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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단발머리 님께서 작성하신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보았고, 내친김에 나도 좀 읽다 자야지 하고 지난번 읽던 곳의 다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아니 글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에서 '루소' 에게 반박한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루소를 까는거다! 그러면 왜 까는가? 깔만하니까 깐다..루소, 남자여... 루소도 걍 남자로구나.



루소는 선언하기를 여자는 결코, 단 한번도,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라고 느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천부적 교활함을 발휘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고, 남자가 쉬고 싶어할 때면 언제든지 더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 더 달콤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애교덩어리 노예로 변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이 주장들을 자연의 섭리에서 이끌어냈다고 내세우면서, 한 술 더 떠서 여성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복종이라는 큰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주입시켜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 미덕의 주춧돌인 진실과 강인함의 함양에도 어느 정도는 제한을 둘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넌지시 말하기까지 한다. (p.59)



나는 그동안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여겨져온 남자들이, 지혜롭다고 혹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여겨져온 모든 남자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이 서로 오구오구 우쭈쭈 해주고 천재 학자인 듯 떠받을어준 모든 남자들이, 그러나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 세상을 보는 눈이나 좀 더 깊이 사유할만한 능력은 안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남자들은 그동안, 세상이 남자들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다. 편협한 시선을 갖고 있어도 당대의 지식인으로 여겨졌었지.



나는 어디, 루소를 얼마나 가열차게 까대는가 보자, 까대는 것에 연대하리라!(응?) 하며 책장에서 오랜동안 잠자고 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를 꺼내가지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올랐다.
















아니, 그런데 대실망인 것이, 쩝... 옮긴이가 쓴 <들어가는 말>에 보면 내가 읽기로 선택한 이 책이 전문을 번역한 건 아니라는 거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전체 13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문고본인 이 책의 성격상 다 싣지 못하고 중요도를 고려해 1,2,5,6,9,12,13 장을 선별해 번역했다. 2장과 유사한 주제를 논하는 3장과 4장,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노함으로써 전체 주제와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는 10장과 11장을 배제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숙함에 대해서 논하는 7장과 좋은 평판을 유지하느라 소홀히 취급되는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한 8장을 빼는 것은 아쉬운 결정이었다. 아울러 여성을 폄하하는 여러 작가들을 비판하는 5장과 여성들이 쉽게 범하는 여러 오류를 지적하는 13장의 경우, 각각 한 명의 작가와 한 가지 오류만 선택했고, 13장에서는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6절을 포함시켰다. (- 여성의 권리옹호, 들어가는 말, 옮긴이 문수현, p.12)



음, 이게 전체를 다 번역한 게 아니라 일부라니, 음, 난 그것도 모르고 덜컥 사버렸는데. 제대로 읽으려면 다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시 살까..를 고민하다가 그냥 일단 읽기로 했다. 나한테 필요한 건 조금 더 과격한 책들일테니, 이건 이것대로 읽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여성폄하 작가들을 비판하는 5장을.. 읽고 싶다... 누구를 가열차게 까댔는지 궁금해. 자고로 사람이 친해지려면 뒷담화를 같이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제1장 인류의 권리와 연관된 의무들을 고찰함>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자들을 깐다. 루소를 언제 까려나 했더니, 걍 1장부터 까버려. 루소만 까는 게 아니라 남자는 그냥 다 깐다. 루소를 비롯해서 모든 직업군의 남자들을 그냥 죄다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하는 일이라고는 여성을 유혹하는 것뿐이고, 세련된 태도 덕분에 화사하고 장식적인 의복 밑에 추악한 부도덕성을 감춤으로써 사악함을 더욱 위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게으르고 천박한 일군의 젊은 남성들이 간혹 시골에 체류하는 것보다 더 시골 마을 주민의 도덕성을 침해하는 것은 없다. (여성의 권리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p.27)



신분 혹은 재산을 가진 남성은 이해관계에 의지해 출세하게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변덕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흔히 말하듯이 자신의 재능으로 출세해야 하는 궁핍한 신사는 비굴한 식객 혹은 비열하게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된다. (여성의 권리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p.274)



선원들과 해군 장교들도 같은 범주에 해당되지만, 그들의 사악함은 경우만 다르지 더 심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에 해당하는 의식 절차들ceremonials을 이행하지 않아도 될 때는 더욱 철저하게 게으르다. 이에 비하면 육군 병사들의 하찮은 배회는 적극적인 게으름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남성들끼리의 사회에 보다 국한되어 있는 해군은 유머와 심한 장난을 선호하게 된다. 반면에 행실이 얌전한 여성들과 빈번히 어울리는 육군 병사들의 경우 감상적인 위선적 말투가 몸에 밴다. 그러나 그들이 너털웃음을 짓건 예의 바른 억지웃음을 짓건, 지성이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여성의 권리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p.27-28)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울스턴크래프트는 한마디로 남성들의 지성을 의심했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처한 상황에서 처한 환경에 따라 지성이 의심스러워. 1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루소를 까주고 마치는데, 자, 까는 걸 또 얼마나 문학적으로 까댔는지!



