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마음















어제 늦은밤. 컵라면에 밥을 먹고 홍콩에서 돌아온 짐을 풀며 틀어둔 티비에서는 <연애의 참견>을 방송하고 있었다. 사연 속의 여자는 남자와 일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던 중, 남친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든 뒤에 보란듯이 빵 차주겠어!' 하며 D-day 를 50일 뒤로 잡는다. 그렇게 남자의 집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확보하던 중, 까페에서 남친이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입을 맞춘 장면을 맞딱드리게 되는데, 이 때 여자는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아는 척을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모른척 지난간다. 나중에 남자가 왜 그 때 모른척 지나갔냐 물으니,


"오빠가 곤란할 것 같아서." 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이제 정말 너만 보겠다며 달라지겠다 한다. 그 뒤로 남자는 여자에게 엄청 다정하며 최선을 다한다.


여자는 달라진 남자의 모습에 수시로 흔들리지만, 그래도 복수를 하리라 결심한다. 드디어 디데이!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고, 그런 여자에게 꽃다발과 반지를 주며 프로포즈를 한다. 나와 결혼해줄래? 이 때 여자는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반지를 돌려주며, 사실은 네가 바람피우는 거 그 전부터 알았고, 너한테 복수하려고 내내 참았던 거다, 이제 그만하자, 라면서 뒤돌아선다.


남자는 아프고 괴로워한다. 여자에게 제발 돌아와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여자가 남자를 찾아갔는데, 남자는 그때 그렇게 말한다.


'4년간 사귀어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어느날 유학을 간다 해서 그 여자 유학가있는 동안 용돈도 보내주고 기다렸는데, 거기에서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고 하더라. 그 때 상처를 받아서 깊은 관계를 못가지게 됐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시는 안그러겠다'


여자는 이 말을 듣고 고민하며 사연을 보낸 거다. 이 남자랑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 그래도 될지, 아니면 헤어져야 할지. 물론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만, 나 역시 여자의 흔들림을 알 수 있었다.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상처가 그에게 깊어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면,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면, 달라지고 바뀌어 괜찮지 않을까,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자에게 기대해봐도 좋지 않은가. 여자가 흔들렸다는 것은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는 걸 의미하는데, 미련이 남은 건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꾸 자신에게 잘해줬던 게 생각났는데, 그래서 흔들렸다면, 이제는 믿어도 좋지 않을까?


나 역시 여자의 입장이 되어 이렇게 생각했는데, 와- 패널들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패널들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이 선택에 다른건 없다. 딱 두 가지 길이다, 바람남과 사귀느냐 바람남과 헤어지느냐. 이렇게 말해주니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 뚜렷하게 보이잖아. 그리고 말했다. '내가 헌신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해서 내가 바람을 피우게 됐다'는 것은,



'나는 어릴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지금 바람을 피웠어' 와 다름없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명일 뿐이라고.

'나는 감기에 걸렸었어. 그래서 지금 바람을 피웠지' 이게 무슨 말이 되냐고.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자가 연애를 하게 되면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이입을 해서 말도 안되는 변명을 받아주게 된다고도 했다. 그 남자는 그냥 바람남이라고. 나는 사연을 보낸 여자의 마음이 되어 남자의 입장에 또 이입하고 있었다. 아!!


그러자, 5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 《여자는 인질이다》생각이 났다.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p.53)




은행강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도 친절한 은행강도에게 감사했던 인질들. 게다가 그 중 어떤 여자는 그 상황에서의 범법자, 자신을 인질로 만들었던 남자와 약혼까지 하게 되지 않았던가!



1985년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질이었던 여자 세 명 중 두 명이 인질범 두 명과 각각 약혼했다. (p.62)




그리고 패널들은 말했다. 복수를 하기로 했으면, 바람핀 남자를 응징하기로 했으면 바로 했어야지, 도대체 왜 그렇게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거냐고. 둘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없던 정도 생기면서 복수는 불가해진다고. 스톡홀름 증후군에서도 함께하는 오랜 시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웨셀리어스와 데사르노는 두 번째 인질 피해자만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이 피해자가 인질범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긍정적인 접촉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인질들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반면 이 피해자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감금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피해자에게 스토골름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근거로는 ˝그가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점, 외부에 있던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는 점, 인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인질범이 실제로는 악취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했음에도, 인질범이 말쑥하고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한 유일한 피해자였다.˝- P68



만약 내 사연을 보낸다면 패널들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내가 들어가있는 사랑,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서 나는 당사자이지만, 제삼자가 보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연애 혹은 사랑과 다를 것이다. 패널들은 저 사연속의 연애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남자를 사실 그대로 '바람남'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연 속 여자는 자신이 당사자 였으므로 '상처를 가진 남자'를 봤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것처럼,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우습잖아. 패널들이 한 비유처럼, 어릴 때 나는 물에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바람을 피웠어... 랑 뭐가 다르다는 건가.


사연속 남자는 바람남이다. 한 번 바람피운 남자가 또 피울 확률은 높다고 패널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인질이 사랑에 빠진 남자는 납치범이고 범법자이다. 납치범의 친절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해도, 그가 납치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인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이래요, 그 사람은 당신을 인질로 만든 나쁜놈이야!' 라고 했지만, 그건 내가 제삼자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나 역시 내 사랑들 속에서 부당하게 일방적으로 그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던 적은 없었나.

분명 이십대 중반의 나는 그런 적이 있.었.다. 그 관계에서도 물론 괴로워했지만 그 관계를 끊어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괴로워했던 건, 내가 나를 잃는 것을 누구보다 못견디기 때문이란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내 안에는 내가 있으니까,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과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십대 중반의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써 지우고 그를 사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직까지 내게 큰 상처로 남아있고 내 인생의 오점이다. 내가 이것 때문에 정치인이 될 수가 없어...


그러나 그 이후의 나는 어땠는가.

분명 몇 번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잘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아껴줘야 한다는 걸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연휴동안 엄마와 둘이 홍콩에 다녀왔다. 비행기 안에서, 대관람차 안에서, 케이블카 안에서, 거리에서, 호텔방에서 나는 엄마와 내내 둘이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비행기 안에서 엄마는 내게 물었다.



"너 그 남자 그렇게 좋아하면서 대체 왜 쫓아가서 매달리지 않았어?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매달리고 잡았어야지."



나는 엄마에게 답했다.



"엄마, 나는... 그 남자보다는 나를 더 사랑했던 것 같아."



연애는 우리 둘의 몫이고, 우리만의 이야기는 우리가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일을,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제삼자가 보는 관계에서는 분명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나 혹은 그를 설명하는 간단명료한 언어가 튀어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를 제삼자에게 설명했다면, 그는 어떻게 정의될까. 그리고 나는?



나는 나쁜년일까? 나는 이기적인 여자일까? 내가 잘못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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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8-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비슷한 사연을 들을때마다 글에 나오는 패널들처럼 단호하게 당연히 헤어져야지! 라고 했었어요.
이 글을 생각해보니 당사자가 아니기때문에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고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못했던거 같더라구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왜 나오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질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온전히 보장받기위해선 인질범의 입장에서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하고 작은 배려(?)에도 감사히 여기다 보면 이렇게 쌓인 신뢰, 연민등의 여러감정들이 마치 애정처럼 느껴질수도 있고..
이러다보니 인질-인질범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 연인관계(특히 이성연인)에도 적용할 수 있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다 읽어갈수록 모든 연인의 관계가 가볍게 보이지 않더라구요. 무섭게 읽혀졌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