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를 읽지 않았다. 와닿지 않았고 때로는 언어들의 과잉과 생략이 껄끄러웠다. 한 마디로 잘 읽히지 않아 잘 안 읽었다.
무엇보다 자기 감정을 그저 쏟아내는 것이 아닌 청자에게 속살거리는 듯한 말투가 정겹다. 잘 읽히고 감각적이고 쳥량하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뭍에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수국의 즙 같은 말투"에 한동안 중독되어 읽고 또 읽었다. '시'란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아도 그 응축된 언어의 집 한 채로 독자에게 때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문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이전과는 같아질 수 없다. 그 전환은 반가운 일이다. 그 집을 통과해서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거나 비합리적이지만 무의미하거나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법이다. 덥고 끈끈하고 답답한 나날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맞은 느낌. 시를 연이어 읽고싶게 만드는 마력을 몰고 오는 시집이다. 시가 안 읽히는 시대, 이런 시인은 여전히 태어나는구나 싶어 반가웠다.
복간된 책이다. 시집이 아니라 저자의 삶의 이야기와 그녀가 읽은 마흔여덟 편의 시가 함께 실린 책이다. 한 마디로 삶과 시의 독법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이런 류의 책들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벼울 줄 알았던 한 중년 여성의 시읽기는 깊고 예민하고 예리하고 진중하다. 내가 요즘 느꼈던 것들, 생각했던 것들을 들킨 듯 삶의 속살에 대한 천착이 빛난다. 늙음과 소멸, 이 사회의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주의에서 소외되고 왜곡되는 사람들의 본질에 대한 애정은 이 시읽기가 자칫 개인주의적 감상으로 한정되지 않도록 한다. "삶의 기본값으로 주어진 설움과 청승을 어떻게 품고 갈까"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물음은 우리가 사랑하고 암송했던 시들이 줄 수 있는 답이 아니지만 그것을 묻고 답을 궁금해하는 시간은 값지다. 또한 학생들이 버린 노트에 소녀 감성으로 일기를 적는 환갑의 청소 노동자와 "지팡이가 아닌 낙엽에 기댄" 구순의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올드걸'을 발견한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비단 특별한 계층, 종족에게만 허용된 특권이 아니라 이 처연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 우연적인 삶이 던지는 화두를 응시하는 것과 통하니 말이다.
다시 시를 읽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