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통치 -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
조은주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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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문제로 심각한 우리나라는 불과 4, 50여 년 전만 해도 다산국가였다. 과다한 인구를 중진국 도약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한 박정희 정권은 ‘가족계획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높은 출산율이 국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가족계획까지 포함했다. 이후 본격적인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됐다. 70년대 구호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으며 80년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다. 이 무렵에는 남자들이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면 관할 보건소에서 나온 의사들이 무료 정관수술을 해 주고 콘돔을 나누어 줬다. 인위적으로 출산을 제한시켰다.

 

격세지감이랄까. 산아제한이 국가적 과제였던 옛 시절을 흥미로운 추억거리로 회상하기에는 오늘의 우리나라 상황은 너무 심각해졌다. 아기 울음소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생산인구와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한다. 여기에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까지 겹쳐 우리나라 경제는 심각한 정체와 퇴보의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는 여러 가지 유인책으로 출산을 장려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인구는 많든 적든 늘 문제다. 많을 땐 줄이도록, 적을 땐 늘리도록 국가적 압력이 커진다. 그래서 인구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란 부제가 달린 《가족과 통치》는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 조은주 교수국가의 통치(박정희 정권의 가족계획사업)가 임신과 출산 등의 국민 생식 영역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자세히 살핀다.

 

근대 이전까지 국가 권력은 ‘가부장제’에 그 뿌리가 있다. 군주는 ‘가부장’에 속한다. 국가는 왕이 정점에 있는, 가족보다 더 커다란 조직 형태이다. 국가의 신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버지에게 대하듯이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 이때 가족은 ‘통치의 모델’이었다.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사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면서 가족은 ‘통치의 도구’로 전락한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가족은 ‘노동 인구’이면서도 ‘통치되어야 할 인구’이다. 국가가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족 구성에 개입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가족계획사업은 국만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통치를 극대화한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적절한 인구 유지가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리하여 가족을 통치하는 강력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임술을 보급하기 위해 보건소 관할 하에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했다. 전국 보건소에 2, 3명의 ‘가족계획 계몽원’을 파견하여 가족계획 캠페인을 하고 경구피임약을 보급했다. 1968년에 조직되기 시작한 가족계획어머니회는 새마을부녀회의 전신이지만, 사실은 경구피임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단체였다. 1973년에 통과된, 임신 중절(낙태)을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은 ‘성공한 산아제한’의 그림자이다. 정부 차원에서 광범위한 낙태가 조장되기 시작하면서 의사들은 국가의 가족계획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간파했듯 지식은 권력에 봉사한다. 출산과 피임에 관련된 의학 및 과학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은 국민의 생식 영역을 통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푸코는 말년의 저작 《성의 역사》 1권에서 국가 권력이 성, 즉 섹슈얼리티(sexuality)를 구조적으로 억압해 왔다는 가설을 거부한다. 오히려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식과 담론은 확산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섹슈얼리티를 말하게 만드는(담론화) 배경과 그 전략을 분석해 섹슈얼리티 억압 가설이 가진 허구성을 폭로한다. 《가족과 통치》는 섹슈얼리티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바탕으로 가족계획사업의 통치술을 재평가한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가족계획 정책의 통제 대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악과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며 미니스커트 단속을 명령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경찰에게 붙들려 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릎에서부터 치마 끝단까지의 길이를 자로 재는 수모를 당하기가 예사였다. 또 박정희 정권은 트랜스젠더를 경범죄로 경찰에 연행하고 단속하는 일을 중요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사례만 보더라도 60~70년대 우리나라의 섹슈얼리티는 사회에서 등한시되거나 단속과 검열을 피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는다. 저자는 가족계획사업의 등장으로 섹슈얼리티와 인구 재생산(출산)은 따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쾌락적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성 담론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가족계획을 홍보하기 위한 만들어진 각종 책과 잡지에는 부부가 만족할 수 있는 성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내용의 글들이 실려 있었다. 국가가 원하는 정상적인 가족 모델은 이성애적 사랑에 기초한 부부 중심의 가족이었다.

