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
비노바 바베, 김성오 옮김 / 착한책가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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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

 

그에 대해 알게 된 건 평전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브라만 출신으로 간디의 제자로 평화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교육운동에도 참여한 사람. 나중에 토지헌납운동을 벌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을 한 사람.

 

그 정도였다. 그의 교육론에 대해서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토지헌납운동이 더 내 마음에 다가왔고, 그 토지헌납운동이 자비가 아니라 의무임을, 토지를 달라고 하는 일들이 애원이 아니라 권리임을 천명한 그에게 놀랐고, 또 그런 운동으로 많은 토지를 기부받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됐다는데 더 놀랐었다. 인도란 나라 만만한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가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는 사실, 그것이 토지헌납운동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이탈림

 

그가 관여한 교육운동을 나이탈림(새로운 교육)이라고 한다. '새로운' 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교육을 거부하고, 새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나는 의미도 있고,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낡은 교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교육을 '기초 교육'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기초는 유치원이나 초등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초'를 배우게 하는 (분명 '가르치는'이 아니고 '배우는'이다. 이는 교사를 중심에 놓은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중심이 되는 교육, 그리고 교사 역시 학생이 되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교육을 한다는 의미다.

 

이 나이탈림에서 교사와 학생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이 지금의 교육처럼 학교라는 공간에, 교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수업시간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교과서로 특정한 교사에게 배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윤리가 기본이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비노바는 인도의 교육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특히 대학교육에 대해서는. 대학교육을 배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들은 지식위주로 배웠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자부심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노바는 대학을 나왔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좀더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비윤리적인 경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옳지 않은 행위를 덮으려고 하는 경우는 윤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오로지 지식이 중심이 된 교육의 결과인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금과 너무도 비슷하고, 비노바의 이 외침이 지금 우리에게 적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나이탈림은 이런 실생활과 괴리된 교육을 거부하고,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추구한다.

 

지행일치

 

그래서 비노바의 교육은 지행일치, 언행일치를 추구한다. 배운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행한다는 것은 가르친다는 것이자 곧 배운다는 것이다. 말이란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말은 곧 행동이다.

 

이것들이 따로 논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육이 아니다. 하여 교사는 독립된 공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단지 학생들과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생활 자체가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존재로서의 교사인 것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에서도 전문가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교사다.

 

그는 말로만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또 함께 함으로써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하는 존재다. 따라서 말과 행동이 가르침과 달라질 수가 없다.

 

통합교육

 

비노바는 통합교육을 주장한다. 통합교육은 교과목을 통합한 것만이 아니라 일과 공부를 통합한 것을 말한다.

 

그는 일에서 멀어진 교육은 죽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일을 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서는 옷을 만드는 실잣기가 필요했고, 농사가 필요했다. 비노바는 교사는 직접 실을 잣고,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 원리를 배우게 해야 한다고, 학생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교육의 우선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데 있다고 한다. 오로지 '가르치는 것'만 할 수 있다는 학생에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보는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어떤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오로지 '가르치는 것'만 아는, 실생활에서 자신의 필요를 직접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모르는 교사들만 양성하고 있지 않는가.

 

일을 할 줄 모르는 교사들이 일을 천시하는 교육을 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교육을 비노바는 낡은 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생활과 괴리된 교육, 이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육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비노바의 교육철학이다.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

 

비노바의 교육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교육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은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철학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배우게 해야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을 보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철학을 주고 있는가? 아이들이 어떤 것을 배우고자 하는가?

 

적어도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갈 때 의미있게 사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오직 대학입학을 위한 교육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은 천시하고,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는 직업을 가질까 궁리하게 하는 교육을 하지 않는지... 대학을 나오고 과연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자신의 생명을 잇는 존재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 오히려 그런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현실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우리는 교육개혁을 운운하지만 늘 방법론에 치중했지 철학에 대해서는 등한시했다. 이제는 교육에 대해서 진정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인지 교육 철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할 때다.

