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와 이디스 워튼은 둘다 뉴욕의 최상류층 출신 작가로 실제 생애 전반에 걸쳐 친하게 지낸다. 이디스 워튼이 <순수의 시대>로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헨리 제임스에게 비견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결핍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둘은 아무래도 상류층이라는 한정된 배경 속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내적 욕망을 탐구하는 데에 천착한 작품이 많다. 이는 한계이기도 하고 그들의 강점이기도 했다. 경험은 작가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그 깊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거실에서 창조한 세계를 결코 폄하할 수 없다. 

















19세기 전반의 명망 있는 의사 슬로퍼의 고명딸 캐서린이 집안의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청년 모리스에게 한눈에 반하며 아버지와 갈등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나쁜 남자한테 빠진 딸의 어리숙함을 못 보아 넘기는 꼰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여주인공 캐서린은 정말 답답한 캐릭터다. 아버지도 연인도 그녀의 확답을 듣지 못한다. 자신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아버지에게도 섣불리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모리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캐서린의 모습은 언뜻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어 보인다. 헨리 제임스는 여기에서 기지를 발휘한다. 바로 그 인물의 현실성이다. 사실 어떤 딜레마 속에서 시원한 결단을 내리고 그 길로 질주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만 보내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누구나 상황은 다르지만 자신의 과거 한 조각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우리의 못난 구석, 근사하지 않은 부분을 불러온다.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의 남자 주인공 아처에서 캐서린을 변주한다.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대신 사회의 압력에 굴복한다. 그도 캐서린처럼 사랑을 포기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회고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선택은 캐서린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과거를 의아하게 돌아보는 캐서린과는 달리 뉴랜드 아처가 회고하는 자신의 사랑은 끝내 포기했던 "인생의 꽃"이었다. 그럼에도 여기 현실에 남아있기를 선택하는 자신의 모습 또한 그는 인정한다. 끝내 죽는 순간까지 딸에 대한 권위와 구속을 포기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시원하게 반기를 들지 못한 캐서린과도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헨리 제임스와 이디스 워튼 또한 평생을 자신들이 가지고 태어난 것, 속한 계층의 한계 안에서 마음으로 원하는 것,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의 긴장 관계에서 살았다. 그들의 삶이 작품의 기본 구조와도 만나는 부분이다. 


이곳 아니면 저곳, 여기 아니면 저기, 이것 아니면 저것의 사이 그 어느쯤에 그렇게 우리들도 모두 갈등하며 나날들을 보낸다. 무엇이 옳았는지를 회고할 수 있을 시점이 오면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 한없이 허무해지지만 깊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나란히 놓고 본다. 어떤 선택도 회한이 남는다. 그 선택을 한 자신, 그러한 것을 견인한 환경,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게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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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3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블랑카님, 저 안그래도 주문해서 워싱턴 스퀘어가 어제 도착했습니다만, 블랑카님이 이렇게 똭- 페이퍼 적어주시네요. 아아...독서인생이란 무엇인가요?

순수의 시대는 저 너무 좋아해요. 마음속 성소란 말을 되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blanca 2020-06-30 19:04   좋아요 0 | URL
헉, 아, 이 책 나온지 좀 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동시에? 다락방님도 <순수의 시대>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너무너무 좋아서 두 번 읽었어요. 이디스 워튼 정말 좋아요. 삶까지. <이선프롬> 도 너무 좋았어요. 헨리 제임스는 음, 저는 솔직히 아주 좋다, 이렇진 않은데 그렇다고 그 작품이 안 좋은 건 아니고.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좀 답답한 캐릭터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도 같고요. 그래도 <워싱턴스퀘어>는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랍니다. 다락방님이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