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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미래 - 디지털 혁명 시대, 일자리와 부의 미래에 대한 분석서
라이언 아벤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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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주변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다. 세계의 어느 국가도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컫는 디지털 혁명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인공지능의 확산 등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경제는 물론 의식구조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몰아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누가 먼저 어떻게 적응하고, 더 나아가 주도권을 쥐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시류를 잘 타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다. 디지털 혁명이 우리 사회에 미칠 효과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으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분명한 전망을 내리기가 힘들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지적했듯이 첨단 과학기술 시대의 도래로 세계 노동력의 단지 5%만 필요하게 되는 시대가 현실이 된다면 그 이후의 혼란은 충분히 예상된다.

 

<이코노미스트> 수석 편집자이자 칼럼니스트인 라이언 아벤트(Ryan Avent)《노동의 미래》(민음사, 2018)라는 책에서 밝지만은 않은 미래의 부와 노동환경을 전망한다. 산업혁명은 대혼란과 오류, 일자리의 감소 등을 수반한다.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기술기반 경제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디지털 혁명이 19세기 산업혁명의 발전 과정처럼 흡사하게 진행될 거로 주장한다. 산업혁명 이후 전통적인 경제에서는 노동 · 원료 등 요소 투입량의 차이에 의해서 경제적 격차가 발생했지만, 디지털 경제에서는 ‘희소성이 높은 자원’, 즉 경제적 가치가 놓은 기술 소유의 차이가 소득 격차를 급격히 증대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져온다. 소규모의 기업이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발전에 많은 투자를 할 것이고, 경제시장에서 ‘승자 그룹’이 되어 부를 축적하게 된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19세기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정보혁명이 산업구조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지식사회의 서막이라고 진단했다. 농업혁명의 시대에는 자기 힘으로 물건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비옥한 토지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부를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디지털 경제에서는 자신의 지식과 정보 능력이 없으면 더 이상의 부를 창출하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부를 유지하기도 힘들게 된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자신의 아이디어만 있으면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많은 사업기회를 발견할 수가 있다. 하지만 ‘노동력 과잉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면 고도로 숙련된 소수의 지식근로자만 일을 수행하고, 수많은 노동자는 저임금을 받거나 일자리를 잃는다. 아벤트는 자동화세계화,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의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력 과잉의 시대가 온다면 노동력의 경제적 · 정치적 영향력은 낮아지고, 희소성 높은 자원의 소유주들은 막대한 부를 독점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디지털 혁명이 조성하는 노동력 과잉에 따른 경쟁 및 갈등소득 분배의 불균형 문제는 향후 풀어야 할 전 지구적 차원의 도전 과제다. 저자는 전 세계의 일반적인 숙련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향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류는 이미 과거 산업혁명을 통해 깨달은 경험이 있다. 혼란스러운 정치적 변화를 겪은 뒤에야 인간의 삶을 보다 개선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재분배를 논의하는 장이 형성될 것이라면서 저자는 낙관적으로 예측한다. 그런데 실물경제의 침체로 하루하루를 답답하게 살아가는 ‘서민’ 독자 입장에선 전문가의 낙관이 속 터지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우리 사회의 주변부는 변화를 요구하지만, 핵심으로 갈수록 고여 있는 물 같다.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권력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기회균등, 공정한 경쟁, 공평한 분배와 같은 얘기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의 응석쯤으로 비친다. 디지털 혁명 시대가 코앞에 있는데도 자신이나 자녀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 Trivia

 

 

 

 

