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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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걸리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의 소설 「치숙」에서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라는 표현이 있다. 사회주의 즉 마르크시즘의 막걸리의 막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한 말이다. 이 표현에 화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심리가 간결한 표현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의 화자는 어린 조카로 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보통학교 4학년밖에 못 다녔지만, 일본인 가게 주인의 눈에 들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아저씨에게 오촌 조카는 조곤조곤 따지고 든다.

 

 

“아저씨! 경제라 껏은 돈 모아서 부자되라는 거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라 껏은 모아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아 쓰는 거 아니요?”

 

 

조카는 사회주의를 부자의 재물을 빼앗는 불한당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한심한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대학교에서 5년 동안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도 돈 한 번 제대로 벌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빠진 아저씨를 조롱한다. 조카는 경제가 돈 모으는 활동이니까 경제학은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삼촌이 경제학을 잘못 공부했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하지만 아저씨는 오히려 조카가 세상 물정, 즉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Scene #2  “여러분, 부자 흉내 내세요!”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토론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고 생산력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자일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한때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최고의 덕담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2014년 대한민국. 이곳에서 지금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돈만을 좇는 속된 삶이 아니라도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십 여 년 전에 모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최고의 덕담이 됐다. 그렇다고 모두 부자일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소수다. 나머진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자 흉내를 냈다. 그런데 부자 흉내의 결과가 심각하다. 펀드니 연금이니 뭐니 투자를 해봤지만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이 단기적인 사회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불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가정을 꾸리면 청년실업이 ‘가족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목표를 상실한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소득수준의 급속한 향상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한계에 이른 데다가 돈으로 사기 어려운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으로 잠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Scene #3  호황이면 소비 열기, 불황이면 자본론 공부 바람이 부는 법  

 

국경을 넘어 퍼부어지는 자본의 융단폭격.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휘몰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삶을 초토화하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쓰는 메뚜기 떼의 공격 같다. 자본은 자꾸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대량해고·비정규직·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공황에 버금갈만한 2008년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발 금융파탄으로 야기된 세계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어 어느 나라든 저소득층의 생활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속에서 금융자본주의가 상위 1%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재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反 월 스트리트 시위’의 영향으로 현 지배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한층 높아졌다. 자본주의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의 분배’ 문제도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년)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배태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따졌다. 피케티 하나를 두고 세계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 오랫동안 사회학 교과서 활자 속에 갇혀 있던 공산주의, 아니 마르크스의 유령도 돌아왔다. 마르크스의 부상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들고만 다녀도 구속감이었던 ‘빨갱이 경제학’의 교과서 『자본론』에 대한 공부 열기도 살아나고 있다. 자고로 호황이면 소비 열기가, 불황이면 공부 바람이 부는 법. 불황 효과일까? 하지만 IMF 위기 때와 비교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IMF 위기는 아시아만 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IMF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공포’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도식이다. 붉은 깃발 아래 낫과 망치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일단 거부감부터 생기는 것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거론하는 데는 여전히 용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아무리 법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다고 해도 오해나 왜곡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깊이 남아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설명조차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반(反)사회주의적 감정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빨갱이’에서 ‘종북’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으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Scene #4 자본가들은 부유해지는데 노동자들은 왜 가난한가?

 

사회의 부와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지는데 왜 우리는 더 가난한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는 이런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노동자들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기계였다.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노동과정이 주로 노동자들도 숙련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숙련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와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기계의 도입은 비숙련공은 물론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솜씨 좋은 숙련공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숙련공들의 보수는 곤두박질쳐 비숙련공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가적 사용이 자신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상품인 노동력의 수요자는 자본가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본질상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되면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분배 몫은 반대로 더 줄어들 뿐이다. 이것이 『자본론』의 한 축이다. 단, 노동자 스스로 생산수단을 확보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하는 만큼 이윤은 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이윤에 집착하면서 또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기 때문에 ‘이윤과 착취’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중요시했다. 사회주의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자유’, ‘개인’, ‘연합’이다. 노동자가 해방의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론 공부』에서 김수행 교수는 마르크스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치유하려는 고민 끝에 사회적 자각을 통해 도달하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탈린 독재정치 시대의 구소련이나 마오쩌둥의 중국, 카스트로의 쿠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한다.

