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시라면 더욱 그 마음을 알게 되겠지만,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철이 없는 존재라,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들 중에서 어른이 쓴 시들이 많은데,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청소년시집을 낸 시인들 중에 교사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직업이 교사일테니.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느끼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을테니


이 시집을 쓴 이정록 시인도 교사다. 시집을 읽다보면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가 쓴 시 '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주라는 어머니 말씀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 시인이 교사라면 학생들이 언제라도 와서 쉬면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인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졌으리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내게 될 사회가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슬픈 종착'을 보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종착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이정록, 까짓것, 창비. 2017년. 44쪽.


이런 상황이 슬픈 종착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슬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가 거의 서른으로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는 정규직이라는 말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알게 하고 있지 않은지.


슬픈 종착이 아니라 이미 슬픈 출발을 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희망보다는 불안을 느끼다니... 아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후대가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이 시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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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보이는창 2021년 가을호. 127호다. 이제는 나에게 오는 몇 안 되는 잡지다. 예전에 구독하던 많은 잡지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가게 했는데...

 

  노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에 실린 이인휘 소설(시인, 강이산)이 마음에 와 닿았다. 와 닿은 정도가 아니라, 입에 이름을 담기 싫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이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득세하던 시절, 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들이 득세하던 시절을 오롯이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실려 있으니...

 

 물론 강이산으로 등장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1980-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의 격랑에 온몸을 맡기고 살아갔던 사람, 그 시대의 격랑에 결국 부서져 버린 사람. 이름을 입에 담기 싫은 사람이 아무런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분이 차가운 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용서받지 못할 그 누구는 거대한 병원장례식장에서 그가 뿌린 씨앗들의 조문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차가운, 딱딱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으니...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인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우리도 이제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하는 이 시대에도, 좋지 않은 과거와 연결된 끈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인휘가 쓴, '시인 강이산'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번 호에서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강이산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고, 더 멀리 가면 4·19혁명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87년 민주화 운동을, 촛불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쩌면 자꾸 과거를 잊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 대접도 못 받고 개 끌려 가듯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사람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장면, 그러면서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강이산의 모습.

 

과거로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아려왔으니...

 

'삶이 보이는 창'. 여전히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있음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음을,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여러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삶이 보이는 창'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과거 악의 씨앗들이 자라나지 못하게, 좋은 씨앗들이 살아갈 수 있게, 우리들 마음을 다잡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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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이 발간된 지 30년이 되었다. 30년. 한 세대가 지났다고 해야 한다.


  첫권에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록 과연 우리는 희망을 찾았는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넘어간다고 하면 이제는 그 세대의 장단점을 알고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극복해야 하는데, 30주년이 된 녹색평론을 읽으면서는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파왔으니...


  이번 호를 기점으로 한 해를 쉰다고 한다. 그래, 한 세대 동안 우리 사회가, 우리 인류가, 우리 지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토록 열심히 외쳤으니, 이제는 숨을 고르고, 쉬고, 다시 외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때도 되었지.


이렇게 생각하면 녹색평론이 한 해 쉰다고 그리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되겠는데, 이번 호에 실린 농업에 관한 글, 공동체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녹색평론이 그토록 주장해왔던 소농공동체가 살아나기는커녕 오히려 농업에 대한 경시만 더 늘었고, 공동체가 부활하지는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침식당한 요즈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거기에 대해서 경고음을 울려주던 녹색평론이 한 해 동안 나오지 못한다니, 


우리가 겪고 있는 농업의 쇠퇴, 공동체의 쇠퇴와 더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조차도 우리 곁에서 잠시 떠나는구나 싶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녹색평론은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지켜나가야겠단 생각을 한다.


자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살리고 있는 곳이 있음을, 이번 호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조그마한 섬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작업 공동분배를 이루고 있다고 하니,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공동체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확대되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이제 녹색평론은 한 해 동안 숨고르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 곁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녹색평론이 해왔던 일들을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것이 그동안 녹색평론을 만나왔던 우리들이 녹색평론에 대해 보이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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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1-11-26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시사인에 김정현 편집자님 인터뷰 기사 나왔더라구요. 주말엔 녹색평론 좀 읽어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26 13:54   좋아요 0 | URL
한 해 쉰다고 해서 아쉽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해요.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아서 좋아요.
 

   흔히 주부들이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려 하지 않는 노동. 그래서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고, 보려고 하지 않는 노동이 되기에, 일을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디 이런 일이 가사 노동뿐일까?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 아니면 공기처럼 그렇게 하는 노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그들을 보려 하지 않는 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그들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척하는 태도 아닐까.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서도 애써 우리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면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할 때만 그들을 소환하지는 않았는지... 그 다음에는 토사구팽도 아니고, 그냥 다시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만 경우가 많은데.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읽으며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 '일원'을 읽으면서 이렇게 모두 모여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원

- 바라나시에서

 

  누운 소와 깡마른 개와 구걸하는 아이와 부서진 집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돼지와 낡은 헝겊 같은 그늘과 릭샤와 운구 행렬과 타는 장작불과 탁한 강물과 머리 감는 여인과 과일 노점상과 뱀과 오물과 신(神)과 더불어 나도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一員)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80쪽.

 

이렇게 우리는 세계의 일원으로, 그냥 맑고 깨끗한 세계가 아니라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일원이 아니라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들을 배척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지 않았는가.

 

마치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존재, 그것도 자기 밑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하거나 위에 있는 존재들과만 어울리고, 그들을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살지는 않았는지.

 

이 '일원'이란 시에서 펼쳐진 세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위만 보아서는 안 된다. 밑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태준의 이 시집 첫번째에 나온 시를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음을.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10쪽.

 

고고하게 홀로 유유자적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굽힐 필요가 있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일원이다. 몸을 굽혀야 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그들을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넘어서 자신이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문태준 시는 우리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몸부터 굽힐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자신도 그들과 일원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우리인 일원인데, 어찌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고 편을 가르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 일원이라고, 우리 모두 몸을 굽힐 줄 아는 존재가 되자고 시집에 실린 첫시와 끝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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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요즘.


  기가막힌 말들의 잔치. 이 말들이 실현이 되었다면, 공허한 울림만 남기지 않고 현실에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있지 않았을텐데.


  사회적 재난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남들로부터 보호하려 장벽을 쌓는다.


  함께라는 말, 더불어라는 말이 말로만 존재하고, 생활에서는 분리, 보호, 방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선진국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몇 사람들은 우린 선진국이다라고 즐길 수 있겠지만, 더더 많은 사람들은 선진국은 말로만 존재할 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먼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 해고는 죽음이라고, 해고된 이후에 사회에서 삶을 유지하게 하기보다는 개인이 제 삶을 유지하게 만든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온몸에 가시가 돋고 남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할 뿐이다.


최승호 시집을 읽으며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부르도자 부르조아)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장면(늦게 도착해 본 광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마을'이란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달고 살고 있지 않은지.


마을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 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 밤엔 장자를 읽으리라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2011년 재판 6쇄. 81-82쪽


평화로운 사람이 '문을 걸고',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과연 평화로운가? 이 평화는 언제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을 걸고, 돌담을 높이 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이때 평화로운 사람은 힘이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힘든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평화로운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하는 사회, 문을 걸지 않고, 돌담을 높이 쌓지 않고 한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마을.


말로만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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