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면 꼭 역자의 후기를 읽는다. 번역 과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원작 자체에 대한 소감까지. 숨어 있는 화자는 작품의 뒤안의 또 다른 등장인물 같다. 번역은 대단히 민감하고 미묘한 작업이다. 어떤 번역가의 직역이, 또 어떤 소설가의 의역이 때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번역'의 한계와 이상의 철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가능한 시점까지 여전히 논란이 된다는 것의 방증이다.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때로 감정의 층위까지 넘나들어야 하는 일이라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것을 저들도 비슷한 결로 느낀다는 보장이 없고, 저들이 울고 웃는 것에 우리도 감응하리라는 법이 없다. 이 자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응축되는 지점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장자리에서 번역은 때로 방황한다.

 

 

 

 

저자 김남주는 주로 프랑스 문학을 번역해 왔다. 이 책은 그녀가 번역한 책들에 덧붙인 옮긴이의 말이 모인 것이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부터 아멜리 노통브, 로맹 가리, 가즈오 이시구로 등 그녀는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녀가 세상에 내어 놓기 전에 독대한 작가들의 원작 자체에 대한 솔직한 감상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번역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번역가의 성실한 독서의 여정에 대한 독자들의 초대로 보여진다.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부지런히 읽으며 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수시로 월경하는 이가 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 삶에 대한 이야기는 끌리는 옷자락처럼 여운이오래 남는다. 군데 군데 인용되는 원작의 내용은 그 어느 홍보 문구보다 그 작품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을 동하게 한다. 그녀의 책에서 또다른 독서목록을 건져 올린다. 찾아 보니 절판된 것이 많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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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7-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저도 나의 프랑스식 서재 받았어요.
아직 안 읽었는데 읽고 페이퍼 남겨야 겠어요.
이참에 김남주의 번역 문체에 대해 관심 좀 가지려구요.
제 취향이길 바라봅니다.^^*

blanca 2013-07-04 20:47   좋아요 0 | URL
저는 김남주 씨의 번역으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었어요. 번역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읽은 책이 아니라 번역가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색깔을 미처 몰랐다는 게 좀 아쉽더라고요.
 
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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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물아물 춤추는 초여름 오후입니다. 훈풍이라는 말이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정말 아름다운 말이 많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든 봉지가 차락차락 울립니다. 봉지 안에는 갓 뽑아낸 우무채가 들어 있습니다.

 -p.5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

이제 본격적인 한여름을 앞두고 끈적이는 습기와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불쾌지수가 마구 올라가는 아침에 혹은 저녁에

이런 청량한 초여름에 물꼬를 트는 이야기는 청량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친절한 경어체로 독자를 맞이한다. 어떤 이야기일까.

남자는 게다가 일본에 체류 중인 오십 대의 미국인 강사다. 그는 장성한 남매를 미국에 두고 아내와는 별거 중인 남자다. 가족들과는 1년에 한 번 정도 재회. 그리고 그의 방에는 해가 잘 들지 않는다. 그러니 한낮인데도 어두운 방이다.

 

상대 여자는.

언덕 위의 군함 같은 하얀 집에 아이 없이 사업가 남편과 살고 있는 전업 주부 미야코.

그녀는 아주 착실한 살림꾼이다.

종일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매일 매일 새로운 밥을 짓고 때로 이웃집 아이를 돌봐주고 하는.

 

둘은 같은 동네 주민으로 함께 산책을 다니게 된다.

존스가 '필드 워크'라 명명한 그 기묘한 여정에서 미야코는 무심코 들었던 예쁜 새소리가 박새 소리임을 알게 되고 유치원떄 오렌지반이었다는 것, 남자는 초등학교 때 너드였단 것을 서로 고백한다.

불륜일까? 동네 이곳저곳의 스쳐 지나던 풍경이 남녀의 동행으로 더 풍부하고 사랑스럽게 변모하고

여자는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여자의 죄책감을 남자는 '자의식'으로 수정하여 가르쳐준다.

미야코는 더이상 집안에 갇혀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작은 새 같은 귀여운 존재로 남아 있지 않는다.

