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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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 사전을 사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을 쓴 민바람 작가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 한국학을 전공했고 한국어강사로 10여 년을 일했다. 한국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텐데, 정작 순우리말 사전을 가지게 된 건 한국어강사 일을 그만둔 후의 일이다. 선물 받은 순우리말 사전을 읽으며 저자는 우리말인데도 외국어보다 낯설다는 사실과 읽을수록 힘이 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마음에 든 순우리말 낱말을 활용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분명 우리말인데 듣거나 읽어본 적 없는 낱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철이 지나 불필요해진 물건을 뜻하는 '가을부채',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단단히 해둔 다짐을 의미하는 '마음고름', 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일을 비유한 '눈썹씨름', 남이 보지 않는 데에서 젠체하는 호기를 가리키는 '이불활개' 등 풀이를 들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낱말들. 이런 낱말들을 모르는 채 한국어 공부는 다 했다 여기고 외국어 공부에만 몰두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이런 낱말들도 재미있지만, 낱말들과 함께 풀어낸 저자의 사는 이야기도 따뜻하고 푸근하다. 불안정하고 경쟁이 심한 직장에 다니면서 저자는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 병원 신세를 지는 일도 여러 번 있었고, 성인 ADHD와 우울증, 사회불안장애 등을 진단받기도 했다.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한탄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덕분에 삶의 모습이 한 가지가 아니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배우기도 했다. 단어가 있다는 건 "많은 이가 이미 같은 생각을 지나왔다는 것". 병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같은 증세를 겪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도,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낱말 중에 나는 '가을부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부채의 전성기는 여름이지만, 여름이 지났다고 해서 부채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다음 해의 여름을 대비해 넣어두었다가 더위가 시작될 즈음 다시 꺼내 부치는 것이 부채다. 사람에게도 전성기가 있고, 그 때가 아니면 찾는 사람이 적을 수도, 수입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서 다시 전성기가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전성기가 오지 않아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저자의 파트너 진 님의 말을 빌리면 "그런 캐릭터도 괜찮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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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온! 셔플 Shuffle 1
카키후라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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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인 사쿠마 유카리와 시미즈 카에데는 유카리의 언니가 다니는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 축제에 놀러 간다. 초대장이 있어야 축제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줄행랑을 치다 우연히 스쿨 밴드의 무대를 보게 된 두 사람. 박력 넘치는 연주에 반한(카에데가 반한 건 다른 것인듯하지만...) 두 사람은 곧바로 스쿨 밴드를 하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이튿날 알아보니 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경음부는 없고 경음동호회만이 있었다. 


유카리와 카에데가 서둘러 경음동호회 부실로 찾아가니, 부실에 있는 사람은 2학년 사토 리코뿐이다. 리코는 안 그래도 회원이 적어서 학생회로부터 부실을 비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유카리와 카에데의 가입을 환영한다. 기존 회원인 리코와 신규 회원인 유카리와 카에데, 여기에 교실에서 유카리와 카에데 사이에 앉는다는 이유로 반강제(아니고 그냥 강제...)로 가입을 하게 된 사와베 마호까지 네 사람이 경음동호회 활동을 시작한다.


<케이온! 셔플>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기 만화 <케이온>의 스핀오프 만화다. <케이온>과 마찬가지로 밴드 경험이 전혀 없는 여고생들이 경음동호회에 가입해 밴드 활동을 하게 되면서 각자의 악기를 익히고 합주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린다. 개인적으로는 유카리 자매가 등장하는 씬들이 좋았고(언니 캐릭터가 리얼 언니 같음 ㅋㅋ), 리코의 외모와 성격이 너무나도 취향 저격이다. 얼른 2권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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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츠가이 4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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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의 작가 아라카와 히로무의 최신 연재작 <황천의 츠가이>는 밤과 낮을 양분하는 운명을 타고난 쌍둥이 유르와 아사의 이야기를 그린다. 시골에서 태어난 쌍둥이는 어릴 때 헤어졌다. 시골에 남아 부모님 대신 할머니를 모시며 살았던 유르는 마을을 떠난 줄 알았던 부모님과 아사를 찾기 위해 도시로 간다. 좌우 님을 츠가이로 거느리는 츠가이 구사자가 된 유르는 데라와 하나의 협력을 받아 가족을 찾는다. 


3권에서 유르는 카게모리 저택을 찾아가 아사와 재회했다. 아사로부터 자신은 해(解), 유르는 봉(封)의 능력을 지녔다는 말을 들은 유르는 아사와 헤어져 데라의 은신처로 간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흉악한 츠가이인 데나가 아시나가의 차지가 되어 있었고, 유르 일행은 데나가 아시나가와 대결을 벌인다. 인간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잡아먹기 좋아하고, 1200년 동안이나 봉인되어 있었던 데나가 아시나가가 대결에 임하는 태도는 절박하다. 


