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었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107쪽)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다 지난 일이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위로도 자주 나눈다. 후회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스런 채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윤리적 불감증이나 극도의 오만, 지독한 자포자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누구든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사는 이 세상에서 후회 없이 삶의 구원을 바라기 힘들다. 후회 없이 어찌 지난 일을 지나 보낼 것이며, 어찌 다른 미래를 꿈꾸고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의 영혼은 내 안의 하이드에게 도전받으며 견실해질 수 있다. 후회할 일은 철저히 후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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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3-10-30 18: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잔님. 모딜리아니의 연인 잔 에뷔테른 초상화의 프로필에다가 닉네임을 사용하시네요. 화가의 슬픈 러브스토리 때문인 것도 있지만 모딜리아니 그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이 소설을 맨처음에 읽었을 땐 그냥 독특한 줄거리의 괴기소설로밖에 안 봤어요. 그러다가 요즘 타 출판사에서 새 번역본이 나온 것도 해서 오랜만에 새벽에 읽다가 인용한 구절에 꽂혔어요. 여생에 앞으로 후회할 일은 분명히 많을거고, 피하기 위해서 심사숙고해도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럴 수도 없는 운명이죠. 좀 힘들고 피곤해도 나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후회하는 행위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인생 주기에 있어서 과도기를 거치면 다음 번에는 황금기가 찾아오는 것처럼요. 쟌 에뷔테른님도 가을 잘 보내시고요,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 몸 건강하세요. ^^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도입부에 이렇게 썼다. ‘사춘기 때 나는 인생을 증오해서 자살 일보 전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죄와 결점, 어리석은 짓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내 눈엔 내가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는 그러면서 끔찍한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건 스스로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결점에 무관심해지는 한편 관심을 밖으로 돌린 다음부터라고 적었다. 외부에 대한 관심 역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자기혐오로 생기는 것과 달리 생의 본질을 파괴하진 않는다는 주장이다.

 

러셀 같은 이도 그랬으니 보통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는 누구에게나 힘겨운 시기다. 사춘기는 더하다.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어른들은 죄다 엉터리 같아 자꾸 화가 난다.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무조건 구속하고 강요하려 드는 듯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기만 하다.

 

부모와 마주하기 싫다 보니 가능하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부모들의 속을 뒤집는 이런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사춘기의 특성이다. 몸은 어른에 가깝지만 뇌, 특히 논리적 사고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결과라는 얘기다. 안 그래도 힘든데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부에 매달려야 하니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교생까지 자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원인은 가정불화 및 가정문제, 우울증, 성적 비관 순이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든 충동적 자살도 있다니 충격적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 한 사람만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도 살아갈 용기를 낸다. 부모의 인내와 보살핌이 중요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는 절대적이다. 정신건강 문제가 드러나도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가정과 사회는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야말로 청소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다.

 

행복의 사회적 요소는 살면서 주위에 믿을 사람이 많아야 된다. 동네 공동체가 활성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동네효과(community effect)’라고 한다.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증거다. 달라이 라마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 혼자만 따로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영어 ‘happiness’의 어원이 ‘옳은 일은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happen’이듯이 개인과 가족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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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중에 분명히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는 것은 단순한 설정이다. 셋이 길을 갈 수도 있고 다섯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길을 가는 상황을 공자는 예로 들고 있다. 세 사람이냐, 다섯 사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셋이 길을 가고 있다면 자신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은 두 명. 그 두 사람 중에 나에게 스승처럼 무언가 가르침을 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그들이 많이 배워서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자격 요건을 제한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는 게 적은 사람일수도 있고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들이 슬슬 피해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공자는 자격 요건을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러니 배우지 못한 사람도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도 스승이라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들이 많으니 주변에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공자의 말처럼 자격을 불문하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스승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한비자라면 공자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세 사람을 잘못 만나면 없는 호랑이 한 마리도 만들 수 있다고(三人成虎).

 

전국 시대 위나라 혜왕은 조나라와 강화를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태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방총)이란 대신을 따라가게 했는데, 그는 출발에 앞서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소." "그러면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않을 거요."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아뢰어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땐 믿어지겠지." 방총은 한숨을 내쉬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애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거짓도 말하는 입이 여럿이면 솔깃해지게 마련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드는 셈이다. 내가 믿을 만한 주변 사람 세 명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말은 진정어린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세 사람이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헛말도 자꾸 들으면 정말 그럴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서운 ‘사람의 말’이 지금은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흉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평소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지인에서부터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저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많으면 천 명까지 나와 친분이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괴담과 헛소문,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 등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SNS를 타고 급속하게 번졌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무심히 던진 말들이 모아져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게까지 했던 일이 발생한다.

