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중략>


김사인 <화양연화>


살아보니 결국 승자는 돈도 권력도 열정도 사랑도 노력도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무화시킨다. 변화시킨다. 심지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본질 그 자체까지 때로 흔든다. 스무 살의 나보다 마흔 살의 타인과 더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사인의 <화양연화>를 읽으며 문득 서글퍼졌다. 덧없고 속절없는 느낌. 그가 예언했듯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그러한 시간을 맞는 것도 기대되지 않는다. 애닯고 애타는 것도 특권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던 탓이겠지. 기다리며 울던 시간도 그 시간만의 추억이 될 것임을 모르고 무너지려 했던 시간들. 


















아이가 어렸을 때 집앞에 걸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있었다. 학교 안에는 서점이 있었고 분야별 신간과 아기자기한 문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도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다니지 않았던 이공대 안을 그렇게 세 살 아이와 함께 아무리 보내도 끝날것 같지 않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종종 가곤 했다. 그 구내서점에서 처음 본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당시의 김연수 만큼 젊은 생기가 있는 소설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날들도 나름대로 힘들었지만 '화양연화'였던 셈이었다. 스마트폰은 아직 초창기였고 사람들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을 특이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그러한 얘기를 하면 심드렁하다. 그 서점에서 강아지 스티커를 매일 사서 아예 재고를 영으로 떨어뜨렸던 기억은 없단다. 그 스티커는 침대 헤드를 점령해서 집에 오는 사람마다 경악하게 만들었었는데. 기억에 없다니. 


김연수가 오랜만에 신간을 냈다. 그의 전작을 읽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모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이 나이들어간다는 실감이 가장 큰 작가다. 나보다 앞질러 살아보고 했던 얘기들을 뒤늦게 경험하며 정말 맞구나, 하던 시간들도 많았다. 문학을 문학으로 남겨 놓으려는 순정의 대목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학교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내식당에서 혼자 들썩였던 그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내 기억에 포개진다. 그런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복기하는 날도 온다. 애달픈 시간들이 쌓여 애닯지 않은 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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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9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결국 시간이었다는 것도 저 역시 깨닫고 있고요. 시간이 변화시키는 것도 저 역시 요즘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보는 눈도 그래요. 이게 이렇게 좋았던가, 이게 이렇게나 끔직했던가, 하고 늘 보던 것을 그리고 익숙한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돼요. 나이가 같다고 다 그렇진 않겠지만, 블랑카님과는 세월의 흐름과 변화를 보는 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같이 가고 있다고 느껴요. 오늘 페이퍼 정말 좋습니다, 블랑카님. (아, 김연수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요.)

blanca 2020-06-20 08: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게 정말 세월, 나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게 ˝이게 나야, 내 생각은 이래˝라고 주장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낯설어요. 자꾸 변하고 닳아요.

다락방님 글 읽다 때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 이거 내가 느낀 건데, 이러면서. ㅋㅋ 그리고 시기도 비슷해요. 잘 나이들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나이들어가기를...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