루소가 그의 탐구에서 한층 높이 올라섰거나, 혹은 그의 눈이 그가 거의 언제나 호흡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안개 낀 대기를 궤뚫어 보았다면, 그의 활동적인 정신은 참된 문명을 확립하고 인간의 완성을 숙고하는 데로 돌진했을 것이다. 맹렬하게 날아서 감각적인 무지의 밤으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말이다. (p.30)



정말이지,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맹렬하게 날아서 감각적인 무지의 밤으로 되돌아간다니!! 무식하다는 표현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하다니. 울스턴크래프트 진짜 반할만한 사람인 것이야. 너무 좋은 표현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식하다는 걸 세련되게 표현했을까.


맹렬하게 날아서 감각적인 무지의 밤으로 되돌아가는 오, 루소여!!



그래도 루소 궁금해져서 루소도 읽고싶어졌다.




















최근에 SNS를 통해서 윤김지영 선생님의 논문을 다운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페미니즘의 지각변동: 새로운 사유의 터, 페미니즘 대립각들> 이었다. A4 영지로 70장이 출력되던데, 앞에 몇 장만 잠깐 읽어봤다. 아니, 근데, 선생님은 초반부터 하이데거..를 데려오는 것이다. 하이데거요??



페미니즘은 섣부른 화해와 평화의 수사, 고고한 윤리적 우월성의 현시가 아니라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터를 열어젖히는 각축의 장인 것이다. 여기서 "존재론적 폭력"(Zizek, 2008: 68) 이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Introduction to Metaphysics(형이상학 입문)(2000)에서 도입하는 개념으로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말해지지도, 생각되지도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고 전개해나가는 쟁투"이자 "창조자들과 시인들, 사유하는 자들, 위대한 정치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Heidegeer, 2000: 65) 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이들은 사유(思惟)의 시작점을 여는 이이며, 페미니스트들도 이에 속한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들은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자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법을 뒤틀어버리는 시인들이자 사유의 대전제와 공리들의 임계점을 드러내며 끝 간 데 없는 질문의 역량을 퍼 올려 철저히 사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지각변동: 새로운 사유의 터, 페미니즘 대립각들, 윤김지영, p.9)



아, 또 하이데거 궁금하잖아요, 여러분? 다행히도 나에겐 하이데거 입문서에 대한 정보가 있다. 한 달전이었나, 만화로 빌려왔다가 안읽고 반납했었지. 아하하하하. 하이데거는 이 만화로 존재한다! 꺄울 >.<
















음... 그렇지만.....음....이거 한 권 읽는다고 존재론적 폭력...에 대해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 용어상으로 그리고 윤김지영 선생님이 페미니스트들을 존재론적 폭력에 비유함으로써 그 의미가 뭔지 잘 알겠다.


이 논문은 <문화와 사회 2019 27권 1호>에 실린것 같은데, 이 책은 어디서 구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논문은 파일로 제가 가지고 있으니 원하시는 분은 말씀하시면 이메일로 쏴드리겠습니다. 푸슝-



실비아 페데리치 덕에 마르크스 읽어야 됐고 파이어스톤 덕에 헤겔 읽어야 됐는데, 하하하하, 마리 루티 덕에 라캉 읽고 싶어졌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덕에 루소 읽고 싶어졌고, 윤김지영 선생님 덕에 하이데거 읽고 싶어졌다. 헤겔과 하이데거 라캉이라니.. 아니, 나는 살면서 내가 이들을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뜻밖의 장소에서 이렇게 툭툭 마주치게 되네.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하는 거 진짜 너무 좋다. 지금 고정 멤버는 사실 몇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정 멤버가 있다는 건 완전 큰 힘이 된다. 꼬박꼬박 같이 읽고 글 써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밀려서 시간도 못지키고 글도 못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시간을 넘겨서라도 읽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큰 힘이 된다. 나로 하여금 계속 이걸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달까. 내가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퍽 다행이었다. '하자'고 한 이상, 해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야말로 그 덕분에 꼬박꼬박 매달 해당도서를 완독하고 있다. 몇 권은 정말이지, 혼자 읽었다면 결코 다 읽을 수 없는 책들이었던 거다. 게다가 이렇게 읽다보니 되게 재미있고 즐겁다. 책 내용이 웃을 수 있는 내용인 건 아니지만, 고달픈 역사를 알게되는 것, 그것들을 표현해내는 글을 읽는게 새로운 깨달음인거다. 그 과정에서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써줘서, 그리고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그들의 책들을 인용해서 자꾸자꾸 더 재미있어진다. 어렵지만 재미있는 거. 내 능력이 딸리는 것 같아 몹시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렇게 여성주의 책 같이 읽는 게 즐겁고 재미있다. 작년에 내가 한 일중 가장 잘한 게 이 일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윤김지영 샘과 윤지선 샘이 함께 저술한 책이 나왔다. 만세!! 이름하여, 《탈코르셋 선언》!! 아니, 엊그제가 월급날이었는데 어제 통장이 초토화 되었고..나는 7월 한 달 책 안사기..운동을 혼자 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윤김쌤 책이 나와버리면 내적 갈등이 오져버리는 것이여..



