 

 

 

 Scene #5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마르크스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원론으로 찾지 못한 답을 『자본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자본론』이 대학 강의실에서 주류경제학에 밀려 외면받지 않으려면 단순히 학문적 유행에 쫓는 목적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적의 대안이 나올 수 있도록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비판적 입장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마르크스 경제학의 우선 과제,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마련하느냐 하는 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 세상이 노동자 중심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계급이 사라지고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과연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자신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이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사적 이익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 어찌하든지 탐욕을 감추면서 자기의 유익을 도모해보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도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너무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장 굴뚝에서 매연을 마구 뿜어낸다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올라가겠습니까?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에서, 187쪽)

 

마르크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이익도 올라간다고 생각한 애덤 스미스의 명제에 윤리적 가정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한 윤리적 가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해서 이 사회에 탐욕과 갈등이 사라진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고, 탐욕을 조절할 수 있는 ‘위로부터의 규제’도 필요하다.

 


 Scene #6  마르크스와 막걸리의 공통점

 

채만식의 소설 『치숙』의 ‘나’는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희화화했다. 부자의 돈을 빼앗는 사회주의를 우습게 비꼰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막걸리다. 우리가 즐겨 마시고, 몸에 좋은 막걸리. 마르크스와 막걸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년)의 저자이자 빵집 ‘다루마리’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이타루는 사람들은 경제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찌게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윤만 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살이 쪄서 비대해진 경제는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품붕괴다. 썩고 순환하지 않으면 자연은, 인간은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자본론』 공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이것을 ‘부패하는 경제’라 명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는 그가 빵집을 경영하면서 연구해 온 '효모', '누룩' 등 '균(菌)'의 순기능이다. 와타나베는 이스트, 설탕, 버터, 우유, 계란을 전혀 넣지 않고,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균들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음식으로 바꿔버리는 효능이 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도 누룩을 효모로 발효시켜 만드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술이다. 와타나베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를 구웠다면, 우리는 막걸리를 통해 『자본론』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가 제조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생각이 발효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막걸리가 부침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막걸리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체 술 소비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소주, 맥주, 양주에 밀려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최근 암의 발생이나 증식을 억제하는 항암물질이 들어있는 건강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책들은 1980년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당당히 1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최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막걸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로 인해 거의 고장 나버린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독일어 초판 1000부 매진에 4년이나 걸릴 정도로 매우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자본론』은 인류 문명사를 바꾸어 놓은 저작임엔 분명하다. 더욱이 불평등 문제가 주목받음으로써 또다시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가 가시화되는 작금에 『자본론』의 유효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자본론』 읽기는 필수적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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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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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많은 표본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특정 집단의 특징을 뽑아 낼 수가 있다. 이같이 여러 정보를 한데 모아서 분류한 뒤 특정을 찾아내는 것을 통계라고 한다. 통계는 수량적 비교를 통해 사실을 관찰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빅 데이터도 기존 기업들이 활용하던 통계를 좀 더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빅 데이터는 데이터를 수집, 저장, 관리,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집합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다.

 

