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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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나이가 들수록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따스한 분은 아니셨다. 그래도 내게는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분이셨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세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더 나아가 세상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의 관계들이 하나의 단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관계들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나면, 다른 모든 감정들은 사라지고 단순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지면 자기중심적이 되고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계급 갈등, 지역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어려운 것은 이런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사의 감정을 아주 묘한 필치와 세련된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가 있다. SF 작가로는 드물게 흑인이며, 또한 여성인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세계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있다. 그중 계속 소장하면서 읽고 있는 시리즈가 비채 출판사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실력을 인정받은 해외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이다. 이미 단편집인 [블러드 차일드]와 장편소설인 [킨]이 출간되었고, 얼마 전 [와이들 시드]가 출간되었다. 항상 그렇듯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은 환상적이면서도 묘하다. 어떻게 보면 뒤틀려 있는 듯한 괴상한 세계와 그 세계 속의 관계들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필립 K, 딕과 어느 부분에서는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와이들 시드]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의 '도로'라는 존재는 타인의 육체를 바꾸어가며 4천 년간 생명을 이어가는 불사의 존재이다. 도로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손들을 퍼뜨렸고, 이제 이 자손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이주시키면 새로운 종족을 만들고 있다. 그의 목적으로 오로지 자손들의 번식을 통해 강한 능력을 가진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도로가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오지의 부족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300년 동안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야낭우라는 늙은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불사의 몸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치유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육체를 바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숨긴 채 자신의 부족 속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늙어 가는 육신은 타인을 속이는 방법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20살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감추고 있었다. 도로는 이런 야낭우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야낭우 역시 도로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막강한 힘을 느낀다. 도로는 야낭우에게 자신을 따라오고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그녀는 도로의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그에게 저항해 본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쪽으로 빠지는군, 나는 여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 도로. 명령하는 남편은 이미 열 명이나 겪어봤어. 당신을 열한 번째 남편으로 맞이할 이유가 있을까? 거절하면 나를 죽일 거라서? 당신 고향에서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아내를 맞이하나? 죽이겠따고 협박해서? 글쎄, 어쩌면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디 한번 확인해볼까?" (P 48)

 

그럼에도 야낭우는 도로가 사신의 자손들을 죽인다는 협박과 자신에게 죽지 않는 아들을 낳아준다는 유혹에 빠져 그를 따라나선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도로이지만 야낭우의 야생성을 다루기에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도로는 야낭우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이 도로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 된다. 야낭우를 복종시키거나 죽여야 하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

 

"그녀는 돌아서서 도로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뒤따르며 최대한 빨리 아이를 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반항하지도 못할 테고, 독립심은 사라질 것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죽이기에는 너무 귀중한 존재이지만 후손을 납치했다가는 분명히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보 하는 갓난아기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격리되어 있으면 결국 복종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P 62)

 

도로와 야낭우는 함께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바다에 이르러 도로에게 속해있는 노예선을 타고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도로가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는 한마을에 정착을 한다. 도로는 그곳에서 야낭우를 자신의 아들인 아이작과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아이작은 도로의 아들로 신비한 능력은 있지만, 도로와 야낭우처럼 불사의 존재는 아니다. 결국 아이작은 죽고, 도로와 야낭우는 다시 만난다. 야낭우는 도로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라져 가는 인간성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도로 역시 야낭우가 절실하다. 둘에게는 세월의 시간만큼의 적대감이 있지만, 또한 둘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고 대등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는 전혀 접해 보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SF 소설이라고 정의하기도 힘들고, 판타지 소설이라고도 정의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은 살육과 지배욕의 화신인 도로라는 존재와 생명과 치유의 존재인 야낭우라는 존재의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힘들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백인과 흑인과의 관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적대적인 관계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또 다른 단편소설인 [블러드 차일드]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외계종에게 지배를 당한다. 외계종은 인간 아이를 양육하고 키우고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종족의 번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그 외계종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도 아닌, 증오의 관계도 아닌 묘한 관계를 이룬다. 마치 도로와 야낭우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미국사회에서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또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가 속했던 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마치 암호문처럼 자신의 소설에 특별난 존재와 특이한 관계 속에서 펼쳐 놓치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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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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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의 하나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 생전에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기 있는 있는 작가였던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았을까? 개인적으로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계층 문화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때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읽으며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인기가 있을까? 이렇게 사실적으로 나이지리아 사회를,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데도 과연 나이지리아에서 읽힐까?'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은 후 읽기 시작했다. 아다치에는 나이지리아의 현대 여성작가이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페미니즘 작가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소설에는 단순히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나이지리아나 아프리카 사람, 더 나아가 흑인들의 전체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한 여성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두들 동경하는 미국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마치 화려한 도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자신을 잃어가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점점 자신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도 언급하지만, 주된 내용은 아프리카인으로서, 더 나아가 나이지리아 인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부분이 더 주를 이룬다.

