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번역 제목으로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인데, 나는 이걸 개봉당시 친구와 극장에 가 보았다. 2011년 영화라고 되어있는 걸 보니, 내 기억만큼 오래전은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그 당시에 첫장면부터 깔깔 웃으면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다시보니 도무지 웃을 수 없고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첫장면이더라.



'애니'는 운영하던 빵집이 장사가 잘 안되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것은 자기에게 실패였다. 가끔 그 빵집 앞을 지나면서 문닫은 빵집을 보고 시무룩해한다. 가끔 만나는 남자는 자신을 단순히 섹스 파트너로만 여긴다. 구속은 싫다, 자유로운 관계가 좋다고 그가 번번이 말하는 바람에 애니 역시 그에게 뜻깊은 관계가 되자고 말하지 못한다. 그저 '나도 그래' 라고 억지로 동의할 뿐. 사실 애니는 그 남자를 만나고나서 한 번도 기분 좋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섹시하고 귀여운 남자라고 그를 얘기한다. 룸메이트는 월세날이 다가오자 애니에게 월세로 압박을 주고, 애니의 엄마는 애니에게 엄마 집에 와 같이 살자고 하지만 애니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차에 단짝 친구인 '마야'가 애인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다며 결혼소식을 전한다. 애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 엉망인 것 같은 이 때에 가장 친한 친구마저 결혼하게 된다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온전히 기쁜 마음이 아니다.


애니는 엄마의 소개로 보석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약혼 반지를 사러 오는 남녀에게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거라 말해 반지 파는데에 관심이 없고, 우정반지를 사러 온 소녀에게는 영원한 우정도 없다며 손님과 싸운다. 직업을 잃는 것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설상가상으로, 마야의 결혼식에 같이 들러리 서기로 한 '헬렌'이 아주 눈엣가시다. 자신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다 가로채고, 게다가 자신의 단짝친구인 '마야'와 자신보다 더 친하다고 드러낸다. 헬렌은 아주 예쁘고, 돈도 많고, 파티에 대한 감각도 탁월하며, 인맥도 대단하다. 뭐가됐든 애니보다 더 나은 걸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애니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렇게 그녀는 질투심과 되는 일도 하나도 없다는 우울감이 폭발해, 결혼을 앞둔 파티에서 행패를 부린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애니의 엄마는 애니에게 누구나 바닥을 칠 때가 있다며 애니에게 애기했었다. 너도 아마 지금이 바닥일거라고, 그러니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애니는 그 때 자신이 바닥을 친 게 아니라고 말햇었다. 그러나 친구의 결혼파티까지 망친 이상 자신이 바닥을 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정하게 대해줬던 남자에게는 이미 실망감을 안겨준 터다. 섹스파트너에게 혹시나 싶어 결혼식 같이갈래 물었지만 거절당했고. 게다가 섹스파트너는 나중에 애니에게 '세번째 여자' 라고 하질 않나. 그렇게 애니는 친구도 잃고, 직업도 잃고, 월세를 못내 룸메로부터도 쫓겨나 엄마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바닥을 치고 자존감을 잃었다.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자존감을 잃은건지, 자존감을 잃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건지. 애니는 확실히 바닥을 쳤고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었고 그리고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 취급했다. 보면서 힘들었던 건 바로 이부분에서였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사람은, 우선 본인이 가장 힘들겠지만, 주변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거다. 매사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니 보석을 팔면서도 비아냥대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친구랑 더 친하다는 생각에 파티를 엉망으로 만드니까. 워낙 자존감이 낮으니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자까지도 몰아내고,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남자를 올려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주변 사람까지도 다 힘들게 만드는 거다.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거, 나는 그보다 더한 대접을 받을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람을 대우해주겠는가.


2011년에 내가 이 영화를 왜 재미있게 봤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다시 보았을 때는, '애니를 내 친구로 두고 싶지 않다'고 열번쯤 생각했다. 저렇게 매사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없이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차 가는 곳마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자존감 낮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너무 피곤한 사람이었다. 아, 정말 싫다, 보기가 너무 괴로워. 부자 여자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도 괴로웠고, 친구를 잃을까봐 전정긍긍하는 것도 괴로웠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섹파에게 당당하지 못한 것도 너무 괴로웠다. 섹파는 섹스를 끝내고난 후 '이제 가' 라고 말한다. 그러면 애니는 옷을 챙겨입고 자신의 집으로 가야해. 부르면 달려가고 가라 하면 얌전히 돌아서 가는.. 아,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미치겠어. 나는 진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닥으로 깔고 가는 사람을 보는 게 너무 스트레스야.



모든 걸 망쳐서 집 소파에 앉아 침울하게 앉아 있는 애니에게, 놀랍게도, 정말이지 놀라운 존재 '메건(멜리사 맥카시)'이 찾아온다. 내가 이 영화에 멜리사 맥카시 나온다고 해서 봤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건 역시 마야의 결혼식 들러리라 알게된 사람에 불과한데, 이 사람이 글쎄 뜻밖에도 애니를 찾아온 거다. 그리고는 신세 한탄하는 애니에게 말한다.


"이거봐, 나는 여기 너에게 친구로 찾아왔는데 너는 친구가 없다고 말하네? "


이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툭툭, 귀찮게 애니를 건드린다. 그리고 때리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폭력이라기 보다는 탁탁 치는 강도인데, 그러면서 계속 그녀에게 말한다.


"난 인생이야. 나는 니 인생이지. 이렇게 너를 때리는데 가만있을거야?"


