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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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범죄와 살인사건 등이 보도된다. 수법 역시 매우 악랄하고 잔인하다. 사람을 죽인 후 토막을 내어서 강에 버리거나 산에 묻는다. 사람을 트렁크에 태우고 다니면서 카드로 돈을 인출하기도 한다. 점점 사람들이 잔인해지는 것은 현대화가 되는 길목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일까?

[루팡의 소식]은 비록 범죄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지만, 조금은 순수했고, 조금은 어설펐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이들의 범죄는 의도하지 않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 책의 작가는 '요코야마 히데오'이다. 일본의 유명 추리소설상과 미스터리상을 휩쓴 작가이다. 특이한 요코야마 히데오가 나오키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순수문학상의 대표가 아쿠타가와 상이라면 대중문학적인 성격의 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상이 나오키상이다. 수상을 거부한 이유가 예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했기 때문이라나...

소설은 공소시효가 끝나가는 15년 전 고등학교 여교사 자살 사건에 대한 제보로 시작한다. 제보의 내용은 이 사건이 자살이 아니며 타살이고, 이 사건의 범인은 루팡 작전이라는 범죄에 가담했던 세 명의 고등학생이었던 기타로와 다쓰미, 다치바나라는 것이다. 공소시효 마감이 24시간 밖에 남지 않자 경찰은 이들 세 명을 긴급 수배하고 체포한다. 이제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인 기타로가 먼저 경찰서로 잡혀 들어와 취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15년 전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대학입시라는 목표는 이미 포기한 채 학교에서 겉돌기만 하던 불량학생 세 명은 자주 루팡이라는 카페에 모인다. 3학년인 이들은 무언가 자극적인 사건을 찾다가 기말고사 시험지와 답안을 훔치기로 결정한다. 시험지는 항상 시험 전날 교장실의 금고 속에 보관된다. 이들의 계획은 수업이 끝나고 모든 학생들이 하교할 때 한 명이 학교에 숨어있다가 나머지 두 명에게 사다리를 내려주고, 세명은 함께 조용히 교장실로 잠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들이 세운 대범하고도 조금 어설픈 루팡 작전이었다. 시험 전날 시험지와 답안지를 훔친다는 것은 어쩌면 모든 학생들의 로망?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은 그 로망을 실현시킨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많은 허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허점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한다. 시험 셋째 날 마지막 과목의 시험지만 훔치는 상황에서 금고를 열어보니 시체가 나오는 것이다. 시체는 다름 아닌 학교에서 모든  모든 남학생들과 남자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글래머라는 별명을 가진 영어 선생인 '미네 마이코'였다.  너무 놀란 세 명의 남자들은 다시 금고를 닫아 놓고 도망을 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다음날 미네 마이코가 학교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신문에 보도가 된 것이다. 과연 마이코를 죽인 사람은 누구이고, 살해당한 마이코는 누가 옮겨서 옥상에서 떨어뜨린 것일까?

소설은 공소시효의 압박이라는 배경과 함께, 세 친구가 학교로 숨어드는 긴장감 넘치는 과정을 매우 빠른 속도로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읽으면 읽을수록 도대체 범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비록 끔찍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세 친구의 고등학교 때의 우정, 그리고 가난하고 힘든 친구에 대한 배려, 선생님과 학생의 풋풋한 사랑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배후에는 끔찍하고 잔혹한 음모를 가진 사람들도 등장한다. 순수함 속에 뒤틀린 사회 배경, 그 순수함을 잠식해 거는 타락한 시대의 물결들이 잘 표현된 소설이다. 소설 말미에서 세 친구를 취재하던 형사는 당시의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아아 맞다, 다치바나 소이치가 고교 시절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죠. 아폴로가 달에 착륙했을 때 정도로 실망한 적은 없었다. 이미 세상은 갈 데까지 가버린 느낌이다...... 그런 말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듣고 보니 전쟁도 전후의 분위기로 퇴색한 쇼와 후반이란 분명히 그런 시대였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부풀리고, 늘이고, 또 늘여서 충분히 풍요로워졌는데도, 어쩐지 현 상태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어떻게 풍요로워졌는지, 어디가 풍요로워졌는지 다들 점점 알 수 없어져버렸지요. 아폴로의 구조도 기술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텔레비전 영상으로 달 표면을 뛰어다니는 남자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그 기묘한 감각이 쇼와 후반까지 계속 이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 걸 질질 끌어오면서도 누구나 현대인으로 있으려 하죠.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학생운동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단념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풍요로움에 둘러싸이다 보니, 사회는 묘하게도 점잔 빼는 어른의 얼굴이 되어버렸죠. 얼굴을 맞대고 싸우지 않고, 하물며 피 같은 건 흘리지도 않고, 대신 규칙이나 분멸이 세력을 떨치고, 선생이니 타인을 위해서라느니 하는 정론의 여과기가 세상의 모든 것을 걸러버렸어요. 그렇지만 애당초 성숙한 사회란 있을 수 없는 환상이니까, 정론으로 전부 여과할 수 없는 모순 투성이의 토막들이 남아버린 거죠, 뭐랄까, 정론 사회에 대한 의심과 증오가 뒤섞인 버거운 토막들이......"