그동안 통계는 기존에 있던 특정 정보를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 취합하는데 그쳤지만, 최근 빅 데이터에 활용되는 정보는 접속기록, 위치정보, 센서 등의 다양하면서도 대량의 정보를 취합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취합하게 되면 각 변수들의 상관관계를 조사할 수 있고, 이전까지는 전혀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다. 기업들의 경영환경은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사업부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 빅 데이터로 예측한다. 또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야 할 때, 빅 데이터를 통해 얻어진 정보는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빅 데이터의 단점도 있다. 일단 빅 데이터 활용이 쉽지 않다. 기존에 잘해왔던 정형 데이터는 전체 데이터의 20%에 불과하며 나머지 80%는 기존에 잘 다루지 않았던 비정형 데이터이다. 각기 다른 비정형 데이터를 표준화 시킬 수 있는 활용법이 필요하다. 게다가 폭증하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빅 데이터가 정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빅 데이터 시대를 맞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가 새삼 떠올린다. 토플러는 미래에 예상되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그 속도를 점차 가속화함으로써 개인이나 집단의 적응이 한층 어려워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는 상상할 수 없이 너무 빠른 가속도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런 변화의 가속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또 인간은 이러한 미래에 어떻게 적응(또는 적응에 실패)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중한 정보의 부담(정보 과부하)이 인간 행동을 와해시킴으로써 정신 병리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처리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자고 일어날 때마다 2.5퀸틸리언(Quintillion, 조의 1만 배, 100경) 바이트나 되는 빅 데이터 속에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선택하고 수집할 수 있을까?

 

매일 빅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과거 데이터에만 집착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은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히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농부(수주대토, 守株待兎)와 같다.

 

 

 

 

옛날 송나라에 어느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쉬고 있었다. 농부가 보는 앞에서 토끼가 지나가다가 그만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뜻밖의 횡재를 한 농부는 죽은 토끼를 집어 들고 이렇게 생각했다.

 

“토끼가 이렇게 저절로 뛰어나와 나무에 부딪혀 죽는 줄 진작 알았다면 힘든 농사를 짓지 않았을 텐데.”

 

농부는 그 날부터 쟁기를 집어던지고 그루터기만 지켜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토끼가 뛰어오다 죽으려니 하고, 허구한 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근처에서 기다린다. 그 결과 토끼는 한 마리도 얻지 못하고 일 년 농사만 망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토끼를 잡으려 하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농부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믿고 미래를 예측했다.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힌 것을 목격했으니 다음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거라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면 빅 데이터 속 진짜배기 정보를 절대로 찾을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정보가 저절로 내 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 과거의 직관적 판단으로 무수히 많은 양의 빅 데이터를 다루기가 쉽지 않다. 어제 나온 빅 데이터는 며칠만 지나면 더 이상 쓸모없는 과거 정보로 전락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객관적 분석 기법과 예측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빅 데이터는 말 그대로 대용량 정보다. 데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데이터는 채팅을 한다든가,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형태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웹사이트 방문, 온라인 검색통계, 서버에 남겨지는 로그정보 등 각종 ‘흔적’ 역시 데이터가 된다. 과거엔 이렇게 생산되는 데이터들은 방치됐다. 쉽게 말해 의미 있는 ‘신호(signal)’가 아니라 단순히 ‘소음(noise)’에 불과했다. 소음을 제거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신호를 찾을 때다. 그 신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최근 주목받는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신호와 소음』은 빅 데이터 과부하 시대에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올바른 정보를 찾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일종 미래학 서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에 소개된 신호와 소음을 구별 못한 통계 오류 사례들은 단순히 통계학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보다는 미래 예측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왜 통계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자료에 접근하는 분석 기법이 적절치 못할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합리적 분석과 예측을 방해하는 지나친 자신감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정보만 귀 기울이고 알려고 한다. 그것을 맹신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신호를 외면해버리고 잘못된 예측을 하고 만다. 그리고 기존의 예측 기법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며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네이트 실버는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기 위한 분석 방법으로 ‘베이츠 정리’를 소개한다. 베이츠 정리는 사전 확률을 도출한 뒤 새 정보가 나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을 골라 적용해 사후 확률을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다. 즉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기존 예측을 잠시 제쳐두고 새로운 예측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통계학자는 정확한 예측을 도출하고 최소한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빅 데이터 시대로 진입할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변화 속도가 빠르다. 이 변화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거나 변화에 적응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전문가라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급속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나가려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세, 즉 미래가 현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새롭고도 민감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완전무결한 능력을 가질 수 없지만 정보 소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신호는 본인이 직접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신호는 저절로 당신의 손에 오지 않는다. ‘수주대토’의 농부처럼 자신의 직관만 믿었다간 엉뚱한 예측으로 인해 낭패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석 기법에 능통한다고 해서 뛰어난 통계학자가 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나친 자신감과 방심은 1%의 소음도 외면한다. 통계학자가 보지 못하는 1%의 소음이 세상을 변화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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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말콤 글래드웰 지음, 선대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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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시합에서 왠지 계속 질 것 같아 보이는 인간 샌드백,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쳇바퀴 돌 듯 시장을 뺏기는 중소기업들, 공권력에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폭력조직, 미국과 붙어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발을 감행하는 중동 국가들.