 

《가족과 통치》는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통치하는지 보여준다. 피임 도구 사용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주체성을 고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경제 성장 담론과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에 포획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한 국가의 이해가 반영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불편한 진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다. 섹슈얼리티가 남성의 본질적인 욕망이라고 인식한 남성들은 성적 주도권을 마음대로 쥐지만, 성관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여성이 혼자 떠안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는 여성을 국가를 위해 ‘출산하는 도구’로 여기고 있다.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로 여기는 몇몇 사람 중에는 산아제한의 시대를 살아왔거나 간접적으로 그 시대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살아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추억하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많이 사라지긴 한 것 같은데, 국민을 통치하는 구시대적 방식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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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료들의 의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인구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입니다.

섬김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 보는 시
선이 문제입니다.

cyrus 2018-10-02 07:24   좋아요 0 | URL
공개되자마자 논란이 된 ‘가임기 지도‘는 국가가 여성 (국민)을 어떻게 보는지 드러낸 정책이었죠.

2018-10-01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02 07:25   좋아요 0 | URL
독재 정권의 권력자들은 국민의 성을 통제하면서도 자신들은 즐길 수 있는 건 다 하죠.. ^^;;

2018-10-02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02 07:28   좋아요 0 | URL
저도 추석에 놀기만 했어요. 책은 안 읽고, 만화를 봤습니다.. ㅎㅎㅎ

추석 때 실컷 놀고 나니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네요. ^^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1 - 남자의 눈으로 본 남성문화
수요자 포럼 지음,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기획, 허주영 엮음 / 호랑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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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면 가수 아이콘의 노래 <사랑을 했다>를 흥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란 말이 일상적인 말이 돼버린 것 같다. 감정 표현을 쑥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용기를 내서 진솔한 감정을 드러낸다. 더 진한 애정 표현까지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되면 ‘사랑’이 넘치는 시대가 된 것 같은데, 정말 사랑의 양이 증가했을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져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합의하고 성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이기에, 상대방의 몸을 강제로 침탈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떳떳하게 말할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하룻밤’ 성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즐기거나 또는 사랑하는 여성이 있으면서도 다른 여성의 성(性)을 구매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성매매 행위가 나쁜 건 원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남성 문화를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가게 된다. 남성 연대(homosocial) 속에 성매매는 남성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된다.

 

나는 성매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돈을 주면서 일면식이 없는 여성과 섹스를 하는 남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볼품없고 비쩍 마른 몸을 이성 앞에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주변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성매매 업소에 가지 않는다고 거절하니까 친구들은 내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그들은 더 이상 내게 ‘떡 치러 가자’고 꼬드기면서 접근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을 잃더라도 그 정도 반응은 감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군대에 있을 때가 좀 힘들었다. 군대 선임과 동기들은 성매매하지 않은 나를 ‘어리석은 놈’으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성과 잤던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서 과시했다.

 

앞으로도 성매매를 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성매매를 안 한다고 해서 남성에게 성 구매를 부추기는 남성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방, 안마 시술소, 여관, 오피스텔, 노래방 등 일상에서 불법 성매매가 성행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성매매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나도 그렇고, 남자라면 마음만 먹으면 성매매를 할 수 있다. 모든 남자는 성매매의 잠재적 구매자이며 실질적 구매자가 될 수도 있다. 성매매를 같이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하는 남성 문화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남성 중심의 잘못된 성 문화를 부끄럽게 여기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부산에 성매매를 주제로 공부를 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의 이름은 ‘성매매 수요자 포럼(이하 수요자 포럼). 2년 전에 여성 인권지원센터 ‘살림’의 지원을 통해 모임이 만들어졌다. 수요자 포럼에 참석한 남자들은 성매매를 ‘수요’의 문제로 보고, ‘내부자’인 남성의 시선으로 접근해서 논의한다.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1》은 수요자 포럼에서 활동하는 남자 회원과 시민운동가 11명의 성매매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성매매가 필요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성매매는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집창촌을 폐지하면 성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공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매매가 만연된 우리 사회에 성폭력 건수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이 있기 때문에 성매매가 사회의 필요악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여성의 성을 돈 주고 사도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절대로 성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회일수록 성매매 자체를 ‘부끄러운 일탈’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 성매매를 안 하는 남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성매매는 남성 문제’라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한 성매매 문제는 성매매 업소에 종사한 여성, 즉 공급자의 문제로만 논의하게 된다. 이러면 성매매를 매개로 한 남성 연대 문화는 유지되고, 정작 성매매의 실질적 수요자인 남자들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불편한 논쟁’을 슬쩍 피한다.

