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요즘.


  기가막힌 말들의 잔치. 이 말들이 실현이 되었다면, 공허한 울림만 남기지 않고 현실에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있지 않았을텐데.


  사회적 재난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남들로부터 보호하려 장벽을 쌓는다.


  함께라는 말, 더불어라는 말이 말로만 존재하고, 생활에서는 분리, 보호, 방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선진국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몇 사람들은 우린 선진국이다라고 즐길 수 있겠지만, 더더 많은 사람들은 선진국은 말로만 존재할 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먼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 해고는 죽음이라고, 해고된 이후에 사회에서 삶을 유지하게 하기보다는 개인이 제 삶을 유지하게 만든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온몸에 가시가 돋고 남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할 뿐이다.


최승호 시집을 읽으며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부르도자 부르조아)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장면(늦게 도착해 본 광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마을'이란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달고 살고 있지 않은지.


마을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 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 밤엔 장자를 읽으리라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2011년 재판 6쇄. 81-82쪽


평화로운 사람이 '문을 걸고',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과연 평화로운가? 이 평화는 언제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을 걸고, 돌담을 높이 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이때 평화로운 사람은 힘이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힘든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평화로운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하는 사회, 문을 걸지 않고, 돌담을 높이 쌓지 않고 한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마을.


말로만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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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미래 세대. 자연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존재할 거의 영속적인 존재라면, 미래 세대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아갈, 즉 우리가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속성을 유지시켜 줄 존재다.


  이렇게 자연과 미래 세대는 통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없다면 인간도 존재하기 힘들고, 미래 세대가 없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를 영원히 존재하게 할 두 존재인데, 과연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답은 부정적이다. 마치 현재가 전부인양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누군가는 지구의 절반을 자연의 영역으로 남겨두자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자연의 영역까지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미래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자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살아갈 다른 사회적 영역도 남겨두기는 커녕, 그들의 영역도 우리가 끌어쓰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김명인의 시집 [꽃차례]를 읽다가 '리프트'라는 시와 '꽃밥 가까이'라는 시를 만나 자연과 미래 세대가 따로가 아니라 함께임을 생각하게 됐다. 자연이 파괴될수록 미래 세대도 살아가기 힘들어질텐데...


우리를 영속되게 해줄 존재들에게 우리가 어떤 자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이 시들을 통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프트


산꼭대기로 산꼭대기로 밀치며 밀고 오던 인파들이

쉼 없이 퍼올리던 눈의 함성들

슬로프를 굴리던 힘찬 발들 어디로 갔나

정적을 태우고 허공 중에 멈춰 선 리프트 아래로는

이 빠진 줄 몰랐을 잔디밭 비탈이

붉은 잇몸을 드러낸 채 가파르게 흘러내린다

나는 여기서 봄을 보낸 적이 없으니

지난겨울을 전생처럼 들춰보는 것

저 속살은 그러니까 오리털 파카나 방한 바지로

겨우내 가려놓았던 설원의 상처거나

이별의 흉터리라, 넘어지면

벼랑까지 굴러갈 것만 같았던

눈사람의 자취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산줄기가 닳도록 왕왕대던 스피커 아예 입 다물었다

녹음의 계절이 여기선 사막 같다

삭막한 꽃들을 활짝 피웠거나

리프트 기둥 타고 칡넝쿨 바짝 치켜들었다 해도

한 철에만 열리는 축제의 깃발 저들이 어떻게 대신할까

추위를 불 지피던 화창한 웃음소리 어느새

따가운 햇살 속으로 잦아들었다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년. 70-71쪽.


봄이나 여름에 스키장 근처를 지나가 보면 황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겨울에 북적이던 사람들로, 하얗게 쌓인 눈으로 가려졌던 상처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마치 학창시절 머리가 길다고 이발기계(일명 바리깡)로 한줄로 깎였던 머리처럼.


보기에도 좋지 않지만, 자연으로 보면 자신의 신체 일부가 뭉텅 잘려나간, 또는 깎여나가는 일. 그런 상처를 다른 풀들, 꽃들로 애써 감춰보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떻게 겨울에 인간들이 채운 그곳을 대신할 수 있을까?