책 앞날개 저자 소개 문구에 보면 ‘수적 편집자’라고 표기된 오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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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29 18:24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보면 저자는 기계가 일자리를 대신하는 시대에 노동단체의 교섭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아무래도 일자리 뺏긴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많아지면 노동조합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 인지 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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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식가 장 브리야사바랭(Jean Brillat-Savarin)이 한 말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가? 가능하다. 음식은 문화의 산물이다. 음식에는 출신지, 성장 환경, 성품 등 다양한 단서가 녹아들어 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나 사소한 행동도 성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말과 행동 속에 우리의 사고행위를 지배하는 은유가 있다. ‘은유는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다. 예컨대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이다. 그들은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기능을 극대화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개념에 기반을 둔,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는다는 전통 경제학 패러다임에는 문제가 있다. 일단 전통 경제학의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세계는 완벽할 정도로 합리적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합리적일 것 같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며, 결과가 뻔한데도 어리석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주의는 하나의 항구적이고 정확한 기준이 있다는 신념을 토대로 진리 또는 세계를 평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언어는 그 자체로서 객관적 · 절대적 의미를 있게 된다. 그러나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낱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을 통해 구성된다고 반박한다. 인지과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프레임(frame)이라고 말한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구조화된 정신 체계이다. 레이코프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에 연패한 민주당의 패인을 분석하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이즈베리, 2015)라는 책에서 공론을 장악하는 프레임의 힘을 소개했다.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은 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선전 선동 수단이 되었고, 다수의 서민들은 부자 위주의 정책을 펴는 공화당에 표를 줬다. 공화당이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프레임은 가부장적인 엄격한 아버지모형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 권위와 개인적 책임, 자유 시장(사회적 다원주의, ‘보이지 않는 손’), 자수성가 등을 말한다. 진보주의적 프레임은 보수주의적 프레임과 정반대인 자애로운 부모모형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자애로움을 베풀고 타인과 협동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정치권은 유권자를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중도 이렇게 구분하는데 사실은 대다수의 유권자는 보수와 진보 성향을 동시에 가진 이중 개념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중도세력이 선호할 만한 적절한 프레임을 내세웠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 프레임을 만들지 않았다. , 민주당은 공화당에 맞설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지 못해 선거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에 끌리는가(생각정원, 2018)은 레이코프의 신작이지만, 기존에 나온 여러 권의 책에서 제시한 은유’, ‘프레임’, ‘엄격한 아버지/자애로운 어머니 모형’, ‘이중 개념등을 대담 형식으로 설명한 책이다. 대담 형식으로 인지과학의 중요성을 알린 책으로는 이기는 프레임(생각정원, 2016)이 있는데,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에 끌리는가는 독일에서 이기는 프레임보다 먼저 출간된 책이다. 레이코프의 대표작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정독했고, 그가 이 책에서 말한 인지과학 용어들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번에 나온 대담집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아니면 안 읽어도 된다.

 

그런데 레이코프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이중 개념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양육 모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직장에서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살다가도 가정에서는 자애로운 부모 모형으로 사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레이코프의 양육 모형은 이성애 중심 · 정상 가족 구조를 전제한다. 그는 미혼모가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살아간다고 단정한다.

 

 

  여성은 은유적으로 국가 전체의 엄격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흔히 미혼모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런 미혼모는 가정 내 권위적인 남성 인물의 부재를 자신이 보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엄격한 아버지 모형을 신봉하는 여성은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을 때리기도 하죠. 여성도 가정에서 엄격한 아버지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정치에서 은유적인 엄격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요약 · 발췌했음, 135~136)

 

 

부부 관계를 맺지 않고 혈연관계가 아닌 아이를 입양한 미혼모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을 신봉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애로운 부모일 수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흑인 공동체 속에 살아간 흑인여성은 부모가 부재한 남의 아이를 양육한다. 백인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흑인 공동체의 양육 방식을 이성애 중심 정상 가족 제도에 벗어난 일탈로 규정한다. 그들은 가모장(家母長) 명제를 내세워 생계를 부양하는 흑인여성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나쁜 어머니로 인식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흑인여성은 일터에서 복종적인 유모가 되려는 압력에 부딪히며 자신의 가정에서는 강력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가모장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144)

 

 

따라서 미혼모의 양육 방식을 엄격한 아버지 모형으로 판단하는 레이코프의 주장은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흑인 미혼모의 육아 방식을 설명하는 데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흑인여성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다. 레이코프는 미혼모의 양육 모형을 설명하면서 인종문제를 간과했다. 그리고 그는 백인 중심의 이성애 중심 · 정상 가족 구조라는 프레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프레임을 장악한 세력은 해당 분야의 주도권을 쥐고, 대중은 이미 형성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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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5-2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보는 세상 역시 프레임으로 만들어
진 거겠죠.

