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소설집을 읽은 김영하 작가와 달궁인들은 포터의 대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약칭 빛과 물질’)에 찬사를 보냈지만, 나는 호평 일색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달의 궁전 2월의 책]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 2019)





빛과 물질의 화자인 헤더는 대학생이다. 헤더는 서른 살 연상인 물리학과 교수 로버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헤더는 로버트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버트를 의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중에서, 90~91쪽)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정도로 각박해진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로버트의 초대에 선뜻 응하는 헤더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내가 헤더의 정서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단편소설 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궁리, 2021)




맨스필드의 소설에 나온 영국인 가정교사는 독일에서 일하게 되어 그곳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다. 그런데 가정교사는 혼자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정교사 소개소에 일하는 여자가 독일에 가려는 가정교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에게 충고한다.



 “나는 항상 여자들에게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처음에는 의심하는 게 낫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악의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게 선의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말해주곤 해요좀 너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영악하게 세상물정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55~56)



가정교사는 자신이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도움을 준 친절한 노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의 명함을 가정교사에게 건네준다. 명함에 적힌 노인의 직업은 참사관(Regierungsrat, 공무원)이다. 노인의 정체를 파악한 그녀는 그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노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간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를 제외하면 노인도 로버트 교수처럼 혼자 사는 남자다. 노인은 가정교사 앞에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키스 한 번 해달라고 요구한다. “나이 든 남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74) 노인은 강제로 가정교사에게 입맞춤하고, 깜짝 놀란 그녀는 밖으로 도망친다.


누군가를 믿기 보다는 의심하라. 가정교사 소개소 직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타인에 향한 의심의 눈길이 그 사람의 참된 모습과 진심을 훼손하는 흉기가 돼선 안 된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그중 몇몇은 본심을 숨긴 채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영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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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02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리뷰는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구려

cyrus 2021-03-02 17:12   좋아요 0 | URL
타인을 언제까지 의심해야 하고, 그 의심을 언제 거둬야할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계속 의심만 하다가는 타인의 진심을 못 볼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야 진심을 뒤늦게 확인할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아요. ^^;;

수이 2021-03-02 17:1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stella.K 2021-03-0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드루 포터는 좀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
나의 경우 몇몇 단편은 나름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지루해서 걍 중고샵에 팔아버렸지.ㅋ

cyrus 2021-03-02 17: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괜찮게 본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구멍>, <피부>, <코네티컷>이었어요. ^^
 
카르밀라 - 태초에 뱀파이어 소녀가 있었다
조셉 토마스 셰리든 르 파뉴 지음, 김소영 외 옮김 / 지식의편집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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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박혜영 님 보세요.

 

역자님의 글 마지막에 있는 남성 십자군에 의해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라는 문장(295)은 제가 2019년에 썼던 표현(“남성 십자군”,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과 비슷합니다.

 


*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여성이 아니다] 2019826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55237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는 2019년에 작성한 글을 절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책의 별점을 낮게 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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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작가 레 파누(Le Fanu, 르 파뉴 또는 레 파뉴라고 부르기도 한다)공포문학의 대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미국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문학 비평집 공포문학의 매혹(Supernatural horror in literature, 1927)에 레 파누의 이름만 언급했다무슨 이유에서인지 레 파누가 쓴 작품을 단 한 편도 소개하지 않았다.


















* 르 파뉴 카르밀라(지식의편집, 2021)


평점: 3점   ★★★   B

 

 

* H. P. 러브크래프트 공포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




 

레 파누의 대표작은 카르밀라(Carmilla, 1872). ‘카르밀라뱀파이어(Vampire)로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이다. 이 작품은 브램 스토커(Bram Stoker)드라큘라(Dracula, 1897)에 영향을 주었다레 파누는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인 1872년에 단편집 <In a Glass Darkly>를 발표했다. 이 책에 총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는데, 그중 한 편이 바로 카르밀라<In a Glass Darkly>에 수록된 녹차(Green Tea, 1869)는 종종 카르밀라》와 함께 언급되는 소설이다.

















 

*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 2017)




 

<In a Glass Darkly>는 동서양 고전을 집대성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 뱀파이어 문학 작품의 계보에서 차지하는 카르밀라》의 위상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비슷하다. 다음 내용은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있는 <In a Glass Darkly>(우리말 제목은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의 설명문이다.