 

소설의 초반부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 와서 타인이 보기에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페멜루라는 여성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프린스턴에서 시간강사이지만 교수직으로 일하고 있다.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온 아프리카 여성들은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하고, 나이지리아에서 사랑했던 첫사랑인 오빈제라는 남성을 못 잊어 한다.

 

"그녀의 영혼 속에는 납덩이가 있었다. 벌써 꽤 오래전부터 그녀는 아침마다 피로, 암울, 이성의 무너짐을 느끼는 병을 앓아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온 형태 없는 갈망, 모양 없는 욕망, 자신이 살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삶에 대한 찰나적 몽상이 몇 달에 걸쳐 서로 뒤섞이면서 사무치는 향수가 되었다. 그녀는 나이지리아 웹 사이트, 페이스부의 나이지리아인들, 나이지리아인들의 블로그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그런데 클릭할 때마다 나오는 것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학위를 따 가지고 최근 금의환향하여 투자 회사, 음반 제작사, 패션 브랜드, 잡지사 혹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남녀들의 사진을 본 그녀는 마치 그들이 자신의 손을 비틀어 열고 그 안에 있던 것을 뺏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무딘 상실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그녀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되었다." (1권, P 17)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오빈제의 시각에서 묘사되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영국 유학 후 나이지리아의 거물의 부정한 일을 봐 주며 나름 성공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치 신기루처럼 여긴다.

 

"레키 고속 도로에 들어서자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차들이 빠르게 움직였고 잠시 후 게이브리얼은 오빈제네 집의 높고 검은 대문 앞에서 경적을 눌렀다. - 중략 - 모든 방이 시원할 테고, 에어컨 통풍구는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며, 부엌은 카레와 타님의 향긋한 냄새로 가득할 것이고, 아래층에는 CNN이 틀어져 있는 반면, 위층 텔레비전에는 카툰 네트워크가 틀어져 있을 것이며, 이 모든 것에는 어느 구우의 침해도 받지 않은 풍요의 분위기가 스며 있을 것이었다. 그가 차에서 내렸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 - 가족, 집, 자동차, 은행 계좌 - 때문에 붕 뜬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고 때때로 모든 것을 핀으로 찔러 바람을 빼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확신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자기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를." (1권, P 43)

 

그리고 소설은 나이지리아에서의 이페멜루의 성장기를 다룬다. 반복되는 쿠데타에 혼란스러운 나이지리아의 상황,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은 모두들 미국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녀는 아버지의 퇴직 이후 겨우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류층과 어울리게 되고, 누구보다도 미국의 삶을 꿈꾸는 오빈제를 만나다. 그녀는 오빈제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미국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고모의 권유를 오빈제보다 먼저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미국은 그녀가 꿈꾸는 곳이 아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장군으로 불리는 남성의 애인이자, 잘 나가는 의사였던 고모는 3-4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페멜루 역시 등록금을 내재 못해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러다가 겨우 백인 남자 친구를 만나서 그 밑바닥에서 탈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이 아프리카너나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자신을 비롯한 아프리카너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블로그에 올리며 나름 미국의 차별 문화를 비판하지만, 어느새 자신 역시 그런 문화 속에 빠져 버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나이지리아로, 오빈제에게로 돌아가는 꿈꾼다.

