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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이야기 - 자유.자치.자연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의 의식과 신념은 하루 아침에 바뀌거나 형성되지 않는다. 가끔 그런 경우를 접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외부의 충격이나 경이로운 삶의 변화를 겪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는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개인의 사유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깊은 연구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지식의 차원이나 이론적 접근 방식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 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 존 레논의 ‘이매진’중에서
노래 속에 아나키즘으로 가볍게 시작해 보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생각과 이념을 확인하지 않고 살아왔거나 발전된 형태의 주의나 주장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잘못된 편견과 시선으로,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아나키즘’을 거부하지는 않았는지.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이해된다. 폭력적이며 비현실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의 아나키즘에 대해 저자는 하나하나 그 오해와 진실을 풀어나간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주의가 너무 과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파괴되고 있으므로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이라는 생각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다."고 말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이념과 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필연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얘기하는 아나키즘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대에 등장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잘못 이해되어 부정적 이미지와 의미도 모른 채 소외되었던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노래속의 아나키즘을 보여주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들을 해명하며 필요성을 역설하고 기원과 유형을 보여준다. 핵심적인 아나키스트들을 소개하며 핵심 사상들을 정리해 준다. 마지막으로 예술과 교육 측면도 점검하고 있다. 그간 저자가 얼마나 깊이있게 아나키즘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것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태도 변화이다. 삶의 태도와 고정관념에 대한 생각의 변화 말이다. 그냥 그저 그렇게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에 인색했던 나에게 많은 질문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만든 책이다. 평소 피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아나키즘’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준 책이다.
저자는 아나키즘을 ‘자유 ․ 자치 ․ 자연’이라는 개념의 삼자주의(三自主義) 개념으로 풀어낸다. 이론과 개념 속에 갇혀 관속의 시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아나키즘은 저자에 의해 현실 가능태로 탈바꿈한다. 우리의 삶에 투영된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바꿔나가고 새로운 생활습관과 태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실천 전략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것도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실천 전략들을 저자는 알기 쉽게 설명한다. 역사적 배경과 그간의 논의를 통해 독자들의 생각을 바꾸고 인식의 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저자의 개념은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인간은 그런 모든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치를 해야 자신이 사는 터인 자연에 합치된다. 우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아가 기성의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자유는 당연히 반항과 부정을 내포한다. (본문 47)
이렇게 당연하고 신선한 이념을 우리는 실천전략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현실속에서 실현되지 않거나 막연한 관념 속에 묻힌 이론들은 공허하다. 아나키즘을 실천한 대표적 아나키스 중에서 쿠닌에 대해 저자는 “아나키스트는 항상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대결의 가장 철저한 모범으로서 그들은 평생을 두고 원칙에 충실하고자 집요하게 싸웠고 진지?정신적 고투를 경험했으며 철저하게 결단했다고 했다. 그 가장 순수한 원형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그는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였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를 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사상도 실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하며 타협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일이 어려운가? 사회적 합의와 개인적 실천이 부족한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직업병처럼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렇다. 상징자본과 상징권력으로서 계급을 재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나 조작은 교육자의 우월성과 피교육자의 의존성으로 성립되는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해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와 조작의 배제는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는 양자의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다. (본문 267)
성인은 청소년 자녀를 여전히 아이로 취급하거나 부당한 권위를 강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Godwin, 1965:118) (본문 267)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유롭게 놀게 하고, 즐겁게 말하며 읽고 쓰게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권위를 버리고 학생과 평등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교사의 독재는 사회의 독재, 정치의 독재를 허용하는 기반이다. 학교의 비민주화는 사회와 국가 전제의 첩경이다. (본문 285)
모든 아나키스트가 교사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교사는 아나키스트여야 한다.
2005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