cyrus 2018-05-29 07:41   좋아요 1 | URL
우린 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빠지기 쉬워요. 그런데 이걸 간파하는 게 어려워요.. ^^;;
 

 

 

 

 

 

I got to have (just a little bit)

A little respect (just a little bit)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작은 존중뿐이에요.” 미국의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 부른 Respect는 문자 그대로 존중에 관한 노래다. 이 노래는 민권운동에 뛰어든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표곡이 되었다. 사실 프랭클린이 부른 Respect는 리메이크 곡이다. 리메이크 버전 Respect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프랭클린의 뛰어난 가창력 이외에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는 노랫말에 있다. 프랭클린은 Respect를 애원하듯이 부르지 않는다.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인 흑인여성으로서 살아온 프랭클린은 존중받을 권리에 대해 소리 높여 노래한다. 따라서 Respect인종의 다양성과 페미니즘을 아우르고 있는 노래라 할 수 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이론문화연구소, 2009)

* [절판]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 2004)

 

 

 

아프리카계 미국인 출신의 소설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는 자신의 글에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아레사 프랭클린의 목소리에 평생 재갈이 물려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들은 오랜 억압에 가로막혀 질식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 변모해 가는 흑인여성들의 자립적인 삶이 주목받지 못한다. 흑인여성의 목소리는 백인 중심 사회에 의해 배제되거나 지워진다. 그렇지만 흑인여성은 할머니에서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소중히 여겼다. ‘정신적 유산이란 흑인여성이 즐겨 부르던 구전 노래들에 표현된 흑인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이다.

 

 

 

 

 

 

 

 

 

 

 

 

 

 

 

 

 

 

 

* [읽을 예정인 책]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예출판사, 2014)

*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1)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은 미국 남부 흑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수집한 민속학자였다. 그녀는 사람의 의식은 한번 깨우면 다시 재울 수 없다고 했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원초적인 흑인 민중의 언어와 문화는 백인 앞에서 말문을 닫고 순응하면서 지내도록 강요한 통제적 이미지에 저항하는 수단이 된다. 특히 흑인여성은 글을 쓰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개인적 목소리를 표현해 왔다. 이 과정에서 흑인여성은 백인이 부여한 통제적 이미지를 거부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변화된 의식을 가진 흑인여성은 다시 재울 수 없다. 그들이 모이면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가 나오게 되고, 하나의 집단으로 형상화된 목소리는 사회를 바꾸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강조하는 집단적 힘 기르기.

 

 

 

 

 

 

 

 

 

 

 

 

 

 

 

 

 

 

 

 

 

 

 

 

 

 

 

 

 

 

 

 

 

*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갈무리, 2018)

* 에릭 홉스봄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PHONO, 2014)

* 김진묵 흑인 잔혹사(한양대학교출판부, 2011)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흑인 역사를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음악이다. 흑인 영가는 미국의 노예 흑인들이 만들어 부른 기독교 복음성가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이 음악의 원류는 아프리카의 전승 음악이다. 아프리카 흑인이 미국으로 끌려가지 않았으면 흑인영가뿐만 아니라 재즈와 블루스, 도 없었을 것이다. 흑인에게 음악은 어떤 예술양식보다도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행동이다. 노예로 팔려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음악은 그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보듬어주는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종종 소설이나 영화에 보면 노예선에 갇힌 노예들은 꿈도 희망도 없는 무력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노예선 내부 모습과 분위기를 증언하는 자료를 수집한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흑인들이 노래를 통해 자신들이 직면한 절망에 대항하는 집단적인 힘을 길러냈다고 주장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노예선은 바다 위에 움직이는 거대한 감옥이면서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의성이 발현된 장소로 볼 수 있다. 레디커가 발견한 기록들은 흑인여성이 저항과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예선에서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때로는 선원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보통은 아프리카인들이 밤낮으로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강제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어떤 노래는 자발적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전에 노예선 선장이었던 어떤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남자들은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고향 문화에 관해 이야기했고 남자아이들은 거기에 맞춰 춤을 추며 즐겼다.” 모든 기록에서는 노예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항상 여자가 맡았다.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338)