 

아디치에의 소설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이지리아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나이지리아의 낯선 환경과 문화 종교, 종족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낯선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이 낯섬 속에서 점점 우리와 닮아있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철저한 가부장적인 문화, 남녀 차별의 문화, 계속되는 쿠데타와 부패, 그 부패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들과 몰락하는 사람들, 현실도피를 위해 미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자신들이 꿈꾸었던 미국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는 사람들, 나이지리아에 돌아온 유학생들이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와 너무나 닮아있다. 거친 나이지리아의 환경과 검은 피부색에 대한 묘사 속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낯설고도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이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을 묘하게 한다. 마치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낯선 음식을 먹으면서 이물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 음식을 맛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거북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소설은 이렇게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거나 인종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주된 뼈대는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사랑 이야기다. 각자가 서로의 삶에서 허상을 쫓아가다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문화나 인종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흥미 있게 소설을 읽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을 더 멋지게 장식해 주는 장식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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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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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결국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난 집을 떠나 가톨릭 선교사의 집에 거처하며 공부를 한다. 그곳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기업도 이루고, 신문사까지 경영한다. 그는 나름 여러 곳에 기부도 하며 지역 사회와 종교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리더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영 다른 모습이다. 아내와 두 자녀인 아들과 딸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한다. 딸이 반에서 1등을 놓치면 불과 같이 화를 내고, 자신의 종교적 관습을 조금이라고 어기면 아들과 딸,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폭력을 가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 대략 그려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힘겹게 공부해서 성공을 이루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7-80년대의 한국 아버지상을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묘사하는 인물은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프리카 중서부의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치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의 모습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인 아다치에의 첫 소설이자,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캄빌리는 과자와 음료수 공장, 그리고 언론사까지 소유한 성공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직 나이지리아 토속 종교를 버리지 못한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강요한다. 당연히 사춘기인 오빠 자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진다. 또 한 번 반에서 1등을 놓친 캄빌리에게도 아버지를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면 캄빌리의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고,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나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난 오늘날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단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P 64)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강요하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공부를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어김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음식을 먹지 않는 공복재의 기간에 캄빌리가 몰래 음식을 먹다가 아버지에 걸린다. 그것을 엄마와 오빠가 감싸주다가 함께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다.

 

"악마가 셋 다한 테 심부름해 달라고 한 거야?" 아버지의 입에서 이보어가 튀어나왔다. "악마가 내 집에 텐트를 쳤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당신은 가만 앉아서 애가 공복재 어기는 걸 모고만 있었어, 미카 은디니?" 아버지가 천천히 벨트 버클을 풀었다. 몇 겹의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벨트에 차분한 색 가죽을 씌운 버클이 달린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오빠에게, 어깨를 가로질러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들어 막는 어머니의 위팔, 성당 갈 때 입은 블라우스 스팽글 달린 부푼 소매로 싸인 위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등에 내려앉았다." (P 131)

 