어쩌면 인형의 집에서의 탈출 같은 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에쿠니 가오리의 그 간명하고 청랑한 언어로 투명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로 물빛 같은 색채를 띤다.

 

황금색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여기저기에서 한잎 두잎 떨어져 공중을 나는, 12월의 오후입니다. 겨울 채비, 라는 단어가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흥미로운 말이 정말 많습니다. 어깨에 짊어지듯이 들고 가는 양복-방금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길입니다-에 덮인 비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냅니다.

-p.239

 

 

초여름에 우무채 봉지를 들고 거리를 걸었던 남자가 이제는 '겨울 채비'라는 말을 떠올리며 세탁소에서 양복을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어느새 저문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반년 남짓의 기간을 거치며 여러 색채로 변모하지만 그 관계 자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닌 것같다.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작은 새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했던 여자는 결국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과도 소원해지지만 '한낮인데 어두운 방'에서 만났던 남녀는 어둑신한 결말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남자는 작은 새 같았던 여자와 만나 행복했고 여자는 남편과의 관계가 지녔던 그 얄팍함을 간파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에 아픈 만족감을 가진다.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풍경은 다시 흐른다.

나이 든 어른들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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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이 다가오는.. 비 오는 날 이 시간에
blanca님의 청량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3-07-03 12:4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더 근사합니다.^^

안녕미미앤 2013-07-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만족감' 이라.. 아픈 만족감.... 아픈 만족감..
내공이 있는 블로그들을 만나면 따뜻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요.. 고마워요 블라카님..

blanca 2013-07-12 16:16   좋아요 0 | URL
안녕미미앤님, 아직 저는 '내공'이 부족합니다. 언제나 그럴 테지만요. 비가 많이 와요. 이런 날 이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한 걸요. 주말 잘 보내세요^^
 

사람은 변한다. 취향도 성격도. 심지어 가치관도. 원래 나에게도 취향이 스릴러, 호러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공수창 감독, 감우성 주연의 <알포인트> 영화를 심야로 보고 일주일 동안 엄마 옆에서 자야 했던 그 일 이후로 모든 호러물을 끊었다. --;; 그 영화가 뭐 그리 무서웠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유독 그 영화의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과 카메라의 시선이 내가 무서워하는 그 지점과 정확히 겹쳤다고랄 수밖에.

 

책도 그렇다. 추리물과 스릴러물은 미야베 미유키 정도만 간신히 읽어내고 되도록 시선을 안 두는 편이다. 본격 장르물이 아니더라도 그런 요소만 가미되면 뭐랄까, 책장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읽고 난 후 잠들기 전의 이런 저런 연상때문에 그리 즐기지 않는다. 겁이 많아서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는 추리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응집력 때문인지 대단히 흡인력 있게 읽혔다. 여러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고도로 치밀하게 무게감 있는 메시지로 응축되고 있었다. 한국소설이 이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지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소설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신작을 많이 기다렸다. 신작이 나오자마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구입했다. 아껴두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중심에 놓인 '개', 그리고 그 '개'와 '인간'의 이야기. 그 '개'는 눈덮인 설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때로 인간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큰 개'이다. 그 '개'가 광막한 대지 대신 창살 안의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사육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들을 묵묵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치열하고 때로 잔인한 '날것'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러니 소심한 나는 잘 견뎌낼 수가 없다. 다 읽어내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금 부끄럽다. 작가의 발전도 시선의 변화도 온전히 잡아낼 수 없으니 아쉽다. 누군가 다 몰입해서 읽고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련다.