이제 단팥빵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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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하이데거? 하아......

다락방 2019-07-12 09:02   좋아요 0 | URL
나 어떡해요? 😔

syo 2019-07-12 09:21   좋아요 0 | URL
🐒 : 체감상 하이데거가 제일 빡센 자식은 아니었어요(당연히 원전 아니라입문서 기준)

박찬국 선생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일단 권하구요, 무난히 읽히면 역시 박찬국 선생님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로 복습 및 심화학습 해 주세요.

다락방 2019-07-12 09:22   좋아요 0 | URL
입문서 추천 겁나 받고 있는데 언제 다읽죠? 저 제 의욕대로 다 읽었으면 이미 대학교수... 🤪

syo 2019-07-12 09:26   좋아요 0 | URL
🙉 : 드릴 말씀이 없다. 그저 화이팅....

다락방 2019-07-12 09:31   좋아요 0 | URL
화이팅 접수합니다... (그러나 한숨)

단발머리 2019-07-1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방에서 나 혼자 혼잣말)
하이데거, 반사!!!

다락방 2019-07-12 10:15   좋아요 0 | URL
자, 우리 하이데거도 같이 파봅시다. 루소도, 라캉도....(끌어들이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19-07-1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의 말년작은
에...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징징댐이 지나칩니다
정신승리(?)같은 그 글을 읽으면
화가 나가는 커녕 쯧, 측은해 지... 아니죠, 너그러워 질 필욘 없죠! 까대야합니다. 말년작은 후져요.

다락방 2019-07-12 14:08   좋아요 0 | URL
제가 뭐 말년작까지 읽게 될것 같진 않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직 라캉도 못 건드리고 있기 땜시롱 언제가 될진 모르고 이렇게 읽을 책은 쌓여만 갑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나저나 나도 참 귀여운 아이였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쓸쓸했지만 아주 행복한 애였어. 지금도 쓸쓸한 것은 똑같지만, 나는 참으로, 참으로 쓸모없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고 있구나. 그러자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라늄 화분을 내놓으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을 때였다. 난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지금 딱 한 걸음 허공을 내디뎌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단 한 가지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 옥상에 올라온 가버라는 젊은이가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세요, 폴리팩스 할머니! 당장 뒤로 물러서세요!"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순순히 뒤로 물러스는 그녀를 보며 가버는 후들후들 떨었다. 의사에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

인생에 변화가 필요했다. 안 그러면 이제 겁이 나서 제라늄 화분에 햇볕을 쏘이지도 못할 텐데, 부인은 하필 제라늄을 참 좋아했던 것이다. (p.13-14)


















폴리팩스 부인은 굳이 살아야할 이유같은 걸 찾을 수 없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만 딱히 또래보다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도 없었고. 부인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이 뭐였는지 물어보고 폴리팩스 부인은 웃으면서 '스파이' 라고 답한다. 그런 그녀가 정말(!) 스파이가 되고자 한다. 살아갈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 것.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 그러나 하지 못했던 그 일, 스파이!


그렇게 그녀는 무작정 워싱턴의 CIA 본부로 찾아가 '나 스파이가 되고 싶어' 라고 말한다. 물론 스파이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을 바로 스파이로 취직시켜줄 순 없다. 그러나 타이밍과 오해가 폴리팩스 부인을 정말(!) 스파이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단조로운 삶을 살던 폴리팩스 부인은 중요한 임무를 띠고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부인은 해외여행도 처음이고 비행기도 처음이다. 자식들이 다 커서 손주들까지 생긴 이 때야, 그녀는 비로소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날아가는 것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나이를 원망하기 보다는, 이만큼 살아온 자신의 나이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녀는 지혜롭고 다정하다. 19일에 방문해야 할 서점에 미리 방문하는 게 영 내 성격에 안맞았는데(왜 지시대로 하지 않는거야!!), 그러나 그마저도 그녀에겐 행운이었다. 그녀는 서투른 스파이었지만, 해야할 일을 정말 잘 해내는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간에!

그녀는 여행지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혼자인 시간도 즐긴다. 포로로 잡혔지만, 함께 포로로 잡힌 스파이에게 다정한 벗이 되어주고, 그녀를 포로로 잡고 있는 적들에게도 아주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아픈 곳을 안마해주는 친절한 부인이 되어준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지혜는 계속계속 쓸모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물처럼 거친 액션이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걸 몹시 싫어하는 폴리팩스 부인이 자신의 탈출을 위해 적들을 어쩔 수 없이 아프게 한다. 심지어 총을 쏘기도 해! 할머니 스파이물이라니, 뭔가 거짓말 잔뜩에 가벼울 것 같지만, 정말이지 읽는 재미가 있다. 중간중간 삶에 대한 부인의 생각을 읽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묘미가 아닐까. 아마 부인도 그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다르게 펼쳐지는 일들을 맞닥뜨리며 더 많이 인생이라는 것의 재미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나타나는 게 참 좋다. 