이렇게 폭력을 행사한 후에는 꼭 딸을 안고 많이 아팠냐고 묻는다. 캄빌리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아버지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하는 종교적 관습뿐만 아니라, 반에서 1등을 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런 캄빌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사람은 그녀의 고모인 이페오마이다. 이페오마 고모는 같은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캄빌리의 아버지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킨다. 그녀와 오빠 자자는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 열흘간 머물며 고모가 보여주는 자유로운 세상을 맞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로 인해서 아버지와의 대립이 더 극단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나이지리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정치적 대립으로 자주 군부의 쿠데타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소설 역시 정확히 어떤 쿠데타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독재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캄빌리의 아버지의 신문사를 억압하고, 비판적인 사설을 쓴 기자를 암살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적인 정권의 시대와 함께 또 한편으로 폭력적인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이 함께 묘사된다. 놀라운 것은 이런 묘사가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폭력과 가정의 폭력이 당연시되고, 그 속에서 항상 폭력을 통해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는 것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다치에를 페미니즘 소설가로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페미니즘에 대해 강의한 유튜브 강의는 550만의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녀를 굳이 페미니즘 소설가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소설은 폭력의 시대, 폭력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그 폭력 속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성의 성장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되는 것은 캄빌리와 캄빌리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오빠 자자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지리아에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존재했고, 그 문화 속에서 여자와 자녀들을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받고 있었다. 소설은 이런 나이지리아의 문화와 독특한 종교적 권위가 존재하는 가정 속에서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캄빌리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독립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은 한국의 가정의 모습과 닮아있다. 한때는 아버지의 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이니 당연히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 맞는 아내나 자녀들 중에는 남편이나 아버지가 사랑하기에 폭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런 폭력은 단순히 가정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심지어 국가 안에서 이런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리더나 지도자는 당연히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위대한 리더나 지도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런 폭력과의 힘겨운 싸움이 있은 후에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 그 폭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을 많이 있다. 아다치에의 소설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자가 남자와 싸우는 것이 아닌, 이런 가부장적인 폭력과의 싸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아다치에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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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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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살았던 시골집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는 우리 가정은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는 하시던 사업이 힘들어지셔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고, 어머니 역시 계속 일을 다니셔서 집에 없으실 때가 많았다. 집에 혼자 남겨져 있을 때면 주로 집의 뒷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햇볕이 들지 않았던 그곳은 어둡고 습했지만 또한 아늑했다. 그곳에는 주로 장독대나 못쓰는 가구들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곳에 있던 가구 중 하나의 바닥을 들춰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끔찍한 것들을 마주했다. 지렁이. 지네. 바퀴벌레. 당시에는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온갖 벌레들이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인지 그 후에는 그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가끔 그때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내 마음이 마치 그 집의 뒷마당 같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온갖 징그러운 벌레들이 꿈틀 거리만큼. 그때는 내 마음이 그렇게 어둡고 습했다.

 

아일린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그녀 안에서도 이런 어마음을 보았다. 소설 속의 아일린은 X 빌이라는 마을에서 사는 젊은 여성이다. X빌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나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상 그녀가 동경하는 보스턴과 가까운 미국 뉴잉글랜드의 어느 작은 동네 정도로 생각된다. 그곳은 춥고 습했으며 눈이 많이 내렸다. 1963년 24살의 아일린은 X빌에서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산다. 그녀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은 어머니가 죽은 후 거의 청소를 하지 않았기에 항상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주방엔 음식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무어헤드라는 소년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잡혀 온 곳에서는 온갖 학대와 폭력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그런 것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외적인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일린 안에는 자기혐오와 긴장감과 분노, 조급함과 같은 온갖 어두운 것들이 가득차 있었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철저히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감추며 살아간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외모를 다듬으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실은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강박적으로 신경을 썼다. 내 눈은 초록색에 조그마한데, 당신이 날 보았다면 그다지 친절해 보이는 눈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특히 더 그랬을 테고.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렇게 전략적이지 못하다. 머리에 핀을 꽂고 칙칙한 쥐색 코트를 입은 모습을 그때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이 무용담에서 단역에 불과한 인물로 예상했을 것이다. 성실하고 침착하고 따분하고 무관한. 멀리서 보면 나는 수줍고 온화한 사람처럼 보였고, 때로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욕을 했고 얼굴을 붉혔고 꽤 자주 진땀을 흘렸으며, 그날만 해도 신발이 부서질 뻔했다. 나는 정말이지 지루하고 생기 없고 무엇에든 면역된 가식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내달리는 생각과 살인자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심드렁하게 서성이며 칙칙한 표정 뒤로 숨는 일은 쉬었다." (P 18)

