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1
콰메 앤터니 애피아 지음, 실천철학연구회 옮김 / 바이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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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메 앤터니 애피아.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태생의 학자들의 이름을 접하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름을 접하니 어색하다. 마치 미국 대통령 후보로 '버럭 오바마'를 처음 알게 됐을 때의 느낌이랄까. 당시에도 언론은 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워했었다. 애피아의 이름을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삼인출판사에서 번역돼 나왔던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이미 만난 바 있다. 너스봄이 주가 되는 책에서 애피아를 만났듯 애피아가 주인공인 이 책에서는 너스봄을 만날 수 있다.  

  세계시민주의.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애피아가 말했듯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들은 기원전 4세기경의 키니코스 학파이다. "당시 이들은 사회 관습과 전통, 학문, 예술 등을 무시하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면서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했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헬레니즘 세계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계시민을 자칭하곤 했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로 이어지는데, 당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도시국가가 무너진지 오래고, 그리스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제 한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라고 생각했고, 개인보다는 전체를 중히 여겼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했고, 운명론에 빠지게 되었다.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는 "민족 공동체에서처럼,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도 공존의 습성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때 공존의 습성은 함께 갈아가기와 연대하기를 위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대화"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는 나아가 이때의 "대화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후반부에 있다. '얕은 연못'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장인데, 여기서 애피아는 철학자 피터 엉거와 피터 싱어를 언급한다. (이름이 비슷한 엉거와 싱어가 형제거나 친척은 아닌 듯 하다.) 그의 비판은 피터 엉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봤을 때) 피터 엉거와 피터 싱어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감안하면, 그 비판은 피터 싱어에게도 적용이 된다. 또, 엉거와 함께 싱어도 비판의 도마에 올리고 있다.

 최근 산책자에서 나온 피터 싱어의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를 읽었다면, 애피아의 비판에서 생각해 볼 만한 구석이 많다. 나는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 싱어만큼이나 '이상'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고, 혹자는 싱어가 현실을 모른 채 지극히 이상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애피아의 비판도 여기에 닿아 있다. 세계시민주의에서는 결국 전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세계시민주의자인 애피아와 실천윤리학자 싱어가 다른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건 그 때문이다. 싱어를 세계시민주의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싱어의 생각은 이미 세계시민주의적이다.  

  싱어는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우리가 고급 취미를 줄임으로써 세계의 절반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어느 얕은 연못에 한 아이가 빠진 것을 보았다면, 내 옷이 진흙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죽으면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그보다 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점을 점차 확대하며 모든 상황에 적용한다. 유니세프로 부터 헌금 봉투가 왔다. 나는 100달러를 보내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는 굶어죽을테니까.  

  그러나, 애피아는 여기에 반대한다. 그는 아이를 구하는 데에는 찬성하지만, 그 아이를 구하는 방법이 지금 당장 내가 100달러를 내놓는 것인가 하는데 의문을 제기한다. 애피아는 매사에 우리가 이렇게 돈을 내놓고, 희생을 하는 것이 진정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다는 것이 우리가 모든 재산을 남에게 준다는 것을 실제로 수반하느냐고 묻는다. 애피아는 세계의 굶주리는 이들과 약자를 돕는데는 찬성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엉거와 싱어는 세상의 나쁜 일 전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애피아는 나 자신을 파산시킬 만큼 엄청난 액수를 유니세프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더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애피아는 "우리의 의무는 전체의 짐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공평하게 져야 하지만, 자신의 몫 이상을 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싱어가, 물에 빠진 열 명 중 한 명을 구하고서 나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지 말고, 남은 어른 아홉 명이 빠진 아이 아홉 명을 구하러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다시 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점을 비판한다. 내 몫을 다했어도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싱어와 그러지 말고 모두가 공평하게 짐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애피아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싱어보다는 애피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의식 있는 개개인 몇몇이 뛴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싱어가 감성에 호소하는 주장을 편 데 비해, 애피아의 비판이 이성에 의거하고 있어 애피아의 비판이 핀트가 살짝 어긋났다고 말할 수는 있다. 싱어는 단지 그만큼 절박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절박함에 대해 이성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가혹하다. 애피아는 또 싱어가 - 책에선 엉거를 언급한다 - 빌게이츠의 기부 행위에 찬사를 보낸 것에 대해서, 그런 빌게이츠의 행위도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매사에 돈을 내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한다. 부가 부를 벌기 때문이고, 저축을 꾸준히 해서 나중에 기부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애피아의 생각에 반대한다. 빌게이츠가 부자가 되어 기부를 하는 반면, 부자가 되어도 그만한 기부를 하지 않는 대기업 총수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기부는 그때그때 하는 것이지, 나중에 몰아서 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기부 문화를 더 죽이게 될 것이다.  

