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회의 건강은 다양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제각각 자기 목소리와 색깔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은 사회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가치들이 공존한다고 해서 구색을 갖추듯 쇼윈도우의 상품처럼 다양하게 진열된다고 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이념들이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가치와 신념대로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규항이 들으면 무척 화를 낼 일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B급 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이 <나는 왜 불온한가>의 머리말에 인용한, 내가 좋아하는 노신 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길은 언젠가 넓고 탄탄한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을 걷고 싶으나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에 섞여 걷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길을 김규항은 묵묵히 걸으며 소리 높혀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 길이 사람 사는 길이라고, 이 길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는 김규항과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달리 부를만한 이름도 없는 셈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때문에 잘못 규정된 이념적 지향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의 생각은 사상이나 이념이라는 거창한 말이 어울리는 않는다. 그의 삶은 혁명가의 그것처럼 화려하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활의 발견’이다. 소소한 생활속에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웃과 나누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모습은 아주 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인가. 김규항은 말한다. 자본주의 물들어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온몸을 맡기고 치열한 경쟁과 사람냄새 나지 않는 일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그의 글을 잘못읽지 않았다면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 대해 당당하며 삶의 태도가 당당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한 그의 모습은 물론 군자나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다. 흔히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과 그가 가진 생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글쓰는 것조차 지식인의 것이라서 대단히 힘들다는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고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운동을 청산한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점들을 포함한)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본문 49페이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김규항의 이 책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와 씨네21, 노동자의 힘, 보그 등 잡지와 신문에 연재한 그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마지막에 2004년과 2005년 일기를 덧붙이고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과 생활과 생각의 접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아주 인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논평자들과 밤의 주둥아리들(네티즌)을 혐오하며 활동가를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 말하는 그의 말에 진진하게 경청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생활이 곧 그의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는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어떤 거창한 웅변이나 화려한 수사보다도 더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의 이념과 가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을 들어보자.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본문 213페이지)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러 책 속에서 만난 체 게바라나 ‘아리랑’에서 만난 김산을 나는 흠모한다. 이름없는 우리 생활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라고 비웃은 적은 없지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많지 않다. 작은 실천과 노력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킨다는 평소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한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항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구독할 예정이다.

  우리는 인류가 생긴 이래 최악의 어른들이다. 우리 전엔, 제 아무리 탐욕스런 장사치들도 제 아이에게 동무를 경쟁자라 가르치거나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그렇게 가르친다. (본문 281페이지)

  누구나 말한다.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고민과 실천은 영원한 숙제가 되겠지만 내겐 전혀 불온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김규항의 글들이 아프게 다가왔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재생지로 만들어 두툼하지만 가벼운 그의 책이 또다른 방식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본문 251)


20051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