 

수요자 포럼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임에 참석한 남자들은 ‘수요자인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 문제를 논의한다. 그들은 함께 모여 성매매 문제를 다룬 책을 읽고 토론하고, 전국에 있는 성매매 집결지도 방문했다. 토론과 현장 공부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오랫동안 쉬쉬해 온 남성 연대 문화의 실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책에 나오는 수요자 포럼 남성 회원들은 진지한 토론과 고민을 거치면서 ‘완벽한 남성’이라는 환상을 스스로 깨부순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남성 연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살아왔던 과거를 반성한다. 이러한 반성은 우리 남성 모두가 해야하는 공통의 행위이지 특정 개인만의 행위가 아니다.

 

남성 문화에 향한 비판이 흐릿해지면, 성매매 문제에 대한 이해는 빈곤해진다. 그렇게 되면 성매매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고, 성매매의 잠재적 구매자이자 실질적 구매자인 남성들은 그 문제를 피하는 수준에 그친다. 남성들은 성매매에 대해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차별, 혐오를 서슴없이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매매는 ‘남성 문화’와 연관 있는 ‘남성 문제’다. 남성의 자기비판과 성찰이 부재한 성매매 담론으로는 성매매를 근절하기 어렵다. 지금부터라도 남성들이 성매매 문제를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더 많이 목소리를 내고, 성찰하고,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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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9-18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남자 고등학생들도 쉽게 성매매를 하고, 그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성매매 문제가 당연히 수요자인 남성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당연했는데 오랫동안 그러질 못했어요. 저는 트위터를 하는데 몇 년 전 ‘성노동’론이 유행하며 수요자인 남성들이 엄청나게 떳떳했었어요. 제가 쵸콜렛 구매하듯 여성의 ‘노동’을 구매한다는 논리였던 거죠. (여기에 대해선 cyrus님이 더 잘 아실 거 같아요) 결국 일부 성’노동자’들이 청소년에게도 직업으로 성매매를 권하는 걸 보고 그냥 환멸을 느꼈습니다. 성매매종사자 인권 존중과 성매매가 합당한 노동인가는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라 생각하며, 나름의 모순을 대강 혼자 정리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동의 대상으로서 ‘성’은, 육체적 능력이나 정신적 능력으로 화폐를 벌어들이는 것과는 다르단 생각을 했어요. 생명과 연관된 특수함도 그렇고, 노동의 객체로 될 수 없는 본능의 부분이란 생각을 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09-19 21:25   좋아요 2 | URL
성매매 문제는 페미니스트들도 어려워해요. 저도 모르는 게 많아요. 혼자 책을 읽으면서 성매매 문제를 생각해보니까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

2018-09-18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9 20:54   좋아요 1 | URL
예전에 책과 굿즈를 보내주셨잖아요. 그에 걸맞게 선물을 드린 겁니다. 만족하셔서 다행입니다. ^^

2018-09-18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9 20:58   좋아요 1 | URL
도박과 흡연, 술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파멸을 부르는 위험한 쾌락이죠. ^^;;

페크pek0501 2018-09-20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사는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태도가 문제인 듯합니다. 주위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나도 해도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
옳고 그름을 따져 보지 않는 태도.

제도는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 조지 버나드 쇼가 생각나네요.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원칙과 제도와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09-21 17:24   좋아요 1 | URL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소한 행동 그리고 문화를 다르게 스스로 보는 일이 쉽지 않아요.

이하라 2018-09-21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만의 문화나 남성만의 문제로 보시는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매매 여성이 자기주도적으로 성상품화하는 것마저 남성주도적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하는 시각이 납득불가입니다. 무조건 여성이 피해자라니 남자들이 여성을 가축으로 삼아 가죽, 고기, 젖까지 다 짜먹으며 새끼까지 치게 하고는 잡아 먹는다는 주장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성매매 문제에서 여성의 성욕과 자본없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상도 문제입니다.