 이 작품은 사악한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실렸다가,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간행되었다. 각각의 이야기는 화자인 독일인 외과 의사 마르틴 헤셀리우스의 환자 사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야기들을 묶어 통일된 화자의 역할을 하는 헤셀리우스는 자신이 목격한 어둠에 일관성과 명확성분석과 진단과 묘사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것이 레파뉴의 의도였다면 이 책은 실패작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어떤 이론도 확립되지 못하며, 어떤 의미도 발견되지 못한다. 대신 이야기들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끈질기고 오싹한 창조물들에 의해 결합된다. 이들은 잔인한 판사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희생자[1]부터 목사의 머리를 통해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상상할 수 없는 악의에 찬검은 원숭이[2]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건 간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에 차서 자신의 목표물을 좇는다. 그러나 남자를 홀리는 흡혈귀 레즈비언 카밀라(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가장 잊을 수 없는)의 예에서 보듯, 이들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도 지니고 있다. 카밀라는 영혼이 아닌 육체의 망령으로, 후에는 쾌락과 증오, 육체적 흥분과 혐오를 동일 선상에 놓는 흡족한 눈동자로 화자를 빨아들인다. 레파뉴는 이제껏 보지 못한 공포와 욕망으로 우리 자신의 망령들을 가장 현대적이고 사라지지 않는 유령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보여준다.




 

[1][2]밑줄은 내가 표시했다. [1]하보틀 판사(Mr. Justice Harbottle, 1872)의 줄거리이며 [2]녹차의 줄거리다. 올해 1월에 나온 카르밀라번역본(지식의 편집)하보틀 판사녹차가 수록되었다.
















 

 

* [e-Book] 르파뉴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올푸리, 2020)

 

 


하보틀 판사는 레 파누가 185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을 새롭게 고쳐서 쓴 작품이다

















*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 2006)

 

* [품절] 르 파뉴 카르밀라(초록달, 2015)

 


 

카르밀라는 다양한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는데, 뱀파이어 문학 작품 선집인 뱀파이어 걸작선에도 수록되었다. 2015년에 초록달 출판사카르밀라번역본을 펴냈다. 그러나 그 책에 실린 녹차에 일부 문장이 누락되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번역이 좋지 않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최근에 나온 지식의편집 출판사카르밀라번역본 출간 소식이 반갑긴 한데, 이 번역본에도 오역과 역주의 오류가 있다.




※ 《죽은 연인이 수록된 번역본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지만지, 2013)

 

* [품절]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소설(민음사, 2010)

 

* 이규현 엮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프랑스(창비, 2010)

 

*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 2006)

 

 

 

번역자와 지식의 편집출판사는 카르밀라최초의 여성 뱀파이어로 소개했다(초록달 출판사도 책 앞표지에 카르밀라를 최초의 여성 뱀파이어라고 소개한 문구를 넣었다). 뱀파이어 문학 작품의 계보를 제대로 확인했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카르밀라는 최초의 여성 뱀파이어가 아니다. 카르밀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한 소설들이 몇 편 있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소설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죽은 연인(La morte amoureuse, 1836)이다. 이 소설의 영문 제목은 클라리몽드(Clarimonde)’. 클라리몽드는 소설에 나오는 여성 뱀파이어의 이름이다.

 

 




* 카르밀라(지식의편집) 중에서, 53

 

 그는 누렇고 까맣고 자주색이 섞인 옷을 입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끈과 벨트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벨트에는 온갖 물건들이 달려 있었다. 등에는 환등기와 흰독말풀이 담긴 상자 두 개를 지고 있었다.

 

[원문]

 

 He was dressed in buff, black, and scarlet, and crossed with more straps and belts than I could count, from which hung all manner of things. Behind, he carried a magic lantern, and two boxes, which I well knew, in one of which was a salamander, and in the other a mandrake.



 

흰독말풀은 가지과의 한해살이풀에 속한 식물이다. 흰독말품과 같은 식물로 잘못 알려진 맨드레이크(mandrake)는 가지과의 여러해살이풀에 속한다. 두 개로 갈라진 형태인 맨드레이크의 뿌리는 사람의 하반신처럼 생겼다. 과거 유럽인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가 만드라고라(mandragora)라고 하는 정령이라고 믿었다. 뿌리에 정령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령의 이름은 맨드레이크의 학명(Atropa mandragora) 속에 있다. 몇 몇 역자들은 맨드레이크를 흰독말풀로 옮기는데, 정확한 명칭은 ‘맨드레이크.


 


* 하보틀 판사(지식의편집) 중에서, 262

 

 카웰 부인은 갑작스럽게 고인의 이야기를 들추어낸 것에 대해 소리를 지르며 비난했고, 보란 듯이 눈물을 터뜨렸다네. 평소라면 하보틀 판사가 유쾌하게 수도꼭지 터진 것 같다.’며 놀렸겠지만, 그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

 

[원문]


 Mrs. Carwell squalled on this sudden introduction of the funereal topic, and cried exemplary “piggins full,” as the Judge used pleasantly to say. But he was in no mood for trifling now, and he said sternly.

