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한번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타인에게 저지른다. 시간의 신은 가해자도 피해자의 윤곽도 흐릿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자기 정당화로 스스로를 재빨리 용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며 늙어간다. 그래, 그때는 어렸어, 철이 덜 들었었어, 라고.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는 견디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명확한 진실을 오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는 일은 흔히 '속죄' 그 자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주 뒤늦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찬탄을 받은 이언 매큐언의 이 책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35년 뜨거운 여름날, 탈리스 가의 막내 딸 브리오니는 오빠의 귀향을 환영하기 위하여 무모한 사랑에 빠져 불행해졌던 소녀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는 내용의 희곡을 쓴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처한 외사촌 언니 롤라와 아홉살 쌍둥이 잭슨과 피에로는 뜻하지 않게 이 희곡의 공연을 위하여 차출되게 된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하고자 하는 열망과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녀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신분 차가 나는 청년 로비 터너가 사랑하는 장면을 엿보게 되고 마침 없어진 쌍둥이 형제를 찾으러 다 흩어진 가족들 틈에서 사촌 언니 롤라가 누군가에 강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기만의 왜곡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며 마침내 로비 터너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렇다. 탈리스 가의 집안 일을 거들었던 어머니와 가족을 방치하고 떠난 아버지의 결손 가정에서 자라 브리오니 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의대생을 꿈꾸었던 전도 유망한 청년 로비 너는 두 소녀의 저마다의 굴절된 진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하게 된다. 그녀들은 어렸고 각자의 욕망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채색했다. 로비를 사랑했던 세실리아는 부모와 의절하다시피 하고 로비는 수감되었다 온갖 살육과 잔인함, 방치가 난무하는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평범했던 안온했던 아기자기했던 그 여름날은 삶의 무참한 우연적 칼날 앞에서 난도질 당한다.

 

절규하는 서사 앞에서 이언 매큐언은 담담하게 소설의 역할을 역설한다. 그것 안에는 과장되지 않은 진실의 핵이 강력한 흡인력의 자기장을 떨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p.67

 

이것은 브리오니의 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실수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잊어버린다. '너'도 '나'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 감정을 지녔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폭력, 오해, 전쟁, 기만적인 이기적인 행위 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로비 터너가 전쟁터에서 겪게 되는 그 수많은 처절한 참상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이 끈적끈적한 여름 속에서 한기를 실어온다. 마치 그 현장에서 직접 그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목격하고 겪는 듯했다. 로비가 느끼는 고통, 무감함, 피로, 욕망은 이윽고 독자의 것으로 환치된다. 그것은 이언 매큐언의 위대한 힘이다. 지천에 깔린 죽음을 목격하며 사내들이 아버지가 되기를, 생명을 갖고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루기를 꿈꾸는 그 슬픈 모순의 욕망에 대한 묘사는 히 더 그러하다.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되기를 열망하는 로비 터너의 꿈에 대한 묘사는 처절하리 만치 현실적이고 몽상적이고 아름답다. 됭게르크를 향하여 힘없이 퇴각하는 영국 군인들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우리 인간이 극단적인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되려 생명을 매개로 한 회복과 부활을 꿈꾼다는 그 무력하지만 끈질긴 생존에의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이언 매큐언은 삶에 대한 그 무조건적인 애착의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브리오니는 속죄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브리오니가 아니라 읽는 우리들은. 그녀가 언니처럼 전쟁터의 병사들을 치료하는 간호사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고행의 행군으로 밀어넣는 그 절절한 대목들에서 어쩌면 그녀의 그 실수가 용서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녀가 결국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만나고 로비 터너의 그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뒤로 하고 런던 남부의 지하철역에서 연인들과 헤어지는 장면. 어쩌면 적절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수도 있었을 그 장면은 슬픈 반전을 품고 있다.

 

1999년 런던. 유명한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는 일흔일곱 번째 생일파티를 유년 시절의 대저택에서 맞게 된다. 그곳에는 그 여름날 실종되어 모든 사건의 전초를 만들게 되는 쌍둥이 형제 중 생존한 노인 피에로의 증손자 등이 육십사 년이 지나서야 무산되었던 공연 <아라벨라의 시련>을  연기한다. 그리고 브리오니의 슬픈 고백은 위험한 반전을 예고한다. 그녀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로 헤어져야만 했던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터너를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 슬픈 연인은 전쟁통에 죽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브리오니의 고백은 소설을 통하여 그 연인의 결합과 그녀 자신의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것의 복선이기도 했다. 브리오니는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는 슬픈 고백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독자는 철저히 속았다. 그러나 이 기만 행위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속죄'는 드라마틱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쩌면 하나의 허망한 환상일런지도 모른다. 이미 저질러진 행위와 가한 상처는 무뎌질 뿐이지 '무' 아래로 가라앉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소중한 마음이 있다,는 그 사실을 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내 마음의 속살과 같은 여린 부분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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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1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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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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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4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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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5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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