번역되기 전부터 [THE RISING SUN]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태평양 전쟁에 관심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이번에 번역이 되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분량과 막대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끓어오르는 기점이 되는 1936년부터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페이지만 무려 1400페이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첫 장을 열자마자 그 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일본은 잔혹한 군국주의의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책장을 열고 처음 접하는 사진들은 태평양 전쟁의 잔혹한 사진들과 일본의 광기 어린 군국주의의 사진들이다. 그리고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폭주하는 1936년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과정은 다큐멘터리나 책을 통해 여러 번 접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태평양 전쟁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물론 저자인 '존 톨런드'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무모한 팽창주의를 지적하면서도 시종 일본에 우호적인 필치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일본이 왜 그렇게 무모한 전쟁으로 폭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대부분의 서양인은 도조 장군과 일본 지도자들이 히틀러나 그의 군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마땅히 무슨 벌이든 받고 불행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일본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재난에서 벗어나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다시 존중받는 지위를 회복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전쟁 중에 번번이 야만족처럼 행동한 나라와 그 국민을 우리가 어떻게 존중하고 칭찬하게 되었단 말인가? 대체로 일본인의 시각으로 본 이 책은 그런 의문과 함께 아시아의 지형을 바꿔놓은 전쟁을 둘러싼 물음들에 대한 필자의 답변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나라가 무엇 때문에 진주만을 공격했고 열 배는 더 강한 적과 죽기 살리고 싸우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을 했단 말인가?" (P 37)

 

이 책의 1936년의 황도파로 불리는 육군의 젊은 장교들의 반란 사건(2.26사건, 또는 쇼와 유신이라고 부르기도 함)으로 시작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 후, 나름 아시아의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열강들처럼 국제공항으로 인한 서민층들의 가난과 자원의 빈곤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남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육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부폐한 관리를을 암살하고, 군인 중심의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며칠 만에 무산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일본의 핵심 권력은 대부분 육군 장교들에게 주어지고, 일본 안에는 군국주의적 야망이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알려진 베이징 근교의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로 인해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겉으로는 아시아를 서구의 열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아시아 전체가 다 잘 살게 한다는 대동아 정책을 주장하며,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난징학살같이 30만 명을 학살하고 강간하는 무자비한 폭력성이 존재한다. 아마 이것이 일본을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일본의 지도부는 중일전쟁의 과정에서 적당한 선에서 중국정부와 전쟁에서 타협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맛을 본 일선 군인들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 정도로 폭주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안정을 위협하는 두 가지 맹독 - 게코쿠조와 기회주의-이 다시 나타났다. 중국에서 또 한 번의 큰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육군대신 스기야마가 협상의 문턱을 높여버렸다. 그런 다음 중국 북부 주둔군 사령관이 예기치 않게 고노에와 참모본부의 특별 명령을 거스르고 베이징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 중략- 장제스가 진정으로 협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 고노에는 평화를 위한 지름길을 택하고 '일본의 이상을 공유하는' 중국인들과 거래하기로 결심했다. 1938년 1월 16일 그는 '제국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할 것이며 협력을 원하는 새로운 중국 정권의 출범과 성장에 의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P 120)

 

그러나 폭주를 막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중국에서의 철수를 결심한다. 그런데 하필 그때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히틀러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가 무력화된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하기는커녕 중국을 넘어 동남아 지역까지 욕심을 낸다. 저자는 이것을 일본의 기회주의라고 부르고, 이 작전을 '버스를 놓치지 마' 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의 전쟁이 1940년까지 질질 끌자, 일본 참모본부는 그해 안에 완전히 승리하지 못하면, 병력을 차츰 철수시키고 중국 북부에 공산주의를 막을 방어부대만 남겨놓기로 비밀리 결정했다. - 중략 - 히틀러의 손쉬운 승리에 도취된 일본군 지도부는 생각을 바꿔 '버스를 놓치지 말자!'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프랑스가 패배하고 영국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상황에서 석유 및 기타 절박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격할 때가 다가왔다. - 중략-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한때, 중국에서 물러나는 것을 감수했던 일본군은 유럽에서 히틀러가 얻은 갑작스러운 행운에 유혹을 받고 동남아시아의 자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P 132)

 

물론 이렇게 파국으로 폭주하는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집단 광기 앞에서 이성적인 목소리는 쉽게 묻혀 버렸다.