자, 겨울이 한 철이라 슬픈가? 아니면 나머지 세 계절을 황량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자연이라 슬픈가? 우리가 자연과 함께 하는 방법이 어떤 일일까? 그들의 영역을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지만, 자연과 우리가 영원토록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생각해 봐야 한다.


    꽃밥 가까이


세상 모든 밥벌레들은

한 끼니 제 밥상 가까이 다가앉기 위해

얼마만큼 수고 속으로 내몰리는가

제 힘으로 밥상 한번 차려보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이 꽃 저 꽃 기웃대는 벌들도

예 아니다 싶으면 한참 동안 허공 맴도는데

서른세번째 회사에 이력서 바치고 축 처져

고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일 막(幕) 내리기 전

서둘러 밥그릇 생(生)에 나를 알선시켜야 한다

생계라고 사로잡는 게 눈먼 일당이라면

허방에 거미줄 쳐놓고 빈 손금이나 더듬는

이 애벌의 시간도 간절하게 절절하게

씨앗을 품고 파종의 때 기다리는 중,

모래는 눈물 따윈 간직하지 않으니

낮잠 늘어지게 재워둔

깔깔한 햣바닥이나 깨워 하늘 사막까지

핥으며 가볼까, 온몸에 가시 세운

선인장 깔고 앉아 거기서라도 터 잡아야지

나비의 일터가 꽃이라면

쑥밭이라도 좋으니 내게도 꽃 이울 터전을 다오

일생일대의 호접무(胡蝶舞) 펼쳐보일

무대에서 자꾸만 밀쳐내는 건

이 환한 봄날이 뉘게나 꽃 시절 아니므로!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년. 84-85쪽.


자연의 일부를 우리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놓은 '리프트'라는 시와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꽃밭에서 먹을거리를 찾지 못해, 쑥밭이라도 좋다고 절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드러난 이 시에서 어떤 공통점이 느껴진다.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미래를 살아갈 존재들의 영역을 많이 침범하고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할 영역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하여 화창한 봄날에 꽃을 즐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온몸에 가시 세운/ 선인장 깔고 앉아' 거기서라도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절규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 우리들 생활을. 


우리는 영속할 존재이기 때문에, 영속하기 위해서는 현재에서 마치 미래는 없다는 듯이 모두 써버리면 안 된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미래 세대들의 절망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우리가 그들을 어루만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이제부터라도 해야 한다고 자연과 미래 세대들이 계속 신호를 주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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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24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창, 올림픽 지난지 4년 후 지금은 어떠한지 kinye님 글 읽으며, 훼손은 빠르고 복구는 느리다가 생각나네요..

kinye91 2021-10-24 14: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훼손은 빠르고 복구는 느리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순식간에 벌어지지만, 그 자연이 회복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요, 자연과 인간이 공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같은 감염병 시대도 자연훼손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할테니까요.

2021-10-24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4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음식만화다. 특별한 맛집을 소개하는 만화가 아니라 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음식이야기다.

 

  특히 할머니가 등장해서 집에서 만든다. 건강한 식재료로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인공 이름이 별이다. 음식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감탄하면서 먹는 아이.

 

1권에 나오는 음식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막걸리빵, 수정과, 봄동 겉절이, 단호박 죽, 떡볶이, 부추전, 비빔밥, 송편, 감자 샌드위치, 미역국, 호떡, 초콜릿, 딸기 쉐이크, 국화차, 화전

 

이 중에 초콜릿은 예외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에 나오는데, 이 음식과 관련해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성애를 다루기도 하지만, 사랑을 이루는 바탕은 바로 이해와 배려 아닌가 한다.