 

그녀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름 그녀만의 탈출구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적인 몽상이 있다. 그녀의 성적인 몽상의 대상은 주로 무허헤드의 소년들이나 직원들이지만, 주된 대상은 랜디이다. 소년원의 교도관인 랜디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멋진 남성이다. 그녀는 시간 날 때마다 랜디의 집 앞에 서성이며 랜디를 관찰한다. 그러다가 가끔 슈퍼마켓이나 옷 가게에서 사소한 물건들을 훔친다. 그녀의 또 하나의 탈출구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몰던 낡은 닷지 자동차이다. 이미 고장 날 때로 고장나서 자동차 안으로 매연이 들어오지만, 그녀는 한 겨울에도 문을 열고 그 차로 달린다. 랜디와의 성적인 몽상이 상상 속에서의 도피 공간이었다면, 현실에서 그녀의 유일한 도피 공간은 아버지의 낡은 닷지 자동차이다.

 

그런데 어느 날 랜디나 닷지 자동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탈출구가 갑자기 그녀 앞에 등장한다. 교도소에 교사로 새로 부임한 리베카라는 여성이다. 타고난 아름다움과 교양, 그리고 세련된 패션 감각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리베카는 부임한 날부터 아일린에게 호감을 보여준다. 그동안 무어헤드에서 아일린에게 호감을 보여 준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리베카의 관심에 아일린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때부터 사건은 겉잡을 수없이 흘러간다. 그것이 바로 소설 초반에서 말하는 그녀가 X빌을 영원히 떠나게 되는 이유이다.

 

소설은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소설의 중간까지는 온통 흑백뿐인 영화가 이어진다. 눈 내리는 습하고 쇠락한 시골 마을인 X빌.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먼지 쌓인 어둡고 더러운 집. 소년들을 학대하는 소년 교도소인 무허헤드. 그리고 닷지 자동차를 타고 이 배경 사이를 이동하는 아일린. 온통 단조로운 흑백의 화면들이 느리고 지루하게 이어져 간다. 그러다가 소설 중반에 리베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만이 다채로운 칼라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아일린을 비롯해 온통 모든 사람들이 리베카에게 집중한다. 리베카는 알듯 모를 듯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남기며 접근한다. 그리고 리베카는 아일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화려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리베카의 집은 의외로 어둡고 더럽다. 그곳에서 이제 흑백영화는 온통 빨간색의 피로 뒤 덥히는 공포 영화로 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가 왜 이런 구성을 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소설은 거의 말미에 이를 때까지, 즉 리베카가 나타나고 아일린이 리베타의 집에 초대되기까지 특별한 사건이 없이 진행되다가, 폭발이 일어나듯이 갑자가 사건이 분출이 된다. 그러기에 이 부분까지 읽을 때 조금의 지루함을 느낄 수가 있다. 초반부터 조금 더 속도감 있는 소설을 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서 깨달은 것은 작가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쓰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말미에 일어나는 리베카를 통한 반전은 이 소설을 읽어준 독자에 대한 서비스 정도이다. 작가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은 아일린이 어떤 사건으로 X빌이란 마을을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읽혀지기 위해 작가가 어쩔 수 없이 독자와 타협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오테사 모시페그라는 작가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일린 안에 있던 그 어둡고 습한 마음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누구 한 명에게도 사랑받지 못한채 철저히 지저분하거 어두운 공간에 버려진 한 여성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녀의 자기혐오와 성적인 몽상,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 등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치 시골집 뒷편의 버려진 가구의 바닥을 들춰보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집요하게 아일린이라는 여성의 어둡고 습한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그것을 들춰보라고 요구한다. 소설의 스토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들춰보는 독자들을 위한 미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아일린의 어두운 마음을 들춰보라고 말하는 것일까.