  애피아와 싱어. 둘다 세계시민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세계의 빈곤을 없애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싱어가 좀더 적극적으로 개인의 실천을 요구한다면, 애피아는 그보다는 시스템 상의 개선에 주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애피아는 싱어를 비판했지만, 크게 봤을 때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세계시민주의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들에게 그런 이방인들을 기억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미스가)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이라 부른 것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이 실천을 더 잘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요구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문명을 더욱 세계시민주의적으로 만든다면 더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도덕적 요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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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9-1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기회가 되면 이것도 일독해야 겠어요...ㅎㅎ

마늘빵 2009-09-16 13:47   좋아요 0 | URL
^^ 싱어에 관한 부분은 책에서는 뒷쪽에 적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걸 주로 쓰긴 했지만.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김순천 지음 / 동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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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청소년들의 희망과 꿈, 자유와 좌절에 관한 이야기." 한번쯤 이런 기획이 필요했다. 암울한 10대들의 인터뷰를 동녘이 책으로 엮었다. 여기 인터뷰이로 참여한 청소년들은 10대들 중 '암울한 일부'가 아닌, '암울한 모든' 10대들을 대변한다. 우리가 뉴스나 신문으로만 알고 있던, 보도와 기사로 전해져오는 무미건조한 사실들은, 여기엔 없다. 여기에서 함께 살아가는 힘겨워하는 우리 곁의 사람들만 존재한다. 현실이 이 정도일까, 물음을 던져보면서도,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네 명의 10대가 책에 이름을 올렸다. 2년 전의 인터뷰라고 했던가. 지금 자라서 대학생이 된 아이도 있고, 자신의 꿈을 한번 접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도 있고, 여전히 괴로워하며 학교에 남아있는 아이도 있다. 2년 전과 달리 그들의 신분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혹은 여전히 자퇴한 소년소녀일지라도, 그들의 방황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선생님들마다 두발 규정이 달라서 아무리 깎고 또 깎아도 불려가서 맞고 머리카락을 잘리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머리를 기르면 나라 경제가 망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수업 시간에 맞기 싫어서 공상을 하는 건 애교다. 나도 고등학교 3년 동안 공상을 무척이나 많이 했다. 공상을 하다 지겨우면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창밖을 보거나, 머리를 책상에 박는 행위는 바로 제재 당한다. 나름 모범생'이었다고' 그래도 봐주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원래 모범생이 아니었던 친구들에겐 가차없었다. 어쩌면 나를 자꾸 봐줘서 내가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교가 감옥인 건 여전한가보다. 아니, 요즘 아이들을 보면 오히려 그때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OO야, 정석 공부하고 있니?", "네? 정석이 뭐에요?", "아니다... 됐다. 교실로 가봐." 당시 선생님와 나의 짧은 대화다. 지금은 더 심하지만, 당시에도 선행학습이란 게 있었다. 이건 누구의 말마따나 학원이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이다. 선생님은 내게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공부하고 있냐고 묻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대고 그게 뭐냐고 묻고 있었다. 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이 짧은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선생님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내게 그걸 아직도 공부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냐고 말했다면, 그 선생님에 대한 나의 기억이 달라졌을 것이다. 