 

비노바의 교육은?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옛날 고리타분한, 그것도 발전하지 않고 농업이 중심이 된 인도의 이야기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가 이야기한 것들은 당시 인도의 상황에 맞는 교육론이었지만,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그의 주장이 지닌 핵심을 추구하면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교육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한 지식보다는 실생활과 연계된 지식을 추구하게 해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윤리가 중심이 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 교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 그는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학생이라고 지칭한다. 교사는 학생이어야 하고, 학생은 교사이어야 한다는 말...

 

이런 것들은 지금도 꼭 필요한 교육론이다.

 

이 책 글 하나하나가 참조할 것이 많은 교육에 관한 책이었다. 비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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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책세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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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자신의 삶을 구한 어떤 간증 같은 것을 바랐다면 이 책을 잘못 고른 것이다.

 

문학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와 있지만, 그것이 조각조각 연결되어 있어 하나로 이어 읽기가 상당히 불편한 책이다.

 

게다가 작가가 자신이 읽은 작품들을 수시로 인용하는데, 이는 마치 '퀼트'와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저것 모아서 엮어 놓아 하나의 예술이 되게 만든.

 

이 책도 마찬가지다. 여러 작품들의 말을 인용하고, 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도 이야기하는데 이것들이 퀼트 작업을 하듯이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를 연결시켜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서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소설들을 읽었다거나 또 여러 이야기들이 서로 엮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회고록이라고 해야 하는데,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우리가 사실 문학을 읽는 이유가 다 다르겠지만, 이 책의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길 바라지만, 그 무엇도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다. 문학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문학은 필요하다. 231쪽.

 

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흔히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을 많이 쓴다. 문학이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베르테르 효과는 삶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종말로 이끌어서 문제지만, 이 베르테르 효과를 거꾸로 하면 문학은 삶을 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직접 볼 수 없으므로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되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보기,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때문에 문학은 삶을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베텔하임이라는 사람이 쓴 "옛이야기의 매력"을 보면 동화들이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와 그들의 삶을 구하게 되는지가 잘 나와 있다. 아이들은 그냥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읽겠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방향을 만들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제적 시대,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그런 과정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런 이야기들로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대다수를 모른다는 것뿐. 만약 알았다면 이 작가가 이 부분에서는 이런 의도록 이 문장을 인용했군, 다음엔 뭘 인용할까 기대하는 재미로 읽었을텐데... 그게 아쉽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문학은 우리를 간접 경험의 세계로 이끈다. 이런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할 수도 망칠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문학이란 사람들의 삶을 구하는 쪽에 더 힘이 실리는 문학이겠지. 그래야 문학이 살아남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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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소설의 불교적 성격
김상수 지음 / 국학자료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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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서, 그 가운데서도 훌륭한 문예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하고픈 말을 경청한다는 것 외에도, 작품이 내포한 작가의 또 다른 자아와 맞닥뜨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 작품 속 자아는 작가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할 수 있는 은밀한 자아이다. 독자의 자아는 작가의 그 내밀한 자아가 구축해놓은 작품세계에서 그 구조물의 상징과 은유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175쪽 결론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작가의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것, 여기에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보게 되는 것.

 

최인훈은 '전후 최대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이런 평가를 차치하고서도 그의 작품 중에 '광장'은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작품으로 살아남았다.

 

여기에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읽을 만하고, 여러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데, 이 책은 이런 최인훈의 작품에 관통하는 하나의 틀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그 결과 최인훈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틀이 바로 '불교'라고 하고, 이를 종교로서의 불교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라고 하고 있다.