 

동성애에 관해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러 관점이 갈등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그 사랑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언젠가 이 만화를 읽은 한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별맛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다 착해요? 너무 착한 것 같아요. 작가님도 이렇게 착한가요?" (4쪽)

 

작가가 착하다 착하지 않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만화를 읽은 이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안타까웠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착하다고 이야기 하기 전에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니고 살아가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콜릿 부분을 보면 마음이 찡해진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면서 자란다면 다르다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여기에 미역국 부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많이 생각하게 하는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미역국에 고기를 넣지 않자 그것을 의아해 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한 말,

 

'생명이 태어난 걸 축하하면서, 다른 생명이 죽은 걸 먹는다는 게 할머니 생각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생일이면 일부러 고기를 더 먹는데, 우리 집은 생일날 만큼은 고기를 안 먹어.' (1권. 152-153쪽)

 

고기를 먹지 말자고 채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탄생의 날에 가능하면 육식은 삼간다는 말인데... 식물도 생명이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면 뭐라 하기 힘들지만, 생명은 다른 생명의 목숨으로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에, 최소한 그 생명에 대한 고마움은 간직하고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은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렇게 만화는 음식을 통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2권에 나오는 음식을 보자.

 

오미자, 김치말이 국수, 미숫가루, 약식, 주먹밥, 찹쌀케이크, 잔치국수, 매생이떡국, 봄나물, 두부버거, 수박화채, 팥빙수, 사과 토스트, 숙주라면, 카레

 

역시 집음식이다. 사 먹는 음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음식. 이 만화는 단지 음식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그래서 음식과 삶이 잘 어우러져 있다. 마치 비빔밥처럼.

 

등장인물도 다양하다. 한부모, 다문화 가족이 등장하고, 그러면서 서로 어우러지면서 결합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음식공동체.

 

함께 음식을 먹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열어가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들이 따스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한 아이가 착한 사람들만 나온다고 했나 보다. 그만큼 이 만화는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만화 속 음식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를 건강하게 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음식은 비싸고 화려하며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이런 음식들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 만화를 보면서 공광규 시, '별국'이 떠올랐다. 이 만화 주인공 이름이 별 아니던가... 음식의 소중함, 사랑이 담긴 음식... 이렇게 만화와 시는 서로 통한다.

 

 별국

           -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들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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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냐? 나도 아프다." 유명한 드라마 대사다. 이 대사 이전에 이미 유마거사가 한 말이 있다.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다는.

 

  병은 공감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여 내 몸에, 내 마음에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병이다. 병이 없다고 건강한 사람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병이 없으면 건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아픈데 나만 아프지 않다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나만 아프지 않을까?

 

  분명 세상은 고통덩어리인데, 나만 세상의 모르쇠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반성해 봐야 한다.

 

고통에 둔감함,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어려움을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만 잘 먹고 잘산다면 그것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소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재판을 통해 판결이 나기 전이든, 판결이 나든) 교도소에 가기만 하면 그들은 환자가 된다. 아픈 사람이 된다. 어떤 병이든 병을 달고 있게 된다. 그 전까지는 세상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젆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비로소 아프게 된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병을 통해 고통을 체험하게 되니, 그런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회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믿고 싶을 뿐이다. 이상하게 이들은 교도소에서 나오면 말짱해진다. 아팠던 기억도 없는지, 병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공감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다른 사람의 병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살게 된다. 이런 병은 가짜 병이다. 공감이 없는 병.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병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 그들은 과연 병을 앓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다 아픈데,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이들은 오로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기만 하고, 도무지 아플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광규 시집 "파주에게"를 읽다가 첫시 '병'을 읽으며 정말 우리 사회에서는 아파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병들었을 때 자신도 병들었음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 '병'을 보자.

 

      병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물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공광규, 파주에게. 실천문학사. 2017년. 11쪽.

 

야크가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오면 아프다고. 그만큼 고상한 존재라고 해도 되겠지만, 세속이 그만큼 병들었다고, 자신만 건강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위 성인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만이 고결하게 살 수 있음에도 세속으로 내려온다. 세속에 내려와 세속인들의 병, 고통을 함께 겪는다. 이것이 바로 공감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삶이다.

 

꼭 성인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넘어가지 못한다.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한다. 공감한다. 보통 우리들은.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 꼭대기에 서려고 한다.

 

그들은 그러면 세속으로 내려오면 안 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냥 살아가면 된다. 야크가 산 위에서 살아가듯이. 그렇지 않으면 함께 아파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건강한 자신이 병들었다고 한다. 함께 하지 못함, 이게 바로 병이다.