어쨌거나 누구의 인생에서건 미래의 모습이며 형태며 방향은 자기 손을 벗어난 것이며, 순전히 우연이나 운명, 또는 신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이제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결말은 누구도 몰라. 폴리팩스 부인은 생각했다. 바퀴 달린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안으로 밀려 들어갈 때 보이는 천장을, 그리고 천장이라는 것 자체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243)




지혜롭게 나이들고 싶고 건강하게 나이들고 싶다.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그다지 큰 게 아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다정한 벗들과 함께하고,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일. 특히나 여행에 대해서라면 더 그러한데, 먼 곳에 가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며 '언젠가'로 미루다가는 아예 이루지 못하게 될 확률이 크니까. 시간과 돈이 생겼을 때는 내가 건강과 체력적으로 힘겹게 될지도 모른다. 갈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지금 당장 가서, 조금이라도 그곳을 보고 느끼고 오자고, 그런 자세로 살고 있다. 나중에 훨씬 더 나이들었을 때, '이제는 가고싶은데 갈 체력이 안되네' 같은 말을 하며 가지 못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하면서 살고 싶다.




폴리팩스 부인이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CIA 본부로 들어가 '나 스파이 하고싶어!' 라고 말하고 또 정말 스파이를 하게 되는 이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좀 더 즐겁게 살고픈 욕망을 느꼈다. 나중에, 아주아주 나이가 많아졌을 때, '사실 이런거 하고 싶었는데' 같은 거 생각하며 젊은 날을 아쉬워하지 않아야지. 지금 당장은 알라디너 몇 명과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하는 거 진짜 너무 좋고!! 덕분에 계속해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더 들면 글자 읽기도 힘들어질 때가 올텐데, 지금 부지런히 열심히 읽어둘거다. 글도 열심히 열심히 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실거야. 요가도 놓지 말아야지. 그래야 좀 더 오래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테니까. 가고싶어지면 휙- 하고 먼 데로 날아갈거다. 지금은 그게 가능하고, 가능할 때 해야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좋아한다는 말도 아주 수시로 해야지. 나중에 '그 때 내가 좋아했었는데..'같은 거 후회하지 않게끔.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하며 그 순간순간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의 이야기라니, 정말 좋다.


"어쨌든 당신에 CIA 쪽에도 쓸 만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겠나? 능력 있는 젊은이 대신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 말이야. 좀 신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난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어. 그런 각오가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 P23

폴리팩스 부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필사적으로 다리를 절며 뛰어가는 패럴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필사적인, 가엾은 인생이라니. 인간이란 어쩌면 이렇게 끈질기게 목숨을 붙들고 매달리는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일을 해내는지! 그러니까, 몸뚱이에 붙은 목숨 말이다. 영혼의 목숨을 부지하기는 훨씬 까다롭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 P317

지니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알 수 없는 것에 도박을 거는 일이지요.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우리는 인간인 거고요. 우리에겐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인생이란 지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방향도, 경로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니까요." - P352

문득 요란한 핏빛을 띤 붉은 해가 떠올라 그들이 지나온 절벽을 환히 밝혔다. 안개로 어둑했던 풍경이 선명해졌다.
"새로운 아침이구나!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잠시 동안 부인은 인생이 얼마나 마법 같은지, 덧없는지, 그리고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부인은 새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멀리 눈 덮인 산꼭대기가 보였다. 그보다 가까이 있는 절벽은 짙은 보랏빛 그늘이 드리워진 황갈색이었다. 조금 전까지 회색으로 얼룩덜룩하던 안개는 빛을 받아 진주처럼 반짝이는 부드러운 연분홍색 구름이 되었다. 시원한 공기에서는 축축한 흙과 젖은 풀 냄새가 났다. 그들이 탄 배를 지나쳐 흐르는 강물에는 하늘과 태양과 강변의 모습이 모자이크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폴리팩스 부인의 마음속에서 거의 신비스럽기까지 한 어떤 감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아주 짜릿한 자유의 감각이었다. - P359

그 순간, 마치 세상의 모든 법칙과 관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삶의 한가운데 서서 삶의 박동을 느꼈다. 부인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에서 새벽을 맞았다.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여태 살아 있었다. 놀라움과 감사, 피로와 허기가 뒤섞였고, 위험 속에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결코 충족되지 않는 열망이 뒤섞였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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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 제목으로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인데, 나는 이걸 개봉당시 친구와 극장에 가 보았다. 2011년 영화라고 되어있는 걸 보니, 내 기억만큼 오래전은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그 당시에 첫장면부터 깔깔 웃으면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다시보니 도무지 웃을 수 없고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첫장면이더라.



