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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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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학년도 대입제도 변경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이제는 냉소만 흘린다. 정치권과 교육부,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들의 태도는 국민 대다수의 희망과 정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듯 보인다. 물론 정서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되겠지만, 교육 문제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것이 그리 힘든가. 정치 논리와 대학들의 안이한 기득권 싸움은 혐오스럽다. 냉소와 비판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지만 사실 제도권 교육의 환경 변화를 공평한 경쟁의 장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부르디외의 이론과 실천은 이런 한국적 현실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림 지식 총서 76권 홍성민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이론과 현실의 비교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성과와 사상이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비교적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프랑스 사람들조차의 그의 불어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저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저작과 논문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들만을 골라 소개한 책이다. 그것은 아비투스, 상징적 폭력, 장이론으로 요약되어 있다.

  부르디외의 학문과 사상은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권력지배에 대한 저항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치를 지닌다. 모든 이론과 사상은 학문과 이성의 발달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현실의 적용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부르디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부르주아 출신의 부르디외가 프랑스 사회에서 느꼈던 모순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며 마르크스의 계급과 베버의 계층의 변증법적 지향점들을 정확히 제안하고 있는 탁월함을 찾아볼 수 있다.

  “학문의 임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들추어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투쟁의 무기와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점이다. (본문 11페이지)”는 말이 지식인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 현재 우리들 삶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겠다. 우리가 지닌 사상과 계급의식이 현실 정치와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지 아픈 성찰의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상징 자본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고 말한다. 즉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의 중요성을 일깨워 무의식적 선택과 개인적 취향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상징적 자본의 합법적 독점체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부르디외는 학교 제도를 통해 설명한다. 교사들의 성향과 교육 방법은 그들의 선발과정들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평가하는 또하나의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적 위계를 규정하는 신분적 질서는 학력이나 가정의 배경으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나아가 경제적 잉여의 왜곡된 배분으로 이어진다. (본문 42페이지)”

  대입 제도의 논술 문제에 대한 적확한 답이 여기 있다. 서울대의 사회 경제적 헤게모니는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며 그것은 불공정한 평가 방식으로 문제가 확대된다.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논술 문제를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제도권의 정상적인 학교 교과 교육과정을 통해 해결하기 힘든 방식의 평가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대학들의 단순무식한 논리와는 달리 문화 경제 자본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일종의 상징적 폭력인 것이다. 기여입학제의 문제는 수그러들지 않고 입시철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성민의 부르디외의 논의를 받아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는다.

  부르디외가 진단한 프랑스 사회 문제가 학교제도를 통한 신분적 위계질서의 재생산이었다면, 필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의 교육 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 이외에 서구의 문화적 강압효과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다. (본문 55페이지) …… 부르디외의 문화 분석이나 교육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첫째, 교육의 변화가 제도의 개선에만 머물러서는 충분하지 못하며, 학교체제를 둘러싼 기타의 사회적 장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제도의 개선은 언제나 개인적인 심성의 변화와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57페이지)

  논의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교 문제가 단순히 입시제도의 변화 문제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홍성민의 말처럼 학교를 둘러싼 사회적 장과 함께 개인적 심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전체 구성원들의 고민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울림을 가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과 사상은 ‘실천’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탁월한 사상과 관점이라도 발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면 지적 유희나 학문의 영역으로만 남겨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와의 만남은 소중하다. 국가와 교육제도 만큼은 개인들의 평등하고 공정한 게임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리라. 그 의무를 위해 신자유주의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말년의 부르디외는 실천하는 지식인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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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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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가치나 사람들의 성향을 바꾸는 일은 무엇보다 힘들다. 오랜 시간동안 몸에 배어버린 관습적 사고와 행동은 타성이 되어 버린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의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종교와 각종 단체 등 수없이 많은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우리와 다른 그들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심각한 민족내의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을 겪었고 그로 인한 분단과 고통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거대 담론으로 통일과 북핵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과 성향,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굳어져버린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그것은 계급을 재생산하고 재생산된 계급은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다. 각종 불법과 유착 관계가 만연하고 부정이 판을 치며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좌와 우의 대립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을 사회 통합과 사회 복지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억눌러 왔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의 저자 하승우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개념이 겉돌고 한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접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처음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들고 우리 사회에 진입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까? 집단간의 이익과 갈등이 봉합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을까? ‘中庸’, ‘和而不同’의 개념조차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좋은 전통과 개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낯설고 어색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실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승우는 이 개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적절하게 수용하고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한계까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탈러런스와 달리 똘레랑스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한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39페이지)