 

소설은 이제는 74세의 할머니가 된 아일린의 시점에서 24살의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나이가 든 아일린은 이제 자신은 그 전의 아일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때의 자기혐오와 조급함, 분노에 사딜리던 아일린이 아니라, 이제는 한결 여유로워졌고 평안해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진행해 가는 74살의 아일린은 24살의 아일린을 혐오하거가 끔직해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나를 비롯한 독자들처럼 그 어둡고 습한 마음을 들춰보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따스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그때의 아일린의 마음을 들춰본다. 그때의 자기혐오, 조급함, 분노,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는다. 심지어 그녀의 말투에서는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성탄절날 영원히 떠나 온 X빌 마을, 정리도 하지 못하고 떠난 무어해드의 자신의 책상. 심지어 성탄절날 아침 술 취한 채로 그 더럽고 먼지나는 집에 두고 온 아버지까지. 나이 든 아일린은 젊었을 때의 아일린처럼 덤덤히 말하지만, 그 안에는 24살의 아일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겉으로 그리워하지조차 못한다. 그랬다면 그녀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둠을 들춰본다. 후회나 원망, 미움과 분노가 아닌 그리움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권하고 있지 않을까.

 

"본 리뷰는 출판사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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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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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때 친한 후배가 있었다. 참 순수한 친구였다.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대하고 농담으로 항상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의 고민상담을 잘 들어주고 따스한 위로도 잊지 않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군에 입대를 한 후 거의 3년 동안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복학한 그를 만났을 때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었다. 그는 3년 전에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시니컬하게 반응을 하고, 상대방의 말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었다.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혼자 멍하니 딴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어떤 선배와 사소한 언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뛰쳐나갔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가끔 그 친구를 생각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 친구가 겪었을 끔찍한 일들이 상상이 된다. 군대의 어두운 곳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내부만의 구석에서 온갖 욕설과 핀잔을 듣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내가 떠올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끝내 그의 고백을 듣지 못해서 그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라 워터스의 [나이트 워치]라는 소설을 읽으며 그 후배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1947년의 배경으로 6명의 런던의 젊은이의 삶을 묘사한다. 거리에는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아직도 전쟁 흔적을 털어버리지 못한 제대한 군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겉으로는 모두들 안정을 되찾은 것 같지만 사람도 거리도 여전히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중 유독 여섯 명의 사람들만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나름 전쟁 후의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쑥 불쑥 그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와 현실에서 뛰쳐 나가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에 불안해 하고, 지금의 삶을 마치 꿈 속의 삶처럼 현실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소설의 초반에는 그들의 과거에 대한 언급이 너무 희미하기에 그들의 자학적인 생각들과 행동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겪었을 끔찍한 일들을 혼자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연 이들은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이 소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전쟁 후의 1947년을 배경으로, 그다음에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을 배경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전쟁이 막 시작하던 1941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섯 명의 인물들이 겪은 전쟁의 광기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를 역 추적한다. 소설의 시작은 '케이'라는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결국, 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인간이 됐단 말이지. 벽 시계도 손목시계도 죄다 멎어서, 주인집 현관으로 들어서는 불구자가 누군지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꼴이. (P 11)

 

케이는 짧은 머리에 잘생긴 청년 같은 외모를 주는 여자였다.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에서 그가 상류층 출신이며 군대와 관련된 일을 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녀는 계속 거리를 방황하며 누군가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결국 전쟁의 시기에 같이 일했던 미키라는 여성을 찾아가 자신의 상태를 고백한다.