  책 속에서 어느 학부모가 전한 이야기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친구가 그랬단다. "수학 어디까지 나갔어?", "아무것도 안 나갔는데", "너 그렇게 공부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 들어가", "너 왜 이렇게 망가졌냐" 그날 그 아이는 펑펑 울었다. "엄마, 때려서라도 공부를 시키지 그랬어?"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학생에서 선생으로 신분 탈환을 한 지난 3년 간,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이었을까. 그걸 선생이 아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고 있다. 나름 한다고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못난 부분이 많았다.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 성적이 아닌 다른 것으로 - 차별을 했던 것 같고, 매를 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매를 들었고, 감정을 절제한다고 했지만 감정을 실어서 때리기도 했다. 다 못난 탓이다. 마음만큼 현장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다. 내 탓이었다. 좀 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준비된 선생이었다면 달랐을텐데. 다행히 난 미숙한 그 모습을 뒤로 선생을 하고 있지 않지만, 학교엔 그 당시의 나보다 훨씬 더 경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미숙한 선생들이 쎄고 쎘었다.  

  우리네 선생들은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본인의 학창 시절밖에 없어서 다 거기서 거기인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뉴질랜드나 덴마크 등에서 공부하다 온 아이들은 한국의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돈다. 자율주의에서 규제주의의 영역으로 넘어온 그들이 적응할 수 없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갈 수는 있어도, 그곳에서 이곳으로 오는 건 애초 불가능했는지도. 대안학교와 일반학교를 놓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학생도 다르지 않다. 대안학교로 가면 일반학교에 돌아와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고민은 한없이 길어지기만 한다.  

  참 다양한 환경에 처해있는 학생들이 나온다. 어떤 아이는 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떤 아이는 타워팰리스에 산다. 그러나, 그 아이도, 이 아이도, 고민이 많다. 힘들다. 주어진 환경은 달라도 모두가 힘들다. 강남 아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강남의 한 정신과 의사는 강남 학교에 가서 현장 조사를 해보고 놀랐다고 한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녀석들이 많았던 것이다. 강남 학부모들의 등쌀에 못이겨 고통스러워 했던 것이다. 통보했더니 알아서 찾아왔단다. 스스로 알고 있는거다. 그러나 아무도 그 아이들을 건드려주지 않았던거다. 한번만 말을 걸어주면 되는데. 

  우울한 청소년과 우울한 사회다. 이 아이들은 힘들어하면서도 대학은 끝끝내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왜 대학에 가야 하냐고 물으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게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하는 대답이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 어릴적만해도 친구들은 꿈이 많았다. 변호사, 의사, 판사는 물론이고 소방관, 경찰, 대통령, 간호사, 유치원 선생님, 무용가 등 참 다양한 직업이 나왔다. 그땐 변호사를 하고, 의사를 하려고 해도 그 이유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나오는 직업도 제한되어 있지만 그 직업을 가지려는 이유도 똑같다. 우리들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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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9-1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인 통제 집단의 역할을 하던 학교가 변하고 있습니다. 그 통제에 불안감을 느끼는 집단도 있겠지요. 남자 고등학교인 우리 학교도 여교사 비율이 65%가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억압과 통제 일변도의 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관리자의 경영 마인드가 정말 필요한 시점인데... 아래로부터의 변혁... 그건 단위학교에서 일어나야 하는데요... 예전같이 교사모임도 없어서...(교사 집단이 20년 전부터 그대로 늙어오고 있거든요.) 앞길이 깜깜합니다.

마늘빵 2009-09-15 09:08   좋아요 0 | URL
네, 단위 학교에서, 학교 내 선생님 개개인이 변화하지 않으면, 10년 후에도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너무 아닌 교사들이 많이 있죠. 교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아닌 사람들이.

카스피 2009-09-1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스승으로서의 선생님보다 강사로서의 선생님이 더 많은것이 현실이지요.학교도 학부모도 모두 스승보다는 강사를 더 원하고 선생님들도 스스로 강사가 되어가는 것이 어찌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마늘빵 2009-09-15 19:28   좋아요 0 | URL
네, 스승보다 강사가 많고, 그나마도 제대로 된 강사 노릇도 못하는 직업 교사들이 많죠. -_- 현실이 또 그래요. 말씀하신대로 서로 원하는 게 같으니. 교사는 학부모가 원하니 애들 인성교육이다, 전인교육이다 신청 안쓰고 '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상처입는 건 결국 애들이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고민 있으면 선생님 찾아와라, 라는 말은 이제 안 통합니다.

