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쁜 소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소설은 창조의 결실이 아니라, 미리 짜맞춘 일련의 ‘형식‘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진실석(복합적이다)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복제품은 단순화(거짓이다)를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호기심만을 달래줄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국 그런 책에서는 작가도, 작가가 보여주겠다고 하는 현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해진 틀에 짜 맞춰져 우리까지도 덩달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p.208)
자기 나름대로 독서의 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다른 책을 쥐여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겪었던 성장 과정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결국 아이와 우리 사이에 깊은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언젠가 아이 스스로 판에 박힌 책들을 단호히 집어 던지면서 느낄 그 비할 데 없는 뿌듯함을 배앗아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 상투적인 책들 때문에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듯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청소년 시절과 화해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그맘때의 우리가 어떠했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부정하거나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그것 자체가 성장기를 무슨 몹쓸 병인 양 치부하는 미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p.212)
하아-
다니엘 페나크가 굳이 나쁜 책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어도, 나는 '청소년 시절과 화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한국 소설 <남자의 향기>가 생각났다.
나는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 숱한 할리퀸 시리즈와 성인 로맨스물을 읽었다는 사실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남자의 향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실은 몹시도 부끄럽다. 너무너무 부끄럽다. 그 책이 아마 세 권짜리였던 것 같은데, 줄거리 자체도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고아인 소년이 부잣집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녀의 보디가드가 되는데,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그녀와 커플이 될 수 없고, 그녀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변호사(?)와 결혼하게 되지만 불행하다..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남주가 그녀를 지키는 보디가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어마어마하게 싸움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냥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했다. 그는 주인공이니까. 하아..
그 당시에도 같은 반 아이가 깡패를 미화한다고 이 소설 싫다 그랬는데, 아아, 나는 재미있다고 답했다. 아아, 그 때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다니엘 페나크는 그 시절의 나와 화해하여야 한다지만, 나는 도무지 화해가 안된다 ㅠㅠ 용납이 안돼.
어떤 책들은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궁금해지지만, 남자의 향기에 대해서라면 다시 읽지 않아도 너무 허접한 소설이었다 ㅠㅠ 그걸 지금 너무 알겠어. 대략 떠오르는 내용만으로도 이미 너무 잘 알겠다. 부끄럽다. 아아, 나의 청소년기 너무 부끄럽고..
게다가 너무 기억나는 게, 그 때 그 부잣집 소녀가 자신의 처녀성을 이 보디가드한테 바치는(?) 맡기는(?) 장면이었다. 아마 작가가 남자였을텐데(그러니 그런 소설이 나왔겠지), 보디가드는 너무너무 이 여자를 사랑해서 그여자랑 관계를 하는데, 하고나서 그녀가 '이렇게 하면 되는거야?' 라고 해서 남자 가슴을 후벼놨던 것. 그러니까 여자는 그를 사랑해서 섹스한 게 아니라, 섹스란 걸 어떻게 하는지 알기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진짜 부끄럽기 짝이없게도 그 때 나는 그 남자의 가슴아픔에 얼마나 이입했던가.
아아, 과거의 나여, 청소년기의 나여... 부끄럽다..
그렇지만 다니엘 페나크가 그 때의 나를 경멸하지 말라고 한다. 흙흙 고마워요 다니엘 페나크 아저씨. 저 경멸할라 그랬어요.
그렇지만 다니엘 페나크가 그 때의 나를 증오하거나 부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흙흘 고마워요 다니엘 페나크 아저씨. 저 그 때의 저를 증오하고 부정하고 싶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남자의 향기 재미있다고 외치고 다녔던 열일곱살의 나여, 내가 너를 증오하고 경멸하고 부정하려 했어. 미안해. 화해하자. 사실..화해가 조금 힘들기는 해. 지금이라면 누가 공짜로 줘도 안읽을 소설을 그때는 니가 재미있다고 읽었잖아. 그렇지만...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된 것이지. 화해하자. 물론 쉽지는 않아.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를 부정하고 싶어.
나여..
오,
나여......
왜그랬니,
나여?
나여..
아아,
정녕 내가 그랬단 말인가.
부끄럽다.
숨고싶다.
그렇지만..
화해하자.
쉽지 않지만.
화해하자.
아니야,
시간을 조금만 주겠니.
화해가 그렇게 금세 되는 건 아니잖니.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줘.
결국은 화해에 이르도록 할게.
흙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