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도서관 세 군데를 돌아다녔다. 도서관에 가서 빌린 책은 이미 번역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단편소설 <감정의 혼란><체스 이야기>.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첫 번째 선정 도서]

*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감정의 혼란》 (하영북스, 2024)


* 슈테판 츠바이크, 김선형 옮김 감정의 혼란》 (세창미디어, 2022)

 

* 슈테판 츠바이크, 서정일 옮김 감정의 혼란: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녹색광선, 2019)

 

* 슈테판 츠바이크, 박찬기 옮김 사랑을 묻다사랑의 본질에 관한 4가지 질문》 (깊은샘, 2020)


[구판 절판] 슈테판 츠바이크, 박찬기 옮김 《감정의 혼란》 (깊은샘, 1996)




<감정의 혼란> 번역본은 총 네 권이다. 최근에 새로 번역된 <감정의 혼란>이 수록된 번역본(하영북스)이 나왔다<감정의 혼란>의 분량이 길지 않아서 도서관 대출 도서인 세 권의 번역본(세창미디어, 녹색광선, 깊은샘)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네 편의 <감정의 혼란> 번역문을 대조하면서 읽어 보니의미가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정상원 옮김(하영북스), 70

 

 딱 한 번 그녀가 얼결에 말을 내뱉을 뻔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받아쓴 내용을 선생님께 건네면서 나는 말로를 묘사한 부분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를 열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감탄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나는 찬사를 덧붙였다.

 “그 누구도 말로를 이처럼 거장다운 솜씨로 그려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홱 몸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서한 종이를 팽개치며 한심하다는 어조로 뇌까리셨다. “그따위 바보 소리는 하지 말게! 자네는 거장다운 솜씨에 대해 아는 게 대체 뭔가?”



* 김선형 옮김(세창미디어), 123~124


 단 한 번 나는 그녀가 말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내가 받아 적은 것을 아침에 넘겨주면서, 그 표현이(말로우의 비유였다)[역자 주] 나는 대단히 감동시켰다며 나의 스승에게 감격하여 이야기하였다. 감정이 복받쳐 열렬하게 그 누구도 그렇게 탁월한 성격묘사를 기록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원고를 던지고 경멸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대가(大家)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나요?”



[역자 주]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 1899)은 영국 작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작품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콘래드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찰스 말로우(Charles Marlow)가 등장하는데, 작가는 어둠의 심장에서 당시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츠바이크가 말로우의 비유라고 표현할 만큼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은 성격 묘사가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작품 속에 주인공이 탁월한 성격 묘사를 언급한 것으로 보면 말로우의 비유는 바로 어둠의 심장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 서정일 옮김(녹색광선), 112~113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뻔한 기회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받아 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선생님의 서재로 갔을 때, 그 표현(그것은 말로의 비유였습니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너무 감격해서, 내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쁨에 들떠 경탄하면서 어느 작가도 말로처럼 거장다운 성격 묘사를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차갑게 몸을 돌리면서 입술을 꽉 깨물고 내가 필기한 종이를 던져버리며 업신여기는 말투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게! 자네가 거장다운 내용인지 아닌지 뭘 안다고 그러는가?”



* 박찬기 옮김(깊은샘-개정판), 99

 

 언젠가 딱 한 번 진정으로 그녀의 얘기를 들을 뻔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필기한 것을 가지고 선생님께 갔을 때, 말로의 초상에 대한 표현에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를 말했습니다. 진심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외면을 하여, 입술을 깨물고 종잇조각을 내버리면서, 경멸의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게! 자네가 뭘 안다고 훌륭하니 훌륭하지 않니 하고 비평을 하나?”



하영북스판본은 말로를 묘사한 부분’, ‘깊은샘판본은 말로의 초상에 대한 표현이라고 적혀 있다. 인용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감정의 혼란>의 주인공 롤란트(Roland)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게 많은 영향을 준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를 묘사한 것(하영북스) 또는 초상화(깊은샘)에 감동한 상태다. 롤란트는 자신의 들뜬 감정을 교수에게 솔직하게 말하는데,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 교수는 말로를 거장으로 칭송하는 롤란트를 꾸짖는다.





