 

 

‘piggin’은 수직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통이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물을 담을 수 있다. “piggins full”을 직역하면 ‘(무언가를) 가득 채운 통이 되는데, 역자는 수도꼭지 터진 것 같다로 의역했다.




* 하보틀 판사(지식의편집) 중에서, 281

 

 아이스쿨라피우스(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리스의 의학과 치료의 신역주)의 후예였던 헤드스톤 박사는 그런 우는 소리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네.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는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라틴어 이름이다. 둘 다 동일한 존재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 ‘아이스쿨라피우스는 로마 신화에 언급되는 이름이다. 따라서 로마의 의학과 치료의 신이라고 써야 한다.


















* 모니크 위티그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 (행성B, 2020)


평점: 4점   ★★★★   A-





카르밀라는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 뱀파이어라기보다는 레즈비언 뱀파이어에 더 가깝다. 나는 2019년에 카르밀라의 정체성을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보는 이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여성이 아니다] (2019826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55237




이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글을 참고했다. 이듬해에 모니크 위티그의 에세이 선집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가 출간되었다.










지식의 편집출판사가 내 글을 볼지 모르겠으나, 출판사와 역자의 행태에 유감스럽다. 나름 정성 들여 쓴 독자 서평에 있는 문장을 허락 없이 도용하는 일은 지식의 편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썼던 표현(‘남성 십자군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이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책 소개 글역자의 말에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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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든 파티 - 캐서린 맨스필드 단편선 에디션F 6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정주연 옮김 / 궁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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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 때 총을 묘사했으면, 그 총은 무조건 발사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작가 체호프(Anton Chekhov)는 이야기꾼이 복선을 활용하지 않으면, 복선에 몰입한 독자를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복선으로 활용된 문학적 장치를 체호프의 총이라고 한다. 복선은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때로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 변화를 더욱 부각해준다


영국에서 활동한 뉴질랜드 출신의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는 체호프의 영향을 받은 단편소설을 남겼다. 캐서린은 동성 연인인 폴란드 작가를 통해 체호프의 단편을 접하게 된다. 1910년 초에 캐서린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개작한 이야기를 썼다. 아마도 캐서린은 습작기를 보내면서 복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체호프의 필력에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차 한 잔(A Cup of Tea, 1922)가든파티(The Garden Party, 1922)와 함께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캐서린의 대표작이다(번역본 후미에 수록 작품의 원제명이 있다제목 옆에 적힌 연도는 집필 연도이자 처음 소설이 발표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 서평에 적힌 연도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근거로 한 발표 연도이다차 한 잔체호프의 총이 있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 속에 역설적인 결말로 이끄는 복선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로즈메리 펠(Rosemary Fell)은 결혼한 부르주아 여성이다. 그녀는 앤티크 상점에 마음에 드는 작은 에나멜 상자를 발견하지만, 비싼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서 구매를 포기한다.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로즈메리는 최고급 차를 마시면서 씁쓸한 순간을 잊으려고 한다. 행색이 남루한 스미스(Smith)라는 여자가 로즈메리에게 갑자기 다가와서 차 한 잔 값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은 로즈메리는 스미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한다. 로즈메리의 남편은 낯선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로즈메리의 행동을 꾸짖으면서도 스미스가 예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미스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부탁한다. 로즈메리는 스미스에게 관심을 보인 남편의 태도에 충격을 받는다. 남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로즈메리는 스미스에게 현금을 주고 돌려보낸다그녀는 남편에게 앤티크 상점에 진열된 작은 상자를 사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다. 남편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로즈메리는 작은 상자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쁜 아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작은 상자는 로즈메리가 소유하고 싶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복선이다. 나는 이 문학적 장치를 맨스필드의 작은 상자라 부르고 싶다. 캐서린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 속의 소품을 잊지 않았다. 캐서린은 이야기 초반부에 묘사한 상자를 결말에 다시 언급한다. 남편은 상자를 갖고 싶은 로즈메리를 돈 잘 쓰는 우리 자기라고 부른다독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상점의 작은 상자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로즈메리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작은 에나멜 상자는 로즈메리의 소유물이 되지만, 결말을 전체적으로 보면 로즈메리는 남편의 소유물이다.