  미국에서 사용되는 탈러런스(tolerance)라는 개념은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유럽 사회의 체제와 틀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똘레랑스’였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또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 처절하고 자생적인 과정에서 사회 체제와 개인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공동선의 개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유행처럼 번지고 지나가버린 쉽게 잊혀져 버리는 특성상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겨레 신문의 ‘왜냐면’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과 대화를 시도하고 공론의 장으로 갈들을 끌어내기 위한 홍세화의 노력은 조금씩이지만 우리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몇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거나 한 사회의 윤리나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작은 노력과 개인적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똘레랑스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평등하지 않은 개인간의 혹은 집단간의 똘레랑스는 의미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차이는 평등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취향으로 변했다. 사회를 바꾸는 참여보다 자기의 취향을 만족시킬 취미가 더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를 침범당하면 간섭이라 여기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96페이지)”는 저자의 지적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는 참여와 실천으로 촉발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어떤 개념이든 용어이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여전히 자발성의 문제로 남는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 개념위에 서게 되는 전제 조건으로 아프게 와 닿는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 이것이 왜 똘레랑스라는 개념에서 중요한가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 (72페이지)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늘 자발적 개인의 참여와 실천, 그리고 연대의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읽은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그렇게 소화되버렸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저자는 그 한계까지 정확하게 짚어낸다. “똘레랑스의 가장 큰 한계로, 체제가 만든 규칙을 깨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83페이지)” 한계라는 표현은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체제가 만든 규칙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큰 틀의 체제까지도 변화가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논의하는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개념적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념을 넘어 현실과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서 맴돌며 이론의 문제로 남겨지는 껍데기 개념은 가라! 학문적 개념보다 논의의 초점과 과정들이 현실에 맞춰지고 그것들이 현실속에 녹아드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를 열고 이기주의를 넘어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 노력하는 사회적 연대만이 살 길이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실천의 문제로 나에게 이 개념은 남겨진다.



200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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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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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名不虛傳).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설명이 필요없는 책이다.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책의 특징은 보편성과 항구성이나 세월이 흘러도 보편적 진실을 담아내고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데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빌려 뒷부분을(5, 6부쯤 되는 것 같다) 읽지 못하고 돌려준 책이다. 누구에게나 사회와 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했던 시절이 있을 것이고 스무 살의 나를 눈뜨게 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기 전에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 주문한 책은 옛 모습 그대로다. 74년 초판이후 개정판이 나오지 않고 그대로 29쇄가 내 손에 들어왔다. 표지도 활자도 오래된 기억처럼 그대로의 모습이다.