* 조셉 콘래드, 이석구 옮김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2008)


*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1998)




세창미디어판본과 녹색광선판본에서 롤란트가 감동한 것은 말로가 비유한 표현이다. 롤란트는 말로의 희곡에 나온 표현에 감동했고, 인상 깊은 구절을 교수에게 말했다. 반면 세창미디어판본의 역자는 본문 밑에 달아놓은 주석석에 말로’가 영국의 소설가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에 나오는 찰스 말로우라고 주장한다.


번역문들이 너무 달라서 <감정의 혼란> 독일어 원문을 찾아서 확인해 봤다.



 Nur ein einziges Mal war ich nahe, ihr das Wort zu entreißen. Ich hatte morgens, als ich das Diktat überbrachte, nicht umhin können, meinem Lehrer begeistert zu erzählen, wie sehr mich gerade diese Darstellung (es war Marlowes Bildnis) erschüttert habe. Und heiß noch von meinem Überschwang, fügte ich bewundernd hinzu, niemand schreibe ihm ein derart meisterliches Porträt nach; da biß er, schroff sich abkehrend, die Lippe, warf das Blatt hin und murrte verächtlich: “Reden Sie nicht solchen Unsinn! Was verstehen Sie denn schon von Meisterschaft.”



독일어를 몰라서 인터넷 독일어 사전에 단어를 입력해서 뜻을 확인했다‘Darstellung’의 뜻은 표현또는 묘사. ‘Bildnis’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초상화비유따라서 ‘Marlowes Bildnis’말로의 비유로 번역할 수 있으며 ‘말로의 초상화’로 번역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번역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둘 중 하나가 옳은 번역이라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Marlowes Bildnis’괄호 안에 넣고, 더 이상 판단하는 것을 중지(epoche, 에포케)’하겠다.


<감정의 혼란> 액자식 소설이다. 소설 주인공이자 화자인 롤란트는 예순 살에 접어든 영문학 교수. 그는 40년 전인 20대로 되돌아가 자신이 숭배했던 교수를 회상한다. <감정의 혼란>1927에 발표되었다. 이 해를 시점으로 40년 전이면 1887, 19세기 후반이다. <감정의 혼란> 발표 연도와 소설 속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시간적 배경이 무조건 같다고 볼 수 없다오류일 가능성이 높지만일단은 이렇게 추정해 본다. 조셉 콘래드가 정식으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해는 1895이다. <어둠의 심장>1899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1880년대에 20대였던 롤란트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에 나온 찰스 말로의 비유를 보고 감동했다는 내용은 부자연스럽다.


원문에 나온 Marlowes’영국 극작가의 성()이다. <어둠의 심장>에 나온 말로는 알파벳 ‘e’가 빠진 ‘Marlow’을 쓴다. 따라서 나는 롤란트가 말한 말로는 영국의 극작가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내게 뭘 안다고 번역이 이상하다면서 따지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된다. 내가 틀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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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0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택의 폭이 넓어 좋구만. 왜 출판계가 츠바이크에 꽂혔는지 모르겠다만 난 고른다면 저 보라 책을 고르겠어. 딴뜻은 없고 예쁘잖아. ㅋ

cyrus 2024-06-06 11:39   좋아요 2 | URL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잘 표현되어 있어요. 이런 흥미진진한 내용의 단편이라면 금방 읽을 수 있어요. <감정의 혼란> 번역본 중에 실물이 좋은 건 누님이 고른 보라색 표지 번역본이에요. ^^

서니데이 2024-06-0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은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에 번역 출간되었겠지만, 최근에 새로 출간되는 책도 많은 것 같아요. 소개해주신 책들도 날짜가 최근 몇 년 사이 출간된 책이네요.
cyrus님 현충일 휴일 잘 보내셨나요. 날씨가 많이 더워집니다.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정의 혼란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 츠바이크 선집 (하영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하영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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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세계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첫 번째 선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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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잘 만든 음반 커버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된다. 1960~7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Hypnosis)는 가수들의 바이닐(Vinyl, 레코드판) 음반 커버 캔버스로 삼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미지를 제작했다. 멋진 음반 커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의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정규 9Wish you were here 음반 커버는 마치 신비로우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감도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두 남자가 악수하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불타고 있다. 악수하는 순간 남자의 몸에 불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악수하고 있는 것일까.


힙노시스가 제작한 Wish you were here커버 디자인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소설과 잘 어울린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은 매우 뜨겁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뜨겁다. 작중 인물들의 마음에 열정이라는 화염이 일어난다정열에 지배당한 인물들은 불타는 사람이다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린 화염은 인물들의 정신뿐만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태워버린다이번에 새로 나온 츠바이크의 소설 선집 감정의 혼란에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감정의 혼란>, <아모크>(Amok), <책벌레 멘델>, <체스 이야기>.