 

 

재즈 비평가로도 활동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재즈를 과거와 현재에 걸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 그가 쓴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의 원제이기도 하다)의 신념과 행위가 반영된 음악으로 봤다. 재즈는 미국 흑인들의 척박한 현실과 삶의 애환 속에서 탄생된 음악이다. 재즈를 만들거나 즐겨 부른 흑인들, 특히 빌리 홀리데이와 아레사 프랭클린 등과 같은 거장들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녀들이 가수가 되지 못했더라면 노래를 잘 부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고, 무대에 올라서도 무명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홀리데이와 프랭클린이 거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노래에 응답한 평범한 사람들’, 즉 흑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 음악은 백인이 설립한 레코드 회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만, 그 속에는 백인 사회가 외면하고 배제한 평범한 흑인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흑인 음악에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메시지 없는 흑인 음악은 노래 속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흑인의 삶이 없을뿐더러 그 노래를 듣는 청자인 흑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흑인 음악에 고통스러운 삶을 산 흑인들의 한()의 정서가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의 정서는 흑인 음악의 정의가 될 수 없다. 한의 정서만으로는 다양한 언어와 음색, 음률로 표현할 수 있는 흑인 음악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인 음악에서 표현된 의 의미를 어설프게 접근하면 흑인을 아픔과 부침이 많은 민족으로 상정하고, 흑인 음악을 피해자의 목소리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흑인을 타자로 대상화하면서 일어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구구절절 드러내는 구슬픈 흑인 음악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들도 소중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흑인 음악도 있다. 프랭클린의 Respect처럼 말이다. 흑인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좌절과 포기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뜨거운 자유에의 열망과 인간다운 삶에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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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28 15:56   좋아요 2 | URL
요즘 흑인 가수들이 부른 노래를 유튜브에 찾아 듣고 있습니다. 빌리 홀리데이, 니나 시몬즈. 그녀들이 부른 곡들은 정말 최고입니다. 흑인 가수들이 부른 재즈라고 하면 우울한 가사와 선율로 만들어진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프랭클린의 <Respect>처럼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노래도 있어요. 저항적인 메시지를 유쾌한 음악으로 전달하는 그들의 예술적 능력이 부럽습니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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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여권의 옹호》(연암서가, 2014)는 ‘페미니즘의 원점’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태동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창했고 뒤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인간은 남성을 의미할 뿐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인 루소조차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나섰고, 《여권의 옹호》에서 루소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권의 옹호》는 여성들도 국민 교육의 대상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불멸의 작가’가 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태어난 지 11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출신 모녀가 쓴 세 편의 소설이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메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여성스러운 매력만을 보여주는 남성 작가의 감상 소설(Sentimental novel)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집필에 공을 들였다. 『마틸다』는 셸리의 미발표 작품이다. 『마틸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라는 파격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이다. 고드윈은 셸리가 보낸 『마틸다』 원고를 읽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고 원고 발표를 요청한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의 원조로 꼽히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당대의 남성 신화에 도전하는 텍스트이다. 서구 문명의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출산 없이 탄생한 괴물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불행한 결과를 상징한다. 『마틸다』의 여주인공 마틸다 역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친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근친 사랑’이라는 주제는 불순하고도 비도덕적이다. 파격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주인공의 주체적 여성상을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건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틸다는 근친 사랑을 금기하는 정상 가족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 그녀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마틸다』를 읽은 고드윈은 아버지를 못 잊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남성 독자들도 고드윈과 비슷한 정서를 느꼈으리라. 이들의 눈에는 마틸다가 ‘변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쌍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쌍년’의 의미는 남자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쌍년’과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쌍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회의 틀에 벗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을 뜻한다[1]. 셸리가 창조한 마틸다는 남성이 부여한 ‘쌍년’의 부정성을 뒤집은 여주인공이다.