대결의 결과로 유르 일행은 데나가 아시나가의 주인 타데라 겐과 만난다. 알고보니 겐은 데라의 이복 동생으로, 10년 전 유르의 부모님이 마을에서 도망치는 걸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선대 타데라, 즉 자신의 아버지임을 밝힌다. 유르 일행은 겐이 유르의 부모님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겐에게 잘해준다. 이 대목은 가족 드라마 같지만, 데라의 집을 벗어나면 유르를 노리는 츠가이들이 득시글득시글하다. 과연 5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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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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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올가는 한때 작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대학 교수인 남편 마리오와 남매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오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으니 올가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마리오가 말한 '사랑하는 여자'란 몇 년 전 마리오와 일 때문에 가깝게 지냈던 여자, 가 아니라 그 여자의 딸이다. 올가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줄 알았던 마리오가 자신과 아이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한편, 이제 막 미성년자 신분에서 벗어난 여자(애)와 사귄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집을 나가고, 올가에게는 엄마 말을 지겹게 안 듣는 아이 둘과 남편이 데려온 개 오토만이 남는다. 평생의 사랑인 줄 알았던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떠난 것만 해도 슬프고 괴로운데, 그가 남긴 아이들과 개까지 돌봐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다. 그 순간 올가는 고향에서 '불쌍한 여자'라고 불렸던 이웃 여자를 떠올린다.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그 여자도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집을 떠난 후 미쳐버렸다. 올가 자신의 미래가 그 여자일 줄이야. 


소설 후반까지도 올가는 마리오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인다. 살림을 내팽개치고 아이들과 개를 돌보지 않으며 자기 몸조차 못 씻고 못 먹인다. 홧김에 그동안 한심하게 여겼던 이웃 남자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기도 하고, 외출을 했다가 가스 불을 끄고 나오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천천히 이성을 되찾으면서 마리오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과연 그는 내가 이렇게 울고불고 매달릴 정도로 괜찮은 남자일까. 


올가가 마리오의 배신을 알고 괴로워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머리로는 딸 뻘인 여자에게 빠져서 가족을 내팽개친 남편이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를 원하는 올가를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이해가 되었다(아아 사랑이란...). 그랬던 올가가 점점 정신을 차리고 남편과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지금의 남편의 커리어를 만들어준 것이 올가이고, 올가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게 한 것이 남편임을 깨닫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버려진 사랑>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다른 두 작품인 <성가신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은 모녀 간의 이야기인 반면 <버려진 사랑>은 부부 간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성가신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을 다 읽고 나서는 기쁨이나 후련함 같은 감정을 못 느꼈는데 <버려진 사랑>을 다 읽고 나서는 기쁘고 후련했다. 옛 남자는 새 남자로 잊을 수 있어도, 엄마와 딸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런 의미에서는 다른 두 작품보다 읽기 편한 내용이었다(TV 드라마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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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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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사는 40대 초반의 만화가 델리아는 나폴리에 사는 어머니가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시신을 확인하러 간 델리아는 어머니가 평소에 입던 낡고 평범한 디자인의 속옷이 아닌 처음 보는 세련된 디자인의 속옷 차림인 것에 의문을 품는다. 어머니는 대체 누구와 만나려고 이런 속옷을 입었을까.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가 혼자 살던 집으로 간 델리아는 어머니의 소지품을 뒤지고 어머니의 형제와 이웃을 만나며 자신이 알지 못한 어머니의 삶을 알아내기 위해 애쓴다. 


이 과정에서 델리아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카세르타'. 그 이름을 쓰던 남자는 한때 아버지의 동업자였고 어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델리아의 아버지는 카세르타가 어머니에게 선물을 보낼 때마다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말하는 꼴도 못 볼 만큼 의처증이 심해졌다. 어린 델리아는 딸인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어머니를 카세르타가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카세르타에게 갈까봐 불안했다. 


이후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혼자서 자식들을 부양했다. 델리아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출가시킨 후 카세르타와 만났고, 어쩌면 카세르타가 어머니의 마지막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카세르타를 찾아 다닌다. 델리아는 오래 전 아버지와 삼촌이 카세르타와 어머니의 관계를 추궁하다 카세르타를 심하게 때리고 고향에서 내쫓은 일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끝내 죽게 한 것은 전혀 뜻밖의 인물임을 알게 된다. 


<성가신 사랑>은 '나폴리 4부작'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엘레나 페란테의 데뷔작이다. 이 소설은 <버려진 사랑>, <잃어버린 사랑>과 함께 '나쁜 사랑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딸의 입장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그린다. 델리아는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 때문에 뭇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아버지에게 의심을 사고 가정을 위태롭게 만드는 건 못마땅했다. 


델리아는 어머니를 의심하고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는 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시선을 답습해 어머니를 의심하고 증오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델리아는 자신이 어머니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했든 간에 어머니는 델리아를 지켜주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델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세상에 알려졌다면 델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을 만나고 고향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델리아가 아직 어렸고 델리아 또한 어떤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므로,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받게 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델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이후 어머니가 일절 말하지 않은 것은 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망친 딸에게 복수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엘레나 페란테가 주로 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 어머니라고 해서 자식을 무한히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내용의 -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임을 감안한다면 그럴 듯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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