 

이런 존재들을 통칭하는 단어가 바로 언더독(Underdog)이다. 투견대회에서 항상 패배하는 개들을 지칭했던 이 말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 없이 작아 보이는 존재들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과연 언더독들은 거대한 권력과 맞붙어 얼마의 비율로 승리를 거뒀을까? 말콤 글래드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10번 중 3~4번은 언더독들이 이기는 것으로 관찰됐다. 1등은 강자고 꼴찌는 약자다. 둘이 경쟁하면 1등이 이긴다. 그러나 세상엔 약자가 반드시 약자가 아니며 강자가 항상 강자가 아니다. 강자가 우리가 생각하듯이 항상 힘 센 자가 아니다. 강한 힘은 오히려 그 원천이 유약함일 수도 있다.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양치기 소년 다윗은 돌팔매질 하나로 블레셋의 210㎝ 거인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흔히 약자와 강자의 무모한 또는 의미 있는 싸움을 일컫는 대명사. 사실 약자와 강자가 붙을 땐 강자가 이기는 것이 공식이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허를 찌르는 약자의 전술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자가 비중을 둔 건 ‘강자의 한계’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골리앗의 육중한 몸을 감싼 45㎏짜리 갑옷이 걸리더라는 거다. 차라리 질곡이던 그 갑옷 탓에 다윗의 민첩성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논지다.

 

『다윗과 골리앗』은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되거나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모든 것을 갖춘 이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파고 든다. 또한 힘의 한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내전을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구교도를 무력으로 억압했다. 그들은 시민들을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통행을 금지했다. 잠옷 차림으로 산책하던 노인, 십대 청소년 가릴 것 없이 총으로 사살했다. 무력은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분노를 키웠다. 북아일랜드에 주둔한 총사령관 이언 프리랜드는 점점 더 강경하게 대처했다. 몇 달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은 30년 내전으로 번졌다.

 

저자는 힘과 성취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U자형 곡선(∩)으로 설명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힘과 성취가 정비례 관계를 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수가 적은 학급이 높은 학습효율을 보이는 것이 많지만 일정한 지점을 지나 학생 수가 너무 적어지면 학생들끼리 배울 것이 적어 오히려 학습효과가 떨어진다. 또 돈이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너무 돈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성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실제 돈 많은 부모들이 하는 걱정이다. 저자는 강경한 체벌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아준다는 통념에도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을 적용한다. 특정지점 이후엔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무력으로 인한 통치보다 약자들을 포용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다윗’을 굳이 약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부당한 대우, 열악한 조건, 강고한 편견 등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긍정성에 따르면 이는 ‘바람직한 역경’일 뿐이다. 세상이 발전하는 건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서지 잘난 골리앗 덕분이 결코 아니라고 했다. 지금 당신 눈앞에 포진한 강적들. 그들의 치명적 약점은 ‘강하다’일 수 있단 얘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시련과 역경이 꼭 우리를 성장시키기만 할까. 때로는 약화시키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것 아닐까.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주제와의 연관성이 흐려지면서 작가의 주장을 애써 강요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다. 키가 작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 앞서 사울 왕이 갑옷을 입혀줬을 때 다윗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며 벗어 던지고, 자신의 주특기인 돌팔매에 쓸 강가의 돌을 골라 들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다윗처럼 삶에서 약점을 강점화 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꿔놓은 사람들이 있다.