 

 

 

 

 

일백 페이지 남짓한 얇은 이 책은 아주 청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본 나라는 딱 두 곳이다. 호주와 일본.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은 아이가 네 살 때 북해도. 아, 쉽지 않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 휴대용 유모차로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안에서 아이와 실랑이하는 일은 얌전한 일본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남사스러웠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이미 사춘기다. 그러니 조금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사촌남매를 데리고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다닌 이야기. 지나친 감상도 딱딱한 가이드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을 잘 포착한 미덕. 언젠가 나도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거라는 미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

 

 

 

 

이런 상큼한 가이드 지도도 군데군데 첨부되어 있어 여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같다. 이 덥고 습한 날, 여행을 꿈꾸는 일은 당연하고 또 너무 먼 일이기도 하다. 어깨선을 넘어버린 이 긴 머리를 귀밑으로 싹둑 잘라버리고 조금 더 시원해지고 조금 더 어려보이기를 꿈꾸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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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7년의 밤]을 재미있게 그래서 빠르게 읽긴 했지만 그 작가의 신작이 기다려진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신작이 나와도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더라고요. 그 때 아마도 구매자평에 '감탄은 있으나 감동은 없다'는 뉘앙스로 썼던것 같아요. 재미있지만 '아 좋구나' 하는 그런 책이 제게는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더 있기를 원하는데, 제가 원하는 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0쪽 남짓 읽었는데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도 읽으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텐데, 혹시라도 안읽어보셨다면 우리 같이 읽어요!!

blanca 2013-06-26 07:03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읽고 계시군요! 저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 정도만 맛보았어요. 일단 주문한 책들 먼저 소화하고 뒤따라 갈게요. 작가의 능력이나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취향'이라는 면에서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책들이 있더라고요.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강박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3-06-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포인트,는 제가 최고로 치는 한국공포물이에요. 너무나 섬뜩하더라구요. 우리안의 공포감, 그것의 실체를 보여주니 더욱이요. 정유정 신작은 칠년의 밤,보다 더 강한가 보군요. 무장하고 봐야겠어요.^^

blanca 2013-06-26 07: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시만 해도 참 획기적인 공포물이었는데. 후속작들은 평가를 못 받았나 보더라고요.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요. 예, 프레이야님의 감상 기다릴게요. 저는 중반까지도 못 읽었어요^^;;

2013-06-2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6-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랫동안 님서재에 댓글을 안 남겼네요.
아마 비로그인으로 글은 읽은 듯한데...
정유정, 7년의 밤 읽으며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화된다는 애기를 들었어요.
우리지역에 사는 분이라 작가초청하려고 출판사랑 통화했지만 작품구상 들어가면 강연은 안한다고...
작년에 3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성사시켜 달라했어요.
올 여름과 가을에도 작가초청할 건수가 많아서 다시 알아봐야겠어요.
신작은 다음달 구매리스트에 넣어둘래요.^^

아~ 나는 혼자서 호러영화 잘 봤어요. 여름이면 꼭 봤는데~ 이젠 그런 영화는 보기 싫어졌어요.ㅋㅋ

blanca 2013-06-28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화 얘기를 들었는데 진척이 있는지 궁금해요. 오호! 순오기님 지역에 사시는군요! 원래 간호사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이제 작품이 나왔으니 아무쪼록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제는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아요.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는 저어하게 되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3-06-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러물에서 시작하여 매끄럽게 정유정으로 스며들었다가 다른 부분에서 매듭을 짓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알 포인트,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이건 1편만), 엑소시스트, 링(대충 지금은 여기까지만)을 보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참 다양한 것 같아요. 감정의 뿌리를 캐내다 보면 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자국이곤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상상을 자극하는 공포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bgm으로 삐걱대는 문 소리만 들려도 혼자 자지러지는 부류-하는데, 블랑카님을 글을 읽으니 정유정이 궁금해집니다.올여름, 한 번 챙겨보아야 겠어요!