저는 유아시절 집에 애보기 여자에게 유사성행위를 강요당해 요즘 표현으로 역강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성장 후에도 여성과의 일반적인 교제를 못했던 시기를 거쳤습니다. 저는 사회 많은 부분에서 여성이 피해자라는 신화에 공감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은 성경에서도 매음굴이 등장할만큼 오래 묵은 병폐겠지만 남성주도문화가 문제가 아니라 성 그 차체가 존재하기에 문제겠지요. 엄연히 호스트 바가 존재하고 여성고객이 남성의 이차접대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건 남성주도문화의 돌연변입니까?

성매매는 사회의 문제이지 남성주도문화의 탓만은 아닙니다.

cyrus 2018-09-21 18:24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의 말씀대로 성매매가 성을 너무 사고 팔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낸 병폐라면 왜 사람들은 성매매 업종에 종사한 여성들을 ‘잡년‘, ‘걸레‘라는 혐오 표현을 써가면서 심하게 비난할까요? 물론, 자발적 성매매 여성도 비난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여성의 성을 구매하는 수요자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비교적 온건합니다. ˝성매매 업소에 들어간 남자가 잘못했네˝라고 말하는 게 전부입니다. ‘걸레‘ 소리 듣는 성매매 여성들의 반응과 대조적이죠.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건 남성들이 남성의 성매매 업소 출입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우리나라는 성매매 구매자(남성)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성매매 판매자(여성)에 대한 부정적 반응보다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저는 성매매를 ˝성 그 자체가 존재해서 생긴 문제˝로 보는 이하라님의 입장을 ‘성은 인간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과도한 쾌락에 집착, 성매매 탄생)을 준다‘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저는 성매매 같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성매매가 사회의 문제인 건 맞습니다. 성매매를 근절하려면, 그리고 남성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느낀다면 성매매 업소 출입을 ‘남성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인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 인식이 ‘남성 문화‘를 유지하게 만듭니다. 남성 문화는 여성과 섹스를 한 남성을 ‘진짜 성인 남자‘로 취급합니다. 이러니 성매매 경험이 있는 남자들은 자신의 성 구매를 부끄러워 하지 않아요. 그들은 성매매 여성이 잘못 했으니 ‘걸레‘ 소리 들을 만하다고 생각하죠.

재미있는 건 남자들은 남창을 만난 여자 고객도 ‘걸레‘라고 부르면서 조롱해요. 대부분 남자들은 여자의 성이 ‘정숙한 상태‘로 유지되길 원해요. 그래서 자신이 만나는 여성의 순결을 유독 집착하기도 해요. 여성이 성 구매자가 되든 성 판매자가 되는 남성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여성의 성을 바라봅니다.

이하라 2018-09-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그자체가 존재하기에 생긴 문제라는 말이 성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성에 부정적 측면만이 있다고 해석하는 건 확대해석입니다.
또 걸레나 잡년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남성 중심의 시각이 여성만 폄훼한다고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남성을 이르는 말도 색골 색한 개잡놈 등 표현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저는 성매매 업소 출입이 남성의 통과의례라는 주장은
사이러스님의 댓글 말고는 처음 접하는 주장입니다.
성이 존재하고 이윤추구가 존재하니 성을 매개로한 성매매나 신분상승이나
성폭력등이 존재한다는 건 일반적일 사고일 겁니다.

남성이 성 판매자가 되는 경우에도 여자의 정숙함이 유지되길 바란다고 하셨는데
남창이라던가 개잡놈이라는 표현 등이 성 관련 문제에 있어서
남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나요?
성구매자인 여성에 대한 시각도 나쁘겠지만 상습 성 구매자인 남성이나
성판매자인 남성이 그럼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인정 되나요?
교제하는 여성이 그런 걸 인정해 주겠습니까?
약혼 중이라면 그걸 안 여자측 부모님이나 당사자가 파혼을 말하는 것도
당연하게 인식될 겁니다. 남성이라고 사회적으로 관대하기만하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cyrus 2018-09-21 20:16   좋아요 5 | URL
저와 이하라님의 입장이 엇갈리는 이유는 우리 각자의 경험에서 오는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책에 나오는 남성들과 저는 ˝남자라면 당연히 성매매 업소에 가야 한다. 안 가는 게 이상하다(남자답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을 만났고, 이런 말을 불편하게 느꼈습니다. 반면 대부분 남자들은 성매매 업소 여성과 잤던 일을 동성에게 얘기합니다. 여성과 잤던 일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는 거죠.