BRINY 2009-09-1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도 변하지만, 학부모도 많이 변했다고 느낍니다.

마늘빵 2009-09-15 19:28   좋아요 0 | URL
네. 애들 위해서 힘써봐야 학부모한테 욕만 먹습니다.
 
토플러 & 엘륄 : 현대기술의 빛과 그림자 지식인마을 4
손화철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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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 마을 시리즈를 읽다보면 관심이 없던 인물에게도 관심이 생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사람 중 한 명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닥 관심이 없던 사람이고, 한 명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듣보잡이었다. 전자가 제1의 물결인 농업 혁명과 제2의 물결인 산업 혁명에 이어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한다며 빨리 그 물결을 타라고 주문했던 엘빈 토플러이고, 후자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버린 현대 기술 속에서 인간 역시 기계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자율적으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고 본 자크 엘륄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익히 알고 있던 토플러보다는 듣보잡이었던 자크 엘륄에게 더 매력이 느껴졌다.

  이 책은 외견상 동일한 비중을 두고 두 사람을 양극단에 놓고 바라보지만, 실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다보면 저자는 토플러보다는 엘륄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엘륄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고, 엘륄의 시각을 이어받은 이후의 학자들이 하나씩 얼굴을 내민다. 울리히 베크나 허버트 마르쿠제, 포스트먼, 보르크만, 밴더버그 등은 엘륄과 비슷한 선상에서 과학 기술의 폐해를 지적한 인물들이다. 또 앞선 철학자로는 나치스에 가입했다고 하여 마르쿠제가 등을 돌린 스승 하이데거가 등장하는데, 과학 기술 철학은 하이데거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봐야 할듯 하다.  

  "근대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이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결과가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현대 과학 기술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연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과학 기술에 지배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엘륄과 마르쿠제의 기술 시스템이 인간의 자율성까지 지배했다는 주장과 닿아있다. 마르쿠제는 창의성이 희생된 이 같은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고 칭했다.  

  또, 포스트먼이라는 학자는 엘륄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는데, 엘륄이 현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사회나 문화, 윤리 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데 비해, 그는 기술이 인간의 사회, 문화, 경제 등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한다. 엘륄의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포스트먼은 현대 기술의 영향력이 어떤지 깨달으면 인간이 과학 기술에 지배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장하는 것이 '인간성의 상승'이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해당 기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이고, 누가 피해를 입는지, 그것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등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아직, 해결책 치고는 추상적이다. 보르크만은 우리의 삶과 괴리된 과학 기술을 가지고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없으니, 단순 반복적인 일은 기계에 의존하되, 창조적인 행위는 인간이 직접하게 하는, 포스트먼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이원적 시스템을 제안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창조성와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기에 동의를 해야 보르크만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난점이 있다. 어떤 일을 창의적인 일로, 어떤 일을 단순 반복적인 일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사회 구성원의 몫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계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체험하려고 한다. 우리는 과거에 통화 음질이 좋고, 문자만 제대로 가면 만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MP3를 듣고, 휴대폰을 네비게이션으로도 활용한다. 근대까지의 기술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면, 현대의 기술은 사람들의 욕구와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술 자체가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그 기술을 따라가느라 힘겹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된다. 과학 기술은 이미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건 명확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서 과학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봤지만, 여기엔 아직도 답이 없다.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의 방향 설정에 있어 남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일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규명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경우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상상은 요순시대나 성경에서 묘사하는 천국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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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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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우리집 창문가에서는 고양이들이 울었다. 아기 울음 소리 같았다. 가끔 혼자 있을 때 고양이들이 창가에서 이렇게 아기 울음 소리를 내면 무섭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 울음 소리가 사람 소리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아기가 어디서 우는 줄 알았다. 너무 가까워서 집앞에 누가 아기를 버렸나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고양이임을 확인하고서 소름이 끼쳤다.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 이런 고양이들이 많다. 저자에 의하면 고양이가 아기 울음 소리를 내는 건 발정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정기가 되면 이들은 이성 고양이를 꼬시려고(?) 크게 소리를 내는데, 그게 아기 울음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분명 집앞에서 매일 마주치는 그 녀석들일 것이다. 매일 마주친다고 해도, 나는 고양이들과 매일 마주치지만 내가 마주치는 고양이가 매일 같은 고양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 같이 생겼고, 날카로운 눈빛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무섭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언제나 녀석들은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주차된 승용차 아래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도망가곤 한다. 우리집 주변에는 몇마리의 길고양이들이 있을까. 저자는 동네에서 1년 4개월 동안 20여 마리의 고양이와 만났다고 한다. 그 중 자신이 일일히 이름을 붙인 일부 고양이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길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영역을 설정해놓고 해당 구역에서만 논다고 한다. 다른 고양이가 영역을 침범해도 너그럽게 봐주는 고양이도 가끔 있는 반면, 제 영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양이들도 있다. 저자와 동네 세탁소 주인처럼 정기적으로 밥을 챙겨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 길고양이는 적어도 생존을 위해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책을 읽고 시간을 내어 고양이 밥을 한번 챙겨봐줄까도 생각했지만, 아침 일찍 나가 늦은 저녁이나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나로서는, 그들에게 시간을 내어 밥을 주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단순히 주변의 길고양이를 관찰한 글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아왔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길고양이와 만나고 부대낀 과정을 글로 묘사하고, 그들을 동네 주민으로 인정한다. 사람들은 마땅한 이유없이 고양이를 싫어하고, 고양이의 수가 늘어나면 인간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를 마녀나 악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길고양이를 '도둑 고양이'라 부르는 것도 억울하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먹고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거리는 것이 다인데, 도둑 고양이란다. 아무 것도 훔친 적이 없고, 훔칠 줄도 모른다. 그들은 누군가 먹다버린 음식물을 찾아 배를 채우며 생을 연명한다.  

