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나도 참 귀여운 아이였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쓸쓸했지만 아주 행복한 애였어. 지금도 쓸쓸한 것은 똑같지만, 나는 참으로, 참으로 쓸모없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고 있구나. 그러자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라늄 화분을 내놓으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을 때였다. 난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지금 딱 한 걸음 허공을 내디뎌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단 한 가지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 옥상에 올라온 가버라는 젊은이가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세요, 폴리팩스 할머니! 당장 뒤로 물러서세요!"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순순히 뒤로 물러스는 그녀를 보며 가버는 후들후들 떨었다. 의사에게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

인생에 변화가 필요했다. 안 그러면 이제 겁이 나서 제라늄 화분에 햇볕을 쏘이지도 못할 텐데, 부인은 하필 제라늄을 참 좋아했던 것이다. (p.13-14)


















폴리팩스 부인은 굳이 살아야할 이유같은 걸 찾을 수 없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만 딱히 또래보다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도 없었고. 부인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이 뭐였는지 물어보고 폴리팩스 부인은 웃으면서 '스파이' 라고 답한다. 그런 그녀가 정말(!) 스파이가 되고자 한다. 살아갈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 것.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 그러나 하지 못했던 그 일, 스파이!


그렇게 그녀는 무작정 워싱턴의 CIA 본부로 찾아가 '나 스파이가 되고 싶어' 라고 말한다. 물론 스파이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을 바로 스파이로 취직시켜줄 순 없다. 그러나 타이밍과 오해가 폴리팩스 부인을 정말(!) 스파이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단조로운 삶을 살던 폴리팩스 부인은 중요한 임무를 띠고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부인은 해외여행도 처음이고 비행기도 처음이다. 자식들이 다 커서 손주들까지 생긴 이 때야, 그녀는 비로소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날아가는 것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나이를 원망하기 보다는, 이만큼 살아온 자신의 나이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녀는 지혜롭고 다정하다. 19일에 방문해야 할 서점에 미리 방문하는 게 영 내 성격에 안맞았는데(왜 지시대로 하지 않는거야!!), 그러나 그마저도 그녀에겐 행운이었다. 그녀는 서투른 스파이었지만, 해야할 일을 정말 잘 해내는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간에!

그녀는 여행지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혼자인 시간도 즐긴다. 포로로 잡혔지만, 함께 포로로 잡힌 스파이에게 다정한 벗이 되어주고, 그녀를 포로로 잡고 있는 적들에게도 아주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아픈 곳을 안마해주는 친절한 부인이 되어준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지혜는 계속계속 쓸모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물처럼 거친 액션이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걸 몹시 싫어하는 폴리팩스 부인이 자신의 탈출을 위해 적들을 어쩔 수 없이 아프게 한다. 심지어 총을 쏘기도 해! 할머니 스파이물이라니, 뭔가 거짓말 잔뜩에 가벼울 것 같지만, 정말이지 읽는 재미가 있다. 중간중간 삶에 대한 부인의 생각을 읽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묘미가 아닐까. 아마 부인도 그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다르게 펼쳐지는 일들을 맞닥뜨리며 더 많이 인생이라는 것의 재미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나타나는 게 참 좋다. 



어쨌거나 누구의 인생에서건 미래의 모습이며 형태며 방향은 자기 손을 벗어난 것이며, 순전히 우연이나 운명, 또는 신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이제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결말은 누구도 몰라. 폴리팩스 부인은 생각했다. 바퀴 달린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안으로 밀려 들어갈 때 보이는 천장을, 그리고 천장이라는 것 자체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243)




지혜롭게 나이들고 싶고 건강하게 나이들고 싶다.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그다지 큰 게 아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다정한 벗들과 함께하고,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일. 특히나 여행에 대해서라면 더 그러한데, 먼 곳에 가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며 '언젠가'로 미루다가는 아예 이루지 못하게 될 확률이 크니까. 시간과 돈이 생겼을 때는 내가 건강과 체력적으로 힘겹게 될지도 모른다. 갈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지금 당장 가서, 조금이라도 그곳을 보고 느끼고 오자고, 그런 자세로 살고 있다. 나중에 훨씬 더 나이들었을 때, '이제는 가고싶은데 갈 체력이 안되네' 같은 말을 하며 가지 못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하면서 살고 싶다.




폴리팩스 부인이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CIA 본부로 들어가 '나 스파이 하고싶어!' 라고 말하고 또 정말 스파이를 하게 되는 이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좀 더 즐겁게 살고픈 욕망을 느꼈다. 나중에, 아주아주 나이가 많아졌을 때, '사실 이런거 하고 싶었는데' 같은 거 생각하며 젊은 날을 아쉬워하지 않아야지. 지금 당장은 알라디너 몇 명과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하는 거 진짜 너무 좋고!! 덕분에 계속해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더 들면 글자 읽기도 힘들어질 때가 올텐데, 지금 부지런히 열심히 읽어둘거다. 글도 열심히 열심히 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실거야. 요가도 놓지 말아야지. 그래야 좀 더 오래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테니까. 가고싶어지면 휙- 하고 먼 데로 날아갈거다. 지금은 그게 가능하고, 가능할 때 해야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좋아한다는 말도 아주 수시로 해야지. 나중에 '그 때 내가 좋아했었는데..'같은 거 후회하지 않게끔.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하며 그 순간순간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의 이야기라니, 정말 좋다.


˝어쨌든 당신에 CIA 쪽에도 쓸 만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겠나? 능력 있는 젊은이 대신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 말이야. 좀 신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난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어. 그런 각오가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P23

폴리팩스 부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필사적으로 다리를 절며 뛰어가는 패럴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필사적인, 가엾은 인생이라니. 인간이란 어쩌면 이렇게 끈질기게 목숨을 붙들고 매달리는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일을 해내는지! 그러니까, 몸뚱이에 붙은 목숨 말이다. 영혼의 목숨을 부지하기는 훨씬 까다롭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P317

지니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알 수 없는 것에 도박을 거는 일이지요.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우리는 인간인 거고요. 우리에겐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인생이란 지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방향도, 경로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니까요.˝- P352

문득 요란한 핏빛을 띤 붉은 해가 떠올라 그들이 지나온 절벽을 환히 밝혔다. 안개로 어둑했던 풍경이 선명해졌다.
˝새로운 아침이구나!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잠시 동안 부인은 인생이 얼마나 마법 같은지, 덧없는지, 그리고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부인은 새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멀리 눈 덮인 산꼭대기가 보였다. 그보다 가까이 있는 절벽은 짙은 보랏빛 그늘이 드리워진 황갈색이었다. 조금 전까지 회색으로 얼룩덜룩하던 안개는 빛을 받아 진주처럼 반짝이는 부드러운 연분홍색 구름이 되었다. 시원한 공기에서는 축축한 흙과 젖은 풀 냄새가 났다. 그들이 탄 배를 지나쳐 흐르는 강물에는 하늘과 태양과 강변의 모습이 모자이크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폴리팩스 부인의 마음속에서 거의 신비스럽기까지 한 어떤 감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아주 짜릿한 자유의 감각이었다. - P359

그 순간, 마치 세상의 모든 법칙과 관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삶의 한가운데 서서 삶의 박동을 느꼈다. 부인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에서 새벽을 맞았다.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여태 살아 있었다. 놀라움과 감사, 피로와 허기가 뒤섞였고, 위험 속에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결코 충족되지 않는 열망이 뒤섞였다.-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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