츠바이크의 단편소설 <감정의 혼란>은 에로틱한 열정의 화염에 휩싸인 사람들이 나온다. <감정의 혼란>의 교수와 제자는 서로 만나면 불이 붙는 사람들이다롤란트(Roland)’라는 이름의 제자는 젊은이들 앞에서 연설하는 문학 교수의 열정에 매료된다. 교수는 풋풋하면서도 언제든지 활활 타오르는 힘을 가진 젊은 열정을 가진 롤란트를 좋아한다. 만나면 서로가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수와 제자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상은 만날 때마다 불타는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수는 롤란트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마음속 화염을 끄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사라지곤 한다. 롤란트는 자신을 잘 대해주다가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교수의 태도에 분노한다. 화를 끊일수록 교수를 만나고 싶은 열정의 화염이 점점 커진다. 교수가 만나지 못한 날에도 롤란트의 몸과 마음은 불타고 있다.


<아모크>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다. ‘아모크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정신착란 증세를 가리키는 용어다. 정식으로 공인받은 의학 용어는 아니다. 열대 지역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매우 높았던 20세기 초에 유행한 용어다. 당시 서구는 제국주의라는 횃불을 들고 다니면서 동양과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다. 제국주의 횃불은 동양과 아프리카의 고유한 역사와 언어, 문화를 모조리 태워버렸다<아모크>의 주인공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식민지에 파견된 의사. 의사는 식민지에서 8년을 살아왔으나 열대 기후와 동남아시아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백인 여성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의사의 말라버린 감정에 에로틱한 열정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여자는 오만하고 쌀쌀맞게 의사를 대한다. 하지만 의사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급기야 그녀를 만나기 위해 스토커처럼 따라다닌다. 의사는 자신의 상태를 아모크와 비슷하다면서 자가 진단한다. 유럽인들은 열대 기후가 아모크를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본인의 스토커 행각을 열대 기후가 일으킨 증상으로 포장하려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 의사는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 에로틱한 열정의 화염에 지배당한 사람이다.


<책벌레 멘델>은 모든 책 제목과 가격, 표지를 전부 기억하는 사람이 나온다. 멘델은 책만 보면 불타는 사람이다. ‘카페 글루크는 멘델의 뜨거운 열정을 보호하는 유일한 일터이자 보금자리다. 하지만 엄청난 화력을 가진 전쟁의 화염은 평화와 인간을 잔인하게 태워버린다. 책을 읽을 때마다 불타는 멘델은 빠르게 변하는 현실에 무관심하다. 그는 전쟁의 뜨거운 위력을 모른다. 불행하게도 멘델은 수용소에 2년 동안 갇혀 지낸다. 살아서 카페에 돌아오지만, 멘델의 정신에 열정의 화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체스 이야기>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명의 체스 천재에 관한 이야기다. 젠토비치(Czentovic) 인간적인 감정이 없으며 슈퍼컴퓨터처럼 완벽할 정도로 체스를 두지만, 상상력에 의존하면서 진행하는 블라인드 체스에 약하다. 반면 B 박사는 블라인드 체스의 달인이다그러나 체스판 앞에만 서면 체스를 두지 못한다교수는 블라인드 체스를 두면 불타는 사람이다B 박사는 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때 우연히 발견한 체스 교본을 읽는다. 그는 체스 교본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읽는다. 체스 교본은 체스를 두고 싶은 열정의 화염을 만든 땔감이었다. B 교수는 책 속에 있는 체스 선수와 대국하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체스 실력을 늘린다. 대국 상대가 없어지자, B 교수는 본인을 대국 상대로 정한다. B 교수는 블라인드 체스를 하면 흑을 쥔 자아와 백을 쥔 자아로 분열한다. 체스를 좋아하는 열정의 화염은 누구든지 이기고 싶어 하는 욕망과 만나면서 더욱더 커진다


열정은 나태한 마음을 태워버리고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 그러나 호기로운 열정이 지나치게 뜨거우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화상이 생기고,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태워버리고 만다. 불타는 마음에 질투(<감정의 혼란>)와 집착(<아모크>)을 끼얹으면 열정의 화염은 도저히 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츠바이크의 소설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라고 극찬했다. 츠바이크의 뜨거운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기이한 열정의 화염에 휩싸인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를 감당해야 한다. 불타는 사람을 만나면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가? 악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손을 빼야 한다. 끄기 쉽지 않은 열정의 화염이 순식간에 옮겨붙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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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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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5월의 책


(모임 날짜: 525일 토요일)





모든 것은 변한다이 자명한 진실은 동서양 곳곳에 있다석가모니 부처(佛陀)는 열반(涅槃모든 괴로움에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 가까워지자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다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불교 경전에 부처의 마지막 말 자취가 있다.