blanca 2013-06-28 10:32   좋아요 0 | URL
쟌느님, 혹시 <7년의 밤>을 안 읽으셨다면 강추드려요. 참 잘 썼더라고요.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여기 저기에서 하도 칭찬을 해서 값을 하나 싶었는데 저한테는 아주 놀라운 소설이었어요. 저는 겁이 많아요. 번지점프, 스쿠버다이빙, 이런 것 죽을 때까지 못할 것 같고요. 무서운 것은 거의 눈감고 안 보는 수준이랍니다.--;;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한번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타인에게 저지른다. 시간의 신은 가해자도 피해자의 윤곽도 흐릿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자기 정당화로 스스로를 재빨리 용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며 늙어간다. 그래, 그때는 어렸어, 철이 덜 들었었어, 라고.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는 견디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명확한 진실을 오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는 일은 흔히 '속죄' 그 자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주 뒤늦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찬탄을 받은 이언 매큐언의 이 책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35년 뜨거운 여름날, 탈리스 가의 막내 딸 브리오니는 오빠의 귀향을 환영하기 위하여 무모한 사랑에 빠져 불행해졌던 소녀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는 내용의 희곡을 쓴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처한 외사촌 언니 롤라와 아홉살 쌍둥이 잭슨과 피에로는 뜻하지 않게 이 희곡의 공연을 위하여 차출되게 된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하고자 하는 열망과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녀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신분 차가 나는 청년 로비 터너가 사랑하는 장면을 엿보게 되고 마침 없어진 쌍둥이 형제를 찾으러 다 흩어진 가족들 틈에서 사촌 언니 롤라가 누군가에 강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기만의 왜곡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며 마침내 로비 터너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렇다. 탈리스 가의 집안 일을 거들었던 어머니와 가족을 방치하고 떠난 아버지의 결손 가정에서 자라 브리오니 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의대생을 꿈꾸었던 전도 유망한 청년 로비 너는 두 소녀의 저마다의 굴절된 진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하게 된다. 그녀들은 어렸고 각자의 욕망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채색했다. 로비를 사랑했던 세실리아는 부모와 의절하다시피 하고 로비는 수감되었다 온갖 살육과 잔인함, 방치가 난무하는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평범했던 안온했던 아기자기했던 그 여름날은 삶의 무참한 우연적 칼날 앞에서 난도질 당한다.

 

절규하는 서사 앞에서 이언 매큐언은 담담하게 소설의 역할을 역설한다. 그것 안에는 과장되지 않은 진실의 핵이 강력한 흡인력의 자기장을 떨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이것은 브리오니의 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실수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잊어버린다. '너'도 '나'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 감정을 지녔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폭력, 오해, 전쟁, 기만적인 이기적인 행위 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로비 터너가 전쟁터에서 겪게 되는 그 수많은 처절한 참상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이 끈적끈적한 여름 속에서 한기를 실어온다. 마치 그 현장에서 직접 그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목격하고 겪는 듯했다. 로비가 느끼는 고통, 무감함, 피로, 욕망은 이윽고 독자의 것으로 환치된다. 그것은 이언 매큐언의 위대한 힘이다. 지천에 깔린 죽음을 목격하며 사내들이 아버지가 되기를, 생명을 갖고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루기를 꿈꾸는 그 슬픈 모순의 욕망에 대한 묘사는 히 더 그러하다.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되기를 열망하는 로비 터너의 꿈에 대한 묘사는 처절하리 만치 현실적이고 몽상적이고 아름답다. 됭게르크를 향하여 힘없이 퇴각하는 영국 군인들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우리 인간이 극단적인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되려 생명을 매개로 한 회복과 부활을 꿈꾼다는 그 무력하지만 끈질긴 생존에의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이언 매큐언은 삶에 대한 그 무조건적인 애착의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브리오니는 속죄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브리오니가 아니라 읽는 우리들은. 그녀가 언니처럼 전쟁터의 병사들을 치료하는 간호사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고행의 행군으로 밀어넣는 그 절절한 대목들에서 어쩌면 그녀의 그 실수가 용서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녀가 결국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만나고 로비 터너의 그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뒤로 하고 런던 남부의 지하철역에서 연인들과 헤어지는 장면. 어쩌면 적절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수도 있었을 그 장면은 슬픈 반전을 품고 있다.