  "고양이도 인간과 똑같이 지구의 생명체로 태어나 같은 지층 연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외계의 생명도 마녀의 동물도 아닌 존재로 그저 우리 곁에 살아갈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하필 전 세계에서 길고양이가 가장 천대받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이란 곳에서 길고양이는 늘 두려움과 불안, 배고픔으로 떨고 있다. 사실 길고양이의 세계를 알기 전까지 나 또한 고양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든 말든 그냥 무관심했었다. 녀석들을 적으로 여기지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한국이란 곳에서, 더구나 도심이란 공간에서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길에서 아무렇게나 퍼질러 있어도 마냥 좋던 계절이 갔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곧 추운 겨울이 온다. 고양이도 추위를 탄다. 털이 있는 동물이라고 추위를 타지 않는 건 아니다. 많은 고양이들이 길거리에서 로드킬을 당하지만, 추워서 덜덜 떨다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죽는 경우도 많다. 이 책을 통해 동네 길고양이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매일 그들을 만나지만 길고양이의 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부턴가 그들의 생김새를 좀더 자세히 관찰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다. 저자처럼 오랜 시간 고양이와 함께 놀아주지는 못해도, 길고양이 한 마리 데려다 키우지는 못해도, 통조림 하나, 소세지 하나 사다주면서 만남을 시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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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요 2009-09-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는데..
밀린 책들이 많아서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ㅎ

가끔 아프님 올리는 글, 눈팅만 하다가 오늘은 안부겸 짧은 인사 겸해 남기고 갑니다.
좋은 한주 시작하세요.^^

마늘빵 2009-09-14 09:18   좋아요 0 | URL
^^ 저도 밀려있는 책들도 많고, 리뷰 안 쓴 책들도 많고... 이 책,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카스피 2009-09-14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들이 주인한테 버림받아서 길 고양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요놈들 스스로가 발정기떄 집을 나가 안돌아오면 길 고양이가 됩니다.흔히들 고양이는 주인 얼굴 3일만 안보면 주인 얼굴을 잃어버린다고 하니까요.
저도 요렇게 몇놈 잃어버렷지요 ㅜ.ㅜ

마늘빵 2009-09-14 22:19   좋아요 0 | URL
네, 주인한테 버림받은 길고양이는 더 살기 힘들대요. 야생을 겪어보지 않아서, 알아서 쓰레기통 뒤지거나 먹을거 구하는 방법도 모르고, 영역다툼에서도 밀리고. 어쿠. 카스피님도 고양이를 잃어버리셨군요. 그냥 그 놈들이 나가버리다니...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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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게 읽는 방법 :  이 책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책을 펼친다.