 是故比丘無爲放逸我以不放逸故自致正覺無量衆善亦由不放逸得一切萬物無常存者此是如來末後所說.

 

 “그럼 비구들이여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게으름 피우지 말라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의 최후의 말이었다.

 

(도올 김용옥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1》 180)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만물이 변한다는 뜻을 가진 판타 레이(panta rhei)’를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어디에선가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나아가고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을 강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 크라튈로스402a,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243쪽 재인용)



우리는 생각보다 변화를 낯설어한다.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갖고 싶어 하고, 변치 않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 윌리엄스(John Edward Williams)의 소설 부처스 크로싱(Butcher’s Crossing)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해준다. 윌 앤드루스(Will Andrews)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자연주의 사상에 심취한 청년이다. 앤드루스는 인간의 발길이 아직 생기지 않은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하버드대학을 중퇴하고 서부로 향한다.


앤드루스는 부처스 크로싱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 들소를 잡는 사냥꾼들이 주로 거주한다. 들소 사냥꾼들의 목표는 들소 가죽이다. 들소를 잡아서 얻은 가죽을 상인에게 판매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은 사냥꾼 밀러(Miller)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들소를 잡는다. 과거에 그는 희귀한 들소 무리가 사는 평원을 우연히 발견한다. 평원을 잊지 못한 밀러는 그곳에 가기 위해 자신과 함께 사냥할 대원을 직접 모집한다. 그는 서부 자연을 궁금해하는 앤드루스에게 들소 사냥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한쪽 팔이 없는 찰리 호지(Charley Hoge)는 예전에 밀러와 함께 들소를 사냥했던 동료다. 그는 항상 성경을 품속에 들고 다닌다. 쉬고 있으면 성경을 펼쳐서 소리 내서 읽는다. 프레드 슈나이더(Fred Schneider)는 가죽을 벗기는 일에 능숙하다. 프레드 역시 개인주의자라서 종종 밀러의 의견에 직설적으로 반대한다.


밀러 일행은 강인한 인내심으로 물이 금방 바짝 말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더위를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한다. 평원에 도착한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들소 떼를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선다. 이날을 오랫동안 고대한 밀러는 마치 같은 일만 반복하는 기계가 된 것처럼 들소를 학살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들소를 전멸하겠다는 일념만 가득 차 있다. 들소 사냥에 눈이 먼 밀러의 과욕은 점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밀러의 사냥 집착은 결국 본인과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다. 들소의 피가 물든 평원은 들소들을 무참히 살해한 인간들을 순순히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화가 난 자연은 눈을 퍼부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밀러 일행의 야영지는 폭설로 고립된다. 밀러 일행은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겨울을 버틴다.


밀러는 팔 수 있는 양의 들소 가죽만 챙기고, 나머지는 봄에 다시 와서 가져가기로 기약한다. 밀러 일행은 일 년 만에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 년 사이에 확 달라진 세상이다. 밀러 일행이 열심히 들소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있었을 때 들소 가죽 사업은 죽어가고 있었다. 어렵게 가지고 온 가죽을 팔지 못한 밀러는 큰 허탈감과 분노에 빠진다.


만약에 찰리 호지가 성경책 대신에 불교 경전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을 모아놓은 책을 들고 있었다면 과연 밀러는 평원으로 가는 여정을 멈췄을까? 부처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모르더라도 세상이 언젠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했다밀러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판타 레이의 흐름을 읽지 못한 인물이다. 가죽 상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들소를 사냥하겠다는 그의 자신감은 지나치게 부풀어진 오만이다. 스스로 과장한 오만은 욕심까지 커지도록 부추긴다오만과 욕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밀러는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갇힌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fantasy)을 현실이라고 착각한다. 들소 사냥을 영원히 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들소 가죽을 전부 가지겠다는 환상. 밀러를 제대로 속인 판타지가 만들어 낸 현실에 판타 레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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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강명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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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당신도 그렇네요.

