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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평점 :

소녀들은 꿈을 꾼다. 백마 탄 멋진 왕자를, 아름다운 궁정과 같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질 로맨스를...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소녀들은 이렇게 꿈을 꿀 것이다. 그런데 항상 이런 로맨스는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삶은 장미 빛보다 진흙 빚을 닮아 있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진흙 빛 속에서도 장비 빛을 피워내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그래서 삶은 살아간다고 표현하지 않고, 살아낸다고 표현하는 것 아닐까.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내 계획과 다른 현실 앞에서도 그 삶을 억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이기며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 요즘 드라마로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임당 빛의 일기]의 원작 소설이다. 우리는 흔히 사임당을 생각하며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조선의 천재로 불리는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로만 생각한다. 특히 시와 서화에 능한 고귀한 여인의 이미지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임당을 굴곡진 삶을 산 영인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먼저 현대의 지윤이란 여성을 이야기한다. 지윤은 일류 대학의 강사이면서, 정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이다. 출세 가도를 달리는 남편과 자식과 며느리, 손자 자랑에 바쁜 시어머니, 그리고 너무나 똑똑하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아들을, 지윤에게는 모두 것이 버겁다. 특히 그녀는 정교수가 되기 위해 학계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민 교수의 밑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민 교수가 새로 발견한 안 겸의 [금강산도]라는 작품을 진품으로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다가 학계에서 매장을 당한다. 이런 와중에 그는 사임당의 일기를 발견하고, 그 일기 속에 숨겨진 금강산도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현대의 지윤과 과거의 사임당의 삶이 반복되며서 진행된다. 사임당은 어린 시절 시와 서화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면서 조선의 천재 화가 이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임당이 쓴 시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들의 눈에 거슬리면서 그 화를 당하게 된다. 사임당은 그 화가 이겸에게까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별 볼일 없는 이원수라는 사람과 결혼한다. 소설이며 드라마에서 이원수라는 인물이 너무 형편없이 묘사되어서, 실제 이원수라는 인물이 알았다면 몹시 기분 나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결국 사임당은 항상 사고만 치는 남편과 네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한양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제 그녀에게 삶은 아름다운 장미 빛이기보다는 진흙 빛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삶을 당당히 살아가며 빛으로 바꾸어 간다.
"울먹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임당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다. 삶이 참 어렵다. 매 순간 풀어야 할 문제 같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기에 버틴다.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딸이기에, 어머니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눈물이 그치고 기와집 담장에 피어 있는 분홍빛 패랭이를 보며 웃어본다. 북평촌에서 보던 꽃을 낯선 땅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 (P 189)"
그리고 이런 사임당의 일기를 보며 지윤 역시 무너져 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지윤은 사임당 일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읽은 사임당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사라지고 나앉게 생긴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 같았고, 사임당의 셋째 아들 현룡은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은수 같았다. 어디서 뭘 하는지, 일만 저질러놓고 사라진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지금의 민석과 닮아 있었다." (P 190)
소설은 또 한때 사랑을 약속했으나 서로 다른 길을 가며, 멀리서 서로만을 바라보는 이겸과 사임당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임당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이유를 몰라 20년 동안 파락호로 살던 이겸은 다시 사임당을 만나며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사임당의 아들 현룡을 조용히 후원한다. 이 과정에서 사임당을 적수인 민치겸과 휘음당과도 대결을 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내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임당과 이겸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을 살아내는 삶에 대한 사임당의 열정이 느껴졌다. 아직 상편만이 출간되어서 하편은 읽지 못했지만, 하편에 이어질 휘음당과의 대결과 밝혀질 금강산도의 비밀들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현실의 지윤은 또 그녀의 버거운 삶을 어떻게 이겨낼지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