 

만약 울스턴크래프트가 문학적 역량을 더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메리』와 『마리아』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메리』의 여주인공 메리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는 능동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내로서의 의무’에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결혼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메리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이지만, 자신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앤을 향한 우정이 깊어질수록 메리는 사랑(이성애)과 결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녀는 한 차례 결혼을 경험했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헨리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성애적 규범과 질서를 끝내 거부한다. 이 소설에서 메리는 앤과의 우정을 경험하면서 평소에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성찰과 낯선 감정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 연애가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혼자’ 또는 동성 동거를 원하는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49쪽)

 

  메리는 심사숙고한 뒤 앤의 가족에게 남편과 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며 한동안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편과 살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살 생각이니? 그 질문에 메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메리』, 89~90쪽)

 

 

이성애 결혼과 가족 중심 규범이 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에서는 독립적 삶의 모델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정상 가족’ 사회는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은커녕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메리와 앤의 만남은 ‘성애 없는 헌신과 우정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 모델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는 이성애 제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애 규범이 전제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간의 우정은 정상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메리』가 보여준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결합은 당대 문학 작품들에 볼 수 없었기에 낯설다. 그래서 더더욱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를 시도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고 낯설지 몰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성애 부부관계만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도전한 여성들의 전위적 투쟁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 미혼 여성 두 명이 동거하는 생활 방식)보다 한발 먼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원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마리아』에서도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상했을 법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는 남편이 꾸민 계략에 빠져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다. 정신병원 수용소에 갇힌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 정신병원 수용소 관리인으로 일하는 제미마(Jemima)다. 두 여자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마리아는 상류층, 제미마는 빈곤층), 공통으로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다. 『마리아』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면서 독자는 ‘열린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을 그대로 따라 결말을 지었다면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유토피아 소설은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한 다음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마리아의 수기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문제들을 분석하여 낱낱이 비판한다. 이러한 그녀의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말을 상상해본다면, 울스턴크래프트는 마리아와 제미마의 우정을 ‘계급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실마리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소설들은 오늘날의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란 실용성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학은 매우 역동적인 장르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순간적인 고통이었으나 그것을 이겨낸 자신만의 역동적인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로 표현했던 작가들의 삶과 닮았다. 그녀들은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의 문학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세상의 규범에 반기를 든다. 또, 잊힐 뻔한 여성의 진실한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작가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발표된 페미니즘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성 독자는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현실과 미래는 이 작가들이 간절히 원했고 상상했던 현실과 미래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적극적인 독서는 끝없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장에서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이러한 사유와 상상을 거듭하게 만드는 독서를 통해 여성 독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메리』, 『마리아』, 『마틸다』는 분명히 ‘오늘날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 그녀들의 페미니즘 소설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1] 페미니즘이 전유한 ‘쌍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참고했다. [내 ID는 강남미인, 되살린 ‘쌍년’의 기록] (일다, 2017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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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기존 관념에 대한 비판 내지 저항에 뿌리를 두는 바, 페미니즘 소설은 충분히 문학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cyrus 2018-05-28 11:41   좋아요 1 | URL
이제 우리나라도 페미니즘 문학,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
 

 

 

‘미국 남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의 소설 원작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것입니다. 19세기 말 미국 남북전쟁으로 인해 격동에 휘말린 여인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죠.

 

 

 

 

 

 

 

 

 

 

 

 

 

 

 

 

 

 

 

* [안 읽었어요!]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열린책들, 2010)

 

 

 

 

이 영화에서 스칼렛의 하녀로 나왔던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은 흑인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제11회,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그녀는 개성 넘치는 하녀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영화가 개봉된 1940년대에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Rhett Butler) 역을 맡은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은 맥대니얼이 시상식에 나오지 못한다면 자신도 시상식에 나오지 않겠다고 보이콧 선언을 했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두 사람 모두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사이좋게 여우조연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로 참석한 흑인배우라는 기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맥대니얼은 할리우드에서 연기 활동을 펼치면서 하녀 역 위주로 캐스팅됐습니다. 일부 흑인들은 그녀가 하녀 연기만 한다면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연기를 비판한 흑인들은 하녀 연기가 흑인에 대한 편견 낳을까 봐 염려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오스카상의 영예를 얻은 뒤에도 하녀 역할이나 단역 연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소화했습니다.

