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아니어도 괜찮아
최정동 지음 / 한길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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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은데 뭐부터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을 때 구입한 책이다. 사실 저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라는 것과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추천사를 썼다는 것만 보고 구입을 결정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의 내용은 물론 문장과 사진까지 모두 좋았고,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서양사와 동양사에 두루두루 조예가 깊으신 분 같아서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저자는 오랫동안 음악 교육을 받거나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음악을 어렵게 생각하고 멀게만 느꼈다. 음악을 좋아하게 된 건 성인이 된 후의 일이다. 회사 앞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온 바흐의 첼로 선율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클래식을 비롯해 재즈, 가요, 국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음악을 들은 지 올해로 30년. 음악시간을 무서워했던 아이가 유력 매체에 음악 칼럼을 기고하는 음악 애호가가 되었듯이, 누구든 언제든 '뮤즈'를 만나면 음악의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이 책의 장점은 클래식 음악을 잘 아는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양연화>, <붉은 돼지> 등의 영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미스터 션샤인> 등의 드라마의 OST로 쓰인 음악 이야기도 나오고, 버스커버스커와 산울림, 송창식, 김광석 같은 대중 가수들의 이야기도 나와서 나처럼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조차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를 사석에서 만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백제가요 <정읍사>와 조선 궁중음악 <수제천>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책에는 유명 음악가나 연주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나온다. 그동안 이름만 들어본 연주자나 지휘자가 음악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어떤 평가를 받는지 상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같은 곡도 A가 연주하면 어떻고 B가 연주하면 어떠하다는 식으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이 책에도 그런 식의 평가가 종종 나온다. 대체 얼마나 들어야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일까. 나도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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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
이선 지음 / 궁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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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출입이 어려운 요즘. 가까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식물을 키우며 위로와 치유의 힘을 얻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일까. 예부터 선조들은 꽃을 가꾸고 나무를 돌보며 삶에 거름이 되고 양분이 되는 지혜를 얻었다. 이 책 <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에 바로 그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저자 이선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전통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식물을 접하며 배운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의 본문은 '서로 사랑하기', '모두 함께 살기', '끝내 살아남기', '다시 돌아보기'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챕터에는 각 주제에 해당하는 사자성어와 그에 관한 식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모두 함께 살기'이다. 식물 하면 심어진 자리에 그대로 자라서 주변과 조화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는 어떨까. 노지에서 자라든, 집안 베란다에서 자라든, 한곳에 밀집해 자라는 식물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햇빛과 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환경에 맞게 자신의 '몸'을 바꾸면서까지 '적자생존'을 도모한다. 이는 인간이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식물들도 '성격'이 제각각이라서, 어떤 식물들은 제 땅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호두나무, 소나무, 유칼립투스, 가죽나무, 단풍나무, 양버즘나무 등이 대표적이다(117쪽). 그렇다고 이런 나무들만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각자도생'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보도나 아스팔트 틈 같은 곳을 뚫고 자라는 민들레, 질경이, 중대가리풀 같은 '고진감래'형 식물들이 그렇다. 바위틈에 자라는 소나무나 앙코르와트의 테트라멜레스 등은 작은 뿌리들이 죽지 않고 버텨서 커다란 바위를 뚫고 전 세계인이 찾는 유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수적석천'의 예를 보면서, 우리도 작은 힘이나마 모아보는 것은 어떨까. 


서문에서 저자는 "아무리 인간세상과 식물세상이 흡사하다 해도 '식물국회', '식물정권', '식물정당' 등의 표현은 달갑지 않"다고 밝힌다. 정말 그렇다. 제 기능을 못하는 국회나 정권, 정당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식물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자 식물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은 식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고, 배워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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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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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기자이자 작가인 오리아나 팔라치가 생전에 쓴 자신에 관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제목과 저자만 보고 자서전일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팔라치가 남긴 글과 메모를 선별해 만든 책이다(어쩐지 자서전이라기에는 얇더라). 그래도 팔라치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대체로 빠짐없이 담고 있어 팔라치에 대해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팔라치가 기자 또는 작가로서 쌓은 업적보다는, 평생의 연인이었던 그리스의 혁명가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알레코스)와의 일화에 더 큰 비중이 할애된 점은 아쉽다. 