 

강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약자 다윗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커버할 나름대로의 비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승산이 없다. 강자 골리앗의 힘이 영원하지 않듯이 약자 다윗의 지혜도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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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런 - 뉴욕 파슨스대 최고 명강의
에린 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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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필름을 끼워넣는 사진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 중에서도 필름은 '코닥'이라는 인식이 뇌리 속 깊게 박혀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던 게 어른들이 필름을 사오라고 할 땐, "코닥 필름 한통 사오라"고 했으니, 코닥은 필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코닥은 '조지 이스트먼'이란 사람이 1888년에 세운 사진의 혁명을 이끈 회사다. 1976년 코닥은 필름 시장에서 90%, 카메라 시장에선 85%의 점유율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 공룡 기업이었다. 그랬던 코닥이 2012년 맨하탄 법정에 파산신청을 낸다. 필름을 넘어 사진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코닥이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든 곳이 바로 코닥이라는 사실이다. 코닥의 수뇌부들은 카메라 산업에서 디지털 시장이 커질 것을 누구보다 먼저 예측해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다. 이는 소니보다 6년이나 빠른 시점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있었다. 코닥은 경쟁 회사들보다 소극적인 마인드로 스스로 처음 만든 디지털카메라가 기존의 자신들이 선점하고 있던 필름 시장을 잠식할 것을 우려했다. 코닥은 미래에도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코닥은 오히려, 디지털카메라 기술은 꽁꽁 숨겨둔 채, 필름 카메라의 연구 개발에 더욱 몰두했다.

 

당시 코닥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일본 후지필름은 미국에 생산 라인을 구축하며 시장 파이를 늘려갔다. 코닥은 이런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 그 이상의 것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까. 1980년대 후반부터 소비자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시장의 신호를 무시하다가 소니 등 새로운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오자 1990년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헐레벌떡 뛰어든다.

 

창고 속 깊숙이 숨겨뒀던 15년전 디지털 카메라 기술로는 이미 시장을 선점한 경쟁자들과 싸움이 되지 않았다. 필름 비즈니스에 대한 미련과 업계 최고라는 오만함이 코닥을 나락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속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132년이나 고공 비행하던 코닥의 몰락은 이처럼,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비즈니스 업계의 화두는 단연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이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유사 브랜드, 지나치게 다양한 대체 상품, 빠르게 싫증내는 소비자 등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맞게 비즈니스를 성장시키고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혁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소비자의 가치를 바꾸고 리드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의 것에서 기능적으로 편하게, 디자인적으로 예쁘게 개선하는 정도로만 점진적으로 혁신을 진행해왔다. 이에 대해 뉴욕 파슨스대학교 에린 조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이 간과해왔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관행적으로 해왔던 기존의 혁신 방향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린 조의 『아웃 런』은 우리가 지금까지의 시장, 브랜드, 소비자 심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점들을 조목조목 예시하면서, 기존의 혁신 방향을 뒤집어 마켓 리더가 된 다양한 기업들의 ‘디자인적 사고’가 어떻게 변화된 세상을 만드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세상에서 후발주자였던 기업이 어떻게 군림하던 선두주자 기업을 물리치는지, 한물갔다고 평가된 기업이 어떻게 잃어버린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 기업이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해나가는지 등을 다양한 아이디어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 기업들이 제대로 된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냉철하게 꼬집는다.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판단하고 의존하는 방식, 과거 양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미래를 내다보는 방식, 기존의 관념이나 체계를 그대로 따르며 가정하는 방식 등 오늘날 대다수의 기업들이 비즈니스 세계의 절대적 지침처럼 여겨왔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성능의 향상’이라는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혁신을 개발하고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차별화 없는 경쟁력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의 발전이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각 브랜드마다 성능이 어떻게 다른지 소비자들 스스로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의 해법은 ‘경험의 의미’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경험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느냐에 따라 혁신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혁신 방향인 ‘급진적 혁신, 의미의 혁신’의 대안으로서 꼭 알아둬야 할 개념이 ‘디자인 경영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안하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은 경영자가 경영 전략을 짜고 의사결정을 하는 데 디자인적 마인드와 프로세스를 적용해,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브랜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추구하려는 노력, 즉 디자인적 사고 과정을 통해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주는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혁신을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거나 디자이너가 경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관점의 디자인 경영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화된 전략이다.