  내용상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체계적으로 엮은 것은 아니고 주로 70년부터 73년에 걸쳐 시사 저널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1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를 시작으로 주로 중국과 일본, 베트남을 위시한 아시아의 정치 역학 관계와 군사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5, 6부에서는 몇 편의 수필과 ‘한 ․ 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으로 글을 맺고 있다.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는 말은 책의 서두에서 그의 진심을 나타내는 간접 인용문으로 쓰인다. 기자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고, 비판적 시선과 깨어 있는 정신을 소유했던 선생의 글들은 여전히 오래된 활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회의 공기로서 언론의 역할이 거론될 때마다, 검은돈과 추악한 정치를 연결하는 작금의 언론을 대하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 정경 유착의 고리에 본드 역할을 한 홍석현 중앙일부 사장의 일은 ‘불법 도청’이라는 방법적 범법 행위에 묻혀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이영희 선생의 글이 살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박정희의 서슬 퍼런 군사독재가 언론을 탄압하던 시대의 발언으로 모두를 숙연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한 언론과 정치의 추악한 모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 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는 말은 언론의 진실과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선언이다. 그렇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그 비판이 사회를 건전하게 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여전히 국민에게서 나온다. 인류의 역사가 낡은 관념과 새로운 관념의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는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올해로 해방 60년. 이제야 겨우 친일자 명단이 발표된 미개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만으로도 노무현 정권은 벅찰텐데 노무현은 국민이 잠시 위임해 놓은 대통령의 의무와 권한 5년을 담보로 협상 카드를 내민다. 그의 진정성은 이해가 되지만 방법론은 틀렸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과 의무를 다시 새겨보는 것으로 잔여 임기를 채웠으면 좋겠다. 과거와 같은 억압적, 폭력적 정치 형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줄었으나 ‘언제나 통치자들의 잘못은 대중의 희생으로 끝났기 때문이다.’는 역사의 교훈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통치자의 실수와 잘못은 대중의 고통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산당 모택동과 국민당 장개석의 1, 2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전개 그리고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자위대로 대표되는 그들의 군국주의에 대한 부활과 야망을 우려하고, 방위 예산과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통해 나타난 아시아의 역할론까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선생은 당시 미국방 장관과 일본 수상과의 대화 내용, 의회 회의록 등의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아시아 전체에 미칠 정치, 군사적 역학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 단순한 자료의 제시와 분석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향후 전망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현재 미국과 일본, 중국과 미국, 한일 관계과 한미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당시의 가장 정확한 논리로 읽혀진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되풀이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베트남 전쟁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헐리웃 영화를 통해 미국의 엄살과 고통에 공감하며 살아왔는지 알고는 있는지. F??참전에 따른 병사들의 고통과 베트남 민족에 저지른 죄과는 반성하고 있는지.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고엽제 문제와 현지 한인 2세들의 문제는 어떤가.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인 베트남전의 악목이 21세에 다시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테러 위협 방지 대책을 논하는 관계자들의 모습을 보면 코메디 프로를 보는 듯하다.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전쟁에 참여한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선생은 베트남 전쟁을 하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프랑스 제국주의 ․ 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자신의 직업과 위치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현실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지셨던 이영희 선생이 기자로서 가져야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실의 긍정에 토대를 두는 세계관을 우익‘적’이라고 놓고, 현실의 개선 또는 개혁을 토대로 하는 세계관을 좌익‘적’이라고 하는 용어 사용의 일반개념에 입각해서 기자는 현실긍정적이기보다 현실개혁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기자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생활이 되고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실천하는 진정한 지성인. 우리가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선생의 말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역사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것이며, 우리 모두가 ‘지식인적 자각에 입각한 실천적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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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8-08-0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솔직히 현재 역사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수구도 진보도 웬지 자신만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묘한 생각까지 듭니다.
진짜 나라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너무 솔직한 리영희씨의 글을 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차라리 이순신과 김구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 미군정에 처참하게 운명당하신 김구선생님이 그립기만 합니다.

sceptic 2008-08-10 15:52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건 없지만, 역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더구나 현실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한 두 사람의 의견이나 한 두 권의 책으로 스스로를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조금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넓고 다양한게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현실도 좀 보이고 말씀하신대로 보수도 진보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그 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 혹은 고민이 현실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계속되겠지만요...
 
아나키즘 이야기 - 자유.자치.자연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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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의식과 신념은 하루 아침에 바뀌거나 형성되지 않는다. 가끔 그런 경우를 접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외부의 충격이나 경이로운 삶의 변화를 겪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는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개인의 사유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깊은 연구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지식의 차원이나 이론적 접근 방식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 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 존 레논의 ‘이매진’중에서


  노래 속에 아나키즘으로 가볍게 시작해 보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생각과 이념을 확인하지 않고 살아왔거나 발전된 형태의 주의나 주장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잘못된 편견과 시선으로,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아나키즘’을 거부하지는 않았는지.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이해된다. 폭력적이며 비현실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의 아나키즘에 대해 저자는 하나하나 그 오해와 진실을 풀어나간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주의가 너무 과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파괴되고 있으므로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이라는 생각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다."고 말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이념과 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필연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얘기하는 아나키즘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대에 등장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잘못 이해되어 부정적 이미지와 의미도 모른 채 소외되었던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노래속의 아나키즘을 보여주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들을 해명하며 필요성을 역설하고 기원과 유형을 보여준다. 핵심적인 아나키스트들을 소개하며 핵심 사상들을 정리해 준다. 마지막으로 예술과 교육 측면도 점검하고 있다. 그간 저자가 얼마나 깊이있게 아나키즘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것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태도 변화이다. 삶의 태도와 고정관념에 대한 생각의 변화 말이다. 그냥 그저 그렇게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에 인색했던 나에게 많은 질문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만든 책이다. 평소 피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아나키즘’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준 책이다.

