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를 기다리며 위픽
조예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해는 소꿉친구 우영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우영이 산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는 정해는 우영이 바다에서 자살했을 리가 없다고 보고 우영이 죽은 섬으로 간다. 우영이 죽은 섬은 정해가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잠깐 살았던 곳으로, 현재는 영산교라는 토착 종교 조직이 섬 전체를 장악한 상태다. 우영이 죽은 이유가 영산교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 정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영산교에 뛰어든다. 


조예은의 소설 <만조를 기다리며>는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의 한 권인 만큼 길이가 길지 않다(132쪽). 그러나 재미와 감동의 볼륨감은 장편소설 못지 않다. 우영이 태어나고 자란 섬 '미아도'를 장악한 '영산교'는 신자들에게 '재회, 소망, 사랑'을 강조한다. 교주인 최양희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헌신하면 그들이 다시 만나고 싶은 상대와 재회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영산교의 약속이다. 정해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믿는 척하면서 최양희의 지근거리로 다가가는 한편 우영의 죽음에 대해 조사한다. 


정해는 우영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누비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정해에게 우영은 단순한 소꿉친구가 아니다. 정해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곁을 지켜준 유일한 사람이며 말 그대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정해는 그런 우영을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로 생각했지만, 우영도 정해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우영이 정해에게 해준 만큼 정해는 우영에게 뭔가를 해주었던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은 미안함과 죄책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결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나는 캐나다의 추리 소설 작가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읽는 중이다. 전부터 이 시리즈의 존재를 알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읽기 시작한 건, 이 시리즈가 원작인 드라마 <쓰리 파인즈>를 봤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아르망 가마슈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발견하는 사람이군요." 그 말이 좋고 그 말을 듣는 아르망 가마슈의 성품이 좋아서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발견하는 사람. 


정혜윤 작가의 <삶의 발명>을 읽으면서 작가님도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서문에서 작가님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고백한다. 사고 직후 치아가 몇 개나 부러졌다고 하신 것을 보면 큰 사고였던 것 같다. 나라면 가해자를 욕하고 나한테 이런 사고가 일어나다니 하늘을 원망했을 것 같은데, 작가님은 사고 덕분에 겸손을 배웠다고,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셔서 놀랐다. (그래도 작가님 더는 다치지 마시고 아프지 않으시길... ㅠㅠ)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책에는 라디오 PD인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나온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연은 일제강점기 때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조선인 전범들의 이야기이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인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은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통해 알고 있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병사로 전쟁에 끌려가느니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가는 편이 대우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패망했고 일본군에 부역한 이들 중 다수는 전범으로 처형되고 나머지는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한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무지가 죄'라며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은 일본인 전범들이나 친일파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책에 나오는 대구 지하철 사고, 씨랜드 화재 사고, 고 김용균 노동자 산재 사고, SPC 산재 사고의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받는데,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잘만 살아간다. 가해자 측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 또한 괴로워하고 자책하는데, 결정권자였던 사람들은 영화 <밀양>의 가해자처럼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받았는지 아무런 반성이 없다. 


여기까지는 내가 늘 접하는 이야기이고 나도 늘 하는 생각인데, 저자는 이런 이야기에서조차 희망을 발견한다. 전범으로 지목되어 사형을 앞둔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살핀 이야기,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다른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유족들을 챙기는 이야기, 인간만큼 동물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는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발명'되는 한, 우리의 삶도 계속해서 살아볼 만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전해주는 저자에게 고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라 경주의 6두품 집안 설씨 가문의 열한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미은은 부모님과 손위 형제를 연달아 잃는 불운을 겪는다. 이 와중에 미은보다 한 살 많은 오빠 자은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일하게 남은 손위 형제인 호은이 미은에게 무시무시한 제안을 한다. 당나라 유학을 앞두고 있던 자은을 대신해 미은이 자은인 척하고 당나라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남동생이 형 행세를 하는 것이면 몰라도 여동생이 오빠 행세를 할 수 있을까. 미은은 망설였지만 호은의 태도가 강경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규방에 갇혀 사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그래서 미은은 자은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예정보다 당나라에 오래 머물렀던 자은이 마침내 신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신라에 도착할 때까지 거친 사내들이 득시글득시글한 비좁은 배 안에서 남장여자인 걸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인데, 신라에게 망한 백제 출신 장인 목인곤이 자꾸만 자은에게 말을 건다. 이 와중에 배 안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 남자와 동행이었던 여자들이 항해 중인 배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정세랑의 신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역사 추리 소설이다. 참고로 나는 역사 추리 소설을 소설 장르 중에 가장 좋아한다. 작가 후기에 언급된 김탁환 작가님의 '백탑파 시리즈'도 전부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 시리즈도 거의 다 읽었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도 무척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 정세랑 작가가 지금처럼 SF,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서 한국의 코니 윌리스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안 되어도 괜찮아요. 작가님 마음대로 써주세요 ㅎㅎ).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총 10편으로 예정된 시리즈의 1편이다. 책에는 네 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네 개의 에피소드 모두 좋았지만, '이게 정세랑이다' 싶었던 에피소드는 세 번째 에피소드인 <보름의 노래>였다. 매년 여름 금성(경주의 옛 이름)에서 펼쳐지는 베 짜기 시합에 사용되는 베틀이 부서진다. 누군가가 고의로 베틀을 부순 걸 알게 된 자은은 범인 찾기에 나서는데, 용의선상에 오른 여성들의 사연이 하나같이 안타깝다.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고 있다거나, 남편이 폭력적이고 무능하다거나. 대체 이 피해자 같은 용의자들을 자은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는데, 과연 완벽하게 -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해지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기뻤다. 그러니 안심하고 읽으시길. 