 

"버스를 놓치지 마! 정책을 입안한 군국주의자들은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예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가 패배하고 영국이 자체의 생존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일본에게 인도차이나는 고무와 주석, 텅스텐, 석탄, 쌀 등의 자원이 넘치는 '길바닥에 놓인 채 누군가가 주워가기만을 기다리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 중략-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마쓰오카의 반발이 있었다. 또 대본영에서 생각이 더 깊은 사람들은 앵글로색슨 국가와 알력을 빚을 것을 예건 하기도 했다. 이 일로 육군 참모총장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황은 눈물을 흘리며 사직했다." (P 136)

 

이런 과정은 진주만 공습까지 그대로 반복되며 이어진다. 군국주의 집단들이 ABCD국가(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통해 태평양으로의 영토를 확대하려고 하고, 미래를 보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이에 제동을 걸려한다. 그러나 한 번 폭주한 군국주의자들은 결국 6척의 항공모함에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싣고 진주만을 폭격한다. 이 과정에서 도조 총리대신이나 야마모토 함장 같은 군구주의자들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주하게 되고, 결국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폭주를 근원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하극상이라고 부르는 게코쿠조이다. 젊은 육군장교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할복의 형태로 자주 나타남) 폭주하고, 지도부나 정치인들은 마지못해 동조하는 과정이다. 흔히 말하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폭주하는 기관차에 올라타는 형식이다. 아마 지금의 일본인의 정서의 대부분에도 이런 분위기가 팽배할 것이다. 아베 총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동조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회주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의 탐욕이다. 겉으로는 양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회만 되면 승냥이처럼 먹이를 향해 달려든다. 심지어는 그 먹이가 당장은 맛이어 보이지만, 독이 될 것이 분명해도 무조건 달려든다. 당장의 탐욕을 막을 집단적 이성이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만주사변, 중일전쟁, 동남아 침략, 진주만 공습 등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폭주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겉으로는 매우 공손하게 보이지만, 조금의 허점만 보이면 승냥이처럼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과정을 깊이있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동시에 일본이라는 나라 속에 감추어진 본성을 이해하게 하는데 매우 귀중한 책이다. 전체적인 책의 분위기에서 저자는 미국적인 시각에서 일본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쓰고 있다. 아마 일본의 진짜 적은 미국이 아니고 소련이었고, 미국이 조금만 더 양보했으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대신 일본이 소련을 견제했을 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저자의 시각은 현대 미국이 일본에 가지고 있는 시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대상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그럼에도 저자는 나름 일본의 행동 근본에 있는 그들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많은 자료와 그들의 문화를 통해 왜 그들이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깊이 있게 접근을 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일 갈등이 극에 다다르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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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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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의 하나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 생전에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기 있는 있는 작가였던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았을까? 개인적으로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계층 문화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때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읽으며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인기가 있을까? 이렇게 사실적으로 나이지리아 사회를,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데도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읽힐까?'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은 후 읽기 시작했다. 아다치에는 나이지리아의 현대 여성작가이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소설에는 단순히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나이지리아나 아프리카 사람, 더 나아가 흑인들의 전체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한 여성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두들 동경하는 미국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마치 화려한 도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자신을 잃어가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점점 자신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도 언급하지만, 주된 내용은 아프리카인으로서, 더 나아가 나이지리아 인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이 더 주를 이룬다.

 

소설의 초반부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 와서 타인이 보기에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페멜루라는 여성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프린스턴에서 시간강사이지만 교수직으로 일하고 있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온 아프리카 여성들은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하고, 나이지리아에서 사랑했던 첫사랑인 오빈제라는 남성을 못 잊어 한다.