 

(고연옥, 희곡 <인간이든 신이든> 중에서

고연옥 희곡집 3316쪽)





체호프(Anton Chekhov)4대 장막극에 속한 갈매기는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사로 시작된다.

 





메드베덴코: 당신은 왜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죠?

마샤: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난 불행하거든요.

 


마샤는 극작가가 되고 싶은 가브릴리치를 좋아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는 대지주의 딸 니나를 좋아한다. 니나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의 꿈은 연극 배우다. 가브릴리치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써서 소린 영지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연극의 주연 배우는 니나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가브릴리치의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소린의 주치의 도른이다. 유명한 연극 배우인 가브릴리치의 어머니 이리나는 일하지 않고 글만 쓰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미망인 이리나는 소설가 트리고린과 연인 관계다. 가브릴리치는 명성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트리고린을 싫어한다.


낙심에 빠진 가브릴리치는 갈매기를 사냥한다. 그는 니나 앞에 죽은 갈매기를 보여주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자살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니나는 가브릴리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니나의 마음은 기브릴리치가 아닌 트리고린으로 향해 있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의 희곡보다 트리고린의 소설 <낮과 밤>을 좋아한다. 트리고린은 자신이 쓴 소설에 큰 관심을 보인 니나에 이끌린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체호프는 의욕적으로 글을 쓴 작가. 젊은 시절 체호프는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짤막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체혼테가 쓴 소설들은 권위 있는 문학잡지가 아닌 유머 잡지에 실린다. 그에게 글쓰기는 부업이었다.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때까지 체호프는 생계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다. 일 년 동안 백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썼다.


체호프는 두 번째 장막극 <숲의 정령>이 상업적으로 실패한 이후로 7년 동안 장막극을 쓰지 않았다. 체호프가 절치부심 끝에 쓴 장막극이 바로 갈매기체호프는 7년 전에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의욕적으로 갈매기를 썼다. 그는 극작가이자 의사인 체호프 본인 모습뿐만 아니라 화가, 작가, 연극 배우로 활동하는 지인들의 삶까지 녹여서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었다가브릴리치는 대중성이 있으나 틀에 박힌 주류 문학(또는 예술)과 파격적인 형식의 새로운 문학이라는 갈림길에 선 체호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경제력을 동시에 얻으려면 대중과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 그러나 가브릴리치의 머릿속에 새로운 형식이 자꾸만 나타난다. 그것이 글을 쓰려는 가브릴리치의 손목을 여러 번 잡는다글을 제대로 쓰지 못할수록 가브릴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가브릴리치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씩 늘어난다공교롭게도 가브릴리치는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어버린다.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젊은 자신감, 니나 그리고 어머니 이리나.


니나는 문학 청년 가브릴리치를 좋아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찾으려고만 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 니나는 가브릴리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트리고린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트리고린과 함께 모스크바에 살면 연극 배우가 되는 꿈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결국 니나는 자신의 꿈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소린 영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브릴리치를 포기한다. 하지만 트리고린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나고, 불행한 일들을 연이어 겪은 이후로 연극 배우의 꿈이 시들어져서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다. 니나는 한순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들을 잃어버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하나는 자신을 외면한 니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가브릴리치, 또 하나는 가브릴리치를 사랑했고 화려했던 과거의 본인 모습이다.


갈매기에서 처음으로 대사를 주고받은 마샤와 메드베덴코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불행해진 사람들이다. 인생의 상복을 입는다는 마샤의 대사는 희곡의 첫인상이자 희곡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극 중 인물들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인 진실이다갈매기》에 느닷없이 일어난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하면 마샤의 대사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갈매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복장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이 언젠가 입어야 할 옷은 검은 옷이다. 그들은 인생의 상복이 어울리는 사람들[주]이다



(사이)


:

지금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렇네요. 

당신도 제법 인생의 상복이 잘 어울려요.

아니라고 부정해봐도 소용 없어요.

살면서 언젠가는 인생의 상복을 입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요. 

아니라고?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상복을 입은 채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어요.