 

케이는 뒤로 푹 물러나 앉아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뿐 아니라 수천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죄다 똑같은 일을 겪었어.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런던 거리 아무 데서나 손을 뻗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다들 연인을 잃거나 아이를 잃거나 친구를 잃었다고. 근데 난...... 헤어날 수가 없어. 미키.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다고." 케이는 비참하게 웃었다. "헤어나다니. 이 표현 진짜 웃기다! 사람의 애통함이 무슨 무너진 집인가, 지천에 수북이 깔린 잔해를 헤치고 일어나 다른 멀쩡한 곳으로 나와야 한다니...... 키미, 나는 건물 잔해 속에서 길을 잃었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문제는 애초에 나갈 생각도 없다는 거지. 아직도 내 인생 전부가 그 잔해 밑에 깔려 있는데......" (P 148-9)

 

도대체 케이는 전쟁터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녀는 전쟁터에서 어떤 끔찍한 것을 겪은 것일까. 비록 겉모습일지 몰라도 모두들 다 회복해서 아무렇지 않게 사는데 왜 그녀만 이토록 괴로워하며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케이뿐만이 아니다. 헬렌이라는 여성은 줄리아라는 여성과 동거하며 끊임없이 그녀에게 집착한다. 비브는 다정한 레지라는 유부남과 만나다가 어느 순간 레지에게 폭발하며 소리를 지른다. 누구보다도 어둡게 사는 사람은 덩컨이라는 남성이다. 덩컨은 비브의 남동생인데 철저히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양초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과거에 알던 프레이저를 만나자 갑자기 공포에 빠진다. 과연 무엇이 이들의 영혼을 이처럼 처참하게 파괴했을까. 

 

1944년을 배경으로 하는 2부가 시작되어서야 그 비밀이 조금씩 드러난다. 1944년의 런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독일 폭격기들이 폭탄을 투하한다. 건물이 송두리째 날라가고 사람들은 그 폭탄에 몸이 찢겨 생명을 잃거나 불구가 된다. 케이는 미키와 함께 구급 대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폭발로 폐허가 된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폭파된 건물 속에서 시신과 부상자들을 접한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에서 흘린 피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폭탄에 몸이 갈가리 찢긴 시신들을 접한다. 그러면서도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청년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초반에는 전혀 연관이 없던 것 같던 이들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쟁 시기에 이리저리 관계를 맺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런던에 폭탄이 떨어지던 날, 그 폭탄과 함께 케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삶이 산산조각 나는 그 진실이 밝혀진다.

 

이 소설은 시간의 역구성을 통해 케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상처를 쫓아가기에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이들이 전쟁 때 어떤 상처를 당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했다면, 그래도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올라가며 그들이 경험한 끔찍한 전쟁의 시대와 그 시대의 광기로 인해 상처들을 발견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이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묻지 말아 달라!"

 

보통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를 한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느냐? 어쨌든 그곳에서 무사히 돌아왔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렇게 않게 적응하며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잃어버리고 와야 하는 것이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왜 그 잃어버린 것을 외면하려 할까. 그들이 통과했을 전쟁터의 폐허 같은 끔찍한 공포를 왜 외면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에 여러 가지 아픔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때로는 일제시대와 태평양 전쟁 때 위안부나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겨우 생명만 가지고 돌아온 사람들. 6.25전쟁 때 가족들이 처참히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사람들, 군사정권 때 고문하고 학살로 가족이나 자식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배가 침몰하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까지.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말한다. 살아남았으니 그냥 살아가라고. 그들이 과연 그냥 살아갔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케이를 비롯한 5명의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전쟁의 상처를 잊으며 서서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리고 앞에 언급했던 그 후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그는 다시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자신의 이전의 모습은 그 군대의 어둡고 힘들었던 시간에 놓고 변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세라 워터스는 우리에게는 [핑거 스미스]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스릴러로 유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역사를 배경으로 시대와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세라 워터스의 진짜 놀라운 점은 시대와 상황으로 인해 찢겨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너무도 끔찍하리만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트 워치]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시대의 광기, 그리고 그 전쟁의 공포와 광기 속에서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파괴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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