 

남들이 아픈데, 나는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함께 병을 앓아야 한다. (꼭 육체의 병을 앓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공감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래야 세상 병이 치유될 수 있다. 함께 아파함으로써 병을 함께 치유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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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1-10-14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kinye91 2021-10-15 08:27   좋아요 1 | URL
글을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시를 읽으며 먹먹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시집이 그랬다. 가끔은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마음이 찡해지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세상에!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십대에 이렇게 세상 쓴맛을 알아버리다니.

 

  무한한 가능성으로 현재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몸을 한껏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십대에, 조숙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조숙이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우리 십대는 이미 늙어버렸다. 세파에 찌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세파 속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를 잡으려 애면글면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십대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도처에서 짤리는 계약직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반대로 최저임금이 인상되었음에도 한 명도 자르지 않고 부담을 조금씩 나눠가짐으로써 모두가 일할 수 있게 된 아파트 공고문 앞에서 뿌듯한 마음을 지닌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붙어 있는 알림을 읽다가 / 경비 아저씨를 단 한 명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 아파트 좀 멋진 걸, 이라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최저 임금 인상에 대한 알림을 읽고' 부분. 34-35쪽)

 

이 시집에 나오는 십대는 밝고 명랑한, 세상 걱정 하나 없을 그런 십대가 아니다. 이미 세상의 편견과 압박에 시달리는 십대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손님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으로 갔을 때 받는 불합리한 대우에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손님보다 알바생, 50-51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십대 중에서도 학교 다니지 않거나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범하게(?우리나라에서 과연 학창시절을 평범이라는 말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고,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다는 말이 있으니, 학교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런 공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지키며 지내는 학생을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했다고 하자... 사실, 우리나라 학교에서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한 학생들은 정말 비범한 학생들이다.) 지내는 다른 십대들보다 더 예민하게 자신을 인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신분이 없어진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직도 학생 때는 교복으로 구분하지 않는가?

 

'교복과 교복 사이'라는 시를 보면 그렇다. 버스 안에 다양한 교복이 있을 때 알게모르게 서열이 작동한다. 저 학생은 무슨 학교, 저 학생은 무슨 학교 하는 식으로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소위 명문고와 그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 그나마 인문계라고 하는 학교로도 진학하지 못한 학생으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평준화 시대에도 차이를 부각시키는 일이 생기고 있다)

 

'버스 안에서 내 교복 보고 수군덕대는 거 알아'(교복과 교복 사이 중. 48-49쪽)하면서 이미 사회이 서열을 익혀버린 십대. 그런 십대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다. 이 시의 화자는 '문제아였던 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지가 문제였거든 / 너희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 그 힘으로 계속 너희들과 같은 버스를 타는 거라고 / 그러니까 버스 안 서열은 그냥 대충 넘어갈래'(교복과 교복 사이 중. 48-49쪽)라고 한다.

 

자기 자리에서 비교라는 틀에 갇혀 무덤을 파고 있지는 않다. 그 점이 희망을 보게 한다. 그런 희망을 지니게 하는 존재는 꼭 있다.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만남이 바로 우리 삶을 희망으로 지탱하게 해준다.

 

  숙제

       - 이상한 나의 선생님 3

 

담임이 집에 가는 길에 쪼그려 앉아 꽃 하나를 보고 가라고 했다

 

다 둘러봐도 꽃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냥 쪼그려 앉아 눈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신발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

 

초록이 가득한 한가운데 아주 작은 하얀 꽃 하나가 살랑거렸다

 

꼭 나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났다

 

유현아,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 창비. 2010년. 78쪽.

 

너무도 잘 알려진 나태주의 '풀꽃'라는 시를 연상하게 하는 이 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 특히 십대 때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유현아의 이 시집은 이런 저런 시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서 읽으면서 다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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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7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십대가 쓴 시.
지금 K를 생각한다를 옆쪽에 두고, 소개해주신 시들을 읽었는데 같이 봐야겠네요.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kinye91 2021-10-07 12:44   좋아요 1 | URL
십대를 거쳐왔지만 잊거나 잃고 있었던 그 시절 느꼈던 감정들을 청소년시집들이 떠올리게 해요. 어른이 쓴 시든, 십대들이 쓴 시든 말이에요. 저는 아직 k를 생각한다를 읽지 않았는데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