 

"그녀의 영혼 속에는 납덩이가 있었다. 벌써 꽤 오래전부터 그녀는 아침마다 피로, 암울, 이성의 무너짐을 느끼는 병을 앓아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온 형태 없는 갈망, 모양 없는 욕망, 자신이 살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삶에 대한 찰나적 몽상이 몇 달에 걸쳐 서로 뒤섞이면서 사무치는 향수가 되었다. 그녀는 나이지리아 웹 사이트, 페이스부의 나이지리아인들, 나이지리아인들의 블로그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그런데 클릭할 때마다 나오는 것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학위를 따 가지고 최근 금의환향하여 투자 회사, 음반 제작사, 패션 브랜드, 잡지사 혹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남녀들의 사진을 본 그녀는 마치 그들이 자신의 손을 비틀어 열고 그 안에 있던 것을 뺏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무딘 상실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그녀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되었다." (1권, P 17)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오빈제의 시각에서 묘사되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영국 유학 후 나이지리아의 거물의 부정한 일을 봐 주며 나름 성공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치 신기루처럼 여긴다.

 

"레키 고속 도로에 들어서자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차들이 빠르게 움직였고 잠시 후 게이브리얼은 오빈제네 집의 높고 검은 대문 앞에서 경적을 눌렀다. - 중략 - 모든 방이 시원할 테고, 에어컨 통풍구는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며, 부엌은 카레와 타님의 향긋한 냄새로 가득할 것이고, 아래층에는 CNN이 틀어져 있는 반면, 위층 텔레비전에는 카툰 네트워크가 틀어져 있을 것이며, 이 모든 것에는 어느 구우의 침해도 받지 않은 풍요의 분위기가 스며 있을 것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 - 가족, 집, 자동차, 은행 계좌 - 때문에 붕 뜬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고 때때로 모든 것을 핀으로 찔러 바람을 빼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확신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자기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를." (1권, P 43)

 

그리고 소설은 나이지리아에서의 이페멜루의 성장기를 다룬다. 반복되는 쿠데타에 혼란스러운 나이지리아의 상황,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은 모두들 미국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녀는 아버지의 퇴직 이후 겨우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류층과 어울리게 되고, 누구보다도 미국의 삶을 꿈꾸는 오빈제를 만나다. 그녀는 오빈제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미국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고모의 권유를 오빈제보다 먼저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미국은 그녀가 꿈꾸는 곳이 아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장군으로 불리는 남성의 애인이자, 잘 나가는 의사였던 고모는 3-4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페멜루 역시 등록금을 내재 못해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러다가 겨우 백인 남자 친구를 만나서 그 밑바닥에서 탈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이 아프리카너나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자신을 비롯한 아프리카너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블로그에 올리며 나름 미국의 차별 문화를 비판하지만, 어느새 자신 역시 그런 문화 속에 빠져 버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나이지리아로, 오빈제에게로 돌아가는 꿈꾼다.

 