 

결국 내 주변에 있는 세 명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스승인지, 아니면 거짓과 부조리의 발톱을 숨기고 있는 사악한 호랑이였는지 파악하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군가가 선하다면 그 선함을 보고 배울 것이며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악함을 보고 느껴서 자신을 고치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진짜 호랑이를 그리며 말하는 것인지, 거짓 호랑이를 만들어 말하고 있는지를 똑바로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나와서 어떤 달콤한 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해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어떤 현상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 스승이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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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삶에 안주하는 사람과 성취하는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안주하는 사람은 설령 성공 가능성이 99%라고 하더라도 1%의 실패 가능성에 연연한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기 방어적인 시나리오로 최악의 결과를 그려보고는 모험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로 성공을 거두더라도 감격보다는 안도감만 느낀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안주하는 사람과 달리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노자』 52장에 보면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有曰强)’으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强)이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소한 변화를 감지하는 명철한 지혜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의미한다. 작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시야에 갇혀 좁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세심하게 감지함으로써 크게 보는 통찰력이다.

 

우리 앞에 닥쳐온 고난 극복에 실로 큰 힘이 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다. 지혜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지혜는 끊임없는 훈련의 대상이기도 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Flow'라 부르고, 플로 상태가 행복과 성취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환상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사회는 단순한 똑똑함보다는 지혜로움이 더 중요하고, 삶은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나'의 존재와 '우리'라는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처럼 진정한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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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벌은 카스트 체계와 유사한 위계 서열 구조다. 인도의 카스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 4개의 시스템으로 돼 있다. 소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뉜다. 하지만 4개의 카스트는 그 안에 무수한 하위 카스트를 내장해 다시 아주 세분된 신분적 위계 서열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학벌도 그렇다. 입시 때만 되면 수능 성적과 내신 등에 따라 정교하고도 치밀한 대학의 순위가 드러난다. 이는 막강한 사회적 규정력을 지닌 잣대다.

 

한국 사회 교육열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사회적 희소가치인 상위 학벌의 획득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토록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것이 모든 한국인이 갈망하는 사회적 희소가치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최고로 상승할 수 있는 수직적 통로인 동시에 그 자체가 각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권력이다. 이 같은 학벌의 권력화는 국민 스스로 학벌 경쟁에 투쟁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교육’을 강조한다는 게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접근이 아닐까?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다. 지금 한국 교육은 ‘학력 경쟁’이 아니라 ‘성적과 학벌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마치 교육의 본래 목적이 상급학교 진학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철옹성같이 강건한 ‘입시교육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창의 인성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학벌을 둘러싼 싸움은 세계화의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 국내 대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 유학으로 팽창한 지 오래다. 고전적 의미의 유학은 감소하고 고교 졸업 후 외국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조기유학 역시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과정으로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된 사람은 과시를 통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과시는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다르다. 헤겔의 ‘위신 투쟁’이나 호네트의 ‘인정 투쟁’과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좋은 학력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증명서로 통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많이 가져도 되고 목소리가 커도 된다. 사람대접 받으려면 특정 학벌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 희소가치를 지닌 자가 과시를 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돼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벌을 사랑한다. 너무나도 맹신적으로.

 

수능시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금 강남 고3 교실은 명문대라는 승리의 월계관을 놓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방불케 한다. 학벌은 하루빨리 물리쳐야 할 ‘공공의 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쟁취하도록 권할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가수 강진은 자신을 울리는 '땡벌'을 사랑한다지만 지금 '강남'은 학벌 때문에 힘들어 지쳐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있다. 서울 최고의 엘리트 가수 '강남'이 부른다.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너무 힘들어요 /

당신은 못 말리는 학벌 /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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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10-2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묘하네요, 강남이 부르는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음.. 아무리 봐도 절묘해요. ㅎㅎㅎ

cyrus 2013-10-25 23:46   좋아요 0 | URL
학벌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문득 강진의 노랫말이 생각났어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