남성 입장에서 여성과의 성 경험은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행위이고, 남성이 자신의 성 경험을 동성에게 얘기하는 이유는 여성을 정복ᆞ지배하려는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매매 업소에 가는 일을 남성성을 만드는 ‘통과의례‘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 혼자서 알아낸 입장이 아니고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맨 박스》의 저자의 입장을 참고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을 쓴 저자들도 성 경험 중심으로 형성되는 남성성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남성들을 비하하는 말들이 남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색골‘,‘호색남‘, ‘개잡놈‘은 혐오 표현에 가까운 ‘걸레‘와 비교하면 심한 수준의 욕설은 아닙니다. 색골과 호색한은 변태와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합니다. ‘걸레‘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상태 좋지 않은) 물건‘으로 비유해서 여성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혐오 발언입니다. 여성을 인간 이하 취급하는 표현입니다. 남성 자신의 혼전 성관계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혼전 성관계를 비난하면서 ‘걸레‘라고 부르는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여자를 나쁘게 보는 이중 잣대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들은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남성 문화란 ‘여성을 성적으로 지배하려는 심리‘, ‘순결주의‘에 집착하는 남성성에 기반한 경험과 행위입니다.

서니데이 2018-09-22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추석인사 드립니다.
오늘은 추석 연휴 첫 날이었는데,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 명절 보내세요.^^

cyrus 2018-09-27 08:37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연휴 잘 보내셨나요? 집에서 책 읽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지냈더니 어느새 연휴가 끝났네요.. ㅎㅎㅎ
 

 

 

서구의 중세는 신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인 질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 즉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주체였다. 그러나 근대 문명이 들어서면서 신의 왕관은 벗겨지고, 중세의 위계질서는 무너진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 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 1997)

* [품절] 프랜시스 베이컨 《학문의 진보》 (아카넷, 2002)

* 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 (한길사, 2016)

 

 

 

근대 문명은 ‘이성’의 발견에서 시작한다. 이것의 출발점은 데카르트(Descartes)‘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이다.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은 인간이 ‘이성적 인간’임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식별하고 사태를 잘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양식, 良識, Bon sens)’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성적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주체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무기 삼아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은 인간의 손에 마음대로 내맡겨지게 된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세계’로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발상은 프랜시스 베어컨(Francis Bacon)의 명제로 이어진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을 알면, 자연을 지배할 힘을 가지게 된다. 베이컨은 지향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실험에 수행되는 탐구이다. 그가 쓴 《학문의 진보》《신기관》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진보에 대한 희망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대부분 서양사는 서구 근대가 르네상스, 종교 개혁, 그리고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역사적 추동력에서 시작됐다고 기술한다. 이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핵심은 단연 ‘이성’이다. 이성은 진리를 밝히는 ‘빛’으로 간주했다. 이 빛은 세계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다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생각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과학이 이성의 효용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성의 빛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비출 때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모든 비밀은 밝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16)

 

 

 

 

 

 

 

 

 

 

 

 

 

 

 

 

 

 

 

 

 

 

 

 

 

 

 

 

 

 

 

 

* [품절] 크리스 호록스 《미셸 푸코》 (김영사, 2003)

* [품절] 요하나 옥살라 《HOW TO READ 푸코》 (웅진지식하우스, 2008)

*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김영사, 2009)

* 양운덕 《미셸 푸코》 (살림, 2012)

 

 

 

