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1
콰메 앤터니 애피아 지음, 실천철학연구회 옮김 / 바이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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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메 앤터니 애피아.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태생의 학자들의 이름을 접하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름을 접하니 어색하다. 마치 미국 대통령 후보로 '버럭 오바마'를 처음 알게 됐을 때의 느낌이랄까. 당시에도 언론은 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워했었다. 애피아의 이름을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삼인출판사에서 번역돼 나왔던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책에서 이미 만난 바 있다. 너스봄이 주가 되는 책에서 애피아를 만났듯 애피아가 주인공인 이 책에서는 너스봄을 만날 수 있다.  

  세계시민주의.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애피아가 말했듯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들은 기원전 4세기경의 키니코스 학파이다. "당시 이들은 사회 관습과 전통, 학문, 예술 등을 무시하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면서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했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헬레니즘 세계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계시민을 자칭하곤 했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로 이어지는데, 당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도시국가가 무너진지 오래고, 그리스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제 한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라고 생각했고, 개인보다는 전체를 중히 여겼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했고, 운명론에 빠지게 되었다.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는 "민족 공동체에서처럼,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도 공존의 습성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때 공존의 습성은 함께 갈아가기와 연대하기를 위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대화"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는 나아가 이때의 "대화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후반부에 있다. '얕은 연못'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장인데, 여기서 애피아는 철학자 피터 엉거와 피터 싱어를 언급한다. (이름이 비슷한 엉거와 싱어가 형제거나 친척은 아닌 듯 하다.) 그의 비판은 피터 엉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봤을 때) 피터 엉거와 피터 싱어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감안하면, 그 비판은 피터 싱어에게도 적용이 된다. 또, 엉거와 함께 싱어도 비판의 도마에 올리고 있다.

 최근 산책자에서 나온 피터 싱어의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를 읽었다면, 애피아의 비판에서 생각해 볼 만한 구석이 많다. 나는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 싱어만큼이나 '이상'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고, 혹자는 싱어가 현실을 모른 채 지극히 이상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애피아의 비판도 여기에 닿아 있다. 세계시민주의에서는 결국 전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세계시민주의자인 애피아와 실천윤리학자 싱어가 다른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건 그 때문이다. 싱어를 세계시민주의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싱어의 생각은 이미 세계시민주의적이다.  

  싱어는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우리가 고급 취미를 줄임으로써 세계의 절반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어느 얕은 연못에 한 아이가 빠진 것을 보았다면, 내 옷이 진흙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죽으면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그보다 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점을 점차 확대하며 모든 상황에 적용한다. 유니세프로 부터 헌금 봉투가 왔다. 나는 100달러를 보내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는 굶어죽을테니까.  

  그러나, 애피아는 여기에 반대한다. 그는 아이를 구하는 데에는 찬성하지만, 그 아이를 구하는 방법이 지금 당장 내가 100달러를 내놓는 것인가 하는데 의문을 제기한다. 애피아는 매사에 우리가 이렇게 돈을 내놓고, 희생을 하는 것이 진정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다는 것이 우리가 모든 재산을 남에게 준다는 것을 실제로 수반하느냐고 묻는다. 애피아는 세계의 굶주리는 이들과 약자를 돕는데는 찬성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엉거와 싱어는 세상의 나쁜 일 전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애피아는 나 자신을 파산시킬 만큼 엄청난 액수를 유니세프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더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애피아는 "우리의 의무는 전체의 짐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공평하게 져야 하지만, 자신의 몫 이상을 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싱어가, 물에 빠진 열 명 중 한 명을 구하고서 나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지 말고, 남은 어른 아홉 명이 빠진 아이 아홉 명을 구하러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다시 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점을 비판한다. 내 몫을 다했어도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싱어와 그러지 말고 모두가 공평하게 짐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애피아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싱어보다는 애피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의식 있는 개개인 몇몇이 뛴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싱어가 감성에 호소하는 주장을 편 데 비해, 애피아의 비판이 이성에 의거하고 있어 애피아의 비판이 핀트가 살짝 어긋났다고 말할 수는 있다. 싱어는 단지 그만큼 절박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절박함에 대해 이성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가혹하다. 애피아는 또 싱어가 - 책에선 엉거를 언급한다 - 빌게이츠의 기부 행위에 찬사를 보낸 것에 대해서, 그런 빌게이츠의 행위도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매사에 돈을 내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한다. 부가 부를 벌기 때문이고, 저축을 꾸준히 해서 나중에 기부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애피아의 생각에 반대한다. 빌게이츠가 부자가 되어 기부를 하는 반면, 부자가 되어도 그만한 기부를 하지 않는 대기업 총수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기부는 그때그때 하는 것이지, 나중에 몰아서 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기부 문화를 더 죽이게 될 것이다.  

  애피아와 싱어. 둘다 세계시민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세계의 빈곤을 없애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싱어가 좀더 적극적으로 개인의 실천을 요구한다면, 애피아는 그보다는 시스템 상의 개선에 주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애피아는 싱어를 비판했지만, 크게 봤을 때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세계시민주의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들에게 그런 이방인들을 기억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미스가)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이라 부른 것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이 실천을 더 잘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요구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문명을 더욱 세계시민주의적으로 만든다면 더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도덕적 요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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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9-1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기회가 되면 이것도 일독해야 겠어요...ㅎㅎ

마늘빵 2009-09-16 13:47   좋아요 0 | URL
^^ 싱어에 관한 부분은 책에서는 뒷쪽에 적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걸 주로 쓰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