아디치에의 소설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이지리아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나이지리아의 낯선 환경과 문화 종교, 종족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낯선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이 낯섬 속에서 점점 우리와 닮아있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철저한 가부장적인 문화, 남녀 차별의 문화, 계속되는 쿠데타와 부패, 그 부패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들과 몰락하는 사람들, 현실도피를 위해 미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자신들이 꿈꾸었던 미국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는 사람들, 나이지리아에 돌아온 유학생들이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와 너무나 닮아있다. 거친 나이지리아의 환경과 검은 피부색에 대한 묘사 속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낯설고도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을 묘하게 한다. 마치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낯선 음식을 먹으면서 이물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 음식을 맛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거북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소설은 이렇게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거나 인종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주된 뼈대는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사랑 이야기다. 각자가 서로의 삶에서 허상을 쫓아가다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문화나 인종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흥미 있게 소설을 읽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을 더 멋지게 장식해 주는 장식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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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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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결국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난 집을 떠나 가톨릭 선교사의 집에 거처하며 공부를 한다. 그곳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기업도 이루고, 신문사까지 경영한다. 그는 나름 여러 곳에 기부도 하며 지역 사회와 종교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리더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영 다른 모습이다. 아내와 두 자녀인 아들과 딸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한다. 딸이 반에서 1등을 놓치면 불과 같이 화를 내고, 자신의 종교적 관습을 조금이라고 어기면 아들과 딸,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폭력을 가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 대략 그려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힘겹게 공부해서 성공을 이루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7-80년대의 한국 아버지상을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묘사하는 인물은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프리카 중서부의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치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의 모습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인 아다치에의 첫 소설이자,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캄빌리는 과자와 음료수 공장, 그리고 언론사까지 소유한 성공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직 나이지리아 토속 종교를 버리지 못한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강요한다. 당연히 사춘기인 오빠 자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진다. 또 한 번 반에서 1등을 놓친 캄빌리에게도 아버지를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면 캄빌리의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고,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나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난 오늘날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단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P 64)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강요하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공부를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어김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음식을 먹지 않는 공복재의 기간에 캄빌리가 몰래 음식을 먹다가 아버지에 걸린다. 그것을 엄마와 오빠가 감싸주다가 함께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다.

 

"악마가 셋 다한 테 심부름해 달라고 한 거야?" 아버지의 입에서 이보어가 튀어나왔다. "악마가 내 집에 텐트를 쳤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당신은 가만 앉아서 애가 공복재 어기는 걸 모고만 있었어, 미카 은디니?" 아버지가 천천히 벨트 버클을 풀었다. 몇 겹의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벨트에 차분한 색 가죽을 씌운 버클이 달린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오빠에게, 어깨를 가로질러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들어 막는 어머니의 위팔, 성당 갈 때 입은 블라우스 스팽글 달린 부푼 소매로 싸인 위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등에 내려앉았다." (P 131)

 

이렇게 폭력을 행사한 후에는 꼭 딸을 안고 많이 아팠냐고 묻는다. 캄빌리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아버지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하는 종교적 관습뿐만 아니라, 반에서 1등을 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런 캄빌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사람은 그녀의 고모인 이페오마이다. 이페오마 고모는 같은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캄빌리의 아버지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킨다. 그녀와 오빠 자자는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 열흘간 머물며 고모가 보여주는 자유로운 세상을 맞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로 인해서 아버지와의 대립이 더 극단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나이지리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정치적 대립으로 자주 군부의 쿠데타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소설 역시 정확히 어떤 쿠데타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독재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캄빌리의 아버지의 신문사를 억압하고, 비판적인 사설을 쓴 기자를 암살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적인 정권의 시대와 함께 또 한편으로 폭력적인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이 함께 묘사된다. 놀라운 것은 이런 묘사가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폭력과 가정의 폭력이 당연시되고, 그 속에서 항상 폭력을 통해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는 것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다치에를 페미니즘 소설가로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페미니즘에 대해 강의한 유튜브 강의는 550만의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녀를 굳이 페미니즘 소설가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소설은 폭력의 시대, 폭력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그 폭력 속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성의 성장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되는 것은 캄빌리와 캄빌리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오빠 자자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지리아에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존재했고, 그 문화 속에서 여자와 자녀들을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받고 있었다. 소설은 이런 나이지리아의 문화와 독특한 종교적 권위가 존재하는 가정 속에서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캄빌리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독립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은 한국의 가정의 모습과 닮아있다. 한때는 아버지의 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이니 당연히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 맞는 아내나 자녀들 중에는 남편이나 아버지가 사랑하기에 폭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런 폭력은 단순히 가정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심지어 국가 안에서 이런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리더나 지도자는 당연히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위대한 리더나 지도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런 폭력과의 힘겨운 싸움이 있은 후에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 그 폭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을 많이 있다. 아다치에의 소설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자가 남자와 싸우는 것이 아닌, 이런 가부장적인 폭력과의 싸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아다치에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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