그러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성이 인간을 위한 이로운 도구라고 본 계몽주의의 믿음을 비판했다. 그는 근대의 핵심인 이성을 도마에 올렸다. 《광기의 역사》에서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광기)을 명확히 규정하는 사회의 통제적 관행에 대한 고발을 통해 권력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국가 권력이라든가 특정 집단의 세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후 이성의 배후에는 지식과 권력의 작용이 자리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실증적 · 합리적 사고와 연결된 권력에 의해 개개인의 삶은 억압받고 통제된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감시 기능’을 체화한 권력을 조명한다. 이 책은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 처벌의 기구(가정, 학교, 병원, 공장 등)를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감옥의 탄생’이다. 그러나 푸코는 단순하게 감옥의 탄생 과정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감시의 체제를 통한 권력의 실체와 은밀한 전략을 파헤쳤다. 그가 주목한 것은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보던 전근대 사회가 한 사람이 만인을 주시하는 시선을 가진 근대적 ‘감시 사회’로 변화되었다는 점이었다.

 

 

 

 

 

 

 

 

 

 

 

 

 

 

 

 

 

 

*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 2014)

*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오늘날 사회는 투명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가 더 많은 정보의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는 투명한 정보 시대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주는 ‘디지털 빛(Digital Light)’이다. 그러나 투명성을 ‘강요’하는 사회, 즉 ‘투명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체계가 가동된다. 이 투명사회 속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한다. 그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개인의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스마트한 권력’이다. 이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게 만든다. 소셜네트워크에 글이나 사진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순간 그 내용이 공유되고 개방된다. 우리는 항상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그리고 북플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남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엿보고 때때로 자신을 노출한다. 투명성은 사회 구성원들을 감시 체계로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투명성의 강요에 의한 감시는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규정하여 사회를 안정시킨다. 사람들은 자발적인 노출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낯섦, 이질성을 없앤다. 감시 체계가 강화될수록 인간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신체는 소멸하고 ‘빅 데이터(Big Data)’와 같은 실증적인 정보와 수치화된 기록만 남는다. 인간의 실질적 존재와 친밀한 관계는 빅 데이터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빅 데이터는 감시뿐만 아니라 인간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나남출판, 2010)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백’을 강요하는 근대 사회가 담론을 생산하여, 그 담론은 지식이 되어 곧 권력이 된다고 말했다. 근대의 섹슈얼리티 담론은 이성애와 동성애, 성도착자를 구분하여, 특히 여성과 아동의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서구인을 ‘고백의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비유를 빌리자면, 현대인은 ‘노출의 짐승’이다. 투명사회 속에 흐르는 권력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수많은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여있는 권력. 지식과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우리가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지식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생산됐고, 누구를 위한 권력이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베이컨의 명제는 요즘 사회에 맞지 않는다. 식자우환(識字憂患). 오히려 지식을 아는 것은 근심이 된다. 권력 속성이 있는 지식은 힘이 아니라 ‘병(病)’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병. 차별과 배제, 그리고 폭력에 이르는 무서운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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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9-2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투명한 정보 시대에 대해 공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인터넷 블로그에 글뿐만 아니라 자기 사진까지 올리는 사람의 그 용기를 우러러봅니다. 닮고 싶어집니다.

<서치>라는 영화를 최근에 봤어요. 요즘 시대가 아니면 만들기 불가능한 영화예요.
사라진 딸의 SNS를 뒤져서 딸의 행방을 찾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SNS의 편리함보다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과연 우리는 노출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cyrus 2018-09-21 18:29   좋아요 0 | URL
여성들은 자신이 구매한 속옷을 입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상품 후기로 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진도 음란 사이트의 표적이 됩니다. 남자인 제가 생각해도 그런 일은 정말 끔찍해요.
 

 

 

현대 사회는 무수히 많은 성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수한 성 담론이 지금도 사회구성원을 끊임없이 갈등상태로 몰아넣거나, 이야기되고 있다. 성 담론은 어디에서 생겨났으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인 고찰에 따르면, 성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으로 대표되는 성과학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성은 과학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에 관한 광범위하고 진지한 토론이 가능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나 성을 의학적 지식으로만 설명하고 분류하는데 그쳤다. 섹슈얼리티(sexuality, 성욕과 성 행위에 연관된 여러 제도와 규범, 생각들의 총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준 것은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Freud)를 통해 우리는 성을 생물학적 대상에서 벗어나 성적 욕망을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설명해낼 수 있게 됐다.