'애니'는 운영하던 빵집이 장사가 잘 안되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것은 자기에게 실패였다. 가끔 그 빵집 앞을 지나면서 문닫은 빵집을 보고 시무룩해한다. 가끔 만나는 남자는 자신을 단순히 섹스 파트너로만 여긴다. 구속은 싫다, 자유로운 관계가 좋다고 그가 번번이 말하는 바람에 애니 역시 그에게 뜻깊은 관계가 되자고 말하지 못한다. 그저 '나도 그래' 라고 억지로 동의할 뿐. 사실 애니는 그 남자를 만나고나서 한 번도 기분 좋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섹시하고 귀여운 남자라고 그를 얘기한다. 룸메이트는 월세날이 다가오자 애니에게 월세로 압박을 주고, 애니의 엄마는 애니에게 엄마 집에 와 같이 살자고 하지만 애니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차에 단짝 친구인 '마야'가 애인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다며 결혼소식을 전한다. 애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 엉망인 것 같은 이 때에 가장 친한 친구마저 결혼하게 된다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온전히 기쁜 마음이 아니다.


애니는 엄마의 소개로 보석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약혼 반지를 사러 오는 남녀에게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거라 말해 반지 파는데에 관심이 없고, 우정반지를 사러 온 소녀에게는 영원한 우정도 없다며 손님과 싸운다. 직업을 잃는 것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설상가상으로, 마야의 결혼식에 같이 들러리 서기로 한 '헬렌'이 아주 눈엣가시다. 자신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다 가로채고, 게다가 자신의 단짝친구인 '마야'와 자신보다 더 친하다고 드러낸다. 헬렌은 아주 예쁘고, 돈도 많고, 파티에 대한 감각도 탁월하며, 인맥도 대단하다. 뭐가됐든 애니보다 더 나은 걸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애니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렇게 그녀는 질투심과 되는 일도 하나도 없다는 우울감이 폭발해,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행패를 부린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애니의 엄마는 애니에게 누구나 바닥을 칠 때가 있다며 애니에게 애기했었다. 너도 아마 지금이 바닥일거라고, 그러니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애니는 그 때 자신이 바닥을 친 게 아니라고 말햇었다. 그러나 친구의 결혼파티까지 망친 이상 자신이 바닥을 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정하게 대해줬던 남자에게는 이미 실망감을 안겨준 터다. 섹스파트너에게 혹시나 싶어 결혼식 같이갈래 물었지만 거절당했고. 게다가 섹스파트너는 나중에 애니에게 '세번째 여자' 라고 하질 않나. 그렇게 애니는 친구도 잃고, 직업도 잃고, 월세를 못내 룸메로부터도 쫓겨나 엄마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바닥을 치고 자존감을 잃었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자존감을 잃은건지, 자존감을 잃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건지. 애니는 확실히 바닥을 쳤고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었고 그리고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 취급했다. 보면서 힘들었던 건 바로 이부분에서였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사람은, 우선 본인이 가장 힘들겠지만, 주변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거다. 매사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니 보석을 팔면서도 비아냥대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친구랑 더 친하다는 생각에 파티를 엉망으로 만드니까. 워낙 자존감이 낮으니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자까지도 몰아내고,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남자를 올려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주변 사람까지도 다 힘들게 만드는 거다.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거, 나는 그보다 더한 대접을 받을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람을 대우해주겠는가.


2011년에 내가 이 영화를 왜 재미있게 봤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다시 보았을 때는, '애니를 내 친구로 두고 싶지 않다'고 열번쯤 생각했다. 저렇게 매사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없이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차 가는 곳마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자존감 낮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너무 피곤한 사람이었다. 아, 정말 싫다, 보기가 너무 괴로워. 부자 여자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도 괴로웠고, 친구를 잃을까봐 전정긍긍하는 것도 괴로웠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섹파에게 당당하지 못한 것도 너무 괴로웠다. 섹파는 섹스를 끝내고난 후 '이제 가' 라고 말한다. 그러면 애니는 옷을 챙겨입고 자신의 집으로 가야해. 부르면 달려가고 가라 하면 얌전히 돌아서 가는.. 아,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미치겠어. 나는 진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닥으로 깔고 가는 사람을 보는 게 너무 스트레스야.



모든 걸 망쳐서 집 소파에 앉아 침울하게 앉아 있는 애니에게, 놀랍게도, 정말이지 놀라운 존재 '메건(멜리사 맥카시)'이 찾아온다. 내가 이 영화에 멜리사 맥카시 나온다고 해서 봤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건 역시 마야의 결혼식 들러리라 알게된 사람에 불과한데, 이 사람이 글쎄 뜻밖에도 애니를 찾아온 거다. 그리고는 신세 한탄하는 애니에게 말한다.


"이거봐, 나는 여기 너에게 친구로 찾아왔는데 너는 친구가 없다고 말하네? "


이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툭툭, 귀찮게 애니를 건드린다. 그리고 때리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폭력이라기 보다는 탁탁 치는 강도인데, 그러면서 계속 그녀에게 말한다.


"난 인생이야. 나는 니 인생이지. 이렇게 너를 때리는데 가만있을거야?"