  가슴이 쿵딱쿵딱 거렸다. 이거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거지? 때로는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때로는 몇 주의 간격을 두고 메일 놀이(?)를 하는 두 사람에게 빠져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읽어버렸다. 주연 배우 레오와 에미 둘, 조연 하나. 내 부실한 기억력에 의하면 출연진은 이 셋이 전부지만 어쩌면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한둘 더 나올 수도. 

  지인의 추천을 받아 읽었고, 지인에게 추천해줬다. 이 책을 읽은 두번째 지인이 말하길, 너무 가슴이 답답하다, 라고 했다. 어쿠. "왜?" 라고 물어봤다. 들어보니 지인은 읽는 동안 바람난(?) 에미의 남편에게 감정이입했던 것이다. 아니 주인공인 레오와 에미에게 집중해야지 왜 하필 에미의 남편을 선택(?)한거야. 모르겠단다. 자기 남자친구가 에미같이 그러면 화가 날 거 같다,고 했던가. 그래도, 그래도, 이건 소설이잖아. 어쨌든 화가 났단다. 의도치 않은 반응인 걸.  

  서로 생김새도 알지 못하고, 우연으로라도 만난 적도 없고,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익명의 남자(혹은 여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도 아닌, 두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을까. 가끔은, 그들의 메일을 훔쳐 읽다가 얘네, 지금 사랑하는 거 맞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사랑이라고 결론짓는 내 생각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호기심이든, 장난이든, 조건만남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두 사람은 서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보고 싶어요, 레오. 잘자요, 에미.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모닝, 굿모닝. 그러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채팅창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에게 호감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어린 시절 숱하게(?) 채팅을 하다가 아, 이 사람 참 궁금하다,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만나고 싶다, 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생김새를 묻는다. 키는 몇인가요, 몸무게는 몇인가요, 파마했나요, 생머리인가요, 어떤 옷을 즐겨 입으세요, 안경은 썼나요, 눈은 큰가요?  마음과 마음으로 오가던 두 사람은 이제 물음과 물음과 물음을 통해 어느새 서로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마침내! 아, 우리 만나요.  

  그래서 만났다. 만났는데 이상하다. 그때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도, 그 사람에게 그때 그 사람이 아닌가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반할 만한 외양이 아니어서였는지, 아니면 스타일이 문제였는지, 몽타주를 잘못 그린건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난 건 실수였다. 채팅창을 통해서만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건데. 그렇게 오랜 세월 메일을 주고 받은 레오는 에미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에미는 레오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 건지 궁금한 건 '이들이 만났을까', '만났다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물음에 닿아있기 때문인지도.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여기까지. 분명한 건, 나에게 에미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란 거. 어느날 나에게 이런 메일이 왔(으면 좋겠)다.

  "제목 : 구독 취소. 정기구독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메일로 취소 신청을 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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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 선물은 아무나 하나
    from 남은 건 책 밖에 없다 2009-09-04 17:09 
    8월의 어느 여름 밤. 존경하는 B선배와 W를 이태원에서 만났다. B선배가 출판사를 운영하는 L님을 모시고 나왔다. 비록 수준이 좀 높지만(!!) 내가 무척 좋아라 하는 출판사. L님에게 처음 인사드리면서 "출판해주신 좋은 책들 덕분에 행복한 밤들이 꽤 있었다"는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응이었음에도 불구, 나 멘트가 넘 매끄럽구나, 빠다 바른듯...하면서 살짝 스스로 놀랐던..ㅋ ) 처음에 갔던 멕시칸+
 
 
반딧불이 2009-09-0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방문취소, 아프님의 서재 정기방문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댓글로 취소신청을 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이런것도 되나요?