 

즉 몇 천 년 동안 우리나라 정신세계를 관통해온 불교가 최인훈의 소설에서도 은연중에 또는 드러내놓고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의 모든 작품에서 불교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고 있고, 그것을 헤쳐나가 해탈에 이르러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소설들이 바로 이런 불교적 성격을 자연스레 띠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문제 있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소설의 장소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소설이 소설로서 기능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인훈의 소설에서 불교적 성격을 찾아내고, 그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최인훈의 소설에서 이런 불교적 성격이 명확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령 그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아예 '석가'라는 말이 등장하고, 소설제목을 통해서도 불교와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구운몽','서유기'가 있으며, '가면고'에서는 인도의 왕자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정진 방법으로 화두를 들고 있는데, 이 '화두'를 소설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에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기도 하고, 소설을 다양하게 보는 관점을 배울 수도 있는 책이기도 한데, 결국 소설은 작가가 완성해서 독자에게 내놓지만, 작가가 내놓은 순간 그 작품은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소설의 최종적인 완성은 독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소설이 생명력을 지니려면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여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인훈의 소설은 우리나라 현실을 비판한 사회소설로도, 또 대체 역사를 다룬 소설로도('태풍'), 가상의 현실을 도입하여 신랄하게 현실을 풍자한 소설로도, 고전소설에서 제목을 따와 그를 현실에 맞게 변용한 소설로도, 관념이 극명하게 드러난 난해한 소설로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점 중에서 최인훈 소설의 불교적 성격을 밝혀 보여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최인훈 소설에 또 하나의 관점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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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와 예술 - 파리코뮌에서 베를린장벽의 붕괴까지
앨런 앤틀리프 지음, 신혜경 옮김 / 이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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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 한 가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에 질서를 무시하는 혼동과 파괴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생각. 또 한 가지는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라서 테러를 맹종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제시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바람에 많은 오해가 있었고, 또 그들이 테러활동을 한 바람에,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바람에 그들은 폭력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잘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권력을 부정하는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는 없는 일. 권력 추구가 아니라 자율과 자치, 협동을 추구하는 그들이기에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직의 결정을 따르라는 말이 통할 수 없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기에, 이들은 정치계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 결과가 권력을 쥔 집단에 의해 오해되거나 축출되거나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들어가는 길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아나키스트가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런 집단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자율, 자치, 협동은 예술의 기본이 아니던가. 예술은 그 본성상 아나키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정한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화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상들을 인정하고 공존하도록 하는, 또 작업을 할 때 혼자만이 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상호성이 중시되기도 하는 그런 활동, 그것이 바로 예술 아니던가.

 

이렇게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예술이 아나키즘 사상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양에서 나온 책이라 우리나라 아나키즘과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아나키즘과 예술 관계를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때 나오는 작가가 바로 쿠르베이다. 쿠르베를 중심으로 프루동과 졸라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 다음에는 신인상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미술에 관한 책을 보면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점묘법을 드는데, 그 점묘법이 참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나키즘과 관련성을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했다.

 

점묘법. 독립된 각 점들이 주변의 점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 나름의 색을 띠게 되는 표현법. 그렇다. 아나키즘 역시 독립된 개인들이 자율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런 자율적 개인들의 연합으로 아나키 사회라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단지 예술가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 아나키즘 사상으로 당대 사회를 표현했다를 떠나서, 미술 표현기법 자체가 아나키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서 러시아 혁명기와 공산당 독주체제의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아나키즘은 러시아에서 사라지게 되고, 예술 역시 사라지게 된다.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아니키즘은 허용될 수 없는 다양성의 사상이었기 때문일테고, 자연스레 그러한 예술 역시 창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미국에서도 역시 아나키즘 사상이 꽃필 조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반대 등으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상들이 난무할 때 역시 그 조류에 따른 예술도 나타나게 된다.

 

하여 미국에서 이루어진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아나키즘과 예술이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를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 작품을 통한 소개 등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아나키적인 예술이 현재에도 계속될 수 있음을, 아니 계속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즘이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아나키적 예술이 많이 창작되었다.

