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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ㅣ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신라 경주의 6두품 집안 설씨 가문의 열한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미은은 부모님과 손위 형제를 연달아 잃는 불운을 겪는다. 이 와중에 미은보다 한 살 많은 오빠 자은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일하게 남은 손위 형제인 호은이 미은에게 무시무시한 제안을 한다. 당나라 유학을 앞두고 있던 자은을 대신해 미은이 자은인 척하고 당나라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남동생이 형 행세를 하는 것이면 몰라도 여동생이 오빠 행세를 할 수 있을까. 미은은 망설였지만 호은의 태도가 강경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규방에 갇혀 사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그래서 미은은 자은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예정보다 당나라에 오래 머물렀던 자은이 마침내 신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신라에 도착할 때까지 거친 사내들이 득시글득시글한 비좁은 배 안에서 남장여자인 걸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인데, 신라에게 망한 백제 출신 장인 목인곤이 자꾸만 자은에게 말을 건다. 이 와중에 배 안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 남자와 동행이었던 여자들이 항해 중인 배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정세랑의 신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역사 추리 소설이다. 참고로 나는 역사 추리 소설을 소설 장르 중에 가장 좋아한다. 작가 후기에 언급된 김탁환 작가님의 '백탑파 시리즈'도 전부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 시리즈도 거의 다 읽었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도 무척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 정세랑 작가가 지금처럼 SF,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서 한국의 코니 윌리스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안 되어도 괜찮아요. 작가님 마음대로 써주세요 ㅎㅎ).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총 10편으로 예정된 시리즈의 1편이다. 책에는 네 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네 개의 에피소드 모두 좋았지만, '이게 정세랑이다' 싶었던 에피소드는 세 번째 에피소드인 <보름의 노래>였다. 매년 여름 금성(경주의 옛 이름)에서 펼쳐지는 베 짜기 시합에 사용되는 베틀이 부서진다. 누군가가 고의로 베틀을 부순 걸 알게 된 자은은 범인 찾기에 나서는데, 용의선상에 오른 여성들의 사연이 하나같이 안타깝다.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고 있다거나, 남편이 폭력적이고 무능하다거나. 대체 이 피해자 같은 용의자들을 자은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는데, 과연 완벽하게 -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해지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기뻤다. 그러니 안심하고 읽으시길.
자은과 인곤의 티키타카도 좋았다. 자은은 여성이고 인곤은 남성이니 이성 간의 밀당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두 사람의 성별이나 젠더와 관계 없이 두 사람이 나누는 모든 대화가 재미있었다. 마치 셜록과 왓슨의 대화 같았달까. 겉보기에는 둘 다 남성이지만 자은은 사실 여성인데,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은이 우위에 있는 점도 좋았다. 여성인 자은은 정치와 역사에 해박하고, 남성인 인곤은 옷과 장신구, 가구 등에 조예가 깊은 점도 성별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트리는 것 같아서 좋았다. 얼른 2편 나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