차 한 잔이 독립적인 존재로 살지 못한 여성의 상황을 그린 소설이라면, 죽은 대령의 딸들(The Daughters of the Late Colonel, 1921)은 주체적이고 욕망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여성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 소설이다죽은 대령의 딸들은 가부장적 분위기에 짓눌려 살아온 자매이다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 1915)는 여성 혼자서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없는 세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소설로 읽힐 수 있다. 가정교사가 겪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 오늘날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들이다. 


이 단편 선집에 수록된 브레헨마허 부인, 결혼식에 가다(Frau Brechenmacher Attends a Wedding, 1910),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Je ne parle pas français, 1917), 서곡(Prelude, 1918), 뜻밖의 사실(Revelations, 1920)은 국내 초역 작품이다. ‘Prelude’전주곡을 뜻하는 단어다. 역자는 우리말 제목을 서곡(overture)’으로 정했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캐서린의 소설에 관심 있는 학자와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으려면 하나로 통일된 소설 제목으로 불러야 한다. 나 같으면 프렐류드라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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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2-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책 처음 나온 거 아니지?
암튼 설 잘 지내라. 맛있는 것도 마이 묵고.ㅋㅋ

cyrus 2021-02-12 11:54   좋아요 0 | URL
네, 맨스필드의 단편 선집의 가장 흔한 제목이 ‘가든파티’에요. 누님도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막시무스 2021-02-1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마음이 무거우시겠지만 설명절은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cyrus 2021-02-12 11:57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위독할 정도로 크게 편찮지 않아요. 위장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요. 이틀 입원하고 퇴원해요. 그런데 현재 혹의 상태가 악성이라면 심각해요. 그런 최악의 진단 결과가 안 나오길 바랄 뿐입니다. 막시무스님도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헨리 6세 2부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총서 2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오수진 옮김 / 동인(이성모)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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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셰익스피어학회2012년부터 셰익스피어 전작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에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자에는 자로는 전작 번역 작업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책인 헨리 62는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이지만, 총서에 포함된 다른 번역본들보다 늦게 나온 편이다. 학회는 전작 번역 작업을 기획할 때 작품 발표 연도순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2017년에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마지막으로 총 37편의 희곡 모두 번역되었다. , 셰익스피어가 쓴 두 권의 시집(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능욕)은 총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의 기획 목표는 무대 공연을 위한 대본을 보급하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대사가 뜻이 어려운 한자어나 고어(古語)가 없는 구어체로 되어 있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의 번역 방침 중 하나가 역자의 주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의 모든 번역본은 연구용 텍스트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서 역자의 주석이 많지 않다. 따라서 공연 기획자가 일반 독자보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를 더 선호할 것이다.


권위 있는 한국셰익스피어학회가 기획한 번역서를 잘 만든 완벽한 책으로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책에 오역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면 일단 직접 읽어야 한다. 역자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역자의 번역본이 무조건 좋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역자의 경력이나 이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역자의 번역본을 외면하는 반응 역시 한 권의 책에 잘못된 평가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의 스무 번째 책인 헨리 62는 잘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번역본은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다. 역자의 해명이 있어야 한다.



볼링브로크: 존 서들, 당신이 주문을 읽고 우리가 시작해 보십시다.

 

(14장 11행, 44)



볼링브로크가 사제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존 서들이 아니라 존 사우스웰(John Southwell)’이다. 사우스웰을 약칭으로 서들이라고 부를 수 있나? 나는 처음 들어 본다.




글로스터: 당연이 우리의 이름을 알 거 아니냐.

 

(21130, 56)

 

 

당연이당연히의 오자공연용 텍스트를 보급하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공연용 텍스트를 눈으로 보는 독자도 있다. 편집자는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교정을 똑바로 해야 한다. 61쪽에 적힌 랑커스터 공작(2막 2장 14행)124쪽에 랭커스터(4막 1장 51행)으로 되어 있다. 국립국어원이 지정한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한다면 랭커스터 공작이라고 써야 한다.







내가 밑줄을 친 마거릿 왕비의 대사는 32290(112)이다. 오 헨리(O. Henry)는 단편소설을 많이 남긴 미국의 작가다. 문장 부호의 위치가 잘못 되었다. 대사를 올바르게 고쳐 쓰면 이렇다. , 헨리. 제게 고결한 서포크를 위한 탄원을 허락해 주소서.”




* 32311~316, 113

 

서포크:

흰독말풀의 뿌리를 잡아 뽑을 때 신음하는 소리처럼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듣기에도 끔찍하고 무서운 저주와 같은 매서운 말을 만들어서

역겨운 동굴에 사는 말라빠진 증오의 여신처럼

온갖 증오의 표정을 얼굴에 가득 보이며

이를 갈며, 맹렬한 독설을 퍼부을 겁니다.