애니는 그녀가 때리는 걸 피하면서 하지말라고 하지말라고 자꾸만 말한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며 맞기만 하다가, 드디어 그녀를 한 대 때린다. 그만하라면서. 그러자 인생, 그러니까 메건은, 아직 그렇게까지 나빠진 건 아니었다며 때리기를 멈춘다. 결국 애니는 다정한 남자와도 화해를 시도하고, 섹파를 버리고, 친구와 우정도 되찾고....



나는 메건의 등장이, 메건의 존재가 너무 놀라웠다. 일전에도 《아메리칸 셰프》란 영화를 보면서 조연으로 등장한 '스칼렛 요한슨'의 존재에 놀라워했었는데, 이건 그런 종류의 놀라움이었다.



애니에게 다시 기운나게 한 존재, 지금 인생이 널 괴롭히고 있다고 주저앉을 거냐고 말한 존재, 그렇게 다시 기운 내서 싸우게 한 존재가 애니의 절친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고 애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존재였던 거다. 갑자기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에게 나타나 '내가 니 인생인데 이렇게 맞고만 있을거야?' 라고 물으며 그녀를 다시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도록 해준 존재가 당연히 그럴 수있을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애니는 마야와 화해하고 다시 마야와 절친이 될것이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미안하다며, 여자친구가 없었던 말야, 했던 헬렌과도 투닥거리며 사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메건은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메건은 애니 인생의 이 시점에 갑자기 휙- 들어와서는 아주 강한 한 방을 선사해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각인시키고 그리고 다시 슝- 떠나버리는 거다. 와- 이런 존재가 있다면, 그러니까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렇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나타난다면, 그러면 그 인생이 그렇게까지 바닥을 친 건 아니지 않나. 바닥에 오래 있지 않게끔 운명이 한 일일지도 모르고. 정말이지 굉장히 강한 존재였다. 내내 비호감에 괴짜였던 메건은 그 순간만큼은 대단한 존재였다. 앞으로 애니는 메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위에 언급했지만, 영원한 사랑은 없고 영원한 우정도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변하게 되면서 단짝 친구는 안단짝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영원한 우정이 있을까? 영원한 사랑은? 이라고 내가 나에게 물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영원한 우정..뭘까? 영원한 사랑..뭘까?



그렇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등장하는 뜻밖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치고 빠지지만, 그 한 방이 엄청 중요한 사람. 이 영화에서는 메건이, 멜리사 맥카시가 그랬다. 되게 독특한 인물이야 진짜. 그렇지만 마지막 섹스신이 너무 비호감... 미안해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 그렇지만 섹스는 굉장히 프라이빗 한 것이고, 당신은 애니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니, 우정은 또 값진 것이고...




자존감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누구나 인생에 바닥을 칠 수 있듯이 나 역시 그럴 수 있다. 바닥.. 까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본 적도 있고. 그럴 때 내가 한 건 '어떻게든 올라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할까' 였다. 어쩌면 나는 애니만큼 바닥을 친 건 아니라서 이게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일, 사랑, 우정 모든 걸 잃고 어떻게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도와줄런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청소나 정리정돈을 하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청소나 정리정돈이 더 나은 기분이 들게 한다는 걸 믿는다. 그보다 더 믿는 건 하루 세 끼 잘 챙겨먹는 것 그리고 매일 운동을 하는 거다. 저만큼이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이 모든 걸 하기가 힘들겠지만, 하다못해 운동이라도 하면, 가급적 바깥으로 나가서 하는 운동이라면 내 자존감이 나를 두드려패는 지경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말하면 우습긴 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2-3회 나가는 요가가 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요가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준다. 이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와는 좀 다르다. 여전히 나는 요가를 못하고 나아지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여 순환을 돕고 근육을 괴롭힌다는 것은, 또르르 땀을 흘린다는 것은, 확실히 더 나은 기분을 갖게 한다.



자기애는 자존감이 아니다. 지나친 자기애는 오히려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지나친 자기애는 자기연민에 갇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자존감은 아닌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감히 인생이 나를 엎어치기 하려고 할 때, 애시당초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어가 가능하게 돕는다. 내 책상은 여전히 지저분하지만 ㅋㅋㅋㅋㅋㅋ 곧 정리할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봤자 금세 또 난장 되겠지만.



잘 먹자.

잘 먹고, 바깥에 나가 운동도 좀 하고, 바람과 빛과 볕을 몸으로 받자.

그래서 섹스도 못하는 섹파따위, 거칠게 차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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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려움이 멈추게 하는 것은 삶
    from 마지막 키스 2023-05-08 09:14 
    같이 읽는 친구중 한 명은 이 책을 종교서적을 읽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친구의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교훈적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리 정희진 쌤이라도 …' 가 되었다. 아무리 정희진 쌤이 추천한 책이라도 그렇지, 나랑 안 맞을 수 있지. 이 책을 읽는 일이 고될 것 같았다. 길게 느껴질 것 같았고 그래서 빨리 진도를 빼고 싶었다. 지루하고 교훈적이고, 사실 읽기 전에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단발머리 2019-07-1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 나도 모르게.....
아멘!!하고 있네요^^

다락방 2019-07-10 14:38   좋아요 1 | URL
아멘까지야!! ㅎㅎㅎㅎ

우리 건강하게 지내요, 단발머리님. 서로에게 다정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면서요.
:)

심술 2019-07-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잘 받았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7-11 15:34   좋아요 0 | URL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