작가의 데뷔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설은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자극적이고 액션 위주의 스릴러보다는 정통적인 느낌의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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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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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모든 대제국은 건설자의 강력한 리더쉽과 함께 타민족에 대한 정복과 포용정책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징기스칸에 관한 책 중 몽골제국을 종교적 포용정책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책은 처음 접하네요. 징기스칸에 대한 탁월한 관점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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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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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거의 미디어의 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 사건이 터진다. 미디어들이 달려들어, 온갖 자극적인 영상들을 쏟아내며 시청률 전쟁을 한다. 계속 영상과 인터뷰만을 보여 주기가 식상해지면, 중간중간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서 사건을 해석한다. 물론 이들이 정말 전문가인지는 확실치 않다. 정치 사건을 변호사가 해석하고, 사이코패스를 정치연구원이 분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쨌든 이들은 온갖 흥미로운 이론과 자극적인 단어로 사건을 분석한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면 사건의 심각성과 본질은 사라지고, 흥밋거리와 가십거리밖에 남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와 관료주의가 어떻게 사건을 철저히 왜곡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있다. 바로 존 버튼의 [기꺼이 죽이다]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존 버튼이 창조한 형사 데이브 거니 시리즈의 세 번째 소설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이 소설이 시리즈 소설인지를 모른 상태에서 읽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초반부터 스릴러 소설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심리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사에서 은퇴한 후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의사인 아내와 사는 데이브 거니는 예전의 악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사건에서 그는 몸에 총을 세 발이나 맞고도 연쇄살인범을 잡아냈다. 그 일로 영웅처럼 대접을 받았지만, 은퇴 후에는 이 사건의 후유증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거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지난날 자신을 취재했던 코니 클라크라는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자신의 딸인 킴 코레이즌이라는 여성이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의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있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킴을 만난 거니는 점점 킴의 취재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리고 킴이 취재하고 있던 착한 양치기 사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착한 양치기 사건이란 10년 전 스스로를 착한 양치기라고 말하는 범죄자가 부자들의 탐욕과 타락이 세상을 망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6명의 부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범죄자는 롤스로이스만을 타고 다니는 부자들을 50구경 데저트 이글이라는 무시무시한 무리고 처참히 얼굴을 뭉개서 살해하고, 그 시신 위에  장난감 시리즈의 작은 장난감 하나씩 던져 놓는다.  킴이 이 사건의 희생자의 가족들을 인터뷰하면서 사건을 다시 재조명하려 하자 계속해서 킴과 킴을 돕는 거니에게 점점 심각한 위협이 닥쳐온다. 누군가가 사건을 다시 드러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당시 사건을 보도해 일약 흥행을 한 램TV는 킴의 취재를 [살인의 고아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내보내며 다시 흥행의 도구로 삼기를 원한다. 또한 연쇄살인 사건으로 사건을 수사한 FBI는 이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거니를 거북해 한다.