 

저자는 풍부한 글로벌 기업 사례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문제인식부터 접근, 수행에 이르기까지 뼛속까지 독자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확대할 수 있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의 방법론을 공감대 있게 제시한다.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러닝’의 개념을 뒤집어 함께 뛰는 느낌을 공유하고(나이키플러스),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할인판매를 하지 않던 명품브랜드의 관점을 역으로 이용해 급매 처분하고(길트닷컴), 골치 아픈 러시아산 작은 다이아몬드를 처리하는 방안으로 결혼기념일 반지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이터너티 링)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상식과 경험을 뒤집는 것이 어떻게 차별화된 혁신 전략의 밑그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혁신이 세계적 화두지만, 거기엔 기술을 넘어 경험의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끝났고 다시 오지도 않을 것이다. 혁신은 사람에 관계된 일이고,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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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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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것이 세상이라고 하면 결국 세상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체스 게임이겠죠. 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 될 수만 있다면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여왕이 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북폴리오(235~236쪽) -

 

 

 

 

 Scene #1  붉은 여왕 효과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쉼 없이 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항상 제자리다. 주변 세계도 함께 뛰고 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빨리 뛰면 다른 곳에 도착해 있거든요.” 여왕이 말한다. “여기선 같은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죽어라고 뛰어야 해. 만약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 이상 빨리 뛰어야 한다고.” 이런 일화에서 비롯된 게 ‘붉은 여왕 효과’다. ‘붉은 여왕의 효과’는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주변 환경이나 경쟁 대상이 더 빠르게 변화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되는 원리를 의미한다.

 

무조건 빨리 뛰기를 원하는 붉은 여왕과 그녀의 빠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채 뒤처지는 앨리스. 이 두 사람의 제자리걸음은 소설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붉은 여왕과 엘리스'처럼 두 블록으로 갈라지고 있고 인류는 제자리걸음 중이다.

 

'플루토노미(Plutonomy)와 그 나머지로.’ 플루토크라트는 부(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플루토스’와 권력을 의미하는 ‘크라토스’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이른다. 용어는 생소하지만, 이들은 세계 경제의 혁명적인 변화의 물결을 타고 그 정점에 오른 글로벌 슈퍼리치라고 볼 수 있다.

 

 

 

 Scene #2  0.1% 글로벌 슈퍼 엘리트, 플루토크라트

 

오늘날 0.1%의 부자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까? 현대 플루토크라트가 급속 성장한 배지는 기술혁명과 세계화다. 이 두 가지 힘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정치적 요소와 결합해 산업혁명의 영향력과 규모에 필적할 만한 경제적 격변을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미국과 서구 선진국은 19세기 말에 이어 두 번째 도금 시대를, 중국과 인도, 일부 개발도상국은 첫 번째 도금 시대를 맞는 ‘쌍둥이 도금 시대(Gilded Age)’가 도래했다. 이 두 도금 시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신흥 시장의 산업화는 서구 국가들에 새로운 시장과 공급망을 제공하고, 서구의 신기술들은 개발도상국들의 도금 시대를 가속화하는 형국이다.

 

오늘날의 승자 독식 경제를 이 세계화와 기술혁명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한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이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지만 2등이나 3등으로 밀려나면 경제적 보상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른바 ‘슈퍼스타 효과’다.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로 과거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더 부유해진 고객, 더 많아진 소비자. 금융기관의 더 좋은 거래 조건 덕에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구조다. 경제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인식하고 여기에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벌어들일 기회임을 꿰뚫어본다.

 

1980ㆍ90년대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민영화와 규제 완화, 무역 장벽 완화의 흐름은 기술과 지식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 모바일과 무선 등 신기술혁명은 새로운 비즈니스 무대를 열어가며 새로운 부를 탄생시켰다. 즉 혁명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프리미엄이 슈퍼엘리트의 등장을 촉진시킨 것이다.