 

1999년 런던. 유명한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는 일흔일곱 번째 생일파티를 유년 시절의 대저택에서 맞게 된다. 그곳에는 그 여름날 실종되어 모든 사건의 전초를 만들게 되는 쌍둥이 형제 중 생존한 노인 피에로의 증손자 등이 육십사 년이 지나서야 무산되었던 공연 <아라벨라의 시련>을  연기한다. 그리고 브리오니의 슬픈 고백은 위험한 반전을 예고한다. 그녀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로 헤어져야만 했던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 슬픈 연인은 전쟁통에 죽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브리오니의 고백은 소설을 통하여 그 연인의 결합과 그녀 자신의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것의 복선이기도 했다. 브리오니는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는 슬픈 고백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독자는 철저히 속았다. 그러나 이 기만 행위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속죄'는 드라마틱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쩌면 하나의 허망한 환상일런지도 모른다. 이미 저질러진 행위와 가한 상처는 무뎌질 뿐이지 '무' 아래로 가라앉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이 있다,는 그 사실을 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내 마음의 속살과 같은 여린 부분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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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2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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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4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3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폰4의 홈버튼이 말썽이다. 지긋이 한 네 번 정도 눌러야 가까스로 켜지고 작동된다. 이것을 고치러 수리센터까지 가느냐, 아니면 아예 갈아타느야, 그것이 고민이다. 약정도 다 끝나고 전화비는 이만 원대로 안착했다. 그런데 다시 기기값과 약정 기간의 노예로 최소 2년 이상을 지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잘 되는 스마트폰이면 더더욱 손 안에서 놓기 쉽지 않을 텐데 이런 저런 생각에 망설여진다. 자주 가는 인터넷 까페에는 2G폰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사람들을 만나면 어색한 침묵 대신 각자의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자기 전에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눴던 가족들은 드러누워 스마트폰의 명멸하는 빛을 자장가로 청한다. 전화비는 애초에 사만원 들을 넘은 지 오래다. 자극적인 표제의 뉴스거리들은 터치하자마자 말도 안 되는 낚시글들인 경우가 많고. 그냥 불편한 대로 덜덜거리는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지그시 눌러 달래는 기분으로 얼러서 쓰다 사망하면 생각할까, 고민하다 답도 없어 그냥 치워 버린다.

 

아이가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해 달라고 먼저 얘기했다. '공주양'이라고. 친구들이 너도 나도 다 가져와서 자랑하고 선생님도 읽어 주고 했다고. 다른 장난감은 말리지만 엄마가 책은 되도록 사주려고 당장 같이 검색에 들어갔으나

 

 

 

 

 

 

 

 

 

 

이 시리즈 자체가 다 품절, 절판이다. 교차검색도 해봤지만 절판이 분명하다. 원서라도 찾아보려 영어책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절대 안 된단다. 그렇겠지. ㅋㅋ 혼자서 땀 뻘뻘 흘리며 침대방에 문닫고 들어가더니 웃으며 나온다.

"엄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품절된 책도 다 선물로 줄 수 있어?"

이런 난감한 질문. 아...나는 절판된 책을 구할 재주는 없다.

"으음, 글쎄"

"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그 품절된 시리즈 책 여덟 권 선물로 달라고 기도했어. 그럼 12월달에 유치원에 가져갈거야!"

여덟 권! 품절도 아니고 절판된 책을. 무슨 수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선물을 무슨 수로 구할까? 절판된 책 구하기. 그것도 시리즈 여덟 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절판된 책을 구하는 재주는 없단다, 아이야.--;;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이 책이 재출간되던지 아니면 새로운 것이 너를 유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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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째요. 일단 아쉬운대로

1. 중고알림등록을 신청해둔다.
2. 출판사에 전화해 재고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해본다.
3. 출판사에 전화해 재판을 신청한다.

아, 품절된 책을 구하는 아이가, 제가 다 안타까워요. 구해주고 싶네요. orz

blanca 2013-06-19 13:01   좋아요 0 | URL
아!!! 출판사에 전화를 한번 해 볼까요? 그런 방법이! 너무 고마워요. 다락방님. 삐뚤 빼뚤 품절된 책 목록을 메모지에 적어 놓았더라고요 ㅋㅋ 맞춤법도 틀리면서요. 아이가 이게 '절판'이라는 의미도 모르면서 알라딘에 좌르륵 뜬 목록을 적는 것을 보니 빵 터졌어요.

like 2013-06-1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전 조카 사주려고 찜해놨던 책 품절이 풀렸더라구요! 잊고 있다가 얼마전에 검색했더니 다시 판매^^(오늘 배송예정이에요)
크리스마스까지 책 꼭 구하실 수 있을 거에요.

blanca 2013-06-19 13:02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더 예쁘게 잘 찍어 쫙 떴으면 하는 소망이 생기네요^^아직 육개월이나 남았으니 기다려 볼까요?