  저자는 아나키즘을 ‘자유 ․ 자치 ․ 자연’이라는 개념의 삼자주의(三自主義) 개념으로 풀어낸다. 이론과 개념 속에 갇혀 관속의 시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아나키즘은 저자에 의해 현실 가능태로 탈바꿈한다. 우리의 삶에 투영된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바꿔나가고 새로운 생활습관과 태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실천 전략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것도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실천 전략들을 저자는 알기 쉽게 설명한다. 역사적 배경과 그간의 논의를 통해 독자들의 생각을 바꾸고 인식의 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저자의 개념은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인간은 그런 모든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치를 해야 자신이 사는 터인 자연에 합치된다. 우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아가 기성의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자유는 당연히 반항과 부정을 내포한다. (본문 47)

  이렇게 당연하고 신선한 이념을 우리는 실천전략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현실속에서 실현되지 않거나 막연한 관념 속에 묻힌 이론들은 공허하다. 아나키즘을 실천한 대표적 아나키스 중에서 쿠닌에 대해 저자는 “아나키스트는 항상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대결의 가장 철저한 모범으로서 그들은 평생을 두고 원칙에 충실하고자 집요하게 싸웠고 진지?정신적 고투를 경험했으며 철저하게 결단했다고 했다. 그 가장 순수한 원형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그는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였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를 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사상도 실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하며 타협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일이 어려운가? 사회적 합의와 개인적 실천이 부족한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직업병처럼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렇다. 상징자본과 상징권력으로서 계급을 재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나 조작은 교육자의 우월성과 피교육자의 의존성으로 성립되는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해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와 조작의 배제는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는 양자의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다. (본문 267)

  성인은 청소년 자녀를 여전히 아이로 취급하거나 부당한 권위를 강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Godwin, 1965:118) (본문 267)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유롭게 놀게 하고, 즐겁게 말하며 읽고 쓰게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권위를 버리고 학생과 평등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교사의 독재는 사회의 독재, 정치의 독재를 허용하는 기반이다. 학교의 비민주화는 사회와 국가 전제의 첩경이다. (본문 285)

모든 아나키스트가 교사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교사는 아나키스트여야 한다.


200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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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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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건강은 다양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제각각 자기 목소리와 색깔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은 사회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가치들이 공존한다고 해서 구색을 갖추듯 쇼윈도우의 상품처럼 다양하게 진열된다고 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이념들이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가치와 신념대로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규항이 들으면 무척 화를 낼 일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B급 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이 <나는 왜 불온한가>의 머리말에 인용한, 내가 좋아하는 노신 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길은 언젠가 넓고 탄탄한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을 걷고 싶으나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에 섞여 걷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길을 김규항은 묵묵히 걸으며 소리 높혀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 길이 사람 사는 길이라고, 이 길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는 김규항과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달리 부를만한 이름도 없는 셈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때문에 잘못 규정된 이념적 지향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의 생각은 사상이나 이념이라는 거창한 말이 어울리는 않는다. 그의 삶은 혁명가의 그것처럼 화려하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활의 발견’이다. 소소한 생활속에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웃과 나누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모습은 아주 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인가. 김규항은 말한다. 자본주의 물들어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온몸을 맡기고 치열한 경쟁과 사람냄새 나지 않는 일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그의 글을 잘못읽지 않았다면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 대해 당당하며 삶의 태도가 당당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한 그의 모습은 물론 군자나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다. 흔히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과 그가 가진 생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글쓰는 것조차 지식인의 것이라서 대단히 힘들다는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고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운동을 청산한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점들을 포함한)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본문 49페이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김규항의 이 책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와 씨네21, 노동자의 힘, 보그 등 잡지와 신문에 연재한 그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마지막에 2004년과 2005년 일기를 덧붙이고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과 생활과 생각의 접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아주 인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논평자들과 밤의 주둥아리들(네티즌)을 혐오하며 활동가를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 말하는 그의 말에 진진하게 경청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생활이 곧 그의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는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어떤 거창한 웅변이나 화려한 수사보다도 더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의 이념과 가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을 들어보자.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본문 213페이지)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러 책 속에서 만난 체 게바라나 ‘아리랑’에서 만난 김산을 나는 흠모한다. 이름없는 우리 생활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라고 비웃은 적은 없지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많지 않다. 작은 실천과 노력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킨다는 평소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한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항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구독할 예정이다.

  우리는 인류가 생긴 이래 최악의 어른들이다. 우리 전엔, 제 아무리 탐욕스런 장사치들도 제 아이에게 동무를 경쟁자라 가르치거나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그렇게 가르친다. (본문 281페이지)

  누구나 말한다.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고민과 실천은 영원한 숙제가 되겠지만 내겐 전혀 불온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김규항의 글들이 아프게 다가왔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재생지로 만들어 두툼하지만 가벼운 그의 책이 또다른 방식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본문 251)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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