[]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희곡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이형식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에서 따온 표현이다. 이 작품 역시 불행한 사람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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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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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가게 <인스크립트> 2024‘1월의 인스크립트추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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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희끄무레하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유령이 있다. 이 유령의 이름은 엑토플라즘(ectoplasm)’이다. 이것은 유령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물질에 가깝다. 엑토플라즘은 영매(靈媒)의 몸에서 나온다. 그것하얗고 끈끈한 액체로 되어 있다. 엑토플라즘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입, 콧구멍, 귓구멍이다밖으로 나온 엑토플라즘은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변한다사람들은 엑토플라즘이 영혼의 실체를 밝혀 줄 수 있는 물적 증거로 확신했다. 그들은 엑토플라즘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엑토플라즘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간은 항상 뜨겁다. 시간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열기를 내뿜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맥을 못 춘다. 파릇파릇한 생명은 점점 누렇게 변하면서 사라진다. 기억은 정교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의 열기가 닿는 순간 기억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르르 녹는다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한다엑토플라즘이 가짜라고 해도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자가 엑토플라즘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영매는 시간에 태워져서 재로 남은 기억을 뭉쳐서 복원한다.


<소프루>는 무대 위에 열연(熱演)하는 배우들, 이 사람들의 뜨거운 연기 열정을 덥혀 주는 극장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희곡이다. 소프루(sopor)’는 포르투갈어로 을 뜻한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캐릭터(character)와 한 몸이 된다. 캐릭터가 된 배우는 숨 쉬듯이 연기한다. 종이에서 살고 있던 캐릭터는 무대에서 다시 태어난다배우는 온몸을 이용해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고, 표정과 목소리로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관객은 배우들의 숨소리(연기)와 숨결(연기력)에 집중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배우의 몸속에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다. 무대 위에서 숨이 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에 배우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 사람의 정체는 프롬프터(prompter)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있다. 배우들이 열심히 숨 쉬는 무대 뒤쪽이나 아래쪽에. 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숨어 있다. 배우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읊어준다. 캐릭터가 된 배우가 숨 쉬는 도중에 동작과 대사를 잊어버리면 캐릭터의 생명력이 끊긴다. 프롬프터는 배우를 위해 다음 동작과 대사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프롬프터는 배우와 캐릭터를 살리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소프루>에 등장하는 예술감독은 프롬프터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감독은 프롬프터가 주인공인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소프루> 3, 12)

 


평생 숨어 있는 존재로 살아온 프롬프터는 예술감독의 제안을 거부한다. 프롬프터는 항상 시커먼 옷을 입는다.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히 숨으면서 살아온 프롬프터는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야 하는 무대 정중앙이 낯설다예술극장은 프롬프터를 극장의 호흡’, ‘극장의 기억’, ‘극장의 허파’(<소프루>, 19, 80)로 표현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프롬프터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배우들의 숨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대사에 밑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뒀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어요. 만약 누군가 극장의 기록 보관소에서 내가 프롬프터로 참여했던 모든 대본을 찾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에 속삭였던 모든 대사들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소프루> 20, 82)

 


<소프루>의 프롬프터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기억한다. 스태프는 배우가 숨 쉴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관객은 무대 위에 흘린 배우의 땀을 기억하지만, 무대를 만들다가 흘린 스태프의 피는 모른다. 그래서 프롬프터의 기억력은 소중하다.


프롬프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배우와 캐릭터의 숨소리도 영영 사라진다. 프롬프터는 뜨거운 시간 한가운데 뛰어들어 타버린 배우와 캐릭터 모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소프루>는 프롬프터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온 액터플라즘(actorplasm)’이다. 액터플라즘이 많을수록 좋다. 한 번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는 배우의 숨소리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런데 프롬프터가 진짜로 사라진다면 이 일은 누가 해주지? 극장을 찾는 관객이 하는 수밖에…‥




우리는 극장에서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배우, 스태프들, 인물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이야기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숨을 쉬지만 그 공기는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합니다.



(<소프루> 16, 57~59, 프롬프터의 대사)

 

 

관객도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같은 공기를 마신다. 관객인 나는 배우들이 숨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한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액터플라즘을 만들 것이다. 





추신

 

* 소프루》에 <소프루><그녀가 죽는 방식>, 총 두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 ‘actor’남자 배우를 뜻한다. 여배우는 ‘actress’를 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조어 액터플라즘(actorplasm)에 남배우/여배우로 명시되는 젠더 이분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배우의 연기 활동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기준들, 즉 연령(성인 배우/아역 배우), 연기 비중(주연/조연/단역) 또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액터플라즘의 액터배우를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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