꿈꾸는섬 2013-06-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공주님의 로망이 된 책이군요. 우선 급한대로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건 안될까요?

blanca 2013-06-19 13:02   좋아요 0 | URL
저희 집 근처 도서관에는 없어서요. 너무 아쉬워요. 없으니까 애는 더 보고 싶어하고. 집 앞에 큰 도서관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2013-06-1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귀여운 분홍공주^^
산타 할아버지가 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저도 최근 스맛폰 다른 기종으로 바꿨는데 기능이 좋으니 더 손이 가는 경향이 있어요.
영화도 전자책도 그걸로 자꾸 보게되고 아무튼 좋은 만큼 역기능이 있어요.ㅠ 눈도 더 피로해지고ㅠ
요즘 사람들 서로 눈을 쳐다보는 시간보다 각자의 스맛폰을 보기 바쁘니 에효ㅠㅠ
디지털 치매,도 문제구요.

blanca 2013-06-19 13: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스마트폰 바꾸셨어요? 혹시 무엇으로 바꾸셨는지 만족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이런 것 선택하는 것도 너무 괴로워요. 근데 저도 그럴 거에요. 아마 또 중독될 것 같은. 지금 제 폰은 아예 키는데 오래 걸리니 멀리 하게 되는 장점이 있어서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래요. 저도 또 요새 고유명사 생각 안 나는 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레이야 2013-06-21 13:43   좋아요 0 | URL
갤럭시 노트 2에요.
모니터가 좀 크니까 전자책이나 영화 보기에 괜찮네요.^^

icaru 2013-06-1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이를 어째,, 세상에 책은 많은데,,, 딱 원하는 그 책이 없으니 말이죠...
저도 아이폰4 홈버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하는데,,, 아직 갈아탈 생각은 없구요 ㅎㅎ

blanca 2013-06-19 13:06   좋아요 0 | URL
어어! icaru님 폰도 그래요? 또 다른 사람도 그 얘기 하더라고요. 네 번 눌러야 된다고 ㅋㅋ 아, 너무 반가워요. 우리 아예 안 켜질 때까지 기다려 볼까요? ^^;; 이게 혹시 사망 징조면 곤란한데. 예전에 쓰던 폰이 하나 고장나더니 갑자기 죽어버리더라고요.

2013-06-19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0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3-06-20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워라~~~
다락방님 말씀처럼 출판사에 전화해서 재고 확인 및 재판을 희망한다고 말씀하세요^^
아마 큰 도서관에는 있을거예요.
프야님은 노트로 바꾸셨어요. 저도 노트!

blanca 2013-06-20 10:53   좋아요 0 | URL
아아! 노트군요.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 일단 구경부터 슬슬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jkim1117 2013-06-2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hopping.naver.com/search/all_search.nhn?query=EQ%EC%9D%98%20%EC%B2%9C%EC%9E%AC%EB%93%A4%20%EC%B6%94%EA%B0%80&cat_id=40004661&nv_mid=6965412383&frm=NVSCPRO

이거 아닌가요? 저희 아이도 좋아하는 책이라 이메일에서 이 글이 뜨길래 뭔가 하고 보니 고민중이신 것 같아서요... 이 시리즈는 성황리에 판매중이랍니다 ㅎㅎ 이건 추가세트구요, eq의 천재들 81권 구성으로 찾아보시면 원래의 세트에 이것까지 포함해서 가능하구요... 이 책 파는 사람 아니구요... 저희집 두 아이때문에 수 백번 가격비교하고 찾아본 경험으로 말씀드립니다~~ ^^

blanca 2013-06-24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찾아 보니 품절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 전집 출간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