애니는 그녀가 때리는 걸 피하면서 하지말라고 하지말라고 자꾸만 말한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며 맞기만 하다가, 드디어 그녀를 한 대 때린다. 그만하라면서. 그러자 인생, 그러니까 메건은, 아직 그렇게까지 나빠진 건 아니었다며 때리기를 멈춘다. 결국 애니는 다정한 남자와도 화해를 시도하고, 섹파를 버리고, 친구와 우정도 되찾고....



나는 메건의 등장이, 메건의 존재가 너무 놀라웠다. 일전에도 《아메리칸 셰프》란 영화를 보면서 조연으로 등장한 '스칼렛 요한슨'의 존재에 놀라워했었는데, 이건 그런 종류의 놀라움이었다.



애니에게 다시 기운나게 한 존재, 지금 인생이 널 괴롭히고 있다고 주저앉을 거냐고 말한 존재, 그렇게 다시 기운 내서 싸우게 한 존재가 애니의 절친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고 애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존재였던 거다. 갑자기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에게 나타나 '내가 니 인생인데 이렇게 맞고만 있을거야?' 라고 물으며 그녀를 다시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도록 해준 존재가 당연히 그럴 수있을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애니는 마야와 화해하고 다시 마야와 절친이 될것이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미안하다며, 여자친구가 없었던 말야, 했던 헬렌과도 투닥거리며 사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메건은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메건은 애니 인생의 이 시점에 갑자기 휙- 들어와서는 아주 강한 한 방을 선사해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각인시키고 그리고 다시 슝- 떠나버리는 거다. 와- 이런 존재가 있다면, 그러니까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렇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나타난다면, 그러면 그 인생이 그렇게까지 바닥을 친 건 아니지 않나. 바닥에 오래 있지 않게끔 운명이 한 일일지도 모르고. 정말이지 굉장히 강한 존재였다. 내내 비호감에 괴짜였던 메건은 그 순간만큼은 대단한 존재였다. 앞으로 애니는 메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위에 언급했지만, 영원한 사랑은 없고 영원한 우정도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변하게 되면서 단짝 친구는 안단짝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영원한 우정이 있을까? 영원한 사랑은? 이라고 내가 나에게 물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영원한 우정..뭘까? 영원한 사랑..뭘까?



그렇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등장하는 뜻밖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치고 빠지지만, 그 한 방이 엄청 중요한 사람. 이 영화에서는 메건이, 멜리사 맥카시가 그랬다. 되게 독특한 인물이야 진짜. 그렇지만 마지막 섹스신이 너무 비호감... 미안해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 그렇지만 섹스는 굉장히 프라이빗 한 것이고, 당신은 애니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니, 우정은 또 값진 것이고...




자존감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누구나 인생에 바닥을 칠 수 있듯이 나 역시 그럴 수 있다. 바닥.. 까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본 적도 있고. 그럴 때 내가 한 건 '어떻게든 올라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할까' 였다. 어쩌면 나는 애니만큼 바닥을 친 건 아니라서 이게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일, 사랑, 우정 모든 걸 잃고 어떻게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도와줄런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청소나 정리정돈을 하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청소나 정리정돈이 더 나은 기분이 들게 한다는 걸 믿는다. 그보다 더 믿는 건 하루 세 끼 잘 챙겨먹는 것 그리고 매일 운동을 하는 거다. 저만큼이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이 모든 걸 하기가 힘들겠지만, 하다못해 운동이라도 하면, 가급적 바깥으로 나가서 하는 운동이라면 내 자존감이 나를 두드려패는 지경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말하면 우습긴 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2-3회 나가는 요가가 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요가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준다. 이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와는 좀 다르다. 여전히 나는 요가를 못하고 나아지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여 순환을 돕고 근육을 괴롭힌다는 것은, 또르르 땀을 흘린다는 것은, 확실히 더 나은 기분을 갖게 한다.



자기애는 자존감이 아니다. 지나친 자기애는 오히려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지나친 자기애는 자기연민에 갇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자존감은 아닌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히 인생이 나를 엎어치기 하려고 할 때, 애시당초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어가 가능하게 돕는다. 내 책상은 여전히 지저분하지만 ㅋㅋㅋㅋㅋㅋ 곧 정리할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봤자 금세 또 난장 되겠지만.



잘 먹자.

잘 먹고, 바깥에 나가 운동도 좀 하고, 바람과 빛과 볕을 몸으로 받자.

그래서 섹스도 못하는 섹파따위, 거칠게 차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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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려움이 멈추게 하는 것은 삶
    from 마지막 키스 2023-05-08 09:14 
    같이 읽는 친구중 한 명은 이 책을 종교서적을 읽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친구의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교훈적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리 정희진 쌤이라도 …' 가 되었다. 아무리 정희진 쌤이 추천한 책이라도 그렇지, 나랑 안 맞을 수 있지. 이 책을 읽는 일이 고될 것 같았다. 길게 느껴질 것 같았고 그래서 빨리 진도를 빼고 싶었다. 지루하고 교훈적이고, 사실 읽기 전에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단발머리 2019-07-1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 나도 모르게.....
아멘!!하고 있네요^^

다락방 2019-07-10 14:38   좋아요 1 | URL
아멘까지야!! ㅎㅎㅎㅎ

우리 건강하게 지내요, 단발머리님. 서로에게 다정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면서요.
:)

심술 2019-07-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잘 받았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7-11 15:34   좋아요 0 | URL
넵!
 

