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기 전까지 몸과 의존의 문제는 타인의 것, 다른 영토의 일이다. 작은 수술로 입원하며 수술에서 깨어나던 시간, 옆병실 환자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은 아무리 지성과 관념을 얘기해도 결국 한 평도 안 되는 육체에 갇혀있다는 뼈아픈 인식과 더불어 '돌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술 당일 나는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모든 일상이 갑자기 대단한 일이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많은 환자에게는 보호자가 있었고 그들의 투병은 누군가의 간병, 희생과 얽히고설켜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생애 주기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회는 그 기간의 생산성과 독립성을 전제로 삶을 규정한다. 그 나머지 기간, 우리는 소위 민폐가 된다. 비용이 되고 성가심이 된다. 건강하고 젊은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우리 모습만이 반드시 어떤 생산력을 보이고 타인에게 돌봄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때의 기간만이 진짜 삶처럼 얘기될 때 우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김영옥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낯설다. 여섯 편의 글은 새벽 세 시, 우리가 가장 유약해지고 감상적이 되는 시간, 가장 고독해지는 시간 감당해야 하는 늙음, 고통, 투병, 간병 등 이 모든 육체의 쇠락,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 안에 가두어두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의 담론의 현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시민'이고 그 돌봄이 오롯이 사적인 영역으로만 할당되지 않는 그곳에 대한 지향과 소망이 펼쳐지는 장이다. 특히나 이러한 돌봄노동이 성차별적으로 가부장 제도 안에서 여성의 희생이자 도리로 간주되는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두드러진다. 병실에서 아내나 부모를 간병하는 남성의 모습은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남자 간병인들도 보기 힘들다. 


돌봄위기는 '독박'의 구조로부터 온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는" 사회는 모두게 불안하고 힘겨운 사회일 뿐이다.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


가족의 돌봄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만 간병인과 전문 요양 기관에서의 삶은 어쩐지 좀 서글픈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잔인하다. 그것은 간병을 하는 가족에게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어긋난 역학 관계, 죄채감, 부책감, 억울함을 남긴다. 우리 나라에서 공론화하기 참 힘들고 민감한 사안이다. 할머니의 말기암과 치매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가족은 불화했다. 그것은 이미 중년이 된 손녀인 나에게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가족 전체가 감당하려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손길을 좀 빌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누군가 온전히 자식이라는 몫으로 감당하려다 했던 실수들, 감정의 예기치 않은 표출들이 효의 연장선상에서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가족이 다 감당하려 했을 때의 비극을 나는 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훌쩍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사람, 약자를 가족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얘기들이 담론화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치유의 느낌이 있었다. '시민적 돌봄'이라는 용어가 낯설고 생경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모든 돌봄이 가족 안에서 감당되어야 하는 사회는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이지은의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에서 소개된 알라나 샤이크의 TED 강연을 직접 찾아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학구적인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치매는 공격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의 생을 그대로 닮은 듯다정하고 부드럽다. 못 알아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전면에 나서는 치매의 풍경에서 아버지의 차분하고 너그러웠던 마음은 그대로 남아 돌보는 사람들과 감응하고 조응한다. 아무리 지적인 작업을 의식적으로 계속한다고 해도 치매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논리적인 확신은 없다면 그녀는 소위 '착한 치매' 환자가 되기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손으로 하는 종이접기 취미들, 몸의 독립성을 연장시켜 줄 운동, 그리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기, 이 세 가지의 준비는 그녀의 인지 기능이 쇠퇴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을 예비시켜 줄 것이었다. 취약하고 의존적인 자신의 내일을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대목이다. 인간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모습은 슬프지만 현실적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항상 독립적인 나의 모습이 나의 자아의 본질이라 여기면 우리는 제대로 잘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듦은 어렵다. 아픈 가족을 나이 든 부모님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시리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이 명확한 생애 주기를 외면하는 사회는 기만이다. 언제나 생산하고 소비하고 활력 징후가 뚜렷한 구성원만이 대우받는 사회는 무섭도록 잔인한 곳이다. 아프고 늙고 유약해지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렵지는 않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은 큰 이정표가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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