 

일반적으로 성 해방은 성과 생식의 분리로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경구용 피임약의 보급과 시험관 아기의 탄생, 그리고 비아그라의 시판 등은 출산이나 성이 더 이상 남성의 소관이 아님을 보여줬다. 현대사회의 성은 남녀 모두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됐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의 해방은 멀고 험하다.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사람들을 고정된 이분법적 성 역할(남성과 여성)에 끼워 맞추려 한다.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태어나 이성의 짝과 혼인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오랜 통념 때문에 아직도 자신과 다른 성 정체성과 삶을 선택한 이들을 ‘일탈자’로 간주한다. 1960년대에 들어 이성애에 내재한 성 불평등성이 주목받으면서 ‘정상적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됐다.

 

 

 

 

 

 

 

 

 

 

 

 

 

 

 

*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이매진, 2016)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 [품절] 플로랑스 타마뉴 《동성애의 역사》 (이마고, 2007)

 

 

 

1969년 미국에서 일어난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 이후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양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이 조직되었다. 또한 70~80년대에 일어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을 통해 이성애 가족 중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이뤄지고, 공공 영역에서 성 정체성에 따른 제한을 해제하라는 집단적 압력이 조직화하는 변화들이 일어났다. 70년대에 레즈비언 사도마조히스트라고 커밍아웃한 페미니스트 게일 루빈(Gayle Rubin)은 ‘일탈’로 치부되는 섹슈얼리티 문제를 이론에 국한하지 않고, ‘실천’의 문제로 전환하는 데 노력했다. 그녀는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 분류되는 ‘이성애, 혼인 관계, 돈을 받지 않는 섹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동성애, 혼외 관계, 사도마조히즘, 성매매 등’의 주변화가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게 만드는 근거로 작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빌헬름 라이히 《성 혁명》 (중원문화, 2011)

* [절판] 빌헬름 라이히 《성 정치》 (중원문화, 2012)

* [절판] 빌헬름 라이히 《오르가즘의 기능》 (그린비, 2005)

* 마이런 섀라프 《빌헬름 라이히》 (양문, 2015)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하려 했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성 혁명》이라는 책에서 ‘성에 대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면, 가부장제를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정신분석학자였다. 그랬던 그가 ‘오르가즘(orgasm)을 성적 절정 상태가 아닌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생체 에너지라고 주장하면서부터(그의 급진적 주장은 《오르가즘의 기능》이라는 책에 요약되어 있다) 프로이트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학계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도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에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 개념을 넣어 성 관념이나 도덕 윤리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려고 했다. 이것이 개인의 성욕을 억누르는 사회적 제약을 해체하고, 성 해방을 실천하는 성 정치학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성을 인정하고, 대중을 성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하는 성 정치 운동을 전개하다가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나남출판, 2010)

 

 

 

라이히는 17세기에 시작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성 억압이 인류의 성을 짓누르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19세기에 성 억압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라이히의 주장을 ‘가설’로 바라보면서 비판한다. 그는 3세기 동안 성 억압으로 인해 성 담론은 위축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성의 역사》를 통해 성 담론이 사회 질서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푸코가 언급한 성 담론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 담론은 ‘고백’의 형태로 발전한다. 19세기는 성에 관한 상투적인 담론들이 지배하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운 성의 폭주가 범람하고 있었다. 성에 관련한 고백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푸코가 보기에 고백 형태의 성 담론은 성 해방의 징후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 섹슈얼리티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도록 유도하는 권력이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16)

 

 

 