자은과 인곤의 티키타카도 좋았다. 자은은 여성이고 인곤은 남성이니 이성 간의 밀당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두 사람의 성별이나 젠더와 관계 없이 두 사람이 나누는 모든 대화가 재미있었다. 마치 셜록과 왓슨의 대화 같았달까. 겉보기에는 둘 다 남성이지만 자은은 사실 여성인데,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은이 우위에 있는 점도 좋았다. 여성인 자은은 정치와 역사에 해박하고, 남성인 인곤은 옷과 장신구, 가구 등에 조예가 깊은 점도 성별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트리는 것 같아서 좋았다. 얼른 2편 나왔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 없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정보라의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도 없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등장한 세계를 그린다. 이 세계에선 더 이상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없다.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는 신흥 종교 '교단'이 그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에 의해 형과 함께 교단에 맡겨져 자란 '태'는 NSTRA-14를 제조하는 제약회사를 상대로 테러 사건을 벌인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투옥된다. 제약회사 대표였던 '경'의 부모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태'가 일으킨 테러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경'을 피해자라고 부르지만, 어릴 때부터 오빠와 함께 신약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경'으로서는 '태'가 부모를 없애준 것이 오히려 고맙다. 


또 다시 '교단'에 의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태'를 심문한다. '태'는 자신의 형 '한'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한'이 숨어 지내는 호수가 근처 별장으로 데려간다. 한편 '경'은 회사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헤어진 '현'과 재회한다. '경'의 부모가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직원이었던 '현'은 대표의 딸인 '경'을 모시다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었다. '현'과 헤어진 후 혼자 힘으로 살았던 '경'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이 소설은 등장 인물 대부분의 이름이 외자라서 성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오빠가 있는 것을 보니 여자, 형이 있는 것을 보니 남자 - 이런 식으로 문장에 드러나 있는 정보를 단서로 삼아야 성별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오해였던 걸 깨달은 대목이 (나에게는) 두 번 있었다. 한국어로는 오빠나 형이라는 단어를 보고 해당 인물의 성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오빠나 형이나 '(older) brother'인데, 영어로 번역된 글을 읽으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다. 


획기적인 진통제가 개발되어 사용화된 가상의 미래를 상정해서 쓴 소설이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도 읽혔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뛰쳐 나와 교단에 투신하는 어머니, 교단의 가르침에 세뇌되어 죄를 짓고 감옥 신세를 지는 아이들, 부모의 돈벌이에 이용되는 또 다른 아이들과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와 대중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요즘 유행한다는 마약이 NSTRA-14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리아나 도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지>, <소녀 연예인 이보나>, <마고> 등을 쓴 한정현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한정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해서 산문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기대한 대로 좋았다. 저자가 첫 산문집의 테마를 '환승'으로 정한 건, 평생 남에게 자랑할 만한 특기가 없었던 저자가 환승만은 잘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자는 '이름 환승'을 잘했다. 저자는 어릴 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정현' 대신 스스로 지은 난희라는 이름을 썼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에서 내내 '한정현'으로 불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필명으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픽을 썼다(정확히는 좋아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좋아하는 아이돌을 대신하는 다른 아이돌에 대해 썼지만...). 


전공은 영어인데 주변 사람들(정확히는 전 애인들)의 영향으로 인문학과 사회학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뉴질랜드에 정착할 마음을 먹은 적도 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한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직업은 소설가이지만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한줄기로 난 길을 걷다가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오면 그 길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달까. 


이런 저자의 삶의 방식은 저자의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자의 소설에는 여성,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이민자 같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가 많이 나온다. 저자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회가 가라고 떠미는 길을 걷는 대신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을 스스로 택한다. 아무도 길을 내주지 않으면 직접 길을 내기도 하고, 그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기꺼이 길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저자가 그동안 발표한 소설의 창작 비화도 나오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소설만큼 애정하는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뉴질랜드 유학 시절 배수아 작가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하셔서 나도 읽어보려고 한 권 주문했다. 이 책에 언급된 책과 영화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고 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