아주 오래전 여름이었다. 친구와 나는 토요일에 만나 영화를 한 편 보았고 작은 전시회가 열리는 빌딩에 들어갔다. 전시회 이름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니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책들을 몇 권 팔고 있었다. 그중에 한 얇은 잡지에는 한 영화감독의 인터뷰가 실려있다고 되어있더라. 나야 관심없는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최애감독 아닌가. 나는 얼른 그 잡지를 사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친구와 좀 더 걷고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거의 다 마셔갈 때쯤, 문자메세지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그였다. 그는 예정에도 없이 불쑥 만날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갑자기 너무 신났다. 응, 갈게. 그렇게 답했다. 아니, 이건 무슨 일이지, 그를 생각하며 사둔 잡지가 가방 안에 있는데, 그런데 마침 오늘 볼 수 있다니!


나는 친구랑 헤어지고 신나는 마음으로 그를 보러 갔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후훗, 그 때 나는 편하게 나오느라 슬리퍼 차림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에게로 가면서야 내가 슬리퍼를 신었다는 것을, 땅바닥에 철푸덕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아, 모르겠다. 에헤라디여~


나는 그를 만나 활짝 웃고는 마침 내가 너를 주려고 이걸 샀지 뭐야, 하며 내가 준비해간 잡지를 내밀었다. 그는 기쁘게 받아들었고, 우리는 맥주를 시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분 좋은 토요일이었고 기분 좋은 마무리였다.



며칠후, 나는 그에게 그 인터뷰를 읽어봤느냐 물었다. 그는 '아, 그 잡지의 존재를 잊고 있었네' 라고 답했다. 그 잡지의 표지에서 그 감독을 발견하고 기뻤던 것, 그 잡지를 집어들고 설레이며 계산했던 것, 이걸 그에게 줄 수 있어 신나했던 것 모두가, 그 대답 하나에 비틀거렸다.


















무디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펄에게 가장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펄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트립을 택할 정도로 경박했다. 물론 펄이 자기를 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여자아이들이 반할 유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립이라니, 그 점은 용서할 수 없었다. 깊고 맑은 호수로 알고 뛰어들었다가 그것이 무릎까지 차는 얕은 연못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했나? 그래, 일어섰다. 진흙이 묻은 무릎을 씻고 진창에서 발을 빼냈다. 그 뒤에는 더욱 조심했다. 그때부터 무디는 세상이 예상보다 작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수학 수업 중에 펄이 화장실에 가자 무디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펄의 책가방을 열고 몇 달 전에 자신이 펄에게 준 조그마한 검은색 몰스킨 수첩을 꺼냈다. 의심했던 대로 책등은 갈라진 자국 없이 말짱했다. 그날 저녁, 무디는 방에서 홀로 수첩을 한 움큼씩 찢어내 꼬깃꼬깃 구긴 다음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휴지통이 구겨진 종이로 수북해지자 무디는-옥수숫대에서 벗겨낸 겉껍질처럼 이제 속이 텅 비어 축 늘어진-수첩의 가죽 표지를 맨 위에 떨어뜨리고는 휴지통을 발로 차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펄은 수첩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왠지 그것이 무디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p.407)



무디는 펄이 항상 글을 쓴다는 걸 알고, 몰스킨 수첩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펄에게 그걸 선물했다. 그러나 펄은 무디가 아닌 무디의 형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고, 무디는 자신의 형이 완전 형편없는 놈이라 생각했기에 그런 펄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펄의 가방에서 자신이 준 몰스킨을 다시 가져왔는데, 너무 마음아프게도, 펄은 그 수첩이 없어졌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제 가만가만한 요가가 끝나고 매트에 누워 송장자세를 취하면서 아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행복하네, 요즘엔 요가가 이런 행복을 줘, 하다가 그 여름날의 토요일 오후가 떠올랐다. 그래 그랬었지, 하고 좋고 설렜던 기억들과 그 날의 햇빛이 떠오르다가, 그러다 며칠 후 그가 내가 준 잡지의 존재조차 몰랐었다는 걸 떠올리자 조금 슬퍼졌다. 조금.


그리고 이내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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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7월 도서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는 잘들 읽고 계십니까? 시작은 하셨습니까? 저는 시작은 했습니다..
















이제 2019년도 하반기만 남아 있는데요, 이에 8월부터 12월까지 읽을 책들의 목록을 안내할게요. 중간에 새로운 책이 나온다거나 하면 변경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일단 생각한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8월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나 '샬롯 퍼킨스'의 《허랜드》 중 한 권 택일로 할까 합니다.