19~20세기에 일어난 섹슈얼리티의 변화는 과연 ‘성 해방’이라 부를 만큼 혁명적이었을까? 성 해방 운동을 가부장 · 이성애 중심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기치로 보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신과 출산 등 재생산에만 초점을 맞춘 ‘정상 가족’ 중심 담론과 성소수자를 가혹하게 배제하는 차별 및 혐오 담론은 다양한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비혼 여성은 ‘결혼 안 하는 페미니스트’로, 성소수자는 ‘정신병자’로 성급하게 단정하면서 조롱하는 문제는 사회 곳곳에 있는 권력의 결과로 드러난 오래된 현상이다. 이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 있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우리 내면의 권력. 이 권력이 작동되고 있는 사회에는 감시, 낙인, 처벌, 배제, 혐오의 담론이 있을 뿐 서로의 차이를 포용하는 담론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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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5 11:51   좋아요 0 | URL
섹스와 자본주의의 밀착 관계도 살펴봐야 하는데, 제가 거기까지 다루지 못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섹스와 자본주의의 관계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이 관계를 살펴보려면, 참고해야 할 책이 많을 것입니다. ^^;;

2018-09-14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5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우에노 지즈코 지음, 박미옥 옮김 / 챕터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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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에 있다. 원하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사용자와의 교섭에 의해 노동조건을 협정하는 권리가 인정된다. 시장경제는 간혹 오류가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치장되곤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탓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이러한 진단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이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복지병과 생산성 저하로 몸살을 앓던 영국과 미국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등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주요 내용은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부지출 축소, 감세를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산업구조조정 등이다.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가 신장된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것이 힘겹다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이른바 ‘노동하는 빈곤층’, 비정규직 문제는 오랫동안 계속 미뤄진 난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정규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비정규직을 무시하는 만큼 자신의 존엄성도 파괴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숨 쉬는 자유조차 허락받지 못할 것처럼 지친 일상의 문화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증가는 질적 저하를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은 바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양산을 통해 그 경쟁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여성 노동자들을 점점 더 조직적으로 주변부 노동예비군으로 이용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가사,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는 여성을 한낱 아이 낳는 기계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성의 현실을 바꿔낼 희망적인 전략은 있는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젠더 평등 정책’이 답인가? 여성 노동이 존중되고 고용환경이 개선되는 노동정책. 참 좋은 정책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성 평등’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여성을 기만한다. 마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 ‘여성 평등’ 속에 ‘여성’이 없는 격이다. 여성 노동자들조차 신자유주의 전략에 포섭되는 이유는 젠더 평등 정책, 여성 할당제 등을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여성의 고용 참여를 환영하고, 페미니스트 못지않게 ‘여성 평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전략을 의심한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일본은 1985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균등법)을 제정했다. 1991년에 육아휴직법, 2001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우에노 지즈코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여성의 삶이 좋아졌는지 팍팍해졌는지 되돌아본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Yes or No’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됐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여성의 의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여성을 가족 내 보살핌의 일차적 책임자로 규정한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이 돌봄 노동 영역을 부담하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젠더 평등 정책은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의 생산, 재생산 노동의 이중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고 성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간의 양극화(여여 격차)가 고착하고 있다.

 

우에노는 ‘기이한 관계’라는 표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여성 혐오 현상이 내셔널리즘과 뒤엉킨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비기득권층으로 전락한 사람들(남성)이 내셔널리즘에 기대려 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내부에 적을 만드는 전략으로 ‘여성 혐오’, ‘혐한’을 조성한다. 정치권에 향해야 할 일본인의 분노가 여성, 한국인에게 쏟아지고 있다. 우에노는 혐오를 부추기고 방관해온 고이즈미, 아베 정권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한 여성’을 앞세워 성차별 해방 분위기 조성과 여성을 경제적 주변부로 몰아내는 ‘여성 빈곤화’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결혼하지 않는 ‘성공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저출산 문제의 주범으로 몰아세워 공격한다.

 

우에노는 페미니즘이 대응하기 어려운 상대가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장벽은 그렇게 견고할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여성 문제는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된 골치 아픈 문제이다. 그녀는 여성 친화적인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에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겹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는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마주하는 일본 여성 문제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여여 격차’와 여성 분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투쟁 방식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진지하게 성찰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하는 비정규직화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페미니스트가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될 작은 구멍을 뚫으려면 ‘연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 발전하고 인간다워진다. 연대는 거대한 장벽을 깨는 힘인 ‘집단성’과 ‘상호신뢰’를 회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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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3 18:24   좋아요 1 | URL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분석해야 하는데, 일부 남성들은 저출산과 비혼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여성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요. 여성이 아니라 사회에 분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