사건에 의구심을 가지던 거니는 우연히 아내 매들린이 예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의 힌트를 얻는다. 영화에서는 킬러들이 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쫓는다. 남자는 성당에 숨어있다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성당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같은 검은 옷을 입고 나온다. 매들린은 영화의 내용을 여기까지 밖에 기억을 못한다. 그런데 거니는 그 이후를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킬러들이 남자를 찾아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냥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다 쏴 죽이는 것이다. 여기서 거니는 또 다른 의문점을 가진다. 그렇다면 나중에 경찰이 이 사건을 수사할 때 이 사건의 피해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전부로 볼 것인가? 킬러가 쫓던 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거니는 어쩌면 연쇄살인범이 특정인을 죽이기 위해 연쇄살인범처럼 꾸미기위해 언론과 대중들이 좋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데저트 이글이니 롤스로이스니 하는 자극적인 소재로 사건을 포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론과 심리학자들은 온갖 이론으로 그 사건을 포장하여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의 범인이 사이코 패스적인 연쇄살인범이라는 FBI와 심리학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범인이 그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고 봅니다. 총과 장난감은 위대한 조종자의 대미를 장식하는 물건들이죠, 범죄 심리학자들이 그런 걸 찾으니 '옛다!'하고 던져준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사명감'이 한층 믿을 만한 게 되니까요. 범인이 그 누구도 파헤치지 않기를 바랐던 가설이 있다면, 그가 제정신이고 그의 범죄가 완벽히 실용적인 이유에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겠죠. 전형적인 살인 동기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사의 방향이 달라지고 그의 실체가 순식간에 드러날 테니까요." (P 410)

어쩌면 많은 살인 사건이나 범죄들이 이렇게 포장되고 있지 않을까?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사이코 패스니, 사회부적응이니 여성 혐오니 온갖 이유와 이론들로 사건을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분석한다. 그런데 살인자는 그냥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해 살인한 것 아닐까?

이 소설은 뛰어난 구성과 거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디테일한 심리 묘사들과 함께 현재 미국 사회의 왜곡된 미디어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자신의 인터뷰를 자극적인 영상과 단어로 편집해서 흥미물로 만들어 버린 램 TV 관계자에게 킴이 따지자 그는 이렇게 대구 한다.

"한 가지 말씀드리죠. 인간은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일 뿐입니다. 어쩌면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영장류죠, 그레 진실이에요. 난 현실주의자입니다. 이 빌어먹을 동물원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난 단지 그 안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뭘 하는지 알아요?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있어요." (P 476)

어쩌면 온갖 자극적인 영상으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우리나라 언론과 미디어도 이런 변명을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이런 것을 원하는대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우리는 단지 시청자의 요구를 따라주었을 뿐이라고... '

오랜만에 완벽한 구성과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가진 스릴러를 읽었다. 이미 출간된 존 버든의 데이브 거니 시리즈인 [658, 우연히]라는 작품과 [악녀를 위한 밤]이라는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이후에 출간될 다른 데이브 거니의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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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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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계에서 '판사'라는 직업보다 더 이성적이고 냉철해야 하는 분야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견이 들어가면 왜곡된 판결이 나올 수 있기에 더욱더 자신을 냉철하게 만들도록 훈련해야 하는 직업일 것이다. 마치 날카로운 칼을 갈듯이, 그렇게 평생을 자신을 날카롭고 냉철하게 만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가끔은 자신의 인생에 회환이 생기고, 잃어버린 감정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도진기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나름 이런 추측을 해 본다.

도진기 작가는 전직판사로서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다. 처음 도진기 작가를 만나 작품은 유명한 변호사 고진 시리즈 중의 하나인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비록 추리소설이었지만, 마치 응팔 시리즈처럼 80년대 감성이 짙게 묻어있는 작품이었다. 어떻게 판사이며,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인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었다.

[악마의 증명]은 도진기 작가가 그동안 써온 8편의 단편 추리소설을 담고 있다. 그중 첫 번째 소설의 제목이 바로 [악마의 증명]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박철은 우연히 의정부의 한 부대찌개 앞을 지나면서 돈 많은 여주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돈을 갈취할 계획을 꾸민다. 저자는 마치 주인공의 머릿속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그의 스산한 생각을 들춰낸다.