 

 

 

 

 

 

 

 

 

 

 

 

 

 

 

 

 

 

* 강준만 《교양영어사전 2》(인물과사상사, 2013)

 

 

 

맥대니얼이 연기한 하녀의 애칭은 ‘매미(mammy)입니다. ‘mammy’는 ‘mommy(엄마)’의 남부 방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아주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단어의 의미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쓴 글[1]에 ‘mammy’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흑인차별이 극심했던 지역이고 아직도 흑백 인종차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mammy’는 미국 남부의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 흑인 유모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혐오 표현입니다.

 

 

 

 

 

 

 

흑인 하녀, 유모 대부분은 뚱뚱한 흑인여성이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장면 중 하나는 하녀(해티 맥대니얼 분)가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입니다. 코르셋은 허리를 가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슴을 더 풍만하게 보이기 위한 여성 전용 보정 속옷입니다. 흑인 하녀가 오하라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은 날씬한 백인 여성의 몸을 우월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뚱뚱한 흑인 유모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읽고 있는 중이에요]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3장은 흑인여성의 한정적인 노동(하녀, 유모, 가모장[家母長])에 덧씌워진 백인 중심 시각과 분석을 해제하여 흑인여성의 노동을 재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장은 유모, 가모장,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controling images)의 사례들이 나옵니다. 앞서 언급했던 ‘mammy’가 바로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가 만들어낸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제제벨(jezebel)‘후치(hoochi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제벨은 성경 열왕기 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Ahab)의 왕비입니다. 성경에서 제제벨은 성적으로 문란한 ‘악녀’로 묘사됩니다. 제제벨은 흑인 창녀,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흑인여성을 부르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제제벨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이어온 혐오 표현이 후치입니다.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시공사, 1998)

 

 

 

이성애 남녀의 결혼과 가족이 사회의 기반이라고 여기는 미국 백인 중심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흑인여성의 유급 가사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이해하는 데 불리한 분석 틀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녀와 유모는 가족을 위해 일을 하면서 임금을 받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하녀와 유모가 된 흑인여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흑인 하녀와 흑인 유모는 ‘백인 노예주’를 위해 일하는 ‘노예’였습니다. 슬프게도 흑인여성의 자식들은 부모처럼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백인 노예주, 특히 목화 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목화를 대규모로 재배해 많은 소득을 올렸습니다. 그러려면 값싼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고, 일하는 남성 노예를 사들이는 대신에 출산능력이 있는 여성 노예를 통제합니다. 미국은 1808년부터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어요. 이때부터 노예의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고, 목화밭에서 일할 수 있는 흑인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어요. 흑인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출산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노예주들은 흑인여성의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유화책을 내세웁니다. 임신한 흑인여성에게 힘든 일을 부과하지 않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흑인여성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을 출산의 도구이자 통제,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 중심의 관점은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어왔습니다.

 

 

 

 

 

 

 

 

 

 

 

 

 

 

 

 

 

* 마커스 레디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

 

 

 