 

가끔은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아나키적 예술은 사그러지지 않고 더 타오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나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권력에 저항하는 사상, 그것이 아나키이고, 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표현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 스스로 판단하여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이고, 아나키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억압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아나키 예술은 더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 사회라면 아나키다 뭐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압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반발 역시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아나키적인 예술이 많이 나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얘기는 그 사회에 억압적인 요소가 많다는 얘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래서 아나키와 예술의 관계를 파리 코뮌부터 1990년대까지를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주위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 예술에서 이런 아나키적 예술이 얼마나 있는지.

 

덧글

 

이 책에서 예술이라고 했지만, 영어로는 Art이고, 또 주로 미술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미술 관련 분야에서 아나키즘과의 관련은 잘 알 수 있지만,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미술관련 이야기를 확장해서 다른 분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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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 나치 시대 독일인의 삶,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
밀턴 마이어 지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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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일을 뽑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망설이지 않고 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어났던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집시에 대한 나치의 학살을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잔혹한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에 언어의 조작을 통해 학살을 최종 해결이라고 한 점에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나치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독일에 열성 나치 당원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책은 1955년에 씌여졌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열성 나치 당원을 1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당시 독일의 인구를 약 7천만 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00만 명이 6900만 명의 의사에 반해서 그러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계 미국인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 1년 동안 독일(예전에는 서독이다)에 가서 살았다. 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교수라는 직함을 십분 활용하여 그 지역 주민들을 사귀게 된다.

 

그를 친구라고 하는데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장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교사(독일에서 교사는 우리나라 교수쯤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다)이고, 재단사도 있고 빵집 주인도 있듯이 우리말로 장삼이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이들은 히틀러 집권 당시 나치에 가입한 나치 당원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은이는 이들을 '작은 자'라고 하는데, 이런 작은 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펼친다.

 

즉,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이 소수의 전쟁광이나 학살광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방관하는 사람들, 또는 암묵적 동의를 하는 사람들에 의지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이런 10명과의 만남이 잘 나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행동을 그다지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때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아이히만 재판'에서 너무도 많이 나온 말 아닌가.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나치 시대 독일인의 삶,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라고 되어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이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주어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날 날을 사는 사람에게 선하다는 말을 쓰면 안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선하다는 표현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고 이들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앞날을 내다보며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이들의 행동은 방조라고 해야 한다.

 

나서서 행동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그러한 방조.

 

이들의 방조 덕에, 또 참여 덕에 나치는 정권을 잡을 수 있었고, 자신들의 행동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다.

 

2부에서는 독일 국민성에 대해서 나오지만, 굳이 그것을 참조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악의 평범성'처럼 주어진 일에 생각을 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니...

 

제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했을 뿐이다. 나는 내 삶을, 또는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이는 커다란 광풍이 지나간 다음에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세계 어디서나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다. 굳이 전후의 독일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통일이 된 독일이고, 다시 무장도 되었고,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기도 한, 유럽에서는 강국 소리를 듣는 독일의 먼 과거 이야기에 불과한 이 책이 최근에 다시 우리나라에 번역된 이유는, 나치의 독일이 그냥 과거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꾸 인식해야 한다. 이 책에서 미국인의 관점에서 독일을 비판했지만, 이렇게 독일을 비판했다면 저자는 당연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인종차별에 대해서, 또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 비판했어야 한다.

 

남의 나라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비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보고, 같은 처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나치 시대 독일 사람들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방관하고 방조하고, 또는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고, 동서 문제도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런 상태에서 그냥 넘어가거나 또는 편견을 부추길 수 있는 행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가 소수의 정치권에게 이용당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치달았는지를 나치 독일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라는 책을 우리는 우리에게 적용해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바꾸어 보아야 한다.

 

생각한다가 정말로 자유로운지, 우리 역시 어떤 편견 속에 깊게 침윤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편견들을 방관, 방조,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나치 독일이 겪은 비극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한참 지난 과거라고만 치부하지 않을 그 무엇인가가 이 책에 있다. 읽으면서 계속 '지금의 나는?'이라고 나를 비춰보는 거울 역할을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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