 

 

 

 Scene #3  '상위 0.1%', 그들이 사는 세상

 

일반인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0.1%의 부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우리가 TV나 언론에서 보는 몇몇 억만장자들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대중친화적이다.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발표 때마다 검정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했고,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투자 설명회 때 후드 티를 입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워런 버핏처럼 거액의 기부로 유명한 억만장자도 흔하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들 또한 플루토크라트에 속한다. 대중매체와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세계적 억만장자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개발도상국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한다고 해도 '상위 0.1%'라는 아주 고귀한 수식어를 뗄 수 없다. 그들의 이름 앞에 '상위 0.1%'를 붙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글로벌 신흥 갑부들이 점점 더 부유해질수록 더 폐쇄적이고 갈수록 일반인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산다. 그리고 그들의 기부 활동은 정부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특권이다. 그러나 선한 목적이 있는 갑부들의 선행 활동을 비난하자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문제는 일부 신흥 갑부들이 폐쇄적으로 뭉치면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당한 오해와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이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 다른 나라 동료 부자와 공동체를 이뤄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드러낸다. 파이는 커졌지만 슈퍼엘리트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조각을 차지하는 셈이다.

 

 

 

 Scene #4  플루토크라트의 성벽이 높다하되 상위 1% 세상 아래 차단된 장벽이로다

 

2011년 가을에 시작된 반(反) 월가 시위는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플루토노미에 대한 저항이었다.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은 물론 빈부 격차 심화라는 신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 세계로 번져나갔던 시위 물결은 1년도 채 안 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대한 분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이렇게 꼬집었다. 그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 는 민주주의 정신과 '기회의 땅'을 내세운 미국이 현재 그들이 비웃던 유럽보다 못한 기회 박탈의 땅이 됐다고 지적했다. 스티글리츠가 산출한 계산법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가 소유하고 있는 국가 전체의 부는 40%에 이른다. 특히 상위층의 재산 구성을 보면 금융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노동이 아닌 금융자산을 통해 획득하고 있다.

 

미국의 양극화 문제가 월가시위로 본격적으로 표면화됐지만 한국도 양극화의 논란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양극화이 심화될수록 슈퍼 리치의 영향력 또한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백만장자는 5년 내로 지금보다 79%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 한국의 상위 10% 이내 부자들의 다수가 강남에 몰려 그들만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고 있으며 경제위기 속에서도 소득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누군가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데에 정부가 한몫 거들기도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누가 부를 얻을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플루토크라트들이 정부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이유다.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가져다준 단맛을 맛본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 파국 속에서도 오히려 중산층의 연봉이 지나치게 높다고 보며, 금융위기도 분수에 맞지 않게 처신한 중산층에게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부자증세 도입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플루토크라트가 있다면, 그 세상의 나머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의 나머지들'은 상위 1% 부자들의 성공습관을 쫓고 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상위 1%'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희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의 나머지들'은 제자리걸음 중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르지 못할 까닭이 없건데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만 높다 하더라 (泰山雖高是亦山 登登不已有何難 世人不肯勞身力 只道山高不可攀, 양사언)

 

누구나 쉬지 않고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근면의 교훈은 우리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플루토크라트가 만들어 낸 멋지고 화려한 성벽은 너무나 높기 만하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계층상승의 사다리'는 걷어차고 있다. 플루토크라트의 성벽이 높다하되 상위 1% 세상 아래 차단된 장벽이다. '세상의 나머지들'이 그들을 따라 오는데 너무나도 버겁기만 하다. 여왕이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빈곤한 졸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발 빠르게 뛰고 있는 붉은 여왕을 따라잡지 못해 제자리에만 맴돌 수밖에 없는 앨리스처럼 말이다.

 

세상의 변화에 재빠르게 따라가고 부의 축적에 급급한 나머지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상에 헤매는 '붉은 여왕', 그리고 플루토크라트와 미처 따라가지 못해 뒤처지는 순진한 엘리스가 되고 만 '나머지들'. 결국, 이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는 양극화 게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체스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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