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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절친한 사이로 소문난 소설가 KY와 소설가 KJ는 둘 중 누군가 먼저 죽으면 죽은 사람의 컴퓨터를 찾아서 하드디스크를 부숴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력이 익지 않은 시절에 쓴 원고나 퇴고를 하지 않은 초고가 세상에 공개되면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소설가 정미경의 유고작 <당신의 아주 먼 섬>을 읽는 동안 '내가 감히 이 소설을 읽어도 괜찮을까' 하고 몇 번이나 자문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남편 김병종이 집필실을 정리하다 발견한 미발표 원고를 그 상태 그대로 출판사에 보내서 완성된 것이 이 책이다. '다시는 그녀의 새로운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남겨진 그녀의 글 한 쪼가리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김병종의 변(辯)이다.
그래도 작가의 마음은 그게 아닐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으로는 계속 문장을 쫓고 소설 속 풍경을 상상했다. 소설의 무대는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돌아 멀리서 보면 산과 바다가 모두 검게 보인다 해서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섬, 흑산도. 여름을 앞둔 이 섬에 짧은 머리카락을 세차용 브러시 마냥 무지개색으로 물들인 여고생 이우가 찾아온다.
이 섬에서 태어났지만 철들자마자 섬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연수는 하나뿐인 딸 이우를 천덕꾸러기 취급했다. 똑똑한 머리로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학교생활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고3이 되어서도 겉돌기만 하니 엄마로선 애가 탈 만하다. 결국 연수는 이우를 고향 친구 정모에게 내려보낸다. 여름 한 철 섬에서 느긋하게 지내고 나면 이우도 도시 생활이 그리워질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다.
정모는 연수와 마찬가지로 철들자마자 섬을 떠났다가 도시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도서관을 짓겠다고 귀향했다. 사람들은 작디작은 섬에 책 읽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며 정모를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지만, 정모는 꿈쩍하지 않고 도서관 짓는 일에만 매진한다. 정모가 도서관을 짓는 데 필요한 부지며 비용은 전부 정모의 오랜 친구이자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인 영도의 외아들 태원이 대고 있다.
이우는 처음에 섬 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지만, 정모와 이웃에 사는 판도, 이삐 할미의 보살핌을 받으며 십 대 다운 활기를 조금씩 되찾는다. 바다 수영도 배우고 비린내 나는 음식에도 금세 익숙해진다. 이대로 섬에서 정모 아저씨와 판도와 이삐 할미와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할 무렵, 이우로서는 잊을 수 없고 잊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섬에 오기 전 이우가 맺은 관계의 씨앗이 그제야 싹을 틔우고 이우를 옭아맨다.
푸른 바다 위에 뚝뚝 떨어져 있는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의지할 혈육이라고는 둘뿐인데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연수와 이우 모녀를 볼 때 특히 그랬다. 오랜 친구인데도 흉금을 터놓지 못하고 열등감만 끌어안고 있는 정모와 태원의 관계도 위태롭다. 판도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이우와 그런 이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판도의 관계 역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이들이 마침내 엉키고 섞일 때, 그 장소 역시 섬이라는 사실이 모순이라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을 받았다. 돈이니 명예니, 자존심이니 열등감이니 하는 것들도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 안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물어뜯고 싸우고 죽일 듯이 미워해도 섬 안에 있으면 어떻게든 같이 살아나가야 한다. 마침내 이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한솥에 끓인 밥을 먹고 한 데 어울려 놀 때, 섬 같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섬이로구나, 그 섬은 아득히 멀어 보이지만 실은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없이 따뜻하고 푸근한 이 소설을 작가가 발표하지 않은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미완의 글을 멋대로 읽은 걸 알면 작가가 얼마나 섭섭해할지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이 소설 덕분에 나라는 독자가 뒤늦게나마 당신의 작품 세계에 입도(入島) 했으니 이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변을 늘어놓는다면 너무 뻔뻔하게 들릴까. 완성되지 않은 채로도 근사한 이 소설을 작가 생전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서 해본 소리라고, 그렇게 여기며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