"대학에 와서는 잠깐 생각이 흔들렸다. 단지 손쉽다는 이유로 어두운 길을 전전하며 잘못 살아온 것 아닐까? 대학은 추상 도덕이 주입되는 곳이었다. 책, 강의, 친구, 모두 이타를 이야기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올바른 사회, 더불어 사는 길 따위를 주제로,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길가 돌멩이보다 숱하던 그 약삭빠른 인간들은 다 어디 간 거지? 내가 모르는 새 다른 사회로 위프 한 건가? 아니면 내가 대학에 진학할 즈음 인간 종이 전격 개량되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 없다. 거룩한 '말씀'에 잠깐 현혹되었지만 난 이내 깨달았다.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대신 '올바른 척'을 하면서 평판을 유지하는 쪽이 잇속을 챙기기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었다.  -중략- 형이상학의 구덩이에서 나는 기어 나왔다. 남의 장단에 춤추는 얼치기가 될 뻔했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방향을 뒤로하고 다시금 '나'만의 인생을 위해 내 안의 '악'을 단련시키기 시작했다." (P 14-15)

주인공은 밤늦은 시간 영업을 끝내고 돈을 가지고 나오는 여주인을 칼로 협박한다. 그러나 여주인의 도발에 그만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그 장면이 그대로 주변 CCTV에 찍힌다. 이제 주인공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는 법의 허점을 이용해 아주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낸다. 과연 주인공이 생각해 낸 악마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마음이 아프게 읽은 소설은 세 번째 소설인 [선택]이라는 소설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연정은 변호사를 개업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나이 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온다. 자신의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보험사에서는 자살이라고 보험금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 의뢰 내용이었다. 죽은 여성의 이름은 백혜령으로 외과의사였다. 얼마 전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어린 두 딸과 함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었다. 사고 당일도 다음날 출근을 위해 큰 딸을 데리고 빗길에 무리하게 달리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해령과 딸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해령의 왼쪽 손목에 외과의사가 쓰는 칼로 깊게 베어져 있었고,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죽은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이 때문에 해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사랑하는 딸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엄마가 있을까? 연정은 외적인 증거만을 기계적으로 짜 맞추느라 보지 못했던 해령의 절박한 엄마의 심정을 발견해 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블록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을 의미 없는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 그래서 '아기 둘을 둔 엄마가 그중 갓난아이 하나만 뒤에 태우고 빗길에서 달리던 중 손목을 그어 자살했고, 차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아이와 같이 죽었다'라는 해괴망측한 그림을 그린 거예요. 물론 경찰이 만든 그 사실의 조합 자체에도 많은 모순점이 있지만요." (P 118)

8편의 소설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시간의 뫼비우스]라는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타임워프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타임워프라는 소재의 흥미보다 한 판사의 인생의 회환이 담긴 무척 감성적인 소설이다. 민경은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손에 마약을 든 영한이라는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자신이 무한 반복되는 영겁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기차가 앞으로 다가올 터널을 지날 때쯤이면 자신은 또다시 과거로 사라질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남자는 민경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20대에 서울로 상경해서 법대에 진학하고 판사가 되고, 그리고 승승장구하다가 인생의 덫에 걸려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쩌면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삶을 108번째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한이가 잠든 시간엔 나 혼자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 난 정영한이다. 이 녀석, 영한이는 30년 전의 나다. 하지만 나는 48세의 정영한이다. 나는 어떤 사건으로 쫓기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전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마침 그 기차는 30년 전의 내가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로 상경하면서 탔던 노선이다. 경기도에 접어들어 화남 터널을 통과할 때, 기차 안은 정전이 되었다. 그리고 새카만 어둠, 잠시 후 전깃불이 들어왔고...... 그리고 내가 있었다. 영한의 의식 속에, 도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48세의 내가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영한이의 내면에 들어와 그 인생을 그대로 반복해 살고 있다. 조금도 영한이를 못 움직이면서, 영한이가 느끼는 즐거움, 기쁨, 슬픔, 분노도 그대로 내 것은 아니지만 바로 나의 의식과 결쳐 있기에 마치 내 것처럼 생생하고 안타깝다. 내 의식은 오로지 관찰과 감각만 하고 일체의 행동과 말과 외부의 작용을 할 수 없는 수수한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P 195)

30년의 똑같은 인생을 백번 이상 반복하면서도 그때의 서툼과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마치 작가의 자전적 성장 소설처럼 느껴지는 묘한 기분은 왜 일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색깔과 느낌을 가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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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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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네이버 캐스트에서 역사에 관한 글들을 즐겨 본다. 그중에 관심을 끌었던 연재는 파워라이트 ON에서 연재되던 경철 교수의 '서양 근대 인물열전'이었다. 근대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와 배경,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유럽 왕족과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 연재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라는 책이다.