내친김에 빡세게 '보부아르'의 《제2의 성》으로 갈까 했으나,

우리, 힘들었잖아요. 그동안..

8월은 날도 덥고(응?), 휴가도 좀 즐길겸, 좀 쉬어가자는 의미로 페미니즘 소설로 선택했습니다. 사실 아예 한 달을 쉬면 어떨까, 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러다가 감을 잃을까 두려워, 읽기를 멈추지는 말자, 하고 그동안의 도서와는 다르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페미니즘 소설중 한 권 택일로 하였습니다.

8월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둘 중 한 권 읽고 뜨겁게 페이퍼 써주세요.








9월은 '코델리아 파인'의 《젠더, 만들어진 성》으로 할까 합니다.

어제 오늘 읽었던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서도 이 책을 강력 추천하더군요.

우리, 만들어진 성에 대해 읽어봅시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제2의 성》은 반드시 읽어줘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명색이 페미니즘 도서 같이 읽기인데, 보부아르는 통과해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2의 성은 아무런 공휴일도 없는 11월에 빡세게 가봅시다.

11월, 우리 제2의 성을 읽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11월에 우리, 그간 열심히 이 모임에 참여해 읽고 썼던 사람들끼리 조촐하게 오프만남도 가져봅시다. 그간 읽었던 책들에 대해 얘기하고 실컷 먹고 마십시다... (응?)

(제가 따로 다 연락 드릴게요. 다 알아, 다. 쟝쟝님은 SNS 로... ㅋㄷㅋㄷ)

우리 빡세게 읽고 썼잖아요. 여러분 고생 많았어요..(벌써 11월인듯)






일단 8,9,11 월의 도서를 선정해 보았고요, 10,12월은 생각나는대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11월 만남이 성사된다면, 우리 그 때 이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을 2020년에도 계속할지 어떨지 의논도 해봅시다. 오케?


아무튼 빡센데도 불구하고 참여해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에 저도 계속 읽을 수 있네요.

자, 힘내서 갑시다. 아자!




염두에 두고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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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0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빡세게 먹고 마십시다 빡세게......🐷

다락방 2019-07-09 12:28   좋아요 0 | URL
진짜 빡세게 빡세게 빡세게!!!!! 불끈!!!!!

syo 2019-07-09 12:32   좋아요 0 | URL
열라 빡세게 논다.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으오오오오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이래? 나 왜 이래요? 지나치게 신났지??

다락방 2019-07-09 12:40   좋아요 0 | URL
그 날은 아무도 집에 들어갈 수 없어!!! 😤

단발머리 2019-07-09 12:58   좋아요 0 | URL
🤣 키햐아!!

단발머리 2019-07-0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반기 계획 너무 근사합니다.
특히 시몬 드 언니와의 만남과 11월 오프라인 모임이요~~ 기대됩니다^^

다락방 2019-07-09 12:28   좋아요 0 | URL
우리 이렇게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만나서 건배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으하하하핫.
만약 2020년에도 계속 같이읽기 하게되면, 그 때도 또 만나서 오프 해주고 말이지요. 으하하하핫.

단발머리 2019-07-09 12:29   좋아요 0 | URL
건배하고 축하하고 그래야죠~
우아앙~~ 힘들었찌요?!? 대단합니다!! 하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7-09 12: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같이 모여서 오구오구 우쭈쭈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세!

비공개 2019-07-1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반기에는 꼭 참여하겠습니다!! 그간 게으름 부려 죄송합니다... ㅜㅜ

다락방 2019-07-10 14:37   좋아요 0 | URL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블랙겟타 2019-07-1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하반기 계획표가!
그러고 보니 이미 하반기로 접어들고 있엇네요 ㅎㅎㅎ
거기다가... 오프가 있을수도?..( ๑˃̶ ꇴ ˂̶)♪⁺
그동안 꾸준히 안 지치고 따라 가겠습니닷! =͟͟͞͞( ∩ ‘ヮ‘=͟͟͞͞) ੭⁾⁾

다락방 2019-07-12 10:15   좋아요 1 | URL
제가 늘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아시지요, 블랙겟타님?
부디 지치지말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함께 해주시는 게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오프에서 봅시다. 꺅 >.<

블랙겟타 2019-07-12 11:20   좋아요 0 | URL
(V•̀ᴗ-)✰

공쟝쟝 2019-07-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 넘나 ㅠㅠ 조아요’ㅜㅜ!! 저도 천천히 뚜벅뚜벅 따라갈게요 ㅋㅋ 책거리 해요 >.<

다락방 2019-07-12 11:33   좋아요 1 | URL
좋죠 좋죠! 이 아이디어는 단발머리님 께서 내주셨습니다. 역시 사람이 모여야 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면 혼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의견이 막 나온다. 우리 8월에는 재미나게 소설도 읽어봅시다.

뚜벅뚜벅 잘 따라오세요, 쟝쟝님! 11월에 만나요!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공쟝쟝 2019-07-12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 벌써 기대된다 -11월

다락방 2019-07-12 12:34   좋아요 0 | URL
저두요...(수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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