마늘빵 2009-09-04 09:15   좋아요 0 | URL
으흣. ^^

머큐리 2009-09-0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한 번 읽으려구요..ㅎㅎ 정말 괜찮으려나???

다락방 2009-09-04 08:22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라니깐요!! (이젠 막 화낸다 ㅎㅎ)

마늘빵 2009-09-04 09:15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라니깐요!! (이젠 막 화낸다 ㅎㅎ) 2

비로그인 2009-09-04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리뷰를 못쓰겠어요. 정말 너무 멋진 연인을 만나 그저 하릴없이 그녀 얼굴만 쳐다보는 그런 사람의 기분이어요.

마늘빵 2009-09-04 09:16   좋아요 0 | URL
일곱번째 파도 리뷰를 쓰려다가, 쓰다가 책을 바꿨어요. 일곱번째 파도는 쓸 수 있으려나. 소설의 느낌을 살려 쓰고 싶었지만, 못 쓰겠더라고요. ^^

다락방 2009-09-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아프락사스님이 써주셨고,
[일곱번째 파도]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 반드시, 반드시 새벽 세시를 먼저 읽고 읽는다.

후훗.
저 둘의 순서가 바뀌면 재미는 절반도 안될거에요, 정말.

마늘빵 2009-09-04 09:16   좋아요 0 | URL
딩동댕.

머큐리 2009-09-05 19:20   좋아요 0 | URL
참고로 이 책은 밤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새벽이면 더 좋고...

또치 2009-09-0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거 이제야 읽었는데...
레오, 에미, 베른하르트, 모두 다 내 곁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출근길에 그 생각하니까 살짝 눈물도 나려고 했어요...
암튼 이건 다 애초에 다락방님, "넛 때문이다" !

마늘빵 2009-09-04 09:46   좋아요 0 | URL
엇, 또치님도 설마 베른하르트에 감정이입한거에요? 그런거에요? ^^

또치 2009-09-04 09:52   좋아요 0 | URL
세 사람 모두에게 다 감정이입이 돼요. 휴, 힘들어.

다락방 2009-09-04 10:55   좋아요 0 | URL
어? 여기에 나 있네요 ㅎㅎ

마늘빵 2009-09-04 11:26   좋아요 0 | URL
여기에 나 없다.

무해한모리군 2009-09-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so-so였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게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아프락사스님은 뵙고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너무 똑같아서 놀랐는데~

마늘빵 2009-09-04 09:46   좋아요 0 | URL
엇, 나를 만났을 때 상상했던 이미지랑 같았다고요? ^^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흐흐. <일곱번째 파도>보다는 이 책이 더 입이 바싹 마르고, 두근두근 거려요. 두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들은 어떻고. 번역 참 잘한듯.

무해한모리군 2009-09-04 11:01   좋아요 0 | URL
목소리는 생각보다 조금 느끼했고 ^^
모습은 생각처럼 부드러운 가운데 단정한 모습이 보였어요~
금요일이니까 칭찬모드~~

마늘빵 2009-09-04 11:2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도 눈이 크고 맑고 다정다감한 인상이 딱 맞았어요. 금요일은 칭찬모드. ㅋㅋㅋ

레와 2009-09-0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장 이메일 친구를 만들고 싶어 몸을 부르르르 떨었어요! ㅋㅋ

마늘빵 2009-09-04 11:25   좋아요 0 | URL
메일 주소 입력란에 아무 주소나 쓰고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스팸 메일이라고 지워버리려나. -_-

레와 2009-09-04 14:14   좋아요 0 | URL
음.. 그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ㅎㅎ

무스탕 2009-09-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아프님 페이퍼의 첫 줄, 붉은 글씨만 읽고 바로 요기로 마우스 내려버렸어요 ^^
아프님 권장대로 아무 소식도 접하지 않고 읽을거에요!!
(눈 감고, 귀 막고 앞으로만 가야지, 꼭!!)

마늘빵 2009-09-04 23:06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네, 사전 정보 없이 읽으시는 게 제일 좋아요. 야심한 시각에 두 시간이면 다 보지 않을까 해요. ^^ 분위기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