주경철 교수는 서양 근대 역사에 매우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근대 역사라기보다 중세 역사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세 말엽 정도가 될까? 근대의 영향을 미치는 유럽의 절대왕권과 그로 인한 민족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콜럼버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터 같은 인물들이 어떻게 근대의 문을 열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8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네이버캐스트에서 연제 되던 인물 중에서 빠진 인물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카트린 드 메디시니라는 인물이 빠진 것이 가장 아쉽다. 인터넷 연재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앞의 네 명의 유럽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고(잔다르크는 좀 애매하지만, 그녀 역시 프랑스 왕실을 세우는데 혁혁한 공이 인정되는 인물이다), 뒤의 네 명은 근대 문명에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


 


 

이 책의 제일 먼저는 잔다르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잔다르크 편과 다음 부분의 부르고뉴 공작 편을 읽으며 프랑스와 영국의 왕실의 복잡한 계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영국의 영토들이 많이 있었고, 이로 인해 100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국왕인 샤를 7세(아직 정식 국왕은 아님)와 영국 왕 헨리 6세는 프랑스 왕권의 정통성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왜 프랑스 왕이 영국 왕과 정통성 자리를 놓고 싸워야 하는가? 이것은 복잡한 유럽 왕실의 계보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유럽은 민족국가의 개념이 약했었고, 왕실들은 서로 결혼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왕의 자손이 본국에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뒷부분에서 나오는 카를 5세이다. 자세한 상황은 책에 있는 도표를 참조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7세의 정통성을 세워 준 인물이 잔다르크이다. 잔다르크는 우선 천사의 계시를 받고 왕과 싸워서 종교적 정통성을 세워준다. 또 오들레앙을 영국군의 포위에서 해방시켜 왕이 그곳에서 대관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 정치적 정통성도 세워주었다. 그럼에도 후에 잔다르크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샤를 7세의 행동을 보면, 아마 잔다르크는 샤를 7세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장의 브로고뉴 공작들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다. 당시 유럽에서 절대왕권이 생기기 전에 프랑스에서 가장 세력 있는 영주가 브로고뉴 공작이었고, 이들은 프랑스 동쪽 지방과 독일의 서쪽 지방 대부분을 다스리고 있었다. 브로고뉴 공작들은 대대로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나 마지막 브로고뉴 공작인 담대공 샤를 1세와 프랑스와 루이 11세의 전쟁에서 브로고뉴 공작이 패함으로 국가 건립의 꿈은 모순된다. 저자는 만약 이때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다면 지금의 유럽 판도는 달랐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브로고뉴 공작의 땅들은 마지막 상속자인 '마리'라는 여성에 상속되고,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언 1세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 땅들은 후에 샤를 5세에게 대부분 상속된다.

중세 유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마 신성로마제국일 것이다. 이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유명한 황제 샤를 5세의 이야기는 3장에서 언급된다. 그는 상속을 통해 지금의 에스파냐 영토와 앞에 언급한 브로고뉴 공작의 땅들, 그리고 기존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땅들과 이탈리아의 땅들까지 모두 물려받는다. 지금으로 봐도 대제국이지만, 문제는 그 땅들이 모두 분리되어 있고, 각 지역마다 고유의 제도가 있었기에 통일왕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독특히 했고, 특히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통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분주하게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쳤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로도 잘 알려진 헨리 8세의 호색과 폭군의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호색한이자 폭군이 근대 영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뒤의 인물 이야기 중에서는 역시 코스테스와 말린체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흔히 잉카제국의 학살자로 알려진 코스테스에게 사실은 그를 도운 원주민 말린체라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 남미인들은 말린체를 반역자처럼 여기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에게도 사연이 있고, 그 사연에 공감하게 되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단지 유럽 역사나 그 역사와 관련된 인물들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 인물들이 가졌던 고뇌나 갈등들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매우 공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제국을 위해 분투했던 샤를 대제의 고민이나, 구원에 대한 불안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특히 공감을 가지게 했다. 책을 통해 이미 사라진 인물들의 삶과 내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고, 이 책이 그런 흥미를 가져다 줌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이후에 출간될 본격적인 근대 편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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