팔라치는 192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부모 둘 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생계가 불안했으므로, 팔라치는 뛰어난 성적으로 의대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특파원 자격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언론인이었던 삼촌의 권유로 종군기자에 지원해 이후 베트남 전쟁, 멕시코 반정부 시위, 중동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걸프전 등에서 활약했다. 


팔라치는 헨리 키신저, 아야톨라 호메이니, 덩샤오핑, 달라이 라마, 야세르 아라파트 등 20세기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취재한 것으로 유명하다. 책에는 키신저와 호메이니를 인터뷰하고 쓴 후기가 나온다. 키신저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부터 팔라치를 무시했고, 인터뷰를 마친 후에는 공개적으로 팔라치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 호메이니를 인터뷰할 때는 지켜야 할 이슬람 율법이 너무 많아서 정작 호메이니를 직접 대면했을 때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노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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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
듀나 지음 / 제우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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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가 1999년부터 자신의 인터넷 게시판에 '클리셰 사전'이라는 이름의 섹션을 만들어 수집한 영화(가끔은 드라마) 속 클리셰들을 정리한 책이다. 왜 전쟁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등장인물의 감동적인 연설로 끝이 날까, 왜 로맨스 영화의 여자 주인공에게는 게이인 남사친이 있을까, 왜 어린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고아일까 등등 한때는 독창적이고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었겠지만, 이제는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어 식상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아이디어들에 관한 신랄한 비판과 지적이 이어진다. 


제목인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는 여자 주인공의 운명을 좌우할 비밀(예 : 출생의 비밀, 남편의 불륜, 불치병 등등)을 여자 주인공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경우가 허다함을 의미한다. 저자가 예로 든 드라마 <하늘이시여>가 2005년에 방영된 작품인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 주인공만 모르는' 드라마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경우 제작진의 나태함을 탓해야 하는 걸까, 시청자들의 안일함을 탓해야 하는 걸까. 여자 주인공이 '모르는' 경우가 남자 주인공이 '모르는' 경우보다 많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특정 성(性)에 대한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저자가 10년, 20년 전에 쓴 글이 대부분이다 보니 인용된 영화나 드라마의 다수가 1990년대 혹은 2000년대의 작품이다(예 : <프렌즈>, <스크림>, <순풍 산부인과>,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등). 최신 영화, 최신 드라마의 클리셰 경향이 나오지 않는 건 아쉽지만, 10대, 20대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명작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그 이상의 연배인 독자들에게는 과거에 유행했던 작품들을 상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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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로서의 번역 - 영어 명작소설 깊이 읽는 법
고노스 유키코 지음, 김단비 옮김 / 유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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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영어 명작 소설 깊이 읽는 법'이라는 부제에 끌려서 구입한 책이다. 읽어 보니 과연 이 책을 읽으면 영어로 된 명작 소설을 전보다 깊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고노스 유키코는 일본의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영미 문학 전문 번역가이다. 이 책은 2016년 4월부터 2017년 3월까지 10회에 걸쳐 저자가 진행한 번역 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챕터마다 한 편씩 저자가 선정한 고전 명작을 읽고 직접 번역 연습을 해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번역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읽기'다. 원문을 제대로 읽기만 해도 번역의 8~90퍼센트는 해낸 셈이다. 가령 1장의 과제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을 예로 들어 보자. 원문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앤이 그 나이대 아이가 쓰기에는 어려운 단어와 표현을 구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부모 없이 고아원과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힘들게 자랐지만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싶어 하는 인물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 좋은 번역가라면 이런 점에 유의해 번역을 해야 한다. 


비슷한 예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 수 있다. 원문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홀든이 말끝을 얼버무리거나 젠체하는 말투를 즐겨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학 가는 학교마다 퇴학을 당하는 불량 학생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 이런 식으로 인물이 주로 쓰는 단어나 표현, 말투의 특성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분석하면서 읽으면 더욱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있다. 이는 번역뿐 아니라 독서에도 적용되는 조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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