흑인여성은 가족생활에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 백인 가족 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하녀 연기를 많이 했다고 해서 흑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해티 맥대니얼이 뭐라고 말했던가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녀 역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녀와 유모는 낮은 임금을 받는 직업이지만, 흑인여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불가피한 직업입니다. 하지만 흑인여성들도 집안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백인 가족이 생물학적 결합(결혼)으로 형성된 혈연 중심의 공동체라면, 흑인 가족은 혈연을 초월한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흑인은 출신지가 다르고, 핏줄이 다른 동료도 ‘형제’이자 ‘자매’인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의 범위를 확대한 흑인들의 유대감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저항하는 집단의식입니다. ‘바다 위의 거대 감옥’이나 다름없는 노예선에 끌려 온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비관했지만, 언젠가는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동료 노예가 있었습니다. 출신지와 언어는 달라도 흑인 노예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했고,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노예선의 역사를 연구한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노예선에 갇힌 흑인 노예들이 ‘흑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자생력과 저항 의지를 키우는 과정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동료를 가족처럼 여기는 친밀한 관계를 ‘뱃동지(shipmat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료애’가 강한 흑인여성들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또는 친구의 자식들까지 함께 돌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육아 방식에서 흑인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그런데 백인 사회학자들은 흑인 공동체 속 흑인여성의 역할을 ‘가족 내 여성의 권력’으로 해석했고, 이를 ‘가모장’ 명제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가모장’을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가부장’과 동일하게 볼 수 없습니다. 가모장 명제는 흑인가족의 특징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한 개념입니다. ‘동료애’와 ‘가족애’가 결합된 흑인 가족에는 누군가가 가족 구성원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유모’와 ‘가모장’은 흑인여성을 이중으로 통제하는 이미지입니다. 유모는 백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착한’ 흑인여성을, 가모장은 남편의 권력을 거세하는 ‘나쁜’ 흑인여성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 통제적 이미지는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지워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도 강력하게 통제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의 시선을 거부하고 흑인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힘 기르기’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다룬 흑인여성 문제들이 마치 ‘흑인여성만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흑인여성 억압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두’라는 이 명사에는 우리나라 여성도 포함됩니다. 여성의 주체성을 지우는 여성 혐오는 여성을 ‘좋은 여자’와 ‘나쁜 년’의 이분법으로 구분합니다. 할 말 다 하는 여성,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등은 어딘가 문제가 있고, 피하고 싶은 여자로 묘사됩니다. 대신 남성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수동적인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여자로 묘사되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편견에서 여성 혐오가 태동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기제들이 어떻게 여성의 삶과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옥죄어 왔는가를 폭로하고 투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우리는 황인종, 즉 백인에 의해 유색인으로 분류되는 집단이면서도 흑인이나 동남아인을 백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차별합니다. 흑인과 동남아인을 무시하는 차가운 시선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유색인 여성들의 직업, 그리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복지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 이 모든 문제가 흑인여성의 억압의 양상과 얼마나 밀접히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흑인 페미니즘은 흑인여성에게만 한정되는 특정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보이지 않는 사람들] 2018년 5월 17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09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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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5-2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념 클라크 게이블이네.
그러니 저 시대에 클라크가 적지 않은 파워를
가졌다는 말도 되겠네.
나중에 흑인을 비호했다고 구설수에 오를만도 하잖아.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난 중학교 때 책으로 읽고 영화로도 봤는데
재미는 있는데 책이나 영화나 흑인을 대변하기 위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미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은 아닌가 해.
모르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관점이 보일런지.ㅋ

cyrus 2018-05-24 16:45   좋아요 1 | URL
클라크 게이블이 최고의 배우였다고 해요. 오스카상 보이콧 선언 이후에 KKK가 게이블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대요. 그런데 이 행적만 봐서는 그가 흑인 민권 운동에 관심 있는 배우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확실한 건 게이블과 해티 맥대니얼은 정말 친한 사이였어요. 해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게이블이 장례식에 참석했어요.

백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백인 여성 작가의 소설과 흑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흑인 여성 작가의 소설을 비교해보고 싶어요. 마거릿 미첼의 소설도 독서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데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페크pek0501 2018-05-26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2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하러 가서 처음 보았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몰랐음을 깨닫는 스칼렛에 대해 참 이상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까 하고요. 그땐 제가 어렸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거죠.
지금은 모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잘 알지요.

예전에 페미니즘으로 본 소설, 이라는 제목 같은데(확실치 않네요.) 그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뭐든 분석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는 걸 경험했거든요. 결국 역사라는 것도 승자(또는 강자)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닿을 수 있는데... 우리는 패자(또는 약자)의 시각으로도 볼 필요가 있으므로 양쪽에서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더라고요.

cyrus 2018-05-28 11:45   좋아요 1 | URL
요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제가 그동안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서양문학과 역사, 페미니즘 논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흑인여성의 목소리를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닌 ‘생존자의 목소리’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됐어요. 흑인여성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백인 중심 사회에 맞서서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백인 학자들은 단지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의 주체적인 면모를 보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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