흰독말풀은 오역이다흰독말풀’에 해당하는 원문은 맨드레이크(mandrake)’.




* 439~11, 139

 

잭 케이드: 승리의 기념물인 이 갑옷은 내가 지니노라, 그리고 이놈들의 시은 내 말 뒤 굽에 묶어서 런던까지 질질 끌고 가겠다.



시신은’에 ‘신’이 빠졌다. 시신들의 정체는 잭 케이드가 이끈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여 살해당한 왕의 부대원들이다. 다음에 나올 두 개의 인용문에도 오자가 있다. 




* 51183~184, 177

 

설즈베리

죄악에 맹세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지이만,

더 큰 죄악은 죄 많은 서약을 지키는 일입니다.

 

 

* 5229, 180


요크: 싸움이 죽은 네 몸에 편화를 안겨주었다.


[원문] Thus war hath given thee peace, for thou art still.




오탈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일은 책 만드는 사람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이지만, 더 큰 죄악은 문장을 표절한 것이다김정환 시인이 번역한 아침이슬 출판사의 헨리 622012년에 출간되었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의 헨리 622016년에 출간되었다. 김 시인의 번역본에 있는 대사와 똑같은 문장이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 총서의 헨리 62에 있다.




* 41117, 127


서포크: 난 왕비의 전령으로 프랑스 가는 중이다. 내 네게 명하노니, 이 해협 너머로 날 무사히 실어 가거라.



내가 인용한 서포크의 대사는 아침이슬 출판사 판본 119에 있다. 그것도 프랑스엘이라는 오자가 똑같이. 내 말을 믿지 못하면 아침이슬 출판사의 헨리 62119쪽 대사와 동인 출판사의 헨리 62127쪽 대사를 꼭 확인해보시라. 표절로 보이는 문장이 또 있다.

 



* 47109, 153

 

 폐하, 언제 우리는 칩사이드로 가서 외상 달아놓고 여자 맛을 실컷 보게 되는 겁니까?



잭 케이드의 반란군에 합류한 백정의 대사다. 이 대사는 아침이슬 출판사 판본 146쪽에 있다. 어떻게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대사가 똑같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역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해명이 나올 때까지 이 번역본의 평점은 최하점이다. 역자가 표절이 아님을 확실하게 해명하면 평점을 수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 밝힌 내 견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정문(訂正文)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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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7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살해 주세요, 타골장인님.

cyrus 2021-01-07 16:25   좋아요 0 | URL
‘타골’이 무슨 뜻이에요? ㅎㅎㅎㅎ 제가 아는 ‘타골’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라서요... ^^

stella.K 2021-01-0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정도면 거의 굴욕감 느낄 것 같은데?ㅎ
진짜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첨부터 잘하지.ㅉㅉ

cyrus 2021-01-07 16:30   좋아요 1 | URL
아무리 책이 잘 만들어졌고, 내용이 좋아도 표절이 확실하면 과감하게 최하점의 평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자의 해명을 들어봐야겠지만, 제가 인용한 두 개의 대사는 아침이슬 출판사에 있는 대사와 100% 똑같아요. 책이 좋은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결국 직접 읽어야 해요.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저자나 역자, 출판사의 명성만 믿고 책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

Jeremy 2021-01-0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ther John Southwell 은 (좌:ㄴ 싸우ㄸ으워ㄹ) 뭐 이런식으로 비스무리하게 발음되면서
저한텐 너무나 어려운 외래어(?) 로 쓰면 ˝존 사우스웰˝ 입니다.
제가 이 책, AudioBook 으로 들었을 때, 아니면
Last Name Pronunciation 찾아 들었을 때 존 서들에 가깝게 발음하는 거,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뭐, 둘 다 미국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비슷하게 쓰려는 노력이 중요하죠.
더군다나 세익스피어 전 작품 중 the largest cast 를 가진 것으로,
3 부작 중 제일 잘 쓴 것으로 알려진 Part 2 of Henry VI trilogy 에서는.

이렇게 눈에 거슬리는 게 많은데도 책이 읽히고
내용이 이해가 된다는 게 더 놀라움!

01-08-2021 12:18am PST

cyrus 2021-01-09 09:07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 텍스트가 다양한 버전이 있다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번역본과 다른 버전이 있는데 이런 텍스트의 특징은 내용 순서가 다르거나 대사 일부가 삭제되었어요. 그리고 텍스트에 있는 영어가 고어(古語)라서 현대에 통용된 영어와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